Destination of the Shilohan Butterfly RAW novel - Chapter 10
09. 나의 행선지는
비가 내렸다. 이런 감옥에서는 물이 중요했기에 비가 오는 날이면 바가지란 바가지는 다 바깥에 내놓고 물을 받는다.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던 박 씨 아주머니는 점심을 먹고 들어와 차온의 앞에서 분위기를 잡았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셋째 언니라는 사람이 방을 다 청소해 놓고 나가서 280호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저기, 할 말이 있어요.”
저 말만 오십 번째였다. 박 씨 아주머니는 복도에 내리는 빗소리를 차단하듯이 문의 투입구를 닫았다. 차온의 손목을 끌어다가 제 앞에 앉혔다. 돈 급하신 일이라도 있냐고 물으려고 그랬다. 그때 박 씨 아주머니는 아주 소중히 싸 놓은 은박지를 내밀었다. 강요하듯 그 은박지를 차온의 손에 쥐여 줬다.
“이게 뭔데요.”
“아까 말이야.”
박 씨 아주머니가 아침 체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아침으로 나오는 국이 점점 묽어져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단다. 허기에 지쳐 벽에 기대고 있을 때. 한 교도관이 그녀에게 다가와.
“ 8811.”
이라고 불렀다. 벽에 기대어 있던 박 씨 아주머니는 놀라서 몸을 일으키며 그 교도관을 바라봤는데 처음 보는 교도관이었다고 한다.
“같은 방에 사는 9810에게 전해 주겠나?”
받은 것은 하얀 봉투였다. 박 씨 아주머니는 방에 오자마자 그 봉투를 호기심에 뜯어 보곤 심한 갈등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안 되겠어서 은박지에 싸 둔 다음 차온을 부른 것이었다.
“욕심이 안 날 순 없지만, 그래도 주인은 아가씨니까.”
차온은 그 은박지를 조심스럽게 풀어 보았다. 그리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발신인이 확실했다. UT 행성으로 갈 수 있다는 그 티켓이, 그녀가 구겼던 그 티켓이 새것처럼 되어 그 은박지 안에 싸여 있었다. 시열이 교도소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체조 시간에 그를 태우고 온 차가 운동장 구석에 주차된 것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매일 아침 체조를 하러 갈 때마다 차온은 도박을 하는 기분이었다.
“부럽네.”
이 티켓을 평생 보지도 못했을 아주머니이니 차온에게 티켓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을 터다. 차온은 그런 박 씨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는 먼저 아드님 데리고 행성에 가신 게 맞을까요?”
“그렇다고 믿어야지요. 거기서 만나자고 얘기했으니까.”
차온은 그런 박 씨 아주머니의 손에 그 티켓이 담긴 은박지를 다시 넘겼다. 박 씨 아주머니는 그런 차온의 행동에 정색하며 말했다.
“지금, 놀리는 거예요?”
“이거 말고도 한 장 더 있어요.”
“뭐, 아니…….”
“계속 심문관한테 불려 가신 거 알아요. 그런데 저에 대해 말 안 해 주셨잖아요.”
차온의 말에 반신반의하던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은박지를 받았다. 이것을 자신에게 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차온은 가족이란 게 없었지만,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은 박 씨 아주머니가 얼마나 절박할지는 짐작이 갔다.
“고, 고마워서 어쩌지. 그래도 정말 필요 없는 거 맞아요?”
울먹거리던 박 씨 아주머니는 차온을 안고 펑펑 울었다. 기쁨에 떨고 있는 박 씨 아주머니를 보고 있자니, 가족 없이 황무지에서 살아남으며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싶었다. 박 씨 아주머니는 지옥을 탈출할 수 있는 천국행 티켓을 받은 것처럼 좋아라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출발하기 전에 남편분이랑 아드님이 한국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셔야죠.”
“맞아요, 그것도 그건데……. 여기를 언제쯤 나갈 수 있을지.”
“일단 기다려 봐요. 곧 틈이 생길 거 같아요.”
혹시 몰라 시열이 준 출입증을 챙겨와 로커에 넣어 두었다. 그 얘기도 해둘까 하다가 도청이 걱정되어 280호에 설치된 카메라를 응시했다. 어느 방에나 달려 있는 감시 카메라였다. 그러나 차온은 오늘따라 그 카메라가 시열의 눈처럼 보였다. 설마 볼까. 비겁하게. 자기는 얼굴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으면서.
차온은 그 카메라를 등진 자세로 앉았다. 자신의 망상일 수도 있지만, 만일 그가 보고 있다면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아 애타 죽었으면 좋겠다. 죽을힘을 다해서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는데, 저쪽도 똑같이 그래야지.
박 씨 아주머니는 모아 둔 쌈짓돈으로 아들의 겨울 잠바를 사 주고 싶다는 말을 했다. 교도소를 나가기만 해 보라고 벼르는 그녀가 부러웠다. 문득 박 씨 아주머니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만약 UT로 가지 못하고 한국에 남아 있으면요?”
“그럼 나도 여기에 남아 있어야죠.”
“그래도……. UT로 갈 수 있는 기회인데. 떠나고 싶진 않으세요?”
박 씨 아주머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어요. 거기에 혼자 가서 뭐 해요.”
박 씨 아주머니는 소등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차온의 이불을 펴주기까지 했다. 바깥에서 볼일을 보고 들어온 셋째 언니가 마지막으로 280호의 문을 닫고 들어왔다. 하루의 끝이 다가온 기분이었다.
차온은 미래를 그려 보았다. UT 행성으로 간 자신을, 미래화된 도시를 거닐며 하하호호 웃는 모습을. 그러나 그 모습에 조금도 설레지 않았다. UT 행성에 한국의 전쟁 소식을 뉴스로 들으며 울고 자빠질 거다. 그러다가 상상의 끝은 지구에 남아 있는 AVRTA의 꽃이 땅을 오염시키고, 건강이 예전만 못해진 시열이 변이 짐승으로 변해 가는 것으로 끝났다.
간이 병원에서 본 환자의 모습에 시열이 겹쳐졌다. 제발 죽여 달라고 우는 그를 보며, 어서 저 꽃을 죽이지 못한 자신을 탓하다가 차온은 경련하듯 일어났다. 깜깜한 방 안을 둘러보다가 빨간 불이 들어와 있는 카메라를 지그시 보았다.
삑, 삑, 삑, 녹화되는 소리가 났다. 까만 카메라를 향해 차온은 무의식적으로 말을 걸었다.
“보고 싶어.”
“어우…….”
박 씨 아주머니는 그녀의 목소리가 잠꼬대인 줄 아는가 보다. 어여 자라고 말 한 뒤 코를 골았다. 세수라도 하면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까.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싶어 일어나 문 앞으로 갔다.
경비 로봇이 날아와 차온이 왜 나왔는지를 묻고, 그녀는 화장실이라고 대답하며 280호를 나왔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 그쪽은 화장실이 아닌데.
제 뒤를 쫓는 로봇이 낯설게 느껴졌다. 늘 9810번으로 시작하는 로봇의 말이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짧아졌다.
– 왜 멈추는 겁니까?
차온은 복도 중간에 멈추어 서서 그 로봇을 바라봤다. 로봇의 눈에 달린 카메라에도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보통 이렇게 가만히 쏘아보고 있으면 총을 꺼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협박이 있어야 했다. 이 로봇은 고장이 난 것인지, 아니면 감시 로봇 주제에 정이 들기라도 하는 것인지.
갸웃거린 차온은 빈 복도를 걸었다. 그러나 화장실 방향이 아닌 반대편 방향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 걸레를 빨 수 있는 수돗가가 있었다. 주룩주룩 비가 오는 날이라 파란 천막이 수돗가를 간신히 가려 주고 있었다. 차온은 그 천막 밑으로 들어가 수돗가 물을 틀었다.
물이 부족해 얇은 물줄기가 졸졸졸 나온다. 거기까지 로봇이 따라왔다. 그러나 제지하는 법도 없고 무얼 묻는 법도 없다. 차온은 가만히 그 로봇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천막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쏘아아아- 비가 쏟아지는 곳에 서서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차온은 그 상태로 계속 로봇을 노려보았으나 역시 말이 없다. 밤에 내리는 비라 너무도 추웠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으나 차온은 5분도 안 돼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랐다.
의심은 사실로 밝혀졌다. 설마 진짜로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줄이야. 그것도 한밤에, 어쩌면 새벽, 어쩌면 아침까지. 저벅, 저벅 다가오는 구두 소리에 차온은 입을 벌렸다. 비가 입 안으로 들이쳤다.
비에 젖어 있는 시열이 철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빠른 속도로 오자마자 한 일은 그녀의 몸을 천막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그가 신기한 한편, 어쩌면 이렇게 미련스러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여기까지 나왔어요.”
짐짓 모르는 척 그렇게 묻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했다. 자기도 비에 젖어 들어가면서, 천막 밑에 들어오지 않고 서 있었다. 차온은 그를 기가 차서 바라보다가, 심한 말을 꺼내려 했다.
“이 주 뒤에 출발이던데.”
그건 제 입으로 차온에게 표를 주었노라 자백하는 꼴이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이리 들어와요.”
차온은 그의 젖은 소매를 잡아당기다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 아래를 봤다. 기어코 그게 무리가 갔는지 한쪽 손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차온은 입김 같은 한숨을 쉬었다.
“들어와서 얘기하는 건 당신 선택지에 없나요?”
천막 밑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그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뜻 모를 미소를 짓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온은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머리통에 꿀밤을 놓고 싶었다. 왜 이렇게까지 미련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생각지도 못한 물음을 들었다는 것처럼 웃었다.
“그동안 내 말은 뭐로 들은 걸까. 하기야. 내가 준 표는 불우 이웃 돕기 성금으로 내는 것도 같던데.”
차온은 그가 하는 말을 받아 적을 듯이 들었다. 그의 대답이 떠나 줬으면 좋겠다는 것임을 알았다.
“이 주 뒤에 떠나는 표, 다시 주면 팔지 말고 갖고 있어. 그거 비싸.”
“내가 왜 당신이 가라고 하면 가야 해요?”
“이것 봐라. 우리 차온, 평생의 소원이 그거라고 나한테 그랬잖아. 막상 소원 들어준다니까 왜 가야 하냐니.”
“그 소원을 왜 당신이 들어주냐고요.”
“왜 나면 안 되는 건데.”
차온은 그를 바라보며 하고픈 말을 삼키고, 삼키다가 병이 될 것 같은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간 그를 보며 가장 하고팠던 말이 입을 찢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당신, 전쟁 나가요?”
“그건 왜 물어.”
“전쟁 일어나서, 그래서 나 보내는 거냐고요.”
“그렇게 말하니까 네가 나한테 되게 중요한 사람 같잖아. 전쟁 일어나니까 안전한 데로 보내 버리는 애인처럼.”
차온은 참다, 참다 도저히 참지 못하는 기분이 이거구나 싶었다. 차온은 거의 빗물에 잠긴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럼 그렇게 행동하지 말든가! 당신이, 나 오해하게 해 놓고 왜 오해했냐고…….”
늘 사람 마음, 혼을 다 빼놓고 멀찍이 서서 저렇게 조롱하는 그가 미웠다. 안 미워하고 싶은데, 그가 뻔히 보이는 수를 쓰고 도망 다닐 때마다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려고 했다.
곁에 있어 달라는 한마디면, 그 한마디면 차온은 뭐든 할 수 있었다. 아니, 그 말이 없더라도 사랑한다는 말,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차온은 그를 기다릴 수 있었다. 태영에게는 미안하지만, 같이 떠나자는 말을 해 주는 사람이 태영이 아니라 시열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안 떠날 거면 말아. 나도 이 주 뒤에 여기 떠나니까. 도와주는 이 없이 이 감옥에서 썩어서 나가게 될 텐데. 그래도 좋아? 잘 살고 싶잖아.”
“…….”
“네 힘으로 간다는 말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하고. 갈 수 있을 때, 기회 있을 때 가는 것도 네 힘으로 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차온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그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빗물이 쏟아지는 천막 바깥으로 가려 하자,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천막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쉽게 가자. 네 꿈이 잡아 달라고 난리 치는데 왜 모른 척하고 그래.”
머릿속으로 생각한 말이 다 맞았다. 그는 자신을 행성으로 보내고, 자기는 이 지구에서 전쟁이나 하며 마음 졸일 일 없이 살고 싶다는 소리였다. 시열은 말 참 안 듣는다며 고개를 숙였다가, 빗물에 맞지 않게 자신을 다시 천막에 두었다. 말 참 안 듣는 게 누구인데.
“지금 난리인 사건. 내가 한 일인 거 알죠. 그런데 왜 그거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해요?”
“내가 물으면 답은 해 줄 수 있으셔서?”
“네.”
그가 물으면, 지금까지 마음에만 품고 있던 이 감정도, 앞으로의 계획도, 그가 살아갈 계획도 다 말하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차온의 뺨을 비에 젖은 손으로 쓸며 고개를 저었다.
“이 나라에는, 이 행성에는 미래가 없어.”
“…….”
“그러니까 애쓰지 마. 애쓰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
차온은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려 했다.
“살면서 마주칠 일도 얼마 없을 것 같은데. 남은 이 주 동안…….”
그는 이 말을 하고 싶어 여기에 온 게 맞는 듯했다. 아까부터 계속 이 주라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빗물 고인 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세우고 미련 남은 양 웃었다.
“나랑 연애 놀이나 할래?”
애쓰지 말라면서. 이 행성에는 미래가 없다면서. 그는 여기에 남는다는 선택지를 버리지 못하는 처지인가 보다. 그에게도 분명 어떤 사정이 있을 거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큼이나 고집이 세기 때문에, 무슨 말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차온을 기절시켜서라도 이 주 뒤에 떠나는 비행선에 타도록 만들 사람이었다.
“남은 이 주간 나랑 하고 싶은 게. 연애 놀이예요?”
“싫으면, 나랑…….”
“안 싫어요.”
차온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의 부모는 뭐 하는 사람인지, 그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 건지, 그의 과거는 어땠는지, 어쩌다가 당신 같은 사람이 펑크에 들어와서 일을 하고 있었는지.
그는 그 모든 것에 대답해 줄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차온은 알고 싶었다. 모든 비극은 차이와 오해에서 시작된다. 그와 자신도 생각의 차이가 있었다. 오해는 없으면 섭섭한 사이였다.
그의 말 대로 남은 게 이 주라면, 남은 이 주간이라도 차이와 오해 없이 지내보고 싶었다. 그는 그때 떠난다고 했으니까.
차온은 달려가 그의 품에 폭 안겼다. 다급하게 그가 손으로 비를 막았지만, 비는 사람의 손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두 방울 떨어져 차온의 이마에 닿았다.
“이 주 동안 나한테 야, 너라고 하지 마요.”
“…….”
“온아, 라고 불러요.”
그가 성을 빼고 불러주는 이름을 듣고 싶었다. 그의 품에 안겨 비를 맞으니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자신도 참 미련스럽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그 이 주간만이라도 그를 가져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참 애처롭고 처량했다.
* * *
차온의 짐은 모두 그가 묵고 있는 한옥으로 옮겨질 뻔했으나 그녀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 최소한의 짐만을 들고서 그의 방에 머물고, 어떨 때는 자고 가고 어떨 때는 자고 가지 않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젖은 몸을 씻고 나온 그가 수건을 의자에 걸쳐놓으며 물었다.
“번거로운데.”
“이시열 씨 미워지면 나도 도망칠 곳이 있어야죠. 짐 다 빼놓으면 방으로 돌아갈 때 창피하잖아요.”
어쨌건 기간제 연인이라도 연인이 되기로 한 사람들인데. 차온은 침대에, 그는 까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씻는 것도 따로 씻고 나온 두 사람은 서로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시열은 마치 자신을 피하는 것처럼 의자에 박혀있었다. 차온은 그를 놀리려고 흐흐 웃었다.
“사귀기 시작하면 그렇게 내외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는 차온의 말이 농담인지 모르는 듯했다.
“모르겠네. 누구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나도 없어요.”
으르렁거리고 미워할 때는 그가 편했다. 그런데 연인이 돼 보자고 말을 하자마자 그들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게 다툼보다 더 견디기가 어려웠다. 차온은 말을 돌리기 위해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말했다.
“해 보고 싶은 거 있어요?”
여전히 대답이 없는 그를 대신해서 차온은 종알거렸다.
“뭐, 어디를 간다든지. 뭐를 같이 먹는다든지. 궁금한 게 있다든지.”
차온은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없어요?”
“있으면.”
예상외로 대답이 빨랐다. 한나절은 지나야 대답할 줄 알았는데. 차온은 웃으며 침대에서 껑충 뛰어 내려왔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나중에 억울함이 없죠.”
차온은 침대 밑에 발을 내려놓고 턱을 괸 자세로 그를 바라봤다.
“나부터.”
“말해 봐.”
“내 이름 불러 봐요. 온아, 이렇게.”
시열은 곤란한 것처럼 입술을 엄지로 만지작거렸다. 대답을 피하려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잠깐이었다. 그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전자의 물을 컵에 따라 마셨다. 말해 주려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차온은 그의 의자가 있는 곳까지 뛰어가 펄쩍 뛰었다.
“내 이름이 어려워요?”
어려운 소원도 아닌데 비싸게 굴었다. 차온은 그의 뺨이 뭉개지게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시열은 그런 장난에도 웃음기 한번 없더니만 차온이 포기한 것처럼 손을 놓을 때가 돼서야 기습적으로 말했다.
“온아.”
손을 내려놓던 차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온은 장난식으로 제 귀를 후벼팠다.
“뭐라고요?”
“됐다.”
토라진 그의 앞머리를 잘했다는 듯이 쓰다듬어줬다.
“더 다정하게.”
“……온아.”
“앞으로 이 주 동안은 그렇게 불러 줘요. 알았죠?”
차온은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와 감싸 안았다. 차온의 가슴께에서 그는 어렵게 숨을 쉬었다. 숨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온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붕대에 감긴 한쪽 팔을 마사지하듯 만져줬다.
“아파요?”
“아니.”
“안 아픈데 왜 붕대는 감았어요?”
“너 보라고.”
시열다운 대답에 차온은 그의 뺨을 들어 올려 자신의 두 눈과 마주치게 했다.
“이젠 안 아파요? 당신…… 피 토하고 그랬잖아.”
“내가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닌데. 연애 놀이하자는 거지. 병원 놀이 말고.”
시열은 차온의 허리를 안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옆머리를 쓰다듬다가, 귓불을 슬쩍 만지작거린다. 차온의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가 놓아주었다. 다정한 입맞춤임에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안 아픈지 대답도 못 해 줄 만큼 아직도 아픈 거죠.”
“안 아픈지 대답도 못 해 줄 만큼 아픈 인간이 너랑 이러고 있을까.”
차온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한 톨도 믿을 수가 없었다. 차온에게 그는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정신이 안 좋은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아픈 걸 숨기는 건 어찌나 젬병인지. 그러나 아프고 정신이 이상한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듣는 순간만큼은 아무한테도 뺏기고 싶지 않을 만큼 좋았다.
“나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자신의 머리칼을 유리인 양 조심조심 만지는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그 짧은 입맞춤에 넋이 나간 그는 무슨 소리든 들어줄 것처럼 눈을 뜨고 있었다.
“애인이랑 드라이브하다가, 별 보고 싶어요. 그리고 거기서 텐트 치고 하룻밤 자고 싶어.”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차온이 그 영화 속 주인공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부러웠던 건, 부모도, 집도, 꿈도, 물론 그것도 부러웠지만, 주인공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믿고 사랑해 주는 그녀의 연인이었다.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살아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열은 차온의 말에 쉬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걸로 됐다. 차온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의 품에서 든 잠은 깊고 달다. 두렵고 외로워 깨지 않을 수 있었다.
* * *
인사한다는 명목으로 나타나 이곳의 가장 윗대가리를 차지한 특수부 출신 이시열은 계급이 없었으나 계급장이 필요 없는 남자이기도 했다. 끽해봐야 황무지에서 게릴라전을 하는 부녀자를 잡아 심문하는 심문관 자리나 유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일에 나름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워낙 남의 비밀을 캐고, 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미였기 때문이다.
이무경이 총통 자리에 오르고 가입국 회담에서 승인을 받았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비록 양자여도 나라에서 제일 높으신 양반의 유일한 자제분이시니 누가 감히 발을 걸겠냐마는, 심문관은 요 며칠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윤태영이란 인간은 한때 펑크라는 조직에 몸을 담갔고, 이시열 또한 손수 비안전지대 뒷골목 조직에서 일하며 부정한 세력들에 대한 뒷조사를 하지 않았던가.
여기까지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였다. 그런데 차온이란 아가씨는 윤태영과 연이 있었고, 이시열도 그 아가씨와 연이 있는 것을 보니 셋은 기묘한 관계란 말이다. 입에 본드 칠을 한 태영의 고집이 슬슬 신물 날 무렵, 시열이 군용으로 쓰는 항공기 하나를 빌려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들었다. 교도소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쐰다는 이유였다.
어려운 요구는 아니었다. 다만 같이 가는 여자가 시열의 애인이라는 그 9810번이라는 게 문제였다.
9810번. 차온. 보육원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출생부터가 비범했다. 하필 그녀가 지난 자리에 있던 AVRTA 꽃봉오리가 피기도 전에 죽고, 하필 그녀가 감옥에 갇혔을 때 시스템이 마비되고 광산 하나가 터져 나갔다. 이번에도 AVRTA의 꽃이 손도 쓸 수 없게 죽은 건 말해 봐야 입 아픈 일이었다.
철커덕-. 문이 열렸다. 가벼운 가죽 재킷을 입은 시열이 들어왔다. 예의 바른 미소를 띤 심문관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가볍게 경례를 하자 그 역시 가벼운 경례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심문관의 인사에 시열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시열의 뺨에 새겨진 문신에 시선이 간 심문관은 품속에서 준비해둔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시열은 책상에 놓인 사진을 집어서 확인하곤, 시선을 들어 심문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연인이라고 다들 요즘 한창 입방아를 찧고 있는 차온의 사진이 있었다.
“로봇이 해킹당해서 제 할 일을 못 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아주 옛날 옛적에 설치해 둔 CCTV를 다 뒤져 보려 했는데. 아뿔싸. 그것도 너무 오래된 나머지 찍히나 마나 한 무용지물이 돼 버렸는데, 이것 좀 보세요. 딱 한 대, 살아 있는 게 있었습니다.”
비가입국 스파이들이 잠입해서 폭발물을 설치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대세가 될 때. 유일하게 심문관만이 이제 쓰지도 않는 CCTV를 찾고 또 찾아 얻은 것이었다. 그 사진에는 흐릿하지만 차온이란 여자가 운동장 쪽으로 나가고 있는 장면이 찍혀있었다.
“출신부터 수상한 여자입니다. 위험하기도 하고요.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웬만하면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심문관은 무엇보다 시열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알면서 내버려 두는 건지 어쩌는 건지. 하지만 심문관의 기대와 달리 시열은 잘 봤다는 듯이 사진을 돌려주고 나가려 했다.
심심한 반응이었다. 적어도 이 사진을 걸고 협상이라도 할 줄 알았다. 아니면 아니라고 반박을 하던가. 그것도 아니면 지위를 이용해 덮으려고 노력을 하던가. 그의 반응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분명하지 않았다.
심문관은 이 사진으로 그들을 어떻게 해 볼 생각보다 일의 전말과 여자의 정체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가고 있던 시열의 발이 문 앞에서 멈췄다. 그가 문고리를 잠그는 게 보였다.
찰카닥, 소리에 배 째라는 듯이 앉아 있던 심문관이 일어섰다. 문을 잠근 시열이 뒤를 돌아 그를 바라봤다. 심문실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한 마디도 응수하지 않았던 시열이 입을 열었다.
“단둘이만 있고 싶어서.”
그리고 다가오는데, 심문관은 바보가 아니었다. 설마하니 제가 십 년을 몸 담근 직장에서 죽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책상 밑으로 손을 들이밀어 응급 시에 쓰는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보안군과 직통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 잘하면 맞아 죽기 직전에 들이닥칠 터였다.
손가락이 버튼에 닿기 직전이었다. 하실 말씀이 남았느냐고 연기하고 있던 심문관은 한쪽 팔이 비틀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으, 악!”
거의 닿기 직전에 잡혔다. 시열의 손에 잡힌 심문관의 손목은 180도 비틀어져 있었다. 바람이 한 차례 불고 나니 시열이 자신의 코앞으로 와 있었다. 특수부의 위명만을 듣고 코웃음 쳤던 심문관은 머리채를 잡는 시열의 손에 오금이 저렸다.
“이야기를, 좀…….”
“둘만 있고 싶다고 말했는데. 섭섭해지려고 합니다.”
쾅, 소리와 함께 심문관의 얼굴이 책상에 처박혔다. 이마가 터져 끈적한 피가 책상에 묻었다.
정신이 가물거리는 심문관은 눈을 뒤집어 까기 시작했다. 심문관의 눈에 흰자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할 때 시열은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심문관의 주먹에 총을 살짝 쥐여 주고 시열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에 뚫린 머리가 터져 나갔다. 피를 뒤집어쓴 시열은 틀어진 심문관의 손목을 반대로 꺾어 원상태로 돌려놨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차온의 사진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얘기 즐거웠습니다. 애인 사진도 찍어 주고……. 친절하시네.”
사진에는 아등바등 운동장을 벗어나는 차온의 뒷모습이 찍혔다. 사진에 나온 예쁜 뒤태에 입을 맞춘 시열은 시간을 확인했다.
첫 데이트였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어야 할 듯싶었다. 데이트 약속에 늦었다고 화를 내는 차온을 떠올리자 입꼬리가 간질거렸다. 그는 사진을 세 번 더 보느라 미친놈처럼 그 방 안에서 시체와 있었다.
* * *
박 씨 아주머니와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교도소 밖으로 외출 나갔다 온다는 소리에 박 씨 아주머니는 사형당하러 가는 거 아니냐고 울먹거렸다. 차온은 데이트고, 걱정 끼칠 일도 아니니 그런 생각일랑 마시라고 말을 하고 나왔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딸의 외박을 걱정하는 엄마 같아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나저나 권력이 좋긴 좋았다. 차온은 수갑 없이 교도소 밖으로 나왔다. 교도관은 몇 시까지 복귀하란 말도 안 하고 280호의 문을 직접 닫아주었다. 총을 든 보안군은 주차장까지 배웅해줬다. 그러다 보니 군대 휴가 느낌이 나고 데이트 느낌은 안 살았다. 상 하의가 죄수복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나왔는데도 시열이 없었다. 주차장에 쪼그려 앉아 기다린 지 이십 분 정도 되었을 때였다. 차온은 주차장으로 달려오는 그를 보며 안심했다. 오다가 일이 생겨 약속이 취소된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씻고 나왔어요?”
아직 덜 마른 듯한 그의 머리카락을 보며 차온이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덜 씻은 느낌 나서.”
하여간 엉뚱한 사람이었다. 차온은 그에게 어느 차를 타느냐고 묻듯이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뭐 타고 가면 돼요?”
“저거.”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걸 본 차온은 예상하지 못한 사이즈에 놀라 몸을 훅 일으켰다.
“와, 저거요?”
신내림 받듯이 점프하던 차온이 새까만 군용기 앞으로 갔다. 시열이 열쇠 버튼을 누르자마자 군용기의 뚜껑이 열렸다. 그리고 깜장 발 받침 하나가 내려왔다. 차온은 누가 받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밟고 올라갔다. 조수석에 앉아 만세 삼창을 했다.
이윽고 올라탄 시열의 손가락이 기어봉같이 생긴 것을 잡아당겼다. 뚜껑이 윙- 소리를 내며 닫혔다. 차온은 안전띠를 채우고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았다.
“나. 이거 조종하는 방법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시열은 자신의 말이 장난인 줄 아는 듯했다. 운전대를 잡은 그가 기다랗게 생긴 봉을 잡고 아래로 당기자 시동이 걸리며 군용기가 위로 뜨기 시작했다. 일직선으로 날개를 펴는 군용기에 탄 차온은 몸이 기우뚱하는 느낌에 까르르 웃었다.
군용기는 조금 뜨는가 싶더니만 금세 지면에서 멀어졌다. 개미만 하게 보이는 전경을 바라보던 차온은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약 UT 행성으로 가는 우주선을 타고 가면 지구가 이렇게 장난감처럼 보일까.
이 행성을 버리라고, 가망이 없다는 듯 말하던 시열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이 행성을 버리고 싶었던 건 자신이면서, 그가 여기를 버리라고 말하자 오기가 들었다. 그의 말에 한이 서려 있었다. 지구를 버리라는 말이 자기를 버리라는 말과 같았다.
별을 보고 싶다는 차온의 말을 따라 하늘이 맑은 지역으로 가는 중이었다. 아래로 보이는 건 황색의 사막, 부식된 건물의 잔해만 굴러다니는 적막의 도시뿐이었다. 군용기는 버려진 기차역 위를 날아갔다. 그곳은 처음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처럼 낡은 기차와 선로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시열 씨.”
“응.”
“나 사람 하나만 찾아 줄 수 있어요?”
그 말에 시열이 그녀를 바라봤다. 코가 눌릴 만큼 창에 딱 달라붙어 말을 이었다.
“박 씨 아주머니……. 그러니까 나랑 같이 방을 쓰는 그분 있잖아요. 남편분이 UT 행성으로 들어간 건지, 아니면 아직 여기에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어요?”
“맨입으로 부려 먹네.”
“이따가 밥 내가 할게요.”
“차라리 맨입으로 부려 먹어.”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천천히 봉을 잡아당겼다. 더 위로 올라가려는 느낌이었다. 차온은 말을 꺼낼까 말까 하다가 용기 내어 아래를 가리켰다.
“저 여기 잠깐만 들렀다가 가면 안 돼요?”
그는 내부에 뜬 화면으로 아래를 확인하곤 그녀에게 말했다.
“별 안 보여, 여긴.”
“저기 두고 온 것도 있어요.”
그는 두 번 설득하지 않는다. 시열은 차온의 요청대로 하강했다. 아래로 곤두박질치듯이 내려가던 군용기는 지면에 가까워지자 수평으로 몸을 눕혔다. 그가 두 개의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아래에서 뜨거운 기체를 뿜으며 땅으로 천천히 착지했다. 뭉게구름 같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앉았다.
착륙에 성공한 시열이 검은 버튼을 눌렀다. 뚜껑이 열리자마자 모래바람이 뺨을 때리기에 차온은 실눈을 떴다.
“어때. 이래도 내릴래?”
하지만 그의 만류 아닌 만류에도 차온은 그 기차역에 다시 한번 와보고 싶었다. 차온이 바람은 잠잠해질 거라며 내리자 그도 발판을 딛고 내려와 군용기의 뚜껑을 닫았다. 차온은 모래에 발이 빠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차로 달려가 문을 낑낑거리며 열고 있었다. 다가온 시열이 뒤에서 힘을 보태자 기차의 문은 쉽게 열렸다.
“팔 한 짝 남은 사람 부려 먹는 재미는 어때.”
“아주 좋아요.”
차온은 활기차게 말하고 기차 내부로 들어갔다.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오지 못했던 내부를 마음껏 둘러봤다. 감탄이 잦은 차온은 덩실덩실 춤추듯 걸었다.
초록색 벨벳 시트에 의자들이 네 개씩 마주 보게 설치되어 있었다. 차온은 신이 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다가가 하나씩 앉아 보았다. 어느 자리가 명당인지 천장까지 아주 꼼꼼히 따져 보았다.
“우리 오늘 여기서 잘까요?”
“싫어.”
“그럴 것 같았어요.”
어느새 그를 놀려 먹는 데에 도가 튼 것 같았다. 차온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군용기가 곧 모래에 묻힐 것만 같았다.
그때 걸어온 시열이 그녀의 옆줄에 있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싫다고 그러더니만 앉은 모습을 보니 이런 구시대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차온은 앞자리 의자에 다리를 뻗고 앉아 본격적으로 풍경 감상에 나섰다. 시열도 자기 자리의 창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사람을 만나서 판을 깔고 수다 떠는 타입은 아니었다. 들어주는 게 편할 때가 많았다. 시열도 말수가 많지 않아서 대화의 휴식기가 어색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비가 와서 그런지 습기가 있는 내부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다가, 차온은 삭막한 사막에 시선을 두고 있는 시열을 불렀다.
“우리 게임할래요?”
바닥에 있는 빈 병을 보고 생각이 났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병을 줍는 차온을 바라만 보았다. 차온은 그걸 자그마한 간이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빙 돌리기 시작했다. 멈춘 병의 주둥이가 그를 향했다.
“이렇게 병의 입구가 이시열 씨를 향하고 있으면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다 대답해 줘야 해요.”
“반대로 너에게 향하면?”
“나도 묻는 말에 대답해야죠. 하기 싫으면…….”
보통 이럴 때 술을 마시는데 그들에게 술은 없었다. 차온은 고민하는 것처럼 허벅지를 두드리다가, 그를 바라보며 책상다리를 했다.
“우린 거짓말 안 하기로 해요. 양심껏.”
시열은 당돌한 그녀의 말에 웃으며 앞좌석에 긴 다리 한쪽을 쭉 뻗었다. 피곤한 건지 눈이 감길락 말락 하는 그를 차온이 지켜보고 있었다.
“물어봐.”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그가 순순히 이 게임에 응해줄 줄 몰랐다. 차온은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는데 막상 판을 깔아 주니 물어볼 게 없었다. 차온은 당황함을 숨기고 첫판이니 봐준다는 느낌으로 질문에 힘을 뺐다.
“이름 누가 지어 줬어요?”
“양아버지.”
대답을 마친 시열이 차온의 자리로 성큼 건너왔다. 차온의 옆자리에 앉은 그가 병을 쉬익 돌리자 그의 근처에서 병의 입구가 멈추었다. 이게 뭐라고. 차온은 좋아하며 팔짱을 꼈다.
“고민할 시간 좀 줘요.”
그는 한 시간 안에 끝내 달라며 차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갑자기 올라온 그의 머리 때문에 어깨가 무거워지고 머리도 무거워졌다. 머리 회전이 느려졌다. 그는 눈을 감고 다리를 뻗은 다음, 차온의 허리를 손으로 안았다. 자신에게 안기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힘을 뺐다. 질문이 생각 난 차온은 그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나한테 준 목걸이. 그거 누구 거예요?”
“어머니.”
차온은 그의 말을 듣고 병을 돌리려다가 말았다. 전 여자친구라고 대답하고 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다음 질문은 없느냐고 물었다. 차온의 품에 안겨들 듯이 머리를 비비적거린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더 안 해?”
“나한테, 그건 왜 줬어요.”
의미 없는 것처럼 목에 걸어 주기에, 그녀는 시열이 미워질 때마다 금은방에 팔아 버릴 거라며 큰소리치곤 했었다. 사정을 몰랐다지만 그의 부모를 욕되게 한 기분이었다. 그 목걸이를 화풀이 삼아 내동댕이친 전적도 있었다. 차온의 미안한 마음에 대답하듯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미친 새끼잖아, 원래. 그날은 그러고 싶었나 보지.”
“내가 당신을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어차피 가짜 연애인데. 십 년만 지나 봐라. 네가 날 기억하나…….”
그는 피곤한 것처럼 차온의 목을 베개 삼아 누웠다. 차온의 목에 굿나잇 키스하듯 입술로 쪽쪽 빨고 놓았다. 차온은 잠에 빠져드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내가 당신을 잊어도 좋다는 것처럼 들려요.”
그는 묵언 수행을 하다가, 차온의 허리를 와락 안으며 잠꼬대처럼 대답했다.
“떠나는 것도 너고, 나를 잊을지 말지 선택하는 것도 너고, 남이 그런다고 하는데 내가 거기다 뭐라 하는 것도 우습고.”
“그럼 당신도 내가 떠나고 나면 나를 잊겠네요.”
“나? 나야…….”
그는 그 말에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말아 물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야 잊지.”
그는 잊는다는 말을 끝으로 잠이 들었다. 불결해서 싫다는 것처럼 굴더니만. 쌔근쌔근 잠든 모습을 보니 안쓰러우면서, 속 편히 잊는다고 하는 게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마음에 노크를 쉬지 않고 했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소득이 없었다. 차온은 그의 마음 한 조각도 얻지 못했다. 자신이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 그 외엔 어떤 마음도 비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지금껏 사랑의 증거라고 모아 둔 게 자신만의 망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라는 사람 옆에 철판 깔고 붙어 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지구에 미래가 없는 것도 맞는 말이고, 전쟁이라는 건 멸망을 앞당기면 앞당겼지 미루지는 않을 터였다. 지금보다 비안전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형편은 더욱 팍팍해질 것이고 자신이 바라던 삶은 지구가 아니라 UT 행성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말대로 십 년쯤 지나면, 어쩌면 그보다도 더 빨리, 이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추억으로 여기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요?”
차온은 정신없이 자고 있는 그의 팔에 감긴 붕대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쓰기는 멀쩡하게 쓰는 것 같던데. 정말 자기 보라고 싸맨 건지 궁금해진 찰나였다. 차온은 그의 주머니에서 은색의 목걸이 줄이 좀 삐져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손을 뻗어, 차온은 그의 주머니에서 로켓이 달린 목걸이를 빼낼 수 있었다.
그는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 차온은 그 로켓에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꾹 눌렀다. 달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로켓이 열렸다. 그 로켓 안에 있는 사진을 본 차온은 벌어져 있던 입술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로켓을 닫아 그의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다.
심란한 밤이었다. 차온은 자신에게 기대는 그의 머리 위에 턱을 두고 밤을 새웠다. 이 땅에서 오로지 두 사람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차온은 그를 조심스럽게 의자에 눕히고 팔을 뺐다. 그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차온은 시열이 깨지는 않는지 연신 확인하며 기차의 문을 열었다.
사막의 냉기를 물리칠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차온은 예전 황무지에서 살던 사람들이 두고 간 천막 안으로 들어가 뒤적거렸다. 쓰다 만 그릇과 불을 피울 수 있는 도구, 그리고 라면 몇 개를 포함한 즉석식품을 발견했다. 매운맛 라면인 게 걸렸지만 일어난 그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지난번에 물 떠오기 당번이었기 때문에 물탱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 물이 아직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안 가 보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양은 냄비를 들고 물탱크가 있는 길로 걸어갔다.
모래 언덕 위로 올라가 차온은 선로와 검붉은색의 기차를 바라봤다. 시열은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온은 걷다가도 심심하면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잠시 두고 떠나는 것도 눈에 밟히는데 영영 두고 가는 게 과연 가능할까. 게다가 그 로켓 안에 들어 있던 사진은…….
“어.”
모래 언덕을 네 발로 올라 평평한 땅에 도착하자마자 탄성을 뱉었다. 혹여 황무지의 떠돌이라도 마주칠까 봐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모래 없는 바람이 불었다. 옆으로 누운 풀끼리 엮이고 흔들리는 소리가 아름다웠다. 새싹이 숨을 쉬는 땅에 차온이 서 있었다.
기차역의 사막과 선이 그어진 것처럼 언덕 너머는 초록의 세상이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던 땅에 싹이 자라고 풀이 나고 꽃이 피었다. 그 자리는 차온이 씨앗을 뽑아 죽인 꽃의 무덤 자리였다.
풀숲으로 들어가 자신이 죽인 꽃의 무덤 자리로 가 보았다. 무성한 풀들이 차온의 발목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꽃의 흔적은 없었다. 꽃의 시체를 양분 삼은 듯이 초록의 풀이 빼곡하였다.
차온은 양은 냄비를 의자 삼아 앉았다. 한 시간을 풀이 스치는 소리로 때웠다. 자신의 미래를, 시열을, 그리고 사막의 정원을 생각했다. 맡아 본 적 없는 향긋한 풀 내음이 코끝을 적셨다. 그 내음이 차온의 고민을 그치게 해 주었다. 분홍 꽃 한 송이를 뿌리까지 조심조심 양은 냄비로 옮겼다.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자세는 더 이상 움츠려 있지 않았다.
* * *
선로로 돌아오던 길에 다른 천막 아래에서 캔 커피를 발견했다. 잘됐다 싶어 장작불에 끓여 기차로 가지고 갈 때였다. 기차의 문을 열려고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안쪽에서 문이 확 열렸다. 피로가 풀린 그의 눈이 차온을 훑었다. 그는 차온의 손에 들린 김이 나는 캔 커피를 멍하니 바라봤다.
“먹을 거죠?”
차온은 그에게 캔 커피 하나를 건넨 다음, 그를 피해서 기차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캔 커피까지 하나 데워 온 차온은 벨벳 의자에 앉아 환하게 웃었다.
“거기서 뭐 해요. 이리 와 앉아요.”
시열은 자기 옆자리를 팡팡 두들기는 차온을 가만 바라보고는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차온이 두드리는 자리에 앉아 그녀의 캔 커피를 가져갔다. 뚜껑을 따 주고 다시 돌려주는 그의 행동에 차온은 발그레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생각해 봤는데요.”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갈 길을 오늘부로 결정됐다. 차온은 그의 회색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마음에 걸린 빗장은 평범한 방법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그러하니 그를 한계로 몰아붙이는 한이 있더라도 차온은 그의 입에서 꼭 듣고 싶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기가 정말로 떠났으면 좋겠는지.
그의 진심이 가소로운 것이고, 그가 진실로 자신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차온은 떠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차온은 그와 그리고 싶은 미래가 생겼다.
“난 이시열 씨 말대로 하는 게 맞아요.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캔 커피를 따서 마시려고 했던 시열은 입가에 가져가던 캔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러곤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게 그렇다니까.”
“네. 그게 그렇더라고요.”
그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계속 손에 쥐고만 있었다. 가지 말라는 한 마디면 되는데. 차온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려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어둑해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등을 덮은 차온을 바라봤다.
“이러니까 따듯하다.”
그건 꾸며 낸 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그의 손은 체온이 높아 따뜻했다. 차온은 어제 쓰다가 만 빈 병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운이 나쁜지 시열만 지목되어 결국 그는 한 마디의 질문도 하지 못한 게 생각이 났다. 차온은 나사 빠진 것 같은 시열을 마주 보았다.
“이시열 씨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왜.”
“왜?”
“왜……. 아, 지금 뭐 하는 거지.”
조급하던 그의 눈이 웃음으로 풀어졌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시열은 질문이 없다고 말했다. 차온은 시무룩해진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오는 그의 혀가 입 안을 훑었다. 그의 목에 손을 휘감으며 키스했다. 시열의 숨에서 달달한 향기가 났다. 혀를 빨며 웃는 목울음을 듣자마자 차온은 시열의 뺨을 떼어 냈다.
“있잖아요.”
키스에 몰입한 시열은 눈이 풀려 입술을 내밀었다. 차온은 더 하자고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짧은 뽀뽀를 남겼다.
“나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자 그의 눈에 실망감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내었다.
“별은?”
“나중에 볼래요. 어차피 우주선에서 실컷 보게 될 건데.”
차온은 이만 가자는 뜻으로 그의 뺨에 키스하고 일어섰다. 그는 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주라는 기한을 만들어 놓고. 알뜰살뜰하게 추억을 쌓은 다음에 헤어질 모양인가 보지. 차온은 절대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아니면 아닌 거다. 미적지근한 상태로 헤어져 그를 추억하며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마음이 불이라면 자신도 불이 될 테고 그의 마음이 얼음이라면 자신도 얼음이 될 테다. 그 혼자 얼음이거나 그 혼자 불인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떠나자는 차온의 말에 묵묵히 기차를 떠나와 군용기에 올랐다. 운전을 하는 내내 그는 한 마디의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음악을 듣고 싶어 차온이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그녀가 좋아하는 옛날 노래를 틀어 주기도 했다. 그와 산에서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들었던 노래였다. 그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의 마음이 부디 불이기를. 차온은 창밖을 보며 그렇게 기도했다.
* * *
차온은 일부러 그의 숙소에 자주 가지 않았다. 박 씨 아주머니와 종일 붙어 다니며 수다를 떨고, UT 행성에 가면 어떻게 먹고살지를 걱정하는 그녀에게 여러 조언을 줬다.
“거긴 그래도 일자리가 많대요. 구하기도 쉽고.”
“정말 그럴까요?”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옮겨가지 못하니까.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분야에서는 사람을 계속 구하는 모양이에요.”
차온은 여태 만약 자신이 UT 행성으로 떠나게 되면 어떻게 살지를 고민해 왔다. 덕분인지 잡다한 지식이 많아, 알아낸 정보들을 그녀와 공유할 수 있었다.
최근 심문관 하나가 자살을 하는 바람에 장례식이 있었다. 며칠 동안 애도를 하느라 밥은커녕 국조차 배급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침울해져 있는 교도관들에게 밥을 더 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 장례식이 끝나는 며칠만 참자는 마음이 있었다.
뭐,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덕분에 감시가 느슨해져 차온은 복도 청소를 다 마치고 수돗가에서 빗물로 걸레를 빨았다. 화단 청소 당번인 태영도 만날 수가 있었다.
날이 좋았다. 겨울이 떠나고 봄볕이 마구 내리쬈다. 빗물을 빌려 간 태영이 빗물은 빨래용이라며 수돗물을 틀어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물이 튀어 옷이 젖었음에도 차온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식으로 장난을 거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피부 다 망가졌어. 이 거지 같은 감옥 뜨기만 해 봐. 신문사란 신문사마다 찾아가서 고발하고 다닐 테니까.”
“화이팅.”
차온의 작은 농담에 그는 쾌활하게 웃더니, 그녀가 빨고 있는 걸레를 쓰윽 훔쳐 갔다. 그리곤 자신이 빌려 간 빗물에 집어넣고 열심히 조몰락거린다. 전혀 집안일에 능숙하지 않은 손길이라 차온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며칠 전에 어디 갔다 왔냐.”
시열과 바람을 쐬기 위해서 기차역을 배회하다가 온 날을 말하는 거였다. 차온은 물이 틀어져 있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태영을 바라봤다. 물이 떨어지는 태영의 머리칼을 보니 한여름날 멱이라도 감은 것 같았다.
“윤태영 씨. 말하고 싶은 거 있어요.”
태영은 무슨 말이길래 진지한 폼을 잡냐고 물으며 기지개를 켰다. 차온은 그가 회피하려고 하는 것을 눈치챘다. 태영의 옷자락 끝을 잡았다. 태영은 고작 옷자락 끝을 잡힌 것만으로 모든 게 잡힌 것처럼 꼼짝을 하지 못했다.
“저번에 나한테 한 말…….”
“좋아해.”
태영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직감한 사람처럼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그는 앞을 뚫어져라 보며 천천히 말을 뱉었다.
“지금 하려는 말, 더 생각해.”
“…….”
“더 생각해 봐.”
차온은 반대편으로 돌아간 태영의 어깨를 자신에게 돌렸다. 태영의 삐뚤어진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차온은 태영의 차가워진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난 항상 살고 싶었는데요. 그것도 아주 잘 살고 싶었어요. 나 무시하고 별종이라고 부르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요.”
“……그런데.”
“그 사람 없이 잘 사는 것보다 같이 죽는 게 더 기쁘겠다. 그게 낫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요.”
자신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태영이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그는 차온이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내 마음이 그래요. 윤태영 씨가 잘 살기를 바라지만 윤태영 씨랑 같이 죽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간 태영의 얼굴에는 끝내 무표정만이 자리 잡았다. 생기 넘치던 그의 입꼬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어리석다는 눈으로 차온을 지그시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홀가분하게 들렸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윤태영 씨가 뭐가 돼요. 그냥 윤태영 씨지.”
“여지라도 주라. 단칼에 거절할 정도로 내가 매력이 없는 것 같으니까.”
차온은 웃으며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는 차온이 놓아버린 손을 잠시 응시하다가, 슬픈 기색을 말끔히 지웠다.
“솔직히 나한테 끌렸지?”
“조금은.”
“그럼 됐어.”
태영은 복수하겠다며 차온의 머리칼을 까치집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치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가 담백하게 자신의 마음을 갈무리하는 것에 차온은 놀라는 중이었다. 조금 더 어려울 줄 알았으나 그는 약간의 어려움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던 태영이 고개를 돌리다가 말았다. 그 자리에서 멈췄다. 못 박힌 듯이 서 있는 태영의 시선이 이상하여 뒤따라 보았을 때였다. 철장 너머에 시열이 있었다.
* * *
버니는 아픈 아내와 딸을 신기술의 집약체인 UT 행성에 불법을 써서 보내 놓은 사람이었다. 담배, 술은 규정상 어긋난다며 올바른 척하던 그가 불법을 자행하자 가식적이라고 욕하는 동료도 있었다. 가족 일에는 너도 어쩔 수 없구나. 모욕적인 비아냥을 참을 수 있었던 건 그게 맞는 말이라서였다.
자신은 희생해도 좋으나 아내와 딸은 AVRTA로 인해 오염된 지구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벌을 받았나 보다. 그는 수년째 UT 행성으로 가지 못하는 몸이었고, 아픈 아내는 연고도 없는 UT 행성에서 죽고 말았다. 향수병이 심했다고 들었다.
딸은 아내의 죽음을 보고 지구로 돌아오고 싶다고 그랬으나 UT 행성으로 떠나는 우주선은 있어도 돌아오는 우주선은 없었다. 결국 그의 욕심이 모든 걸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버니는 또다시 이기적인 부탁을 하기 위해 태영을 찾았다. 태영은 까칠하지만 속이 여리고 따듯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지구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제가 사랑하는 딸을 맡아 줄 사람으로 손색이 없을 터였다. 머리로는 모두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알아봐 달라고 하신 것, 책상 위에 올려 뒀습니다.”
“형.”
“예.”
버니는 복귀하고 나서부터 계속 시열에게 존칭을 썼다. 시열은 하지 말라고 구구절절 말하는 것도 우스워서 그냥 내버려 뒀다. 시열은 요즘 이렇다. 이 주만 행복해지면 남은 삶을 버틸 줄 알았는데, 이 주 뒤에 다가올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게 문제였다.
차온이 알아봐 달라고 한 여자의 남편과 아이의 정보였다. 연인 노릇을 해 주겠다고 말한 차온은 이 주가 되기도 전에 질린 사람처럼 시열을 찾아오지 않았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마음은 그게 잘된 일이냐고 물어대고 난리다.
그래도 만날 핑계는 생겨서 다행이었다. 시열은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읽으며 몸을 일으켰다. 청소가 끝날 시간이라 타이밍도 좋았다. 시열은 서류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외우며 버니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태영하고 혼인 신고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문으로 문을 잠그고 나가려던 시열은 그 말에 문고리를 놓쳤다. 놓은 게 아니라 놓쳤다. 단 2초간. 그 2초 동안 표정이고 마음이고 아무것도 수습되지가 않았다. 마음에 이는 성난 파도를 가라앉히려고 피를 냈다. 입 안쪽에서 피 맛이 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 손잡이를 돌리는데 우지끈- 소리가 났다.
“씨이발…….”
덜렁거리는 손잡이를 보자마자 짜증이 왈칵 일었다. 시열은 십 초간 숨을, 청력을, 시력을 조절할 수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눈자위가 벌게졌다. 버니는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열리지 않은 문을 대신해서 열어 주었다. 시열은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이 밖으로 나갔다.
날이 좋아서 싫었다. 엊그제는 날이 너무 추워서 싫었다. 지저귀기 위해 태어난 새의 울음소리조차 견디기 어려울 만큼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지금 차온에게 가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세상이 은혜로웠다. 혼인 신고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치민 토기가 가시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시열은 명확한 외출 계획이 있었다. 철장 너머로 차온을 구경하다가 들어갈 계획이었다. 말도 섞을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을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
차온은 태영과 수돗가에서 걸레를 빨고 있었다. 둘은 이 주간 연인인 자신보다 더 연인처럼 마주 보며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다시 속이 뒤집히고 역해지기 시작했다.
수년간 보아 온 태영의 얼굴을 찢어발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차온이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둘이서 어떤 약속을 했을까. 저 하잘것없는 놈에게 미래를 약속했을 차온을 생각하자 시열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자신은 무엇 때문에 그녀를 포기하는가. 무엇 때문에 자격이 없는가. 그렇게 떠올리다가, 욕심을 부리다가, 차온이 철장 쪽으로 다가오자 정신이 들었다.
그의 자격은 이것이었다. 얇은 철장이 그의 독방에 있던 검은색 쇠창살로 보이기 시작했다. 몸은 자랐고 그는 다른 장소에 있지만, 정신은 자라지 못하고 작은 독방 안에 갇혀 있었다. 데려가 달라는 말로 어미를 죽였고 가지 말라는 말로 첫사랑을 죽일 순 없었다. 그의 곁에선 불행해졌다.
송곳니로 입술을 물고 있으니 피가 머금어졌다. 약간의 치졸한 마음이 들어 차온이 거의 다가왔을 즈음 잔기침과 함께 그 피를 뱉었다. 나를 보러 왔냐며 웃던 그녀는 철장 너머에서 그가 피를 뱉는 꼴을 보자마자 싸늘해졌다.
“그거 피잖아요. 잠깐 내려 봐.”
그럴 생각이 없었으나, 아니, 그럴 생각이 있었다. 태영에게 몰린 그녀의 시선을 빼앗아 오자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마음껏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건강하다고 믿고 마음 편히 떠날 그녀가 싫었다. 그는 이 먼지 나는 행성에 두고 태영과 오순도순 살 그녀가 싫었다. 그러나 그는 창백하게 질린 차온의 얼굴을 보고 제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끔찍하고 유치한 일인지 깨달았다.
시열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와 그녀를 바라봤다.
“박미정 남편 소재지 알아봐 달라고 그랬잖아. 이 년 후에 우주 항공 정비사로 데려간다고 이름을 올려놨던데. 앞당길까?”
스스로 말하면서도 얼마나 끔찍한 남자인지 알고 있었다. 원래의 목적은 그게 아닌데 그녀를 위해 알아 온 것처럼 말하는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창백하게 질린 차온의 얼굴을 보며 안심하는 미친 새끼였다.
사랑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의 관심이, 애정이, 입맞춤이 이 지구를 떠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것임을 알아줬음 좋겠단 거였다. 이 주간 그의 것이라고 어찌어찌 얘기는 해 뒀는데 아무도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으니까.
그 이 주란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볼일은 끝났다고 돌아가는 그의 등을 차온이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가 저 여자가 떠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떡하지. 제 곁에 남는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우스운 걱정이었다. 시열은 어리석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망상을 하는구나. 그래,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 * *
화분으로 옮겨 놓은 꽃 한 송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꽃 수술에서 하얀 액체가 흐르는데, 닦고 닦아도 자고 일어나면 맺혀 있었다. 오늘은 꽃을 닦아주지 못했다. 못된 녀석을 혼내주려고 나선 참이었다. 이제는 제집처럼 들어오게 되는 한옥의 유리문을 열고 침실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들어가자마자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차온은 주인 없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를 향한 기다림은 불안으로 끝이 났다. 그가 열이 펄펄 끓고 아팠던 과거가 선명한 탓이었다. 제 피로 무언가를 해서 이제는 좀 나아졌나 싶었다. 하지만 오전에 피를 토하는 꼴을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 그의 협탁 서랍이 덜 닫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거 내 리볼버네.”
보육원 원장에게서 훔친 리볼버를 그가 간직하고 있었다. 차온은 그의 소지품 중에서 녹음기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겼다. 연결된 동그란 조약돌 같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러자마자 걱정으로 점철된 그녀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녹음된 것은 한옥에 와서 책을 읽어 주던 자신의 목소리였다. 이 외로운 행성에서, 아무런 마음 기댈 곳 없어 보이는 그는 이따위 녹음기로 마음을 달래려 한 것일까. 그러나 차온은 그 꼴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욕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가운을 걸친 그는 자신이 올 것을 예상한 것처럼 웃으며 반기기까지 했다. 지독한 놈이었다. 한 번은 자신을 불러서 매달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정말로 자신이 떠나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방치해 두고 있었다.
오늘 그가 피를 쏟으며 서 있는 장면을 보이지만 않았어도 여기에 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참 뻔뻔하고 악독한 남자였다. 고작 사흘이 남은 이제 와서 그는 피를 토하며 그녀를 부른 셈이었다.
차온은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그건 무척 비겁하고 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그녀를 붙드는 건 너무 비겁했다. 가지 말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굳어 있는 차온의 표정을 보다가, 시선을 그녀의 손에 들린 녹음기로 내렸다. 약간의 당황함조차 없는 뻔뻔한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설마 이 녹음기를 듣는 것도 계산에 포함된 일인가 싶었다.
“그거 들으면 잠 잘 와. 자장가 같아.”
차온은 고개를 살랑살랑 젓다가, 녹음기 재생을 멈추며 대답했다.
“내 목소리가 그런 면이 있긴 해요.”
그리고 삭제 버튼을 찾아 눌렀다. 그는 삭제 버튼을 누르는 걸 보자마자 빠르게 걸어와 녹음기를 강제로 빼앗았다. 다급히 버튼 여러 개를 동시에 누르고 나서야 그는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완전히 삭제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그 녹음기를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머리 뚜껑이 열린 차온은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줘요. 마저 삭제하게.”
“너한테 그럴 권한이 있다고 생각해?”
“저거 내 목소리 아니에요?”
그러자 그는 아예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넣었다. 잠금장치가 설치된 서랍인지 닫자마자 삐로롱 소리가 났다. 그는 그제야 안심한 사람처럼 차온을 지나쳐 침대로 갔다. 이불을 덮지도 않고 그 위에 누워버렸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실제 사람은 필요 없고 녹음된 목소리만 있으면 버틸 수 있다 이거지.
“당신. 다 나은 거 아니죠.”
“우리 차온. 의사로 취직했나 보네.”
“그럼 내 앞에서 피는 왜 토했어? 옜다 엿 먹어라 뭐 이거야?”
“내가 아픈 게 너한테 엿 먹이는 일씩이나 돼?”
“그래! 이 멍청아!”
더 심한 말을 해 주고 싶지만, 그 말을 한 자신이 후회스러울 것 같아 차온은 초인적인 힘으로 참았다. 차온은 그에게로 다가가 뺨을 내려칠 것처럼 손을 들었다. 시열은 뺨 한 대 정도는 맞아 주겠다는 것처럼 얌전하게 있었다.
그 얼굴이 짜증 나서 손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바람을 가르고 내려온 손의 종착지는 그의 이마였다. 뺨 맞을 각오를 하고 있던 시열은 이마에 얹힌 손이 불편한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그때처럼 아픈 줄 알았네.”
“그때…….”
차온의 말을 따라 한 그는 설마 하는 눈빛으로 차온을 바라봤다. 차온은 약간 벌어져 있는 그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혀는 섞지 않고 그의 입술만을 마음껏 갈취한 다음 떨어졌다.
“당신이 나 잠 못 자게 했으니까. 당신도 잠 못 자야 공평하지. 안 그래?”
차온은 얼빠진 그의 뺨에 입술을 쪽 남기고 웃어 주었다.
“잘 자요.”
얌전히 있던 그는 떠나가는 차온의 손을 꼭 잡았다. 차온은 돌아갈 뜻을 굽히지 않고 쳐다만 봤다. 그는 약간은 초조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고 가.”
“싫어요.”
“얼마 안 남았잖아.”
“그러길래 기한을 한 달은 잡지 그랬어요.”
하고 많은 말 중에 그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차온이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조금 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 주 동안 내 애인 해 준다며. 뭔 애인이 이래.”
“헤어지기 사흘 전 애인은 원래 이래.”
차온의 말을 들은 그는 손을 천천히 놓았다. 부드러운 헤어짐을 예견한 것처럼 그는 차온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렸다.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억지로 자는 척하는 모습이었다. 차온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혹여나 그가 떠나지 말라고 하지는 않을까. 그 말을 기대하며 서 있었다.
그러나 시열은 겁쟁이였다. 문을 예상보다 천천히 열고 나왔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실패에 가까웠다. 차온은 뒷짐을 지고 생각에 잠겨 걷고 있었다. 앞마당에 나타난 뜻밖의 손님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버니 씨.”
훤칠한 버니, 그의 옆에 있는 의사 가운을 입은 여자. 두 사람은 마치 차온을 기다린 것처럼 거기에 서 있었다.
“우리 잠시 얘기 좀 할까요?”
의사가 먼저 그녀에게 제안했다. 그녀의 연구실에 남자 하나를 거꾸로 매달고 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차온은 두려움을 이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건 이 두 사람뿐이었다.
* * *
마땅히 대화를 나눌 장소가 없어 취조실 하나를 빌렸다. 분위기를 바꾸겠다고 커피까지 들여놓았지만 딱히 그 불편한 공기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사흘 뒤 출발하는 겁니까?”
버니가 말문을 열었다. 차온은 버니를 빤히 바라보다가,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버니는 약간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떠나지 않을 거라고요.”
“그걸 왜 내가 버니 씨한테 얘기해야 해요?”
“행선지를 알아야…….”
“알면 뭐 하게요. 이시열 씨한테 꼬박꼬박 보고라도 해 드리려고요? 여기를 나가면, 나는 이제 이시열 씨든 버니 씨든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그때 의사가 차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수를 쳤다. 시선을 끈 그녀는 차온에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윤지아 박삽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 손을 마주 잡지는 않았다. 차온은 윤 박사에게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윤 박사는 그녀가 묻기도 전에 먼저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나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난 이시열 씨하고 성적으로는 조금도 관계없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하고 관계있는 건 주사 놓을 때 빼곤 없어요.”
주사. 그 말에 차온은 버니에게 있던 시선을 온전히 그녀에게 던졌다.
“완치는 된 건가요.”
“거의?”
“거의, 라는 말은.”
“그게 있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난 우리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아야 된다고 봐요.”
그녀는 손목을 두드렸다. 그러자 초침이 돌아가던 시계 위로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랐다.
“봐요, 이 징그럽게 생긴 것들. 이게 변이 짐승의 피 안에만 존재하는 놈들이거든. 근데 이거를 뽑아다가 사람 몸에 주입해 봐요. 멀쩡한 사람이 그걸 버티겠나.”
빨간 막대기가 기생충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차온은 갑자기 바뀌는 화면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그리고 이게 차온 씨 피 안에 있던 놈인데……. 세상에 그 징그러운 놈이 여기도 있긴 한데. 조금은 변형된 거 보이죠. 생긴 것도 귀엽게.”
아까의 기생충 같은 것보다 훨씬 동그랗고 통통 튀는 느낌이었다. 무언가가 헤엄치며 그녀의 앞을 오고 가고 있었다.
윤 박사는 홀로그램을 끄고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나타났을까. 나는 우리 차온 씨를 너무너무너무 만나고 싶었는데 이 둔한 곰탱이 같은 분이 차온 씨가 여기 있다는 걸 이제 말해 줬지 뭐예요. 난 그것도 모르고 온 사방 다 뒤지고 다녔잖아.”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뱉는 윤 박사가 신기했다. 차온은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그래서요. 나를 왜 찾아다녔는데요.”
“저 동그랗고 귀여운. 저 차온 씨 핏속에서 사는 놈들이 이시열 씨 목숨을 살리거든요.”
“완치, 불가능한 것처럼 말했잖아요.”
“내가 언제? 아유, 그냥 조금 더 필요하다 이거지. 어떻게 20년 넘게 앓았던 고질병을 하루아침에 고쳐요? 그래도 몇 년은 더 필요해.”
차온은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을 듣고 있다가, 버니와 윤지아 박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만약 제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면요?”
차온의 말에 윤 박사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럼 몇 년 있다가 이시열은 누구도 찾지 못할 하늘나라로 떠나겠죠. 몸 상태가 그 지경인데.”
차온과 윤 박사는 서로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았다. 버니가 나서서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차온은 커피를 한쪽으로 치우고 상체를 책상 가까이에 붙였다.
“그럼에도 이시열 씨가 나를 떠나보내는 게 목적이라면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시한부 인생조차 기꺼울 만큼 자신을 떠나보내고 싶다면 차온은 그의 선택을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다만, 그게 위장이라면.
“차온 씨?”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거요?”
“제가 키운 화분이요. 근데 그것보다.”
버니와 윤 박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차온의 말을 기다렸다.
“나를 도와줬으면 싶은 것도 있고.”
* * *
버니의 군화가 망설임을 끝내고 유리문을 넘었다. 로켓을 들여다보고 있느라 시열은 불을 켜고 살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자세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침에도 저 자세였다. 그는 버니가 아닌 누가 들어와도 저 자세일 거다. 한 사람만 빼면 말이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버니는 일부러 책상이 아닌, 그의 침대에 서류를 놓았다. 할 일을 다 했음에도 떠나지 않는 버니에게 그가 힐긋 시선을 던졌다.
“할 말 있어?”
“예.”
“그럼 실컷 하고 가. 안 그래도 머리 비울 게 필요했는데.”
“모레 출발하기로 한 화수호가 내일 날짜로 변경됐다고 합니다.”
UT 행성으로 떠나는 화수호 얘기였다. 버니는 시열이 버럭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다. 그걸 보고라고 올리느냐고. 하지만 그는 로켓을 쥔 손을 베개 옆에 떨어트릴 뿐이었다. 멍하니 누워만 있는 모습에 버니는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직접 데려다주시겠습니까?”
버니의 말을 들은 시열이 로켓을 닫았다. 가타부타 말이 없어도 그가 허락했음을 알 수 있었다. 버니는 본인은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다며, 그래서 직접 시열이 데려다주는 게 좋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할 일을 마친 버니는 시열의 방문을 닫았다. 차온이 없으면 내일도 불은 꺼져 있을 거다. 그의 자세는 들어올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 * *
몇몇 재소자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에 같은 방을 쓰던 여자가 울었지만 박 씨 아주머니와 차온은 아니었다. 특히 박 씨 아주머니는 곧 남편과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소식에 기뻐하고 있었다.
버니에게 요청한 것이 있어, 차온은 따로 시열의 차를 타기로 했다. 버니의 차엔 박 씨 아주머니와 태영이 타게 됐다. 게다가 태영에게는 미리 말을 해 두었다. 그녀의 계획에 대해서 말이다. 이별을 앞두고 싱숭생숭한 태영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진짜 이별이네.”
“잘 가요.”
“편지하면, 답장해 줄 거냐?”
화수호를 타고도 며칠이 걸리는 머나먼 행성에서 편지를 보내봤자 받을 수 없겠지만. 차온은 열 장 꽉꽉 채워 보내라고 농담을 했다.
“받으면 바로 답장 보낼게요. 할아버지 되고 나서 받아도 전 모르지만요.”
한번 UT 행성으로 떠난 사람은 다시는 지구로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떠나기는 쉬워도 돌아오기는 어려웠다. 그곳이 태영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차온은 작별 포옹을 위해 태영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윤태영 씨 없었으면, 나는 여기까지 무사히 오지 못했어요.”
“그걸 이제 알았어? 이 우주에서 가장 안전한 최고의 신랑감을 네가 놓치는 거라고.”
차온은 그의 꿋꿋한 미소를 보고 포옹을 풀었다. 그는 아직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우물거렸다.
“있지.”
“네.”
“문제 있으면 UT 행성으로 와. 나도 문제 생기면 너한테 갈 테니까. 그건 되지?”
“윤태영 씨는 언제나 환영이에요.”
“그래. 우리 잘 살자.”
태영은 미련을 접은 듯 뒤돌아 떠났다. 마지막까지 머리 위로 하트 모양을 그리는 그를 보며 차온은 마음이 저릿했다. 형제가 있으면 그와 같은 느낌일 거다. 태영 같은 사람은 태영밖에 없었다. 영원한 이별은 아니어도 기나긴 이별은 맞았다. 택한 길이 달라 마주치게 된 이별이 슬펐다.
“조심히 가요.”
그녀는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던 박 씨 아주머니에게 마주 인사했다. 박 씨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더니 꾀죄죄한 가방에서 작은 나침반 하나를 꺼냈다.
“우리 집에 대대로 내려오는 건데. 아가씨 가져요.”
그리곤 차온의 작은 짐 가방 지퍼를 열어 넣어 두었다. 대대로 물려받는 가보라는 소리에 차온은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완고했다.
“이걸로라도 갚을 수 있으면 나는 좋겠어. 아가씨, 아니, 차온 씨가 어디에 있든 행복하기를 바랄게요.”
“저도요. 소식 전할 방법이 있으면 꼭 전해 주세요.”
“그래요.”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는 그녀의 작은 보답은 차온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마지막까지 이게 맞는지 고민하던 자신에게 나침반을 주어 올바른 길이라고 알려 준 것 같았다. 박 씨 아주머니를 기다리던 버니는 차온에게 짧은 목례를 했다. 차온은 어깨에 짐 가방을 메며 뒤를 돌아보았다.
버니의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도 까만 차가 한 대 있었다. 차 문에 기대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차온은 그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웠다. 그 역시 차온이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차온은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그는 차온을 보지 않고 앞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사람도 고집이 대단했다. 차온은 조수석에 타며 시선을 주었지만, 그는 차 문이 닫히자마자 운전대를 쥘 뿐이었다.
폭풍이 잠든 바다로 나아가 순항하는 배처럼 시열의 운전은 완벽했다. 차온은 그가 목적지를 잊었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는 목적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돌고 돌아 그 기차역이었다. 그와 하룻밤을 보낸 기차역에서 내려 달라고 버니에게 부탁해 두었다. 버니가 그에게 잘 전달한 모양이었다.
운전하는 내내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기에 그가 기차역에 자신만을 내려 두고 떠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그는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다행히도 먼저 내려 그녀의 차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시열은 차온이 내리자마자 기차역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차온도 그를 따라서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별의 말 한마디도 없이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기차선로를 밟을 때까지도 작별 인사를 나눌 낌새가 없었다. 차온은 그의 목에 걸린 로켓 목걸이를 보며 다시금 말을 꺼낼 용기를 얻었다. 풀 내음 머금은 바람이 부는 기차역. 차온은 선로를 걷고 있는 그의 옆으로 달려갔다.
“영화에서 보면요. 꼭 이런 기차역에서 이별하더라구요.”
차온의 말에 그가 그런 영화도 있냐고 물었다. 그의 시선에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너무도 공허한 탓에 차온은 그가 꼭 시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한테 해 줄 말 없어요?”
그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땅으로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다시 덤불처럼 차온의 몸을 타고 올라와 눈가에 도착했다.
“잘 가.”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입술은 닫혔다. 차온은 허무한 마무리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게 끝이에요?”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면 말해. 해 줄게.”
“나 없으면 몇 년 뒤에 죽는다면서요.”
그는 그 말에도 흔들림 없는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신이 허락한 게 거기까지면 거기까지 살아야지.”
“죽어도 좋다는 소리예요?”
“원래도 수명에 대한 기대는 없었어. 네가 나타난 건…….”
“…….”
“좀 더 살아 보라는 뜻이었나 본데.”
“내가…….”
“이건 내 목숨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네 덕분에 몇 년 더 부지한 거, 이렇게 갚고 있잖아.”
차온은 그의 완곡한 거절의 뜻을 읽었다. 피는 필요 없고 그렇게까지 해서 더 살고 싶다는 뜻도 없다는 소리였다. 그게 그의 뜻이었다. 차온은 알겠다는 것처럼 끄덕였다. 그리고 미련이 더는 없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저 위에서 바람이 불었다. 이쪽을 카메라로 주시하고 있던 군용기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차온은 기차역으로 내려온 그 군용기를 향해서 걸어갔다. 휘몰아치는 바람 사이로 신음을 들은 듯했다. 그러나 뒤를 보지 않았다. 발은 이미 군용기의 받침을 밟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모래바람이 일어 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차온은 군용기에 올라 안전띠를 매었다. 이별한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 * *
모래바람이 일자 그의 마음에도 바람이 일었다. 이상하다. 시간이 더 있을 것 같았는데 인사가 끝나자마자 차온은 떠났다. 해방의 순간이라고 생각했으나 속박의 시작이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새까만 군용기에 오르자마자 그의 머리가 터질 것 같이 뛰었다. 가슴이 뛰는 게 아니라 머리가 뛰고 있었다.
처음 양아버지인 이무경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그 부작용 넘치는 알약을 씹으면서까지 살고 싶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당시에는 어머니란 사람을 위한 복수가 뚜렷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다 보니 그냥 죽고 싶었다. 부작용은 갈수록 심해졌고, 방법은 없었고, 해 둔 일은 마무리하려다가 또 마무리하고, 그렇게 살다가 그녀를 만나고.
“가지, 마.”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니, 자신도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 왜 그가 사랑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떠나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왜 그는 항상 붙잡을 수 없는 처지인지 모르겠다. 한 명은 지옥에서 꺼내 달라고 했더니 죽어 버렸고, 한 명은 꺼내달라고 하면 지옥으로 끌고 오는 거였다.
수명이 몇 년밖에 남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온이 제 무덤 앞에서 울었으면 좋겠다. 얼른, 한시라도 빨리.
그는 목에 걸린 로켓을 열었다. 그 안에 담긴 사진에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다. 회전목마를 타며 웃고 있는 차온의 사진이었다. 제 인생은 이렇게 정해졌나 보다.
시열은 코트 안주머니에 챙겨온 리볼버를 꺼냈다. 차온의 리볼버였다. 총알 한 발이 남아 있었다. 양아버지에 대한 의리, 전쟁에 대한 책임, 떠나간 차온에 대한 마음을 이 한 발에 지울 수 있었다. 기차역에서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시열은 총구가 자신의 이마를 겨냥하도록 기울였다. 방아쇠만 당기면, 그렇게 된다면.
어머니를 거의 잊어갈 때쯤 차온이 다가와 그의 목에 사슬을 건다. 그렇게라도 의미 있는 인생이 되어 보려고 발악한다.
“떠나지도 못할 거면서.”
리볼버를 든 그의 손을 아래로, 아래로 내린다. 그리고 자신의 리볼버를 되찾아갔다.
“아…….”
차온이 다시 돌아왔다. 그는 울고 있는 제 얼굴을 감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차온을 보자마자 눈물이 창피를 모르고 비처럼 떨어졌다.
“나한테 듣고 싶은 말 없냐고 그랬죠.”
한순간 절망의 바닥을 기던 그는 헐떡이며 울었다. 차온이 손을 잡아 일으켜 준 곳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누더기 같은 심장을 기워 준 그녀가 그의 몸을 반 바퀴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나한테 살고 싶다고 해 봐요.”
착하고 바보 같은 여자. 그래서 사랑했지만 그래서 위험했다. 시열의 이성은 전쟁에 휘말리도록 두는 게 너의 사랑이냐고 물었다.
“싫어.”
“싫어요?”
“내가 왜 네 아까운 피를 좀먹으면서 살아야 해. 그렇게까지 해서 살려 둘 이유가 나한테 있어?”
“있어요.”
“내가 결국 너를 죽이게 될 거야. 보기도 아까운 너를, 내가…….”
그때 차온은 가방에 지퍼를 찌익 열었다. 옷가지나 들어 있을 줄 알았던 그 가방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작은 화분만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차온은 그 작은 화분을 꺼내어 그에게 선물하듯 보였다. 거기엔 아주 작은 분홍색 꽃이 피어 있었다.
“내가 피워 낸 거예요.”
차온은 그의 품에 그 화분을 안겼다. 그는 푸릇한 향기에 끌려 그 화분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는데.”
차온은 화분을 안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고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차온과 모래 언덕을 지났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할 찰나였다. 그는 물을 머금은 땅의 냄새를 맡고 미소를 지웠다.
푸릇푸릇한 싹으로 뒤덮인 땅에 차온이 서 있었다. 차온은 자신이 만든 정원이라며 그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당신은 여기가 이미 죽은 행성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빨리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여긴 내 고향이고, 당신은 여기에 남는다고 하니까. 나는 여기에, 당신의 곁에 있고 싶어.”
가지 마. 나를 데려가 줘. 그 말이 그녀의 목숨을 앗게 될까 봐. 그 말을 받아들인 그녀가 후회하게 될까 봐. 그러나 이 사랑스러운 사람은 그의 두려움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
“우리는 두 번째 기회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한 번쯤은 서로 용서해 주고 살아 보자구요. 나는 이 땅도 살리고, 당신도 살리고 그래서 당신이 비겁할지라도 한번은 손 내밀어주고 싶어요.”
“싫…….”
화분 위로 떨어지는 물은 필시 자신의 몸에서 나오고 있는 거였다. 그는 차온이 준비한 함정에 걸려 모든 가면을 벗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게 진실된 그의 얼굴을 보였다.
“가지 말라고 해도 돼?”
“…….”
“네 피에 기생하면서, 그렇게 살아도 혐오스럽지 않겠어?”
“…….”
“그래도 된다면, 네가…….”
죽을 때 같이 죽고 싶어. 너 없는 세상에 두지 말아줘. 그의 못다 한 말은 그녀가 이어 주었다. 차온은 졸지에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그의 뺨을 만지며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에 내 허락 없이 죽는 건 안 돼. 죽을 것 같으면, 꼭 나도 같이 데려가야 해. 알았죠?”
혼자 삶을 꾸려나가기엔 외로운 행성이었다. 앞날을 모르는 이곳에 홀로 두지 않기로 약속해 달라고.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맹세의 의미로 입을 맞췄다. 늘 포기하고 살았던 그와 달리 그녀는 뭐든 포기하는 법이 없으니까.
시열은 차온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아서, 자신을 외롭게 둘 바엔 죽여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푸른 새싹이 피어나는 황야에서 차온과 시열은 사랑이 아닌 죽음을 맹세했다. 이렇듯, 기적은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