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ination of the Shilohan Butterfly RAW novel - Chapter 6
06. 기약 없는 이별
6년 동안 케케묵은 버튼을 누르는 심정이란. 버니는 심호흡하며 빨간 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무사히 전해졌다. 열흘 전부터 논의한 작전이기에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화청도로 들어올 거였다.
그의 인생에서 이만큼 길었던 작전은 없었다.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고, 아무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으나 그는 시열을 믿고 버텼다. 이 임무에 투입되기엔 걸리는 것이 많았다. 나이도 있고 사춘기 딸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지원을 자처했다.
“드디어 오시네.”
이제는 익숙해진 토끼 가면을 썼다. 버니는 하얀 가면이 잘 어울리는 시열의 어깨를 두드렸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상관이 이 작전에 건 기대가 얼마큼 컸는지 아는 바였다. 시열은 묵묵부답이었다. 시열이란 남자도 긴장이란 걸 하긴 하는구나 하고 있을 때였다.
“걔는?”
총기를 점검하고 있던 버니는 뜬금없는 시열의 말에 머리가 굳었다.
“누구.”
“있잖아, 걔.”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버니가 답답하다는 듯이 시열이 가면을 슬쩍 내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몰라?”
“설마……. 차온 양?”
“빠짐없이, 차질 없이. 걔에 대한 조치도 취했냐고 묻는 거야.”
버니는 총기를 한 손에 들고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점검은 몇 번이고 했다.
“따로 사람이 붙을 거다. 이쪽 작전을 다 알려 줄 순 없으니 차온 양이 놀라고 불편하긴 하겠지만…….”
“저녁도 맛있게 먹었는데 불편할 게 뭐 있을까.”
티 내지 않고 다시 한번 총기와 손님을 맞이할 자리를 정리했다. 하지만 시열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버니는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태영이 차온을 불러 저녁을 함께 먹은 모양인데 그때부터 시열은 임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그 설마가 맞나 보다. 하지만 본인은 자기가 지금 뭐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버니는 살다가 보니 별일도 다 있다며 껄껄 웃었다. 저녁 한 끼 같이 먹은 것 가지고 태영 얘기만 나와도 신경질을 팍팍 부리니. 차온을 데리고 복귀하면 재밌는 광경을 많이 보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빨간 버튼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 목표가 가까워지고 있다.
시열도 그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였다. 바다와 연결된 창고 문이 열렸다. 밤 11시가 되기 직전에 손님이 나타나셨다. 시간, 날짜를 특정할 수 없게 아무 때나 나타난다더니 그게 맞는 정보였나 보다. 버니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가면을 고쳐 썼다. 연기에 능한 시열은 두 팔을 벌리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손님은 짭짤한 바람 냄새를 묻히고 들어왔다. 시열은 피우던 담배를 책상에 비벼 끄며 일어선 상태였다. 버니는 그의 뒤에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이미 버튼은 눌렸다. 버니의 눈에는 선두에 선 사람의 얼굴이 익숙했다. 선글라스를 썼지만 그의 눈썹에 난 화상 자국이 눈에 익었다. 빨간 말이 달린 부대기가 휘날리는, 적마 부대의 앞에서 본 것도 같다.
“돈은.”
너희 뒷골목 조직과는 말을 섞는 것도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시열은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뭐 하자는 거지? 돈은.”
“요즘 군인들은 쿨해서 좋네요. 액수도 안 세어 보고 가져갑니까?”
손님은 불쾌한 얼굴로 시열의 몸을 훑었다. 버니는 마련된 자리에 앉는 선글라스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시간을 끌었으니 되었다. 선글라스를 따라온 부하들도 긴장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신식 무기를 내다가 팔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란 소리였다.
버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를 기다리는 시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쾌재를 불렀다. 앞으로 2분, 아니면 3분 정도의 시간을 더 끌면 끝이었다.
선글라스는 시열을 가만히 노려보며 코트에서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시열과 버니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무거운 무기를 한꺼번에 담아 옮길 수 있는 팩이었다. 정해진 순서대로 큐브처럼 돌리면 저장해 둔 무기를 꺼낼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무기 팩을 꺼내놓던 선글라스가 갸웃거리며 다시 무기 팩을 가져갔다.
“늘 오던 치들이 아닌 것 같은데.”
“선글라스를 꼈어도 시야는 밝으시네요. 보다시피 사람이 좀 바뀌었습니다. 사전에 보스한테 듣지 않으셨습니까?”
“도저히 그쪽 계열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시건방져서 말이지.”
선글라스는 기선을 제압하고 싶은 모양인지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빼어 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시열에게 턱짓을 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너희 말고도 무기 사겠다고 줄 선 사람 많아. 너희 전에 있던 사람은 구두 핥으라고 말하면 핥을 기세였어. 응?”
“그래서. 구두를 닦던 혀 놀림은 마음에 들으셨습니까?”
“왜. 너도 함 해 주게?”
선글라스의 말에 뒤에 선 보초 셋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선글라스는 돈 가방을 둔 책상에 발을 턱하니 올렸다. 그러나 하얀 가면을 쓴 시열의 입술은 미동이 없었다.
“그러게 사람 봐 가면서 까불었어야지.”
“누구신가 했더니.”
“응?”
“정만교 행보관님 아니십니까.”
그때 능청스럽게 웃던 선글라스의 미소가 사라졌다. 시열이 무기를 빼돌렸다고 의심 가는 인물을 모두 적어둔 리스트가 있었다. 버니는 시열의 눈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두 닦던 혀 놀림은 어땠는지 왜 말 안 해 주실까요.”
“너, 뭐야.”
“그걸 알려 주셔야 그 새끼들 잡아 왔을 때 시켜 볼지, 말지 고르지 않겠습니까?”
선글라스를 비롯한 군 쪽의 사람들은 낭패가 났다는 얼굴이었다. 한 놈이 재빠르게 총을 잡았으나 이미 창고는 점령을 당했다. 수년간 준비해 온 임무에 한 치의 오차가 있어서도 안 되니 말이다. 선글라스가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자 수십 개의 레이저 불빛이 쏘아졌다.
이미 상황 파악이 끝난 선글라스는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그 와중에도 기가 살아서 시열에게 거들먹거리며 물었다.
“스파이? 그럴 리가. 펑크는 몇 년간 쓴 사람이라고 했는데.”
선글라스는 빠른 판단력으로 항복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 모든 게 펑크의 작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다. 점점 버니의 표정이 굳어지려는 찰나였다. 시열은 머리 뒤로 손을 뻗어 가면의 오픈 버튼을 눌렀다.
군에 있는 모두가 시열의 얼굴을 알지는 못한다. 특수부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시열의 뺨에 새겨진 문신은 원사 정도 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판이었다. 비밀리로 쉬쉬하는 일이라 외부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혹여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문신에 커버 작업을 했다. 선글라스는 시열의 뺨에 새겨진 문신을 알아보는 얼굴이었다.
“너, 특수부구나.”
“보고 싶었습니다, 행보관님. 지금까지 어디 계셨어요.”
“이런, 씨이발!”
자결하려는 듯이 혀를 깨무는 동작에 시열이 먼저 손을 썼다. 시열의 몸이 의자에서 떨어지자마자 선글라스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정만교 행보관의 몸을 깔아뭉갠 시열이 그의 턱을 잡았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둔 부드러운 천을 그의 입 안에 마구 쑤셔 넣었다. 토끼를 잡은 시열이 허리를 폈다.
“이상형인 여자랑 소개팅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네요. 서로 할 얘기도 많은데 벌써 지옥으로 전근 가시면 안 되죠.”
정만교의 비명을 듣고 버니는 창고의 천장을 열었다. 대기하고 있던 부대원들이 까만 줄을 타고 내려왔다. 체념하지 못한 정만교는 체포되는 제 부하들을 향해 눈빛을 보내왔다. 하지만 정만교의 갯벌은 이미 밀물에 잠겼다.
고문은 기본, 신식 기술을 접목하여 인권은 개나 줘 버린 수사가 뒤따를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다.
창고 문으로 짭짤한 바다 냄새가 훅 들어왔다. 버니는 가면을 벗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끝이다. 드디어 이 기나긴 여행의 끝이었다.
* * *
예감이 좋지 않았다. 금방 끝난다고 한 일이 언제까지 이어지려는지 모르겠다. 예정된 시간보다 한참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차온은 걱정된 표정으로 일이 끝나고도 남았을 창고 쪽을 바라봤다. 과묵한 이어폰을 더욱 깊숙이 귀에 넣었다.
아무 말이라도 하기를. 설마 일이 잘못되어 시열이나 버니에게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침울한 상상이 밀려왔다. 신께 기도하는 심정이 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드디어 기척이 났다.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환한 미소를 찾았다. 차온은 총기를 내리며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버니도, 시열도 아니었다. 차온은 비명 섞인 신음 소리조차 뱉지 못했다. 매끈한 방탄복을 갖춰 입고,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국기 모양을 팔뚝에 달고 있었다. 까만 고글을 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무장한 보안 군인이 차온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차온?”
차온은 이 사람을 쏘고 도망가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창고까지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 이 사태를 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보인 군인은 들고 있던 총기를 안전 모드로 바꾸었다.
“발견했습니다. 네. 다음 배에 올 셉타 팀과 합류해 데려가겠습니다.”
보안 군인의 보고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차온은 주춤하며 물러서고 다시 총기를 세워서 들었다. 그러자 보안 군인은 고개를 저으며 귓가에 있는 이어폰을 두드렸다. 대화를 위해 귀에서 들리는 통신을 끊은 것처럼 보였다.
“적이 아닙니다. 방금……. 악!”
그러나 남자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놀란 차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씨발.”
차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태영이 군인의 뒷덜미를 쳤다. 총기 손잡이를 세워 내리친 태영이 다가와 차온의 팔을 들었다.
“어디 다쳤어?”
“아, 아뇨.”
“미친, 저건 도대체 뭐야.”
태영은 쓰러져 움찔거리는 군인을 총기 끝으로 건드렸다. 그때 하늘에 헬기가 떴다. 헬기를 발견한 태영은 차온의 손을 잡고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온은 태영의 손에 끌려가며 쓰러진 군인을 돌아보았다.
“지금, 작전 실패한 거예요? 군인한테 잡히면, 그러면 두 사람은 죽잖아요!”
무기를 밀거래하다가 들키면 사형이었다. 안 그래도 펑크는 비안전지대에 터를 둔 터라 밉보일 게 많을 거였다. 그런데 밀거래를 하다가 잡혀갔으니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 태영도 그걸 아는지 이를 악물고 달리는 눈치였다.
“윤태영 씨!”
“시끄러워.”
“윤태영!”
이대로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외침이었지만 태영은 잡은 손을 절대 풀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유흥지로 들어와서도 태영은 죽기 살기로 뛰었다. 수많은 사람이 달려가는 태영과 차온을 이상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인파를 뚫고 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쓸렸다.
짐도 챙기지 못하고 떠나는 피난민처럼 도망쳤다. 안색이 창백해진 태영은 차온의 숨이 딸리는 듯하자 잠시 속도를 늦췄다.
“차로 도망가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창고로 들어오는 길이든 나오는 길이든 하나밖에 없었고 그 길목은 차온이 지키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군인은 차온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건 내부에서 배신자가 있는 게 틀림없는 상황이었다. 일부러 함정을 파 둔 뒤에 시열의 팀을 한꺼번에 잡아가게 만든 거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창고의 뒤편에는 바다가 있었다.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얼마 안 가 잡힐 거였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 때문에 머릿속은 안 좋은 예상들로만 가득했다. 차온은 머리를 쥐어 싸매며 주저앉고 싶었지만 이 무식하게 힘 좋은 동료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꿈만 같은 시간을 보낸 테마파크를 지나치고, 태영과 식사를 하다가 허겁지겁 달려 나온 호텔을 지나쳤다. 화청도의 모든 것이 꿈만 같은데 퇴장하는 순간조차 비현실적이었다. 차온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주차장에 도착하고 차 문을 연 윤태영이 그녀를 조수석에 구겨 넣었다.
“허, 아…….”
“일단 출발한다.”
“아니요. 잠시만요!”
“씨발, 몰라.”
태영은 시동 버튼을 누르더니 삐걱거리며 튀어나온 운전대를 잡아당겼다. 곧바로 속력이 붙은 자동차가 주차장을 미친 듯이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여기에 시열과 버니가 와서 기다릴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나 보다. 차온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찬바람 맞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어쩐지 우리한테 일을 쉽게 맡기더니. 이 거지 같은 펑크 새끼가 이젠 군하고 손을 잡아서 우릴 잡아 처넣으려고 해?”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도망 나온 거냐고 묻고팠지만 운전대를 잡은 태영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핏줄이 튀어나온 그 손은 지지대를 잡는 것처럼 운전대를 잡는 듯했다. 태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뜯고 있었다.
“펑크로는 못 돌아가요.”
“설령 펑크가 쳐 둔 함정이 아니더라도 돈도 잃어, 무기도 안 가져와. 이대로 가면 목 따 달라는 거나 다름없지.”
나가는 길은 차가 많이 막히지 않았다. 차온은 혹여나 뒤따라오는 차량이 있을까 계속해서 뒤를 확인했다. 아무런 소지품도 없이 딸랑 총 두 자루가 두 사람에겐 전부였다.
얼마간은 차에 넣어둔 식량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화청도 근방을 벗어나면 황무지였다. 모래바람이 치는 땅에서 두 사람이 오래 버틸 순 없을 터였다. 돈은 거의 버니와 시열이 관리하고 있었다. 남겨진 두 사람은 짐조차 챙겨 오지 못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살길이 없었다.
“씨발, 진짜!”
화청도를 빠져나와 한적한 갓길을 찾았다. 빈자리를 찾자마자 거칠게 차를 댄 태영이 운전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황무지로 들어가면 생사를 보장할 수 없고 여기에 있으면 체포하러 보안군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태영은 피가 난 입술로도 모자라 손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안 그래도 심란한 차온은 그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다. 그의 입 안에 물려 있는 손가락을 잡아 움켰다.
“그만해요.”
차온의 만류에 그가 옆을 돌아보았다. 차온은 태영의 눈이 새빨개졌음을 알고 마음이 뭉클했다. 도망칠 때는 그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 터다.
“형들, 죽었으면 어떡하지.”
태영의 멘탈이 여기서 더 무너지면 위험했다. 차온은 두 사람이 죽었을 거란 가정은 제일 마지막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그럴 일 없다고 태영에게 단호히 말한 뒤 차온은 상황부터 정리했다.
“윤태영 씨는 원래 주차장에 있어야 했는데……. 어쩌다가 나한테까지 왔어요?”
“그야 일이 빨리 안 끝나니까.”
차온은 떨고 있는 태영의 등을 토닥이며 남몰래 눈물을 닦아 냈다.
“두 사람, 안 죽었어요.”
태영은 차분해지려고 노력하는 차온을 돌아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안 하지만 그럴 일이 있겠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표정에 차온은 반박하고픈 심정이 되었다. 태영에게 설득하듯 말했다.
“아까 그 사람, 분명 나한테 차온이냐 묻고 데려가려고 그랬어요. 무슨, 기억은 안 나는데 팀하고 합류해서 데려간다고.”
“……정말?”
“네. 피라미인 나도 생포하려 하는데 이시열 씨나 버니 씨를 죽일 리 없잖아요.”
조금은 진정이 된 태영이 운전대에 기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바람을 말한 것이지만 차온은 그래도 태영이 정신을 차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온이 넘어져서 까진 무릎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내가 계속 주차장에 있었지만 들어오는 차량은 한 대도 없었어. 어제부터 와 있거나 배 타고 왔거나. 둘 중 하나지.”
“아, 아까 배 타고 간다고 그랬어요.”
“가출하고 뒷골목에서 양아치 짓이나 하던 나를 구해 준 형들이야. 난 해 볼 수 있을 만큼 해 볼 거지만 너는…….”
중얼거리던 태영은 말끝을 흐렸다. 혼자 감정 정리를 끝낸 듯 차온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너는 굳이 안 그래도 돼.”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럼에도 이건 태영이 너무한 거였다. 차온은 조금 서운하다는 얼굴을 하고 태영을 바라봤다.
“그럼 나 황무지에 버리고 가게요?”
“적당한 곳에 내려줄 테니까 우선 거기서…….”
“곧 보안군한테 잡힐걸요.”
말이나 못 하면 밉지라도 않지. 차온은 태영의 옆구리를 한번 팔꿈치로 찔렀다.
“나도 데려가요.”
“아무리 그래도.”
“같은 팀원이잖아. 아니에요?”
차온의 말에 윤태영은 한 방 먹었다는 얼굴이었다. 태영은 한숨을 깊게 내쉬곤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절대 같이는 안 죽어.”
“그럼요.”
“너보다 내가 한 삼, 사 년 더 살았으니 천국도 삼, 사 년 일찍 가야 된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나서 태영은 초록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운전대 옆에 마이크 모양이 나타나자 태영이 혀를 굴렸다.
“화청도에서 가까운 군 시설.”
– 화청도에서 가까운 군 시설로 안내합니다.
중성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차는 잠금 모드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태영이 손을 댈 필요도 없이 자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차온은 밀린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좀 자 둬.”
차온의 마음을 아는 양 태영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괜찮아요.”
“자야지 뭐든 해 볼 힘이 생길 거 아니야.”
그가 친히 조수석을 눕혀 주었다. 차온은 문득 시열이 이와 똑같은 행동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태영에게서 등을 돌려 눈을 감았다. 한번 시작한 시열에 대한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차온의 머리통을 꽉 채웠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태영의 앞에선 씩씩한 척을 했지만 너무도 무서웠다.
태영이 눈치채지 않길 바라며 차온은 눈물을 흘렸다. 숨죽여 우는데 태영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차온은 다급히 눈물을 닦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점차 화청도에서 멀어져, 빛이 꺼져 가는 황무지로 가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바깥을 바라보다가, 잠시도 눈을 감지 못하고 밤을 새웠다. 머릿속엔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시열이, 버니가 보고 싶었다. 살아만 있어 준다면 좋겠다. 같은 팀원으로 받아 줘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 * *
고도로 발달된 내비게이션은 스스로 운전을 해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이 먹을 식량이나 물을 구해다 주진 않았다. 뒷좌석에 있던 식량을 꺼내 와 먹는 동안에도 운전은 쉬지 않았다. 차온은 기름기 없는 견과류를 씹으며 차창 밖을 구경했다.
화청도에서 가까운 군 시설은 세 곳. 태영의 추측으로 우선순위를 추려내고 1순위인 곳을 내비게이션에 찍어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보안군은 배를 타고 와서 배를 타고 갔기 때문에 먼저 도착했을 터였다. 차온은 고문을 받고 있을 시열과 버니를 떠올리다가 입맛이 떨어졌다.
안 먹히는 건 태영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먹던 통조림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와 내부의 탁한 공기를 바꾸어 준다. 그러나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날씨 좋네.”
“이 차, 팔아야 되지 않을까요?”
“왜?”
태영이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차온을 바라봤다. 하지만 차온은 비안전지대로 들어간다는 안내판을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저기선 아무도 이런 차 안 끌거든요. 괜히 소문만 내는 꼴일 수 있어요. 중간에 보안군이 수상하다며 수색이라도 시작하면 우리는 좆된 거고요.”
“일리는 있는데 차라리 버릴지언정 팔지는 못해. 펑크 소유라서 파는 것도 펑크한테 허락을 받고 팔아야 해. 어쩌면 벌써 도난 신고를 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팔다가 잡혀가는 거야.”
“그렇네요…….”
“그리고 여기서 이거 살 사람이 어딨어? 지 몸을 저당 잡혀도 못 살 인간들 천지인데.”
태영은 자동 운전을 하고 있는 차의 운전대를 왼쪽으로 틀었다. 비안전지대가 곧이라는 안내판을 무시하고 비포장도로처럼 보이는 길로 비집고 들어간다. 자동 운전을 하던 차는 목적지가 멀어진다며 신호를 보냈지만 태영은 무시하고 페달을 밟아나갔다.
“안 되겠다. 얘는 우리 사지에 던져두고 지는 운전 다 했다고 좋아할 애야.”
“인공 지능은 도주 상태라는 걸 모르니까요.”
일이 커지고 마음이 급해질수록 머리 회전이 느려졌다. 엄청난 양의 생각이 꼬이고 꼬여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다. 차온은 차가운 창문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그때 옆에서 기척을 내던 태영이 차온에게 포장된 과자 봉지를 건넸다.
“먹어.”
비안전지대로 갈 수 없어 태영이 택한 길은 돌이 많았다. 간혹 차체가 흔들려 멀미가 났다. 게다가 시열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과자가 먹힐 리 없었다. 됐으니 치우라고 고개를 젓는데 태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금 안 먹으면 나 창문에서 뛰어내린다.”
“농담 말아요. 그럴 기분 아니야.”
그러나 태영은 봉지를 까서 과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냄새를 맡아보라는 것처럼 차온의 입 근처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털었다. 안 먹으면 쳐들어가는 노래를 불렀다. 언제 적 노래인지 기억도 안 났다. 태영의 고집에 못 이겨 결국 하나를 받아먹고 말았다. 차온의 입 안으로 과자가 들어가자마자 태영은 목소리를 착 깔았다.
“부탁 하나 해도 돼?”
“부탁이요?”
“들어줄 거라고 약속해.”
차온은 바삭한 과자를 씹으며 경청했다. 그의 표정은 장난이 아니라는 듯이 무척 진지했다. 각오한 듯, 비장한 태영의 모습을 보자 불안해졌다.
“나보고 가만히 차에 있으라고 하는 거면 안 들을래요.”
“왜?”
그 말이 맞았나 보다. 차온은 웃으며 조수석 등받이를 뒤로 당겼다. 편안한 자세로 누워 태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영화 안 봤어요? 꼭 동료를 남겨 두고 떠나는 사람이 먼저 죽어요. 남겨진 사람은 위기에 처하고요. 만일 일을 진행하는데 내가 걸리적거리면 그냥 버려두고 가요. 구해 달라고 안 해요.”
반박하거나 화를 낼 줄 알았는데. 태영은 무심히 앞을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했다.
“못 버려두고 갈 거 같으니 그렇지.”
그가 뱉은 목소리에 진실이 실려 있다는 걸 느꼈다. 그건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을 떠나 조금 더 진하고 깊은 감정이었다. 차온이 놀란 기색으로 태영을 바라봤지만, 그의 표정은 자못 사무적이고 건조할 뿐이었다.
황무지로 돌아와 달리고 있는 차 안은 금세 정적에 휩싸였다. 차온은 설마 태영이 자신을 여자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말도 안 된다. 태영은 워낙 동료애가 끈끈한 사람이었다. 지레 그의 마음을 오해하면 서로가 곤란했다.
비안전지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이니 안전한 길은 포기했다고 봐도 좋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돌길이 바퀴에 무리를 주고 있었다. 그때 모래바람이 가리지 못한 빨간색 표지판을 발견했다. 창밖을 바라보던 차온이 태영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쩌죠. 막아 둔 것 같은데.”
빨간 표지판은 위험 지역이니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들어가도 벌금은 물지 않았으나 지명 수배범을 제외하곤 돈을 준다고 부추겨도 안 가는 게 위험 지역이었다. 오죽하면 부랑자도 빨간 표지판을 보면 돌아섰다. 오염 물질이 측정이 안 될 정도로 나온다거나 하는, 사람이 발 못 붙이는 이유가 한 가지씩은 있었다.
차온의 걱정 어린 표정을 바라본 태영은 입술을 씹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그가 펑크에서 하고 있었던 까만 가면이었다. 그걸 차온 쪽으로 건네며 쓰라고 말했다. 그게 방독면 기능이 들어 있는 가면임을 모르지 않았다.
“일단 혹시 모르니까.”
“그럼 윤태영 씨는요?”
그 말에 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영이 자기에게 잘해 주고 있는 건 알고 있으나 본인 목숨이나 챙겼으면 좋겠다. 차온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난 괜찮아요. 이상하게…….”
오염 물질에 면역이 있다는 말은 이상하지만, 방독면을 써야 하는 곳에서도 차온은 탈이 없었다. 광산 근처에서 보호복도 없이 태어난 아기가 바로 자신이었다. 차온이 받지 않자 태영은 가면을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에 두었다. 무의미한 싸움이란 걸 알았는지 태영이 말을 걸었다.
“내가 불편해?”
위험 지역보다 이렇게 다 퍼주고 죽어버릴 태영이 무서웠다. 차온은 태영을 바라보며 궁금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윤태영 씨. 나한테 요즘 너무 잘해 주는…….”
그때였다. 차온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태영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앞으로 몸이 쏠림과 동시에 태영의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실내에 빨간불이 켜졌다. 위험을 감지한 인공 지능은 문을 이중으로 잠갔다. 인공 지능의 건조한 목소리가 차 내부에 흘렀다.
– 전방에 위험 생물이 있습니다.
위치를 말해 주는 건조한 목소리는 팟 소리를 내며 꺼졌다. 보안 군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변이 짐승의 수가 늘어나, 그 지역을 아예 봉쇄하는 경우도 있었다. 변이 짐승이 나오지 못하도록 우리를 쳐 둔 탓에 사람도 드나들 수 없었다. 인공 지능은 위험 생물이 있다고 경고하지만, 오류가 난 걸 수도 있었다. 차창 너머로 모래 언덕에 삼켜진 건물의 잔해만이 보였다.
– 자동 모드에서 이탈하시겠습니까?
어쩐지 차갑게만 들리는 목소리를 듣다가, 태영이 이를 악물었다.
“여기 아니면 길이 없어.”
하지만 위험 물체를 발견한 차는 자동 모드가 해제되지 않았다. 탑승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었다.
– 자동 모드에서 이탈하시겠습니까?
일정한 시간을 두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태영은 수동으로 운전대를 돌리려 했으나 잠겨 있었다. 자동 모드를 풀려면 위험 지역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길이 없었다. 방법은 한 가지였다. 차온은 조수석 뒤편에 둔 총기를 꺼내 왔다.
“죽이죠.”
“뭐?”
“그것밖에 방법이 없잖아요.”
차온의 행동이 기가 막힌지 태영이 운전대에 턱을 올려 뒀다. 앞을 노려보던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태영은 나갈 채비를 하는 차온에게 검은 가면을 권했다.
“너 이거 쓰면.”
“안 써도 돼요.”
혹시 무기로 쓰일 다른 것은 없는지 찾기 위해 차온이 캐비닛을 연 순간이었다. 쏟아지는 물건들 속에서 차온은 하얀색 가면을 찾아냈다.
“형이 두고 갔나?”
차온은 떨어진 하얀 가면을 집어 들고 생각에 잠겼다. 변이 짐승을 꼭 죽여야만 하는가. 나약해 빠진 마음이 가면을 집자마자 사라졌다. 차온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그 하얀 가면을 얼굴에 썼다.
“이거요.”
차온은 검정 가면을 다시 태영의 손에 돌려주었다. 하지만 얼른 받아야 할 그가 웬일인지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다. 차온은 무슨 문제 있냐는 표정으로 태영을 쳐다봤다.
“윤태영 씨?”
“야.”
“네.”
“조금…….”
싱겁게끔 말을 하다가 만다. 태영은 복잡한 마음에 머리칼을 대중없이 쓸어 넘겼다. 정신 차리자는 의미로 뺨을 가볍게 친 그는 곧장 자신의 검정 가면을 썼다. 그가 발치에 둔 총기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조심해.”
차온은 대답 대신 태영과 손뼉을 마주쳤다. 손에 익은 길쭉한 저격용 총으로 총기를 탈바꿈했다. 짐승의 눈을 노리자. 시력을 박탈한 뒤에 총으로 목을 날리면 되겠지.
태영과 차온은 눈으로 의사 전달을 마쳤다. 태영이 차 문을 수동으로 잠갔다. 발이 앞으로 가다가 말고 모래 속으로 푹 빠졌다. 차 없이는 도망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
건물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원래도 주거 전용 지역은 아니었던 곳처럼 보였다. 모래가 까매서 파도처럼 보였다. 차온은 가면 때문에 땀이 차고 숨이 찼다. 무언가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두려움이 사람의 마음을 좀먹었다. 미지의 적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이었다. 차온은 표지판이 세워진 곳으로 걸어가 문구를 가리고 있는 모래를 털었다.
“A동 숙소 출구.”
“숙소?”
“네.”
그때 태영이 뭔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걸었다. 차온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 냄새가 안 난다. 휑한 사막일지라도 사람의 흔적이 남아, 슈퍼나 아파트 같은 곳의 잔해를 발견하는 게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이곳은 간혹 있는 건물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휴게실 같았다.
태영은 반쯤 부서진 문을 발로 찼다. 나무가 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문이 쓰러졌다. 문을 밟고 나아간 태영이 우뚝 멈추어 섰다. 차온도 그의 뒤를 따라가서 건물 안을 들여다봤다. 건물은 뼈대밖에 남지 않은 콘크리트 기둥이 겨우 지붕을 버티고 서 있는 구조였다.
긴가민가하지만 공장처럼 보였다. 안에 있는 기기들은 작동이 불가할 정도로 낡았다. 그런데 빈 바닥에 버너 같은 게 있었다. 모든 물건에 먼지가 쌓여 있는데 그 버너만이 깨끗했다. 태영은 걸어가 가스버너를 발로 차보다가, 주변에 흩어진 옷가지들을 보고 멈칫했다.
“누가 여기에 사는 모양인데.”
“여기서요?”
여기서 그나마 물건 같은 걸 파는 황무지 마트까지 가려면 적어도 차, 오토바이 같은 것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절대로 이런 곳에서는 연료를 충전할 수 없었다. 아무리 먹고살기 퍽퍽해도 황무지로 나아가지 이런 위험 지역에서는 살지 않는다.
차온이 의심쩍은 시선으로 뒤를 바라볼 때였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태영은 총기를 바로 잡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었다. 차온도 긴장을 바짝 한 채로 태영의 뒤를 쫓았다.
“그릇?”
뛰어가며 태영이 말한 곳을 보았다. 콘크리트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이 있었다. 창문이 깨진 줄 알았으나 유리로 된 그릇이었다. 차온은 다리가 굳는 느낌이 들었다. 애벌레 같은 것이 깨진 조각 틈에서 기어 다녔다. 용도는 모르겠지만 벌레를 모으고 있었나 보다. 식용일 가능성이 컸다.
잠시 서로를 마주 본 태영과 차온은 낯설어진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자신들이 폐공장의 뒤편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온아.”
“네.”
그때 가면의 눈구멍으로 보이는 태영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열 받은 눈이었다.
“내가 총을 갈기면 그냥 상대가 누구든 따라서 갈겨. 알았어?”
차온은 대답할 수 없었다. 변이 짐승이라고 들었는데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게다가 상대는 이 험한 곳에서 벌레로 연명하는 중이었다. 추측하건대 위험 지역으로 들어온 이방인 둘을 피해 다니는 중인 것 같았다.
“이런 데서 사는 새끼가 정상일 리 있어?”
태영의 총기가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출력을 최대한으로 올린 모양이었다. 커다란 포가 나가는 총으로 변환한 태영이 그 무거운 총을 어깨에 걸치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폐공장의 뒤편은 모래바람이 더 심하게 불었다. 누런 모래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모래가 발을 삼키는 지경이 되자 차온은 태영을 불렀다. 그러나 저 앞으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 태영이 보였다. 차온은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윤태영 씨! 너무 혼자…….”
그때 태영이 사라졌다. 차온은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태영이 사라진 자리가 까맸다. 안 그래도 어둑하여 윤곽으로 겨우 알아보던 참이었다. 기듯이 모래 무덤에서 빠져나가 태영이 사라진 곳으로 뛰었다.
“오지 마!”
힘에 겨운 그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잠바 속으로 파고드는 모래바람이 앞길을 막을 때였다. 차온은 무언가를 깨닫고 총기를 놓칠 뻔했다. 앞이 어둑해서 보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눈앞에 커다란 원형의 구멍이 나 있었다. 크기가 호수만큼 패여 있었다. 거인이 밟고 지나간 것처럼 움푹 파인 땅은 낭떠러지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차온은 조심조심 움직여 태영이 떨어진 곳을 바라봤다.
“윤태영 씨!”
태영이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간신히 돌을 붙잡고 있는 그가 보였다. 차온은 총기를 내팽개치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잡아요!”
“안 돼, 이 멍청아. 총 잡아!”
차온은 뒤를 바라봤다. 모래바람에 섞인 어둠만이 있었다. 차온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태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기 떨어지면 윤태영 씨 못 구해요, 나. 우리 둘이 내려가도 올라올 방법이 없어요. 바닥이 어딘지도 안 보인다고요!”
조금만 버티면 동이 트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차온이 태영에게 손을 내밀고 있을 때였다. 고민을 끝낸 태영이 차온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작게 중얼거린 그가 차온의 손을 잡아당겼다. 차온은 온 힘을 다해 누워 그를 끌었다. 태영은 차온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돌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올라오려고 애를 먹던 그의 시선이 차온의 뒤쪽을 향했다.
태영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차온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이라면 협상을 하려고 했다. 식량을 줄 테니 길만 지나가게 해달라고.
차온의 눈에 따끈한 눈물이 고였다. 상식을 벗어난 생명체를 만나면 나오는 생리적 반응이었다.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등지고 선 생물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그러나 이족 보행을 하고, 살색의 피부를 지녔으며, 도구를 사용하듯이 거품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상체뿐이긴 하지만 옷을 입었다. 반팔 티 사이즈가 작은지 꽉 조여 보였다. 차온은 패닉 상태임에도 태영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저게, 저게.”
저게 뭐냐는 물음에는 태영도 답을 주지 못할 것이었다. 사람의 행색을 하지만 사람이라고 봐 줄 수 없는 이유는 변이 짐승처럼 동공이 모두 까만 데다가, 생식기가 있을 부위가 매끈하며, 키가 2.5M는 족히 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구부정하게 휘어진 허리와 보랏빛 혀는 절대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의 손에는 새 유리그릇이 들려 있었다. 차온은 울면서 태영을 힘주어 끌어 올렸다. 정신을 차린 태영도 반동하듯이 손에 힘을 주고 땅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태영의 총기는 저 밑으로 떨어진 상태였고 차온의 총기는 땅에 버려져 있었다. 만약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면 저 긴 다리로 당장에 점프하여 뛰어올 것 같았다.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은 그것의 손이 움직였다. 여섯 개의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차온과 태영이 멍하니 있는 사이 그것은 뒤돌았다. 태영과 차온을 공격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었다. 캥거루처럼 뛰어서 폐공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차온은 태영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움직여야 돼요.”
지금은 생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태영은 차온의 총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차온의 손목을 잡았다.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뛰어가는 그의 뒤에서 차온은 눌러둔 숨을 터뜨렸다.
무섭다. 그러나 함부로 무섭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태영의 손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폐공장을 피해서 단숨에 달려갔다. 해가 떠오른 참이라 새벽보다는 앞이 잘 보였다. 태영은 뒤처지는 차온을 두고 가지 않았다. 끝까지 잡고 끌어가는 그의 모습에 차온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수차례 모래에 발이 빠지고 나서야 차가 보였다. 모래에 반쯤 잠긴 그것은 차온과 태영이 가까이 오자 자동으로 시동이 걸렸다. 두 사람은 문이 열리는 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시트에 사람이 앉자마자 운전석 문이 닫혔다. 차온은 안전띠를 매고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았다.
“사람은, 사람은 아니죠.”
출발하는 차 안에서 태영은 말을 아꼈다. 컵 홀더에 들어 있는 물병을 따서 마시고 그는 운전대를 잡았다. 모래 범벅인 태영의 발이 액셀을 밟았다. 차는 자동 모드가 해제되어 있었다. 조용히 올라가는 속도계를 바라보던 차온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어디 숨어 있나 봐요. 차가 이상한 점을 못 잡고 있어요.”
“있잖아.”
“네.”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네…….”
“손 좀 잡아 줘.”
태영이 조수석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차온은 그의 떨리는 손을 보고 연민이 들었다. 모래 구덩이에 매장될뻔하지 않나, 가족 같은 형들은 생사를 알 길이 없고, 어디 가서 말해도 비웃음 사기만 할 경험을 둘이서 했다. 차온은 그의 얼음장 같은 손을 잡았다. 나머지 한 손으로 태영의 얼굴에 씌워져 있는 가면까지 벗겨 주었다.
“어디 제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네요.”
차온이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띄웠지만 태영은 대꾸 없이 운전을 했다. 흙탕물 같은 땀이 주르륵 흐르는 태영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차온은 지도를 눈으로 확인하며 말했다.
“아까 저쪽으로 가라고 그랬어요.”
“걔가 뭘 알고 우리한테 안내해 줘.”
“어쩌면 탈출구일지도 모르죠.”
태영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액셀을 밟았다. 그때 목을 빼고 바깥 동향을 살피던 차온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A동 숙소. 빨간 페인트로 폐공장 벽에 적혀 있었다. B동, C동, D동. 이어져 있는 숙소의 뒤로 블랙홀 같은 커다란 구멍이 여럿 나 있었다. 작업복을 여기에 버려두라는 문구가 프린트된 안내문이 보였다. 폐공장이 아니라 수명을 다한 폐광이었다. 옛적에 AVRTA를 캐던 광산이란 소리였다. 그렇다면 그건 변이 짐승일까.
태영은 지도와 차온을 번갈아 보다가, 버럭 욕설을 쏘았다.
“씨발, 일단, 깊게 생각하지 마. 우리가 지금 신경 써야 하는 일은 그게 아니니까.”
태영은 그 말만 하고 차온의 손을 놓아주었다. 떨림이 조금 잦아든 그는 차량에 달린 거울을 보자마자 말이 안 나온다는 얼굴을 했다.
“거지꼴이네, 시발.”
흙먼지를 뒤집어썼으니 꼴이 이런 게 당연하건만. 상황이 이럼에도 자신의 모습을 신경 쓰고 있는 태영의 행동이 그다웠다. 차량은 별다른 경고 없이 위험 지역을 벗어났다. 자신들이 나오고 있는 길은 그것이 가리켰던 길이란 것을 상기했다. 태영은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구해 준 걸까. 그렇다면 왜? 사람 같이 사고할 수 있는 변이 짐승이란 건 듣도 보도 못했다. 뉴스에서는 연일 그들을 재앙에 비교했다.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일어나는 자연재해처럼, 온난화든 식량 부족이든 변이 짐승이든 같은 취급을 했었다. 사람들은 변이 짐승의 지능에 대해 다루진 않았다.
차온은 자신의 세상이 어찌나 비좁은지 하루하루 깨닫는 중이었다. 세상은 넓었다. 그것도 빌어먹을 만큼 무섭게 넓었다. 반면 자신에게 허락된 시야는 너무도 좁았다.
* * *
차는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공기 청정 기능을 껐다. 챙겨 온 식수도 식량도 바닥날 즈음에 통제 구역까지 1km 남았다는 신호가 떴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빨간 점이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고 일러 주고 있었다. 차를 주차하고 설치된 카메라 줌을 당겨서 수백 미터 앞을 보니 군인 세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이 정답일 가능성이 컸다.
차온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군인의 복장이 자신을 습격한 남자의 복장과 똑같다는 걸 알아챘다. 평범한 보안 군인의 군복 위에 태극기 달린 파란 조끼를 추가로 껴입었다. 차온의 시선과 태영의 시선이 맞물렸다.
두 사람은 차의 시동을 끄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무턱대고 진입하기엔 이쪽은 아는 정보가 부족했다. 입구에 서 있던 세 명의 군인은 두 명으로 줄어들었다. 태영은 새벽 한 시가 가까워지자 입을 열었다.
“차온.”
“네.”
“나 믿냐?”
태영의 갈색 눈동자가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제 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태영 하나기도 했다.
“믿을게요.”
태영은 차온의 대답을 듣자마자 뒷좌석에 둔 그의 가방을 꺼냈다. 거기서 하얀색 텀블러 같은 것을 꺼내 챙기고, 가면을 썼다.
태영은 시동을 켜고 액셀을 밟았다. 동시에 계기판에 있는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 위장 모드로 변합니다.
인공 지능은 30분이란 타이머를 화면에 올렸다. 위장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료도 다 떨어져 가는 참이라 만감이 교차했다. 차체는 시간이 갈수록 투명해졌다.
그때 태영이 텀블러 뚜껑을 열었다. 텀블러 안에 당길 수 있는 까만 고리가 있었다. 운전대를 놓은 태영이 한 번에 고리를 당겼다. 고리에 딸린 마개가 떨어지자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차 안을 메웠다.
태영은 콜록거리며 액셀을 밟았다. 위장 모드로 당당히 부대 앞까지 차를 몰았다. 다가오는 차를 발견하지 못한 군인 두 명은 수다를 떨고 있었다. 태영이 차 문을 열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군인 두 명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때가 됐다는 듯이 태영은 후진했다.
차는 군인 두 명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불안해진 차온은 안전띠 끈을 안았다. 운전에 집중하던 태영이 차온의 눈을 손으로 가려줬다. 하지만 눈을 가린다고 사람 치는 느낌은 지울 순 없었다. 차가 멈췄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린 태영은 뒷좌석에 기절한 군인을 한 명씩 밀어 넣었다. 차온이 도우려고 하자 그냥 있으라고 소리쳤다.
“눈 감아.”
운전석으로 돌아온 태영이 턱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태영은 뒷좌석에 누워 수면 가스를 마시고 있는 군인 둘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두 번의 발포 소리에 피가 튀었다. 뒷좌석으로 넘어간 태영은 시체의 군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차온은 어금니를 악물고 뒷좌석으로 넘어가 태영을 도왔다.
십여 분 뒤 두 사람이 벗겨낸 군복은 사람의 체형에 맞게 변하는 기능성 옷이었다. 군복의 지퍼를 잠그고 군모까지 쓴 태영은 티슈를 꺼내 시트에 묻은 피를 닦았다. 차온은 태영이 시체를 처리하는 동안 앞좌석에서 갈아입었다.
태영은 죽은 군인의 손목에 찬 시계와 인이어 이어폰을 훔쳐 차온에게 줬다.
“여기는 군사 정보 때문인지 지도에 건물이 나와 있지 않긴 한데……. 여하튼 너는 여자라 눈에 띄니까 최대한 숨어다녀. 잠깐 수색하고 다시 출구서 만나기로 하고.”
“네.”
진 빠져 보이는 태영이 뒷좌석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차온도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모닥불 피우듯 매캐한 겨울바람 냄새가 났다. 사람 둘이 죽었다. 박하사탕을 문 것처럼 속이 얼얼했다. 슬픔도 죄책감도 겨울바람이 데려간 것처럼 반 토막이 났다. 버니, 시열을 구해야 한다는 집념이 다른 감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보초를 서는 두 사람을 죽였으니 다음 보초로 교체되기 전까지 이들을 찾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 안에 두 사람의 흔적을 다 지워야만 했다.
입구에 쳐 있던 전기장은 차온과 태영의 손목에 있는 시계가 삑 소리를 내자마자 사라졌다. 태영의 예상대로 군인이 끼고 다니는 손목시계가 열쇠인 듯싶었다.
태영은 입구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보일러실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차온이 망을 보는 사이 두꺼비집 모양의 기기를 태영이 팔꿈치로 콱 내려쳤다. 두꺼비집이 으스러지자마자 시설 내에 정전이 일었다. 맞은편 건물에 불 켜진 방이 까만색으로 변했다.
“나는 저쪽으로.”
태영은 10분 뒤에 여기서 보자고 한 뒤에 오른쪽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와 반대로 몸을 튼 차온은 하얀 건물을 목적지로 삼았다.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그때 점퍼를 입은 군인 하나가 하얀 건물의 문을 열고 나왔다. 정전이 난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화장실로 급하게 뛰어갔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차온은 군인이 나온 건물의 냄새를 맡았다.
물에 개어 먹던 가루 약물 냄새가 났다. 차온은 그 역한 냄새에 코를 막았다. 건물의 자동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달려온 차온이 시계를 유리문에 대자 삐빅 소리를 내며 열렸다.
– 이수경 님. 환영합니다.
불이 꺼진 복도에 약물 냄새가 진동했다. 건물 내에 병원, 그것도 아니면 실험실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별안간 사람이 나타날 수 있으니 주의를 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3000A를 제외한 모든 출구를 통제합니다.
천장에 백색 조명이 켜졌다. 금세 태영이 부순 걸 복구한 모양이었다. 통제한다는 안내 멘트 때문인지 차온이 들어온 문에도 푸른 전류로 휘감긴 셔터가 내려왔다. 뛰어 봤자 나가는 문에 걸릴 터다. 게다가 방송을 듣고 깨어난 군인들이 하나둘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왼쪽 4000C쪽입니다.”
“출입구부터 확인하고…….”
셔터로 닫히는 문 뒤에서 군인들이 침입자 수색한다고 조를 짰다. 차온은 복도를 내달려가 벽 뒤에 숨었다. 여지없이 셔터가 내려온 건물에 갇혔다. 이렇게 되면 태영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구출도 문제고 탈출도 문제였다. 곧 출입구 쪽에 세워 둔 차의 위장 모드가 풀릴 것이었다. 그 차가 없으면 부대를 탈출한다고 하더라도 맨몸으로 황무지를 건너야 했다.
차온이 숨은 복도에 철벅철벅 군화 소리가 들렸다. 차온은 허리를 숙이고 계단 쪽으로 직행했다. 위층은 감시가 덜한지 걸쇠도 안 걸어 두었다. 폭풍 전의 고요 같았다.
위층에 도착한 차온은 인기척이 없음에도 식은땀을 흘렸다. 위층의 복도는 두 갈래로 갈렸다. 바닥을 새로 수리한 왼쪽 길을 버리고 상대적으로 헌 오른쪽 길을 고집하여 걸었다. 복도 끝에 불이 훤한 방이 있었다. 마침 감시하기 좋게 맞은편 방이 비어 있었다. 긴장감이 고조에 다다랐다.
그때 빨간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의사 가운을 입고 일람표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여자는 나오자마자 문 옆 기계 판의 번호를 눌렀다. 6, 3, 4, 1. 입으로 중얼거리며 외운 차온은 여자가 떠나가자마자 복도를 달렸다.
설마. 포로를 묵게 하는 감옥 같은 데는 아니겠지. 여자가 비밀번호로 잠근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안을 살피기 위해 철문 투입구의 마개를 밀어 보았다.
“이시열 씨?”
창 하나 없이 10평 남짓한 방 안. 남자가 기진맥진한 채로 쓰러져 있었다. 시열의 뒷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차온은 더 생각할 것 없이 기계 판에 외워둔 숫자를 입력했다. 삐로록, 문이 열리자 차온은 뛰어 들어가 쓰러진 시열부터 챙겼다.
“이시열 씨! 정신 차려 봐요.”
부르짖고 흔들어도 그는 의식이 없었다. 목까지 빨개질 정도로 열이 끓는 증세는 그전과 똑같았다. 그 초록색 알약을 먹지 않으면 열이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의사 같은 여자가 다녀간 건가?
시열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눈을 뜰 힘도 없어서 말은 알아먹는지 모르겠다. 이 상태론 버니를 찾을 수 없고, 태영을 만날 수도 없었다. 차온은 시열을 눕히고 방 안에 도움 될 만한 것은 없는지 뒤지고 다녔다. 방에는 따로 화장실까지 구비되어 있는 것은 물론, 냉장고에 침대에 소파까지 있었다. 포로가 쓰기엔 과분한 환경이었다. 차온은 혹시 감옥을 잘못 준 거는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오지 마.”
그때 나지막한 시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온은 다급하게 그의 상체를 일으켜 끌어안았다.
“이시열 씨. 정신이 들어요?”
“오지, 마요.”
마음 아프게도 그는 본정신이 아니었다. 눈만 떴다 뿐이지 정신은 여기가 아니라 꿈에 있었다. 현실과 꿈이 분간 안 가는 시열이 흐린 시선으로 차온을 봤다. 땀범벅이 된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는…….”
그러고는 엄지로 차온의 뺨을 가엽다는 듯이 쓸어 만졌다. 시열의 눈빛은 본 적 없이 애달팠다. 물이나 먹여 줄까 하던 차온은 말문이 막혔다. 시열의 과거에서 사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자기한테 준 금목걸이의 주인이려나. 누구이기에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할까.
위급한 상황임에도 질투가 나려 했다. 아픈 사람을 두고 이러는 자신이 남을 구할 자격이 있나 싶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니 정신 차리자고 반성하는데 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기력을 잃은 것은 아닌지, 차온의 가슴에 기대 눈을 끔뻑끔뻑 떴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시열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정신이 든 눈으로 가만 차온을 봤다. 델 듯이 뜨거운 시선이었다. 환멸이 난 듯한 그의 표정이 차온을 향한 건지, 그 스스로를 향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차온?”
“……정신이 좀 들어요?”
시열은 헛것을 보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진짜예요.”
“약이 잘 듣는 건지……. 내가 미쳐 버린 건지.”
“약 먹었어요?”
무슨 이유에선지 시열은 차온이 실제일 리 없다고 믿었다. 혹시 잡혀 와 고문을 받다가 회까닥해버린 것은 아닐까. 차온은 열이 식지 않은 그의 얼굴을 걱정스레 만졌다. 그러자 시열이 웃으며 제 손을 잡았다. 피할 줄 알았으나 오히려 기꺼운 것처럼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따끈한 입술이 손바닥이 아니라 심장을 지졌다.
“아니이. 주사.”
“주사? 어떤 주사요? 아니, 이런 걸 물을 때가 아니지. 우선 나가요.”
몸이 하늘로 들렸다. 시열은 차온을 눕히고 그 위로 쓰러졌다. 시열의 무게에 깔린 차온은 오늘이 세상 하직하는 날이구나 싶었다. 입에 담기도 민망한 그의 아래쪽이 부풀어 있었다. 시열은 희희낙락 웃으며 제 입술을 삼켰다.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로 깨물고 빠는 통에 속으로 붓는 거 아니냐고 욕을 했다. 그때 시열의 목에 핏줄이 터진 양 빨간색 선이 그어졌다. 차온은 강제로 그의 고개를 잡고 돌렸다.
“뭐야. 이거 왜 이래요.”
그는 키스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입술을 부딪치려고 했다. 차온이 차온인 줄 모르는 눈이었다.
“이시열 씨. 정신 차리라고!”
호통이 먹혔는지 키스하려는 시도가 줄었다. 갑자기 그는 차온의 가슴께에 고개를 기대고 낄낄 웃었다.
“너 이름 뭐야.”
“이시열 씨, 참 가지가지 한다.”
“이시열? 나랑 이름이 똑같아?”
단단히 맛이 가 버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열은 상체를 일으켰다. 기다시피 시멘트벽으로 다가갔다. 차온은 말려도 들을까 싶어 일어나다가 만 자세로 가만히 그를 지켜봤다. 그러나 시열은 벽에 다가가는 게 아니라 돌진하고 있었다. 머리뼈가 부서져라 벽에 이마를 박았다. 시열에 의해 쿵, 쿵, 소리가 났다. 그의 이마에 시퍼런 피멍이 들었다.
차온은 일어나 벽에 머리를 박는 시열을 잡아챘다. 하지만 시열은 방해 말라는 듯이 차온의 손을 내쳤다.
“좀 꺼져 줄래?”
별도 달도 따다 줄 듯이 다정하던 그의 눈빛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미치광이를 상대하려면 똑같이 정신 좀 놓아야 했다. 기절이라도 시켜서 데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차였다. 차온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손가락 세 개를 얼굴 위에서 흔들었다.
“네 얼굴.”
“…….”
“성형했어?”
“으이, 네?”
도움 안 되는 헛소리를 할 바엔 차라리 정신 잃고 쓰러져 있을 때가 나았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시열이 약간의 미소를 띠고 말했다.
“내가 아는 여자랑 닮아서.”
차온은 설마설마했던 게 사실로 판명 났음을 알고 이를 갈았다. 정신이 아프다더니 이제는 옛 여자를 들먹거리고 있었다. 차온이 인내하자는 심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지금 안 꺼지면……. 나한테 당할 수 있어.”
시열의 말 한마디에 창백해진 차온은 있는 힘껏 그를 쏘아보았다.
“뭐라, 지금 뭐라 했어요?”
그때 시열이 목에 그어진 빨간 선을 가리켰다.
“이거 가라앉힐 용도로 너 부른 거야. 멍청이.”
대화를 하다 보니까 좀 나아진 모양인지 시열은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어디 소속?”
“몰라요.”
“자기 소속도 몰라?”
차온의 소속에 대해 모를 리 없는 그가 소속을 물었다. 시열의 목에 그어진 선은 경주마처럼 귀밑까지 달리고 있었다. 한 뼘 한 뼘 올라올 때마다 시열은 고통스러운 양 고개를 젖혔다. 종종 참지 못하고 뒤돌아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 처절한 과정을 지켜만 봐야 했다. 차온은 냉장실에서 얼린 얼음이라도 가져와 그의 목에 댔다.
“이시열 씨. 그러지 마요.”
벽에 머리를 갖다 대고 있던 시열이 충혈된 눈으로 차온을 돌아보았다. 차온은 얼음을 더 가져오기 위해 일어섰다. 그때 시열이 목에 댄 얼음을 바닥에 떨구어 버렸다. 냉장실 문을 열던 차온은 머리가 아파졌다. 도저히 시열이 감당이 안 됐다.
“왜? 가까이 와 보지 그래.”
“어!”
시열의 입에서 피가 넘쳐흘렀다. 그가 잔기침을 두 번 하자 피가 섞여 나왔다. 시열의 목에 그어진 선이 각혈을 기점으로 속도가 붙었다. 차온은 얼음 트레이를 던져놓고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해야 해요. 나가서 약, 그때 먹었던 그 약 구해 올까요?”
시열은 차온에게 얌전히 안겨 숨을 골랐다. 지탱할 힘이 부족한지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의 말투나 행동이 나이보다 어려졌다.
“이상하다. 네가 내가 아는 여자면, 당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날 안을 리 없거든…….”
“지금 당신 상태가 정상이에요?”
“잘 만들었다. 한번 속고 싶을 만큼.”
차온의 뺨을 검지로 건드린 시열은 입술과 입술을 조심스레 부딪쳤다. 그의 턱 끝까지 전진하던 붉은 선이 목젖 부근에서 멈추었다.
기분 좋아진 시열은 인사하듯 입술을 쪽 맞췄다. 인사를 끝낸 그가 입 안으로 천천히 혀를 넣었다. 그의 숨이 가빠지도록 혀를 섞었다. 시열이 군복을 벗기는 게 느껴졌다. 차온의 목 뒤에 있는 버클을 내렸다. 키스에 몰입해 콧잔등을 찌푸리던 시열이 파아,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멈춰.”
말은 그렇게 해도 입술에서 눈을 못 뗀다. 그는 시선을 차온의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잠잠하던 붉은 선이 반항하는 양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멈추라고 말한 것인지 그는 다시 벽에 머리를 박으러 가고 있었다. 차온은 실험 삼아 그의 뺨에 손을 댔다. 눈빛의 초점이 흐려진 그가 차온을 보며 있는 대로 성질을 냈다. 차온의 손을 치우고 팔꿈치로 벽을 가격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나갈 생각 없어 보이니까. 우리 수다나 떨자.”
“내가, 나가서 치료 약 구해 올게요.”
“그런 기분 알아?”
지친 그의 몸이 벽에 늘어졌다. 무릎 하나를 세우고 앉아 차온을 바라봤다.
“갖고 싶은데 갖기 싫어. 하고 싶은데 하기 싫어. 토 나올 것처럼 머리는 싸우고 있는데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여.”
그때 땀이 들어간 건지 왼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오른쪽 눈은 웃고 있었다. 차온은 그의 표정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 참던 그가 차온의 몸 위로 넘어와 그녀를 넘어뜨렸다. 시열은 얇은 티를 벗어젖히고 상체를 내보였다.
자신의 허벅지와 그의 성기가 맞닿았다. 달칵, 바지의 버클을 푼 그가 속옷을 내리고 양물의 몸통을 꺼내 들었다. 움직이려고 했으나 그의 손이 더 빨랐다. 차온의 목 뒤에 있는 버튼을 잡아당겼다. 군복의 상의가 다 벗겨졌다. 차온은 그의 벗은 상체를 붙잡고 차분함을 가지려 애썼다.
“나 차온이에요!”
그 외침에 그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그는 차온의 윗옷을 마저 벗긴 다음 그녀의 턱을 살며시 쥐었다.
“그래 보여.”
“그래 보이는 게 아니라…….”
“걱정 마. 더워서 벗은 거니까.”
시열은 차온의 웃옷을 벗긴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거의 누운 자세로 벽에 기대어 밖으로 꺼내 둔 성기를 한 손에 쥐었다. 차온을 바라보며 느긋이 손을 흔들었다. 두툼한 성기가 그의 손에 의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했다.
보육원 남자애들끼리 원장이 보던 성인용 잡지를 훔쳐서 돌려 본 적이 있었다. 차온은 합류해 몇 장을 보다가 속이 안 좋아져 치우라고 그랬다. 그런데 시열의 성기가 잡지 1면을 장식한 남자 배우보다 컸다. 살이 찐 성기를 흔들던 그가 어느 순간에는 눈을 감고 허리를 들었다. 그러곤 다시 눈을 슬며시 떠 차온을 바라봤다. 성기의 몸통 아래서부터 위로 쭈욱 짜내듯이 올렸다.
“더러워?”
탁한 씨물로 끈적해진 손을 보고 차온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냄새가 별로냐고 웃으며 물었다. 차온은 고개를 돌렸으나 그는 그래도 좋은 듯 낄낄거렸다.
“이래도 안 나가네. 아, 죽어도 상관없으니 여기, 있으라고 그래?”
그는 제 귀두에서 흐르는 하얀 씨물을 바라보았다. 손등 위로 흐르는 씨물을 보고 그가 욕을 한 것도 같다. 상태가 언제쯤 나아질지 모르겠다.
“여기선 언제 내보내 준다고, 그런 말 혹시 들은 거 없어요?”
충격이 컸지만 티 내지 않고 얘기했다. 그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대답 없이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자기 위로를 했음에도 죽지 않고 빳빳이 서 있는 성기 때문에 괴로운 눈치였다.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찧기 시작하는 그에게 차온이 다가갔다.
차온의 기척이 근처에 오자마자 그가 눈을 떴다. 보기 흉하니 가려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는 다가오는 차온을 바로 낚아채었다. 머리가 잡힌 차온은 그의 입술로 끌려갔다. 허락 없이 들어와 도망가는 차온의 혀를 빨았다. 입천장에, 윗입술에, 아랫입술에 그의 혀가 스쳤다.
차온은 숨을 쉴 구석을 찾으려 그의 목을 밀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되려 그가 침범할 만한 약점을 내어 준 셈이 되었다. 그는 숨쉬기 곤란한 차온을 가볍게 안아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갈무리 해봤자 소용없다는 듯이 차온의 윗옷을 끌어 내린다. 가볍게 드러난 속옷째로 그가 입 안에 넣었다. 가슴살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차온이 허리를 흔들었다. 뒤로 넘어가려 했으나 그의 손이 단단하게 잡고 있었다.
그의 온몸이 불덩이였다. 차온은 그의 머리를 만지자마자 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만지지도 못하고 손을 떼었다. 그러나 시열은 제어 풀린 눈으로 차온의 가슴을 물자고 안달이었다. 속옷을 내리고 드러난 하얀 속살에 혀를 댔다. 가슴을 한 움큼 물자 절박한 사람처럼 빨아대기 시작한다. 터진 둑처럼 몰아세운다. 시열은 가슴에 입술을 매달고도 모자라 했다. 욕심 많은 손이 밑으로 내려갔다.
“이시…….”
둔부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간 손이 일을 벌였다. 펄쩍 뛴 차온의 입술을 그가 막았다. 손가락이 차온의 바지를 내리고 속옷으로 바로 침입했다. 들어오자마자 한 짓이 가관이었다. 가여운 음부가 갈라지는 부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의 짧은 손톱이 살그머니 그곳을 후볐다.
“으, 응.”
동시에 가슴이 씹히듯이 물렸다.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물고 빨았다. 자기가 보기에도 거칠다 싶으면 위로해 주듯이 혀로 핥아 달래 준다. 자국이 남은 가슴 위에 그가 연신 키스를 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르고 들어왔다.
“안 돼. 누가, 여기에 오면!”
손가락은 파고 들어가자마자 가만히 있었다.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그의 치밀함에 놀랐다.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하는 손가락이 원을 그렸다. 그의 입이 쉬지를 않았다. 욕심은 어찌나 많으신지. 키스하다가도 목표를 바꿔 목에, 가슴에 자국을 남기느라 바빴다. 특히 유두 주위에 집착하고 있었다. 남사스러운 빨간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차온…….”
그가 그리워하듯이 자신을 부른다는 착각. 그 착각이 방심하게 만들고, 방심한 사이 손가락은 제법 안쪽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즈음 차온은 그에게 먹힌 입술을 빼내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고작 한 손이었다. 한 손으로 붙들고 있는데 사지가 마비된 양 꼼짝을 못 했다.
시열이 체중을 왼팔로 버티고 누웠다. 그사이 손가락 한 놈을 더 데려와 내벽 안으로 들여보냈다. 차온은 숨을 헐떡이며 그의 팔에 감겼다.
“여기?”
두 개의 손가락 끝이 누른 지점이 이상했다. 안쪽 속살이 떠는 느낌이었다. 차온은 다리를 조르듯 모으려는 욕정을 무시하고 싶었다. 그가 갈등하는 차온의 귓가에 쪽쪽 입을 맞췄다.
“흐, 귀여워.”
시열이 손가락에 묻어난 시큼한 물을 쭈욱 빨았다. 남기지 않고 빨아먹은 손가락으로 여린 속살을 헤집고 들어가 푹, 눌렀다. 의지와 상관없이 허리가 튕겼다. 아래가 젖고 있는 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시열이 손가락을 구부릴 때마다 움직임이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아, 읏.”
차온은 약간 멍한 눈으로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기분이 좋았다.
“내가 누군지 이제 알죠.”
그는 차온의 수줍은 물음을 듣고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명쾌한 해답을 얻은 사람처럼 웃었다.
“아, 역시……. 좆같이 실제 같더니.”
그는 욕망으로 풀어진 차온의 뺨을 누르듯 만졌다.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은 추잡한 욕망 같은 것이 덜어진 입맞춤이었다.
“너, 꿈이었구나.”
그는 안도한 표정으로 차온에게 부드러운 키스를 남겼다. 여유를 찾은 그의 혀가 입 안을 긁어 주며 차온을 달랬다. 그는 배려해주는 양 차온을 제 아래에 눕혔다. 그는 혀를 내밀어 목선을 핥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이곳이 어딘지,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잊었다. 시열은 차온의 기분을 살피며 입술을 떼었다.
시열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허벅지였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목에 난 빨간 선이 반 이상 지워진 게 보였다. 차온은 그의 목에 난 선을 만지려다가 실패했다. 허벅지에 닿는 입김 때문에 다리를 움츠렸다. 그러자 그는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음부를 벌리고 들어갔다. 차온은 허벅지를 맞붙였으나 그게 자극은 더 심했다. 그는 맞물린 허벅지 사이에 끼인 제 손을 보고 웃었다.
빠져나가지 못한 그의 손은 더욱더 깊이 들어왔다. 다리에 힘을 풀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온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막기 위해 다리에 힘을 줘 버리고 말았다.
“읏, 아…….”
손가락 끝이 툭 불거진 음핵을 긁었다. 차온의 신음을 본 그는 더욱 눈이 돈 것처럼 보였다. 혀로 힘을 주고 있는 차온의 허벅지를 쓸었다. 그 이상한 느낌에 차온의 허리가 들릴 때였다. 그는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였다. 차온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데 사활을 건 사람처럼 굴었다. 손가락도, 음부도 완벽하게 자리를 찾았다. 손가락은 촉촉해진 음부를 찌르고 훑고, 자극에 자극을 주고 있었다.
“그, 아, 그러지…….”
그는 차온의 물로 충분히 적셔진 손가락을 빼내는 듯했다. 그러나 나가면서도 속살을 간지럽혔다.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손가락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마자 차온은 허벅지 힘이 풀렸다. 봉긋한 가슴을 물기 시작한 그를 내려다봤다. 그는 또 젖은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핥았다. 아주 터질 듯 뺨이 붉어지라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는 차온의 양다리에 손을 얹었다. 아무리 다리에 힘을 줘도 벌리려는 힘에 맞설 수 없었다. 활짝 벌려진 다리 사이를 그가 빤히 바라봤다.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속옷은 이미 있어 봤자 도움 되지 않는 천 쪼가리에 불과했다. 그는 거의 다 젖은 속옷을 잡아당겼다. 속옷이 허벅지에 걸쳐지자마자 그의 혀가 음부 가까이로 왔다. 끝을 세운 혀로 음부를 할짝거리며 말했다.
“이런 꿈이라면 백 년도 꾸겠어.”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시열은 바빠졌다. 홍조가 든 것처럼 분홍 속살을 머금었다. 손가락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살덩이였다. 뼈가 없는 혀로 두드리자 음부는 어서 오라며 길을 터 줬다. 갈라진 틈으로 들어온 빨간 살덩이는 요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고개를 틀고 차온의 둔부를 잡았다.
“아, 아으!”
차온은 살자고 그의 머리를 잡았다. 머뭇거리며 빼던 둔부가 그의 손에 잡혔다. 목이 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다. 그는 목마름을 해결하는 것처럼 혀를 담갔다. 음부에 담긴 혀가 어찌 움직여도 차온은 쾌락밖에 느낄 것이 없었다. 그의 혀는 단순히 오가는 것이 아니었다. 겉을 핥고, 안으로 들어와 날름거리며 물을 얻어갔다. 허리가 절로 움직였다.
차온은 어흑, 하며 발끝을 들었다. 눈앞에 별이 보인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가 입술을 떼고 차온의 클리토리스가 있을 부위를 입술로 누르고 쭉 빨기 시작했다.
“아, 그거, 아!”
혀로 속살을 헤집는 것도 고통스러운 쾌감이었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자그마한 부위는 예민함이 말도 못 했다. 혀로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고였다. 시열은 차온이 전신을 비트며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 차온. 그러면 그럴수록 나한테 먹여 주는 것 같잖아……. 차라리 얌전히 내 입에 물려 주는 게 점잖아 보인다니까.”
그는 그 한마디를 뱉고 다시 눈을 감았다. 차온을 잡고서 클리토리스에 입을 맞췄다. 뺨이 홀쭉하도록 빨아 당기는 동시에 손가락을 박아 뒀다. 이제는 무리 없이 들어간 손가락을 안에서 퉁 튕겼다. 양쪽에서 가해지는 쾌감에 혼이 빠졌다. 그의 머리채를 잡고 둔부를 위로 들어 올렸다.
“아! 하으, 응!”
“그거 빨았다고 부었나.”
“잠깐, 핥지 마요, 아, 읏!”
약을 펴 바르는 것처럼, 음핵을 혀로 핥아 주었다. 두꺼운 손가락을 음부에 넣고 원을 그리며 돌렸다. 차온은 그의 허벅지를 쥐었다가 때렸다가 난동을 피웠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꽉 오므리고 말았다. 허리를 떨며 옆으로 쓰러졌다. 아래에서 물이 샜다. 차온의 눈에서도 짭조름한 물이 샜다. 그는 기특하다는 듯 차온의 양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쉴 틈은 없었다. 자신의 위로 드리운 그림자를 겨우 느꼈을 땐 그가 이미 올라탄 후였다. 그가 코끝에 입을 맞추는 순간이었다. 아래에 묵직한 느낌이 든다 싶었다. 갑자기 허리가 저릿한 통증이 연이어 터졌다.
“아, 으!”
그의 눈이 풀리고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는 약을 한 사람처럼 입가가 느슨해졌다. 차온의 어깨에 쓰러져 숨을 버리고 마셨다.
“꿈에서 안 깨는 방법은 없나…….”
그는 차온에게 답을 구하듯 물었다.
“나, 후으, 주사 한 번 더 맞을까?”
그의 성기는 뚫고 들어오지도 못했다. 정확히 반만 들어오다가 말았다. 속옷도, 바지도 벗지 못하고 이러고 있었다.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걱정이 됐다. 차온은 문간 쪽을 바라봤다. 쥐새끼 한 마리 얼씬 안 하는 듯싶었다.
그는 반만 박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들어가지 못해도 입구에 비비며 느꼈다. 눈빛이 안정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차온을 한 손으로 끌어안더니, 돌아누워 자신의 위에 올려 두었다. 순식간에 그를 포옹한 자세로 올라탔다.
“이빨, 상해.”
준비는 이만하면 됐다는 듯 안쪽으로 부딪혀 오는 성기를 받았다. 차온의 입 안에 손가락이 들어왔다. 입 안쪽에 있는 살을 장난스레 만지고 떠났다. 차온은 좋아 죽는 그의 얼굴을 보며 보통 변태가 아니구나 싶었다.
“나랑, 꿈에서, 이러고 싶었어요?”
“아니.”
“아……. 응!”
그때 그가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도발하고 본전도 못 건진 차온이 허리를 떨었다. 그가 차온의 허리를 도망치지 못하도록 안았다.
“미안, 이보다 더했어.”
그는 자기가 뱉은 말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차온의 허리를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정나미 떨어지도록 허리만을 움직였다.
“아, 아, 응!”
“묻지 말지……. 멍청이.”
꿈에서 깨기 전에 이것저것 해 보고 싶어졌잖아. 실행 의지가 강한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차온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정신을 좀, 차려요. 우리, 여기 갇혔어요. 으!”
몸이 뒤집혔다. 차온은 다시 시열의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위에 올라탄 상태로 차온의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성기가 처박히는 각도는 들어올 때마다 달라져, 물러진 속살을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쑤시고 들어와 누르는 것도 모자랐나 보다. 빠져나가자마자 손으로 음핵을 어루만졌다.
“아으, 이거, 꿈, 응!”
차온은 그의 팔뚝을 잡았다. 그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깨워 보려 했다. 그는 잔소리 말라는 듯이 차온의 말을 혀로 받았다. 몸은 그에게 구속되어, 무참히 아래에 치받는 성기를 받아내었다. 푸욱, 박을 때마다 물장구치는 소리가 났다.
“너무 미끄러운 건 별로라서.”
그는 그따위 저질스러운 말을 했다. 일부러 적셔진 성기를 차온의 허벅지에 닦았다. 말로는 미끄러운 게 싫다지만, 곤두선 성기를 왜 보지 못하느냐며 농락하려는 의도였다. 고개를 좌우로 틀어 봤자 소용없었다. 따라온 그의 입술이 차온의 입술을 먹고 차온의 유두를 핥았다.
정신없는 애무에 같이 미쳐갔다. 싫다고 말도 못 하겠다. 성기를 품을 때마다 음부는 울었다. 너무 울어 부끄러웠다. 정신이 한 번 더 흐려지고 있었다. 그도 달라진 반응을 느꼈는지 씨익 웃었다. 끈끈한 목소리로 차온의 귓가에 속삭였다.
“올려 줄게, 허리 움직여서 좋아하는 곳에 박아 볼래.”
“시…… 으, 아읏!”
“이렇게, 허리 돌리면서 박으면 기분 좋을걸.”
그 말에 차온은 그의 목에 손을 감았다. 끝나려면 얼른 끝나라고 한숨 쉬었다. 그는 만족의 숨이라고 오해한 모양인지 치대듯 꽂아 넣었다. 허리를 돌린 그가 한 지점에 푹 박으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읏…….”
사정하는 도중에도 시열은 차온의 반응을 지켜봤다. 붙어먹는 아래에서 물이 비어져 나왔다. 차온은 두 번째 절정을 느끼며 그만, 이라고 외쳤다. 오고 있는 쾌락의 파도를 부정하는 몸짓이었다. 가엽게도 그 모습을 그에게 목격당하고 말았다. 그는 상체를 숙여, 가고 있는 차온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다시 그의 허리가 움직였다. 뺨에 묻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는 가고 있는 차온의 얼굴을 눈에 박을 듯이 바라봤다. 차온은 자잘한 절정이 끊이지 않게 만드는 그의 성기를 빼버리고 싶었다. 그는 쾌락의 파도가 이어지게 여운을 때려 넣을 뿐이었다. 푹, 푹, 박고 빼냈다. 차온의 입에서 단숨이 터졌다. 꼴 보기 싫은 듯 고개를 돌려 버린 차온이 둔부에 힘을 줬다.
“아…….”
싫다고 할 수 없게 만들려나 보다. 그는 차온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넣고, 빼기를 반복하다가 몸이 동하면 처박아 버린다.
차온이 시큰한 허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그가 제 성기를 한 손으로 잡고 빼내 버렸다. 마개가 뽑히자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그 광경을 기다린 양 웃었다. 손목으로 눈을 가린 차온은 무릎 세운 다리를 떨었다.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얼굴을 밑으로 내린다. 차온이 독기 빠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혀로 차온의 젖은 음부를 닦았다.
“아, 으, 아니……. 제발!”
혀를 써서 살점을 핥았다. 그것의 반복이었다. 차온이 다리를 떨고 우는 것이 좋은가 보다. 그는 아예 차온의 음부에 입술을 박았다. 성기가 밀고 들어와 긁어 판 곳을 다시금 혀가 차지했다. 쭙, 빨아들이는 그의 입소리에 차온이 경악을 했다.
“이, 시열, 나, 이거는 아니야.”
그러나 그는 무시했다. 탈출. 그것은 머릿속에서 희미해진 개념이었다. 차온은 그의 말대로 이게 꿈이 아닐지 생각해 봤다. 사람이라면 이럴 수 없었다. 곧 생각할 시간도 사라졌지만 말이다.
“아, 으, 응, 흑!”
욕실 벽을 잡고 쉬어빠진 목으로 신음을 짜내었다. 차온은 퉁퉁 부은 가슴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예민해져, 어쩌다 시열이 가슴만 주물러도 아래가 젖었다. 하필 그가 그걸 알아 버렸다.
뒤에서 한 번에 박아 넣은 그가 차온의 몸을 휙 돌렸다. 그는 자국투성이가 된 차온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입술 사이에 넣고 주욱 빨기 시작했다. 차온은 몸부림 비슷한 것을 쳤다.
“부드럽게, 아, 으.”
예민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한입에 가슴이 삼켜지자마자 차온은 엉엉 울고 싶은 느낌이 되었다. 숨이 턱 막히고 머리는 하얘지고 그의 입술에 빌고 싶어지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차온의 반응만을 확인하고 있었다. 성기를 박아 넣고 차온의 두 다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다.
욕실 벽에 등이 닿았다. 차온은 가슴에 붙은 그의 머리를 떼어 내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차온의 밑이 젖다 못해 흐르는 걸 알고 있었다. 속살에 고일 대로 고인 그 달콤한 물을 끄집어내는 것이 직업인 것처럼 행동했다.
“아으으…….”
예상대로 원하는 만큼 애무하고 성기를 끼워 넣었다. 차온은 무너져 그의 머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가슴을 맛나게 핥고 있던 그는 웃으며 가여운 유두를 놓아주었다. 물론 심술을 담아 빨면서 놓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다리 힘이 풀린 차온의 몸을 안아 들었다. 미리 물을 받아둔 욕조에 앉았다. 아래가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차온은 작은 동작에도 흐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어지러워.”
차온이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말했다. 뜨거운 물에 들어오니 현기증이 났다. 비단 섹스뿐이 아니더라도 탈출 대책을 세우긴 해야 했다. 지금까진 운이 좋아 들키지 않았다. 태영도 그렇고. 꿈이라 믿는 시열의 정신머리도 그렇고. 차온은 무엇 하나 안심이 되질 않았다.
“이시열 씨.”
조금은 안정이 된 것처럼 보이는 시열을 불렀다. 차온의 몸을 꼭 안아 주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버니는 어디로 잡혀갔어요?”
그러자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차온의 목을 물었다. 한 손으로는 그의 손에 딱 잡히는 말캉한 가슴을 쥐었다.
“이시열 씨. 보지 말고 여기를 좀 더 긁어 줘요.”
“하, 아직도 꿈속이에요?”
“그렇게 말하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왜 말해 주지 않지? 고장 났나?”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차온의 코끝을 그가 손가락으로 장난스레 눌렀다.
“말 안 들어서 더 귀여워.”
아래에서 슬슬 성기를 쳐올리기 시작한다. 차온이 고개를 돌리고 그의 목에 손을 올렸다. 그가 차온을 옴짝달싹 못 하게 꽉 끌어안았다. 차온은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미소를 목격했다. 그래서 입 근처로 다가왔을 때 밀어내지 못했다.
그가 사 준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키스는 잠시였다. 홀리기 직전에 본색이 나왔다. 아랫도리를 미친 듯이 쳐올리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욕조 바깥으로 물이 쏟아졌다. 그의 허벅지 위에 물결이 일었다. 차온의 몸은 안쓰럽게 흔들렸다. 차온은 그의 목을 안고 사정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는 입술을 놓지 않은 채로 허리를 들어 올렸다.
깊숙이 박히는 느낌이 들 즈음, 입술을 뗀 그가 달뜬 신음을 흘렸다. 하아, 으, 아. 그의 작은 신음이 귀를 울릴 찰나였다. 그가 아래를 접붙이고 하얀 씨물을 사정하는 게 느껴졌다. 뜨거운 신음이 수차례 흘러나왔음에도 그는 만족을 채우지 못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처럼, 사정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그가 입을 맞췄다. 정상이 아니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차온은 물이 식기 전까지 그곳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 * *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왔다면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를 가두어 두고 참기 힘든 성욕으로 고문하는 곳이었을까? 그런 곳치고 냉장고부터 욕실까지 본격적이었다. 그는 한두 시간 정도 잠을 잤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차온을 찾았다. 차온은 그가 잠든 사이에 냉장고를 열어 단팥빵을 꺼내 먹었다. 음료 칸에 있던 흰 우유까지 따라서 먹었다.
“꿈에서 깬 줄 알았어.”
차온의 등에 따끈한 몸이 달라붙었다. 꿈에서 깬 게 아니라 잠이 든 것이라고 몇 번이나 일러 줬음에도 그는 믿지 않는다. 이틀 내내 지겹게 몸을 섞었음에도 은근히 하반신을 비벼댔다. 차온은 남은 우유를 다급히 마셨다. 그리고 곧바로 등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티셔츠 이렇게, 걷어 봐요.”
차온은 그가 자는 사이 겨우 입힌 검은 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차온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티의 목 부분을 어깨까지 끌어 내렸다. 드러난 목에는 몽땅 연필처럼 짧아진 선이 보였다. 차온은 그의 뺨에 손을 올려 두드렸다.
“많이 나아졌어요.”
그는 표정 없이 제 뺨에 올라간 차온의 손길을 느끼다가, 참을 수 없는 것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차온은 키스하려고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막았다. 그러자 그의 의아한 표정이 느껴졌다. 차온은 그의 손을 잡고 부엌이 아닌 소파 쪽으로 데려갔다. 그는 얌전히 따라와 차온이 시키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나는…….”
시열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온의 몸을 안아 올렸다. 힘이 이상스럽게 세진 그는 차온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미치겠네, 진짜…….”
힘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졌다. 이틀 전 그가 머리를 박은 벽에 금이 가 있었다. 수상스럽게 생각한 차온이 그를 지켜봐 온 결과 그는 힘이 말도 안 되게 세진 것도 모자라 온 감각이 발달하고 있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득달같이 일어나 따라오는 통에 차온은 마음대로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냄새도 잘 맡았다. 냉장고에서 꺼내는 음식을 족족 다 알아맞히는 통에 마약 탐지견 훈련이라도 받았냐고 물었다.
“아, 우리, 말 좀 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는 틈만 나면 섹스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 두고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수시로 차온의 가슴을 만지작거리거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기분이 이상하니 그만하라고 하면 안 된다. 이상한지 봐 주겠다며 아랫도리로 손을 옮겼다. 음부를 터치하는 걸 시작으로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 벌써 가슴골에 얼굴을 넣고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차온은 그의 뺨을 잡아 위쪽으로 돌렸다.
“고개 들어 봐.”
어차피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차온은 말을 짧게 했다. 저쪽이 막무가내로 행동하고 있기에 별로 존중해 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우리는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어. 윤태영도, 버니도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알 바인가?”
관심 없다는 그의 눈이 왜 그렇게 섭섭한지 모르겠다. 차온은 그의 뺨을 마구 누르며 화를 냈다.
“알 바가 아니면? 두 사람이 죽어도 돼?”
“죽으면 죽는 거지.”
이런 놈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왔다. 차온은 섭섭함을 넘어 그를 구하겠다고 이러고 있는 자신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무심의 끝을 달리던 그는 울먹이는 차온을 보고 왜 그래, 했다.
“내가 죽어도, 그냥 죽는 거예요?”
머리를 맞대고 탈출 방법을 논의해도 모자랄 판에 죽으면 죽는 거라니. 이럴 리 없다고 인정 못 하다가 유치한 질문까지 나왔다. 어떻게든 시열을 살려서 데려가겠다는 희망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졌다. 그가 차온의 뺨에 입술을 붙이려고 했다. 이 와중에도 이런 행위밖에 못 하는 그가 정말 미웠다.
“내가 어쩔까.”
“뭘 어째요.”
그의 낮은 목소리가 짜증을 담아 차온에게 쏘아졌다.
“말해 주면 돼?”
그는 일어서려는 차온의 몸을 꽁꽁 싸매듯이 안아 제 품에 넣고 가두었다.
“김구영도 윤태영도 죽으면 안 되지. 당연히.”
김구영. 버니의 본명인 것처럼 들린다. 차온은 그를 노려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눈에 힘 풀어. 원하는 대답까지 해 줬는데.”
“난 거짓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이참에 깔 건 까자 싶었다. 차온은 목에 두른 금목걸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누구 건데 나한테 줬어?”
이 펜던트가 그에게 평범한 의미일 리 없었다. 시열은 돈을 줄 테니 커플 팔찌를 차 달라고 해도 저가 싫으면 싫은 사람이었다. 목걸이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어도 시열은 그럴싸한 말로 얼버무렸다.
“마음에 안 들면 버릴래?”
지금도 차온의 금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그는 대수롭지 않은 양 말했다.
“누가 준 건데.”
“키스나 하자. 좀 그만 떠들고.”
꿈속이라고 믿고 있다면, 지금 보이는 건 그의 무의식이란 소리였다. 솔직해질 법도 하련만 그는 벽에 가시덤불을 두르고 철망까지 쳤다. 그 말은 차온에게 마음을 열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더 다가오면 날카로워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차온의 등을 쓰다듬던 시열은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 차온이 고개를 흔들며 반항하자 턱을 움켜쥐었다. 힘에 당할 수는 없지만 차온의 입은 살아 있었다.
“난, 당신한테, 성욕이나 풀어 주는 존재야?”
“왜 그리 심각해. 그냥 키스하고 싶은 것뿐인데.”
“좋아하니까.”
차온은 턱을 쥔 그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무력해진 그의 손은 차온의 얼굴 옆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 상태로 차온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차온은 알 수 있었다. 질투로, 사랑받지 못해 추한 얼굴이 있었다.
차온은 원장에게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실제로 보육원 내에서 차온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랑받는 것에 집착하던 차온의 인생에 나타난 시열은 첫 만남부터 파격적이었다.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스푼 씩 추가하게 되는 설탕 같았다.
그는 달지만, 인생에는 하등 도움 되는 것 없이 해로웠다. 그러나 몰라서 사랑하는 게 아니고, 알아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을 먼저 배웠을 뿐이었다.
시열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고백이나 해볼 걸, 싶었다. 당신 덕분에 포기하지 않았다고, 삶의 윤곽이 잡혔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짝사랑하는 사람은 눈치가 빨라진다. 상대의 표정, 말투, 습관을 관찰하다가 척척박사가 되어 마음까지 읽게 된다. 그리고 차온은 흔들리는 시열의 눈빛을 보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아직 자신에게 마음 한 조각 내주지 않았다.
그가 대답으로 고를 만한 말은 뻔했다. 자신을 조롱하거나, 이 마음을 없던 일처럼 받아들이려고 하겠지. 비록 그는 지금이 꿈속인 줄 알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시열은 한참 후에야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차온의 손이 그를 막았다. 발언권을 빼앗긴 시열은 차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신한테 답을 바라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내 마음이 그래요.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대답하지 말고 삼켜요.”
차온은 그와 보내는 이 시간이 길지 않음을, 그리고 두 번 다시 그와 이런 상황에 있을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차온의 눈빛을 읽었는지 그는 손이 떨어졌음에도 답을 내놓지 않았다. 언제 봐도 비겁하고 나쁜 남자였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꿈이 아닌 것 같기도 해.”
그가 정신을 차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이 시간을 꿈으로 치부하게 내버려 둘까. 차온은 후자를 택했다. 웃으며 그의 목에 손을 감았다. 저항 없이 끌려 내려오는 그의 입술을 삼키고 빨았다. 놀라서 굳은 그의 혀를 부드럽게 물어서 핥았다. 약간은 당황한 것 같던 시열의 눈이 키스에 집중할수록 사나워졌다.
어차피 꿈이니까 깊게 생각할 거리가 아니라는 그의 표정이 안 봐도 비디오였다. 시열은 정욕의 화약고에 불을 붙인 차온의 얼굴을 붙잡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여러 번 몸을 섞으며 익숙해진 과정이었다. 차온은 그의 손에 의해 속옷을 잃었다. 벗겨진 아래로 그의 몸이 부딪혔다. 자연스럽게 커다란 양물이 짓쳐들어온다.
“으…….”
시열이 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아니,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열을 두고 UT 행성으로 가버릴 거다. 아니, 시열을 두고 UT 행성으로 가지 못한다.
“아!”
여간하여서는 익숙해지지 않는 크기와 감각이었다. 시열은 내벽을 함부로 치대며 들어왔다. 움직이는 그의 몸에 깔려 신음을 질렀다. 시열의 가슴팍이 코끝에 비벼졌다. 한 부위가 이어진 것만으로도 그를 가진 기분이 들다니.
성기를 배불리 채우고 웃는 그의 뺨을 만졌다. 손이 닿자마자 커지는 그의 눈에 차온만이 고여있었다. 그거면 됐다. 이 며칠간의 기록은 알아서 개조해 잘 간수해 둘 것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도 사랑받았다고 개조해 두고 자랑으로 삼을 터였다.
시열은 연인, 결혼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비단 자신만이 아니라 그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못할 사람처럼 보였다. 여자뿐 아니라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감히 그에게 마음을 보일 생각은 없었다.
시열은 가만히 쓰다듬어 주는 차온의 손길을 느끼다가 기분 좋은 것처럼 키득거렸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어떤 아쉬움과 어떤 후련함이 담겨 있었다.
“아……. 뭐야.”
“뭐가요?”
“꿈 아닌 줄 알았잖아.”
노련하게 움직이는 그의 허리 덕에 차온의 밑은 바빠지고 있었다. 부드럽게는 받아야겠고. 빨리 먹고 싶기는 하고. 욕심 많은 속살이 그의 것을 삼키고선 축축이 젖어 갔다. 그걸 느꼈는지 시열도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허리를 젖혔다.
“아, 해.”
아? 갑작스러운 요구에, 쳐들어오는 성기를 느끼느라 바빴다. 차온은 어색하게 입을 벌렸다. 그는 입을 벌린 차온에게 버드 키스를 했다. 쪽, 쪽, 다정스러운 입맞춤을 나누는 와중에도 그의 허리 짓은 과격해지고 있었다. 찰박, 소리를 내며 박아 댔다. 그의 성기 때문에 차온의 목소리는 힘을 잃어 갔다. 차온의 신음을 혀로 쭙 빨아 댄 그가 마지막 박차를 가해 허리를 털었다.
“아……. 흐으.”
그도 심하게 느끼고 있는지 잇자국 나지 않게 차온의 뺨을 은근히 문다.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차온은 그의 등을 잡고 버티려 했으나 무식하리만치 치받는 성기 때문에 자세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박다가 물이 튀는 걸 좋아했다. 질퍽한 소리가 연달아 나자 차온은 눈을 감고서 버텼다. 하지만 그는 차온이 눈을 감자마자 동작을 멈췄다. 한창 박아 넣는 참에 멈춘 터라 차온은 발버둥 비슷하게 떨고 말았다.
“으, 아아……. 아!”
뭐에 심통이 났는지 그가 차온을 안고서 몸을 일으켰다. 연결되어 있는 부위에 자극은 자극대로 받고, 마음은 마음대로 놀라고 말았다. 차온은 경악한 심정을 숨기고 싶었으나 그가 걸어가는 곳은 익히 아는 곳이었다. 어제저녁에도 저기에서 한바탕 놀았으니까.
“하으! 아…….”
우선 식탁에 차온의 상체를 눕힌다. 그러면 차온은 어쩔 수 없이 의지할 곳이 없어지게 된다. 차온의 당황한 얼굴과 함께 삽입은 시작됐다. 차온은 반쯤 누운 상태로 그의 흥분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험하게 생긴 것이 짜증 내듯 찌르고 들어온다. 뭉툭한 성기 끝으로 누른 곳은 이미 차온의 속살이 좋아한다고 판명 난 곳이었다.
“아…….”
차온의 숨이 넘어갔다. 시열은 듣기 좋다고, 계속 듣고 싶다고 다정하게 말했다. 버둥거리는 차온의 손을 맞잡고 그는 더 깊이 들어오려고 안달이었다. 깊이 찌르는 만큼 빠져나가는 순간도 만만치 않았다. 굵직한 성기의 움직임에 따라 속살이 아쉬운 듯 조이고 있었다. 그는 그 느낌을 좋아하는지 배시시 웃었다.
막판 절정에서 떨쳐진 게 아쉬운가 보다. 그는 차온의 손을 식탁에 내리누르고 허리를 흔들었다. 씨물을 가득 채우기 위해 오고 가는 성기의 움직임은 징그러울 정도였다. 조금만 쉬고 싶다는 차온의 말을 그가 키스로 핥아 가져갔다. 접붙은 아래의 움직임은 치열했다.
나가지 말라고 붙잡는 듯한 속살 때문인지 그는 유독 흥분을 참지 못했다. 절정의 순간이 다가오자 그는 다급히 차온의 몸을 일으켜 꼭 안았다. 마지막에 허리를 크게 한번 털 듯이 쳐올렸다.
“아으, 으!”
사정해도 끝이 아니다. 그는 다음을 준비하는 것처럼 허리를 움직여 사정이 끝난 양물을 달랬다. 그는 우는소리 하는 차온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손가락 사이에 민들레가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차온은 비관적인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에게는 작은 유흥일 뿐이지만, 이 입맞춤 덕분에 그를 살리자고 저지른 일들이 후회되지 않았다.
차온은 말없이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이 순간을 기억할지, 아니면 모른 척할지, 아니면 예전에 그런 여자도 있었더라고 술자리서 한 번씩 얘기하게 될지. 하지만 차온은 언제까지고 기억할 터였다. 그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대는 이 순간이야말로 자신이 꿈꿔온 그 순간임이 틀림없었다.
사랑을 알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해 봤다. 시열을 사랑하는 삶이 사랑스러웠다. 비로소 사랑할 수 있었다.
* * *
차온은 욕조에 물을 받아 밀린 빨래를 했다. 식사는 유통기한이 짧은 빵과 우유로 때웠다. 통조림같이 유통기한이 긴 식품은 천으로 싸두었다.
방에는 없는 게 없었다. 수납장에서 반짇고리도 찾아냈다. 드라이기로 빨래를 말리는 동안 구멍 난 양말을 시열에게 기워달라고 했다. 시열의 바느질은 실로 구멍을 틀어막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얀 양말에 초록색 실이 웬 말인가. 하지만 차온은 내색하지 않았다. 잘 신고 다니겠노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시열을 데리고 떠날 채비를 끝냈다. 이 상황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같이 들어온 태영의 생사가 불투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짬을 내서 바깥으로 나가려 할 때마다 시열이 훼방을 놓았다. 나가지 못하게 끌어안거나, 색다른 체위로 차온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나간다고 말하지도 않았음에도 본능인지, 아니면 진짜 훼방 놓을 목적인 건지, 그는 귀신같이 알고서 방해 공작을 펼쳤다. 둘이서 들러붙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일에 무감각해지라고 종용하는 느낌이었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계가 없기에 대충 며칠이라고 짐작하기만 할 뿐이었다. 버니도, 태영도, 자동차도 걱정이었다.
“오늘 떠나야 돼.”
차온은 냉장고 위에 짐보따리를 올려 두고 시열을 깨우러 갔다. 오늘따라 차온이 먼저 기상했음에도 방해가 없었다. 평상시라면 왜 일어나냐며 그녀의 몸을 억지로 눕혔을 터였다.
“이시열 씨.”
차온은 왜 안 부리던 늦장을 부리냐 하며 시열의 어깨를 흔들었다. 시열의 체온이 높았다. 몸이 거의 절절 끓는 기름 난로였다. 시열은 베개를 적실 정도로 땀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아뿔싸. 병이 또 도졌나 보다. 저놈의 병은 눈치도 없이 출발을 결심한 날에 오고 난리였다. 재보지 않아도 40도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그때 하늘이 준 계시인지 팟, 팟, 팟,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빨간 뿔테 안경을 쓴 의사가 여기 수리공 좀 불러야겠다고 구시렁거렸다.
“이시열 씨. 눈 좀 떠 봐요.”
들키면 자기 하나 코 깨지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환자인 시열에게 탈출이라도 모색했냐며 고문을 가할지도 몰랐다. 차온은 몸을 굴려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침대 커버에 달린 프릴이 차온의 몸을 가려 주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뾰족구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혹시 몰라 총기 같은 것은 냉장고 위에 숨겨 두었는데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다. 차온이 입술을 질겅질겅 물고 있을 때 에나멜 재질의 뾰족구두는 시열이 누운 침대 옆에 섰다.
“상태가 호전된 건지 아닌지 모르겠네.”
시열은 대답이 없었다. 의사 가운에서 청진기 달린 기기를 꺼낸 여자가 시열의 몸에 집게를 꽂았다. 여자는 포로에게 신약 테스트를 하는 사이코 의사 같지 않았다. 약을 먹어도 열이 왜 떨어지지 않느냐고, 하여간 손 많이 간다고 한 소리 하기까지 했다.
“오호.”
삑, 삑, 청진기를 치우고 기기의 스크롤을 내리던 여자가 발랄하게 외쳤다.
“세상에!”
버튼을 다다다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통화 연결음으로 이어졌다. 상대는 신호가 세 번도 채 되기도 전에 받았다. 여자는 의사 가운을 휘날리며 방 안을 돌아다니다가, 광이 나는 에나멜 구두를 소파에 올려 두었다.
“지금 당장 김 박사 좀 깨워요. 이시열 씨, 지금 상태 엄청 좋거든? 이거 성공했나 봐.”
시열을 실험 대상으로 쓴 것이 확실했다. 그 결과가 좋게 나온 모양인지 여자는 아주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가는 길에 아차차 하며 돌아와 시열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흐뭇하게 웃는 여자의 콧노래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여자는 실내 공기가 탁하다며 문을 열어 두고 떠났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차온의 사고 회로가 저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실험 대상으로 쓰는 포로에게 하는 행동치고는 격의 없이 친근한데다가 문까지 환기하듯 열어 두었다. 지금 시열은 도망갈 상태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보통의 포로에게 할 법한 행동들이라곤 도저히 생각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열을 회유하느라 이곳에 가두어 둔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침대에 냉장고까지 갖춘 방을 포로에게 단독으로 내어 줄 이유가 그들에겐 없었다.
시열이 독보적으로 좋은 정보를 지녔든가. 그것도 아니면 이런 대접을 해 줄 만큼 가치 있는 포로든가. 하지만 차온이 알기로 시열은 비안전지대에 있는 뒷골목 조직의 직원일 뿐이었다. 얼굴 반반한, 성질 좀 못된, 특수한 신체적 능력이 있는 조직원 말이다. 찾아보면 그런 특징은 쌔고 쌨다. 아마 그럴 거다.
먼지 구덩이를 빠져나온 차온은 열려 있는 문을 보고 이거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밖으로 나가면 위험해질 확률이 높지만, 태영의 생사도 확인해 볼 겸 나가보는 게 좋겠다. 어차피 이 복도는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으니 저 여자만 잡아서 심문해 보면 어떨까.
차온은 까치발을 들어 냉장고 위에 올려둔 총기를 챙기고 잠든 시열의 뺨에 이별 키스했다. 일어나서 놀라지 말고 기다려요. 금방 올게요. 듣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인사까지 해줬다.
스위치가 고장 나 전등이 들어오지 않는 복도. 여자의 향수 냄새가 위층으로 통하고 있었다. 삼 층은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에탄올 냄새가 났다. 왼쪽에서 두 번째 방. 십자가 모양의 명판이 문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차온은 마른침을 삼켰다. 총기가 있으니 쫄 것 없다. 벽에 등을 붙이고 주변을 경계하며 걸었다. 이 삼 층에 여자를 제외한 사람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적어도 차온이 지내는 동안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라면 제압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 여자가 방에서 열쇠 꾸러미를 들고나왔다. 반대쪽 복도로 가는 것을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쫓아가야 하는데 본능적인 궁금함이 들었다. 천천히 여자의 뒤를 밟아 따라가면서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는 방의 안쪽을 흘깃 보았다.
어디서 많이 봤다. 초면이 아닌 물건들이었다. 여자의 방에, 유리 진열장에, 책상에 아는 물건이 보였다. 기성품이 기본인 세상에서 물건 같은 게 대수냐. 하지만 쉬쉬 넘겨서 안 된다는 감 같은 것이 찌르르 꽂혔다. 동물적인 감으로 연구실 안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열쇠 꾸러미는 장식으로 들고 다니는 게 여자의 습관인가 보다. 전자식 자물쇠는 오픈되어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차온은 웬만해선 한 번 본 것들을 잘 잊지 않았다. 시열의 책상에서 봤던 물약들이었다. 똑같진 않아도 그 비슷한 것들이 놓여 있었다. 색깔별로 약물을 담은 유리 플라스크, 나비를 산 채로 담근 유리통, 배열만 다르지 내용물이 똑같았다.
그때 후크 선장의 시계처럼 위험을 알리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여자 외에 한 명 더 있었다. 이런, 낭패였다. 차온은 연구실이라고 적혀 있는 안쪽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아.”
연구실 왼편에 사람이 있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넘어진 차온의 눈이 알몸의 남자를 훑었다. 1호기라고 적힌 남자는 벌거벗은 채로 사지가 벨트에 묶여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천장에 정육점의 살코기처럼 매달렸다. 죽은 사람이었다.
연구실 쓰레기통에 컵라면 용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철제 의자에는 두툼한 담요도 걸쳐 있었다. 비위도 좋지. 여자는 여기서 먹고, 자고 한 모양이었다.
“그럼 성공한 겁니까?”
“그 정도가 아니라구요. 이건 혁신이에요, 혁신.”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가 연구실 천장까지 올라갔다.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제법 익숙했지만, 코너에 몰린 차온은 일일이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잡히면 저 실험을 똑같이 당하게 될 거다.
두려움에 찬 차온의 눈이 다급하게 연구실을 훑었다. 가운을 걸어 놓는 캐비닛이 보였다. 공간을 찾아 몸을 구겨 넣고 캐비닛의 문을 닫은 순간이었다.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가 지긋지긋한 연구실 생활도 청산할 날이 머지않았다며 소리쳤다.
“이시열 씨가 정신만 차리면 해 보고 싶은 실험이 아주 산더미라구요. 이건 신인류로 나아가기 위한 초석 같은 걸지도 몰라요. 전 세계가 나를 주목하고…….”
캐비닛에 난 작은 구멍으로 차온은 바깥 상황을 살폈다. 여자가 며칠 전엔 깔끔했는데 정신줄 놓고 연구하다가 보니 이렇게 됐다며 책상 위에 널브러진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남자는 뒷모습만 보였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차온이 남자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파란 박스에 짐을 쓸어 담아 넣는 것으로 정리를 끝낸 여자가 웃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복귀하면서 큰 물고기 여럿 낚았다면서요? 이참에 물갈이 한번 한다고 다들 어찌나 신나 있던지. 줄줄이 사형대로 가는 것 보고 나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 일이 이렇게 됐으니 곧 위로 가시겠네요? 따님 보러?”
한 자 한 자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따님?
“못 봅니다. 아직 남은 임무가 있어서요.”
기억났다. 중후하고 점잖은 목소리의 주인. 캐비닛 쪽으로 돌아선 남자는 정복에 감색 코트를 걸친 군인의 모습이었다. 갓 입대한 풋내기로 보이진 않았다. 군모에 계급장이, 가슴께에 훈장을 달았다. 행방이 묘연하던 그 버니였다.
버니는 여자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연구실 난방이 별로라 미안하다고 했다. 실험체를 슬슬 교체해야겠다는 여자의 말에는 서류가 준비됐으니 그러시라고 했다. 박쥐처럼 권력에 붙은 버니가 배신자였다. 그래서 그들이 무기를 거래하는 날 군인이 현장을 덮칠 수 있었다. 하지만 차온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펑크 내에서 가장 순박하고 성실한 사람을 꼽자면 버니 한 사람뿐이었다.
요즘 세상에도 사람을 믿니. 한동안 잊고 살았던 원장의 재등장이었다. 차온의 머릿속은 에어컨을 튼 것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래. 버니가 배신자였다. 손에 쥔 총기가 달달 떨렸다.
“아, 아 그리고 그 원본 피의 주인공. 아직도 안 잡혔어요?”
“예.”
“아, 왜 이리 굼떠요. 조그마한 여자애 하나 찾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원본 피. 신경질적인 여자의 목소리. 여자는 버니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당부하듯이 말했다.
“꼭 데려와야 해요. 이시열 씨가 여기서 보다 완벽해지려면 그 애가 필요해.”
“예.”
버니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의사 가운을 입은 여자는 확답을 듣자마자 서로 일 때문에 얼굴 붉히지 말자는 뜻이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내 두 사람은 시열이 있는 아래층으로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파스타인지 삼겹살인지, 저녁 메뉴 토론을 하며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차온은 이성적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이시열 씨가 완벽해지기 위해 필요한 원본 피. 아무리 긍정적으로 사고를 돌리려고 해 봐도 시열과 버니가 한패라는 가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시열은 곧 펑크를 떠날 것이라고 예고했었다. 보수를 줄 테니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하.”
캐비닛을 열고 나온 차온은 빈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갈아 치워진다는 실험체의 앞에 섰다. 그러니까 버니와 시열은 첩자인 것이다. 거기까지는 머리로 납득이 됐다.
“그러니까.”
버니나 시열의 눈에는 이 남자나 자신이나 똑같다는 거구나.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같은 동료로 본 건 자신뿐이었다. 그들에게 보육원을 나온 한 마리의 실험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에겐 자신의 마음이 필요하지 않았다. 피, 몸뚱어리, 그런 게 필요해서 잘해줬나 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를 껴안고 좋아한다고, 구하러 와서 다행이라고 했다.
“흐, 으으. 이, 멍청이.”
얼마나 가진 게 없으면 관심 좀 줬다고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까. 속인 놈보다 속은 놈이 욕먹는 세상이었다. 속인 시열보다 속은 자신이 초라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다음 계획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물이 멎지 않아 초조하게 연구실 안을 돌아다닐 차였다. 허리가 잘록한 유리병에 시선이 갔다.
수집욕이 들 만큼 무늬가 인상적인 나비였지만 그래 봤자 저 유리 플라스크 안에 갇힌 신세였다. 사람은 두 쌍의 날개밖에 보지 않는다. 더듬이와 겹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가명으로 나비라는 이름을 짓자 시열이 웃었던 것이 생각났다. 차온에게 그 작은 플라스크는 자신을 향한 조롱처럼 보였다.
차온은 괴성을 지르며 그것을 들어 내리쳤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차온의 이성도 돌아왔다. 추락하는 나비의 모습은 실험용으로 쓰일 때보다 나았다. 자유로워 보였다.
이게 울 일인가. 울 일이어도 울지 말자. 울고 싶어도 울지 말자. 울 자격이 없다.
애초부터 자신은 시열의 돈을 받고, 시열은 자신의 일부를 받기로 계약한 관계였다. 이게 울 일인가. 배신당했다고 바닥에 엎어져 우는 게 우스웠다. 아무도 가족이라고 한 적 없고, 친구라고 한 적 없고, 연인이라고 한 적이 없었다. 혼자 착각한 바보가 이용하라고 광고를 냈을 뿐이었다. 스스로 실험체가 되기 위해 찾아오다니. 이시열은 복도 많지.
역시 이 지구엔 자신이 원하는 게 한 가지도 없었다. 떠나야 했다. 이 지구를 떠나서 자신은 어떤 삶이든 소화해 낼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 했다. 차온은 소리 없이 빈 복도를 빠져나갔다.
일어나서 놀라지 말고 기다려요. 금방 올게요.
그의 뺨에 입을 맞춘 게, 삶이 사랑스럽다고 느낀 게, 수치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 * *
펑크에서 내어 준 자동차는 군 시설 앞에서 발견되었다. 시열, 버니, 태영의 지문이 등록되어 있어 옮기는 일 자체는 쉬웠다. 뒷자리에서 발견된 군인 시신 둘은 장례를 잘 치러주었다. 그로 인해 군 내부에서 태영의 사형을 주장했지만 버니는 그 의견을 철저히 묵살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이 군 시설에서는 시열이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열이 사형을 반대한다면 잠잠해질 여론이었다. 하나 잡혀 온 태영은 고작 그 정도의 사면으로 감사할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곡기를 끊다시피 하고 있다는 보고가 매일같이 책상으로 올라왔다. 버니는 침음에 빠져 그 고집쟁이와 마주했다.
“이야, 여기까지 웬일이야?”
태영이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너 보러.”
태영은 감옥에 누워 선탠하듯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아무 말을 하지 않거나, 하루 종일 욕을 한다고 들었다. 워낙 혈기 넘치는 동생이라 배신감을 크게 느낄 줄은 알았다. 사람 복장 터지게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태영은 삐치기 시작하면 풀어 줄 때까지 만리장성을 쌓는 놈이었다.
“형, 딸 있다며?”
버니는 태영이 저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그 장단에 함께 놀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총상을 입고 쓰러진 태영의 목을 지켜 낸 건 버니였다. 비록 지금은 감옥에 갇혀 있는 처지이나 버니는 태영을 이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시열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에게 태영은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이해해라, 태영아.”
“이해는 씨발, 두 번 이해했다간 대가리에 구멍 뚫리겠네.”
태영이 아픈 건 총상이 아니라 마음의 총상일 터였다. 솔직히 둘이서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구해 내리라 하며 여기까지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차온을 데리고 오라고 보낸 군인 하나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즈음 버니는 태영과 차온이 모든 실상을 눈치챘거나 아니면 지레 겁먹어 펑크로 돌아갔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펑크도 수색 대상이라 차온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시에 덮친 펑크 내에도 차온은 없었다. 특별히 인상착의까지 알려 줬지만 차온은 펑크 내에도, 그 근방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분명 태영과 함께 있었던 게 분명한데 저 고집불통은 그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았다.
“태영아. 차온 양, 어디에 있니.”
“내가 그 계집애 행방을 어떻게 알아.”
태영이 자식 지키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쏘아보았다. 버니는 그것이 태영의 보호 본능과도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 근방은 사막이나 다름없고, 며칠 버티지 못할 거다. 차라리 일찍 알려 주는 게 차온 양한테 더 좋을 수도 있어.”
“걔한테 왜 그렇게 집착해? 아, 우리 시열이 형이 혹시 필요하다고 잡아다 달래?”
“차온 양에 대해서는 너랑 더 얘기할 것이 없다. 애초부터 우리 쪽에서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던 사람이고…….”
“나는?”
가만히 듣고 있던 태영이 유치장 안에서 싸늘하게 버니를 노려보았다. 버니는 태영의 눈에 담긴 원한을 똑바로 보기 어려워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필요 없어?”
첫 만남 때 태영은 깡마른 소년이었다. 그 깡마른 소년이 어찌나 악바리처럼 달려들어 대들던지. 원래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시열의 변덕 때문에 한 팀으로 받아들였다. 뒷골목에서 삥이나 뜯던 양아치라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으나 의지할 가족이 없어 보여 짠하기도 했다.
정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정을 한껏 줘 버렸다. 시열이 태영을 한 팀으로 받아들인 건 밖으로 조사하러 다닐 때 펑크의 눈을 피해 정상적인 팀으로 위장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평범한 양아치 하나가 끼어 있으면 펑크도 의심은 덜 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그런 것치고 시열은 태영에게 잘했고, 버니도 그를 친동생 이상으로 여기게 됐다.
6년이란 시간은 길었다. 소년에서 청년이 된 태영은 그들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첩자인 시열과 버니가 그에게 함부로 비밀을 발설하지 않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여기로 찾아오지 않았다면 펑크에 있다가 함께 체포되었으리라. 그러면 버니는 그를 몰래 구명해 줄 생각이었다.
“됐다. 피차 기분 더러운 얘긴 여기서 그만하자.”
태영은 등을 유치장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5초도 안 돼서 눈을 떠 버니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걘 왜 찾아? 궁금하니 물어나 봅시다.”
윤 박사는 오래전부터 시열의 몸을 도맡고 연구해 온 과학자였다. 그 여자의 말은 반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뇌리에 박히는 말은 몇몇 있었다.
“보내준 피들을 검사해 봤을 때. 이 여자애는 사람이라고 보긴 좀 어렵고…….”
“예?”
“부모가 좀 이상했을 것 같은데. 애를 낳는 과정에서 무슨 심각한 오염 물질에 노출됐다든가. 아니면, 변이 짐승에 물려 죽기 직전에 애를 낳았든가.”
윤 박사는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버니에게 싱긋 웃어줬다.
“여하튼 평범한 쪽은 아니에요.”
차온은 딸 같이 보듬어주고 싶은 여자였다. 자신의 딸과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말투에, 비슷한 분위기에, 겹쳐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구식 리볼버를 들고 보육원 밖으로 나온 차온을 볼 때마다 UT 행성에서 부모도 없이 버티고 있을 딸이 떠올랐다.
잘해 주려고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눈이 가고, 손이 갔다. 현재 불법적으로 UT 행성에 머물고 있는 딸을 위해서라도 이런 감정은 접어 둬야 했지만, 버니는 이 이상으로 차온을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유치장 열쇠 구멍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쇠창살이 찰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무얼 하든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있었던 태영은 유치장 문이 열리자마자 눈빛이 돌변했다. 며칠을 굶어서 그런지 살이 빠지고 피부가 거칠어졌다. 태영의 허벅지 위로 버니는 준비했던 것들을 던졌다.
“그거 가지고 2급 도시로 들어가. 신분증이랑 돈은 어느 정도 준비해 뒀어. 이후는 너 하기에 달렸지만.”
위조 신분증과 돈을 구하느라 며칠을 썼다. 하지만 과연 태영이 쉽게 받아 들까. 태영의 자존심과 고집을 생각한 버니가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태영은 순순히 그가 던진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걸 받느니 혀를 깨물어 죽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태영을 보고 버니가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등에 차가운 총구가 닿았다. 태영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낄낄 웃었다.
“형. 여전히 밉지만 선물은 고맙게 받을게.”
등 뒤의 총구를 느낀 버니가 뒤돌아보려고 할 때였다.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차는 어디에 있어요?”
차온이었다. 설마 이 군 시설 내에 있었던 건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차온의 목소리는 말 걸기 어려울 만큼 차갑고 딱딱했다. 버니는 손을 머리 위로 들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빨개진 차온이 서 있었다. 그를 질타하듯 건조한 시선을 던졌다. 총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차온의 뺨에 피가 묻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분명 실랑이가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이 둘이 여기를 탈출하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었다. 일부러 사람을 다 물린 다음 여기에 온 버니 덕분인지, 다행히 군 감옥까지는 깡으로 뚫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버니. 군인이었어요?”
담담하게 물어보는 차온의 목소리에 버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영이 침입한 당시에 온 부대의 이목을 끌 만큼 난리를 부려 설마 차온과 함께 들어왔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보니 차온이 잡히지 않게 하려고 시선을 끌 작정이었나 보다. 유치장 문을 열고 나온 태영은 버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잘 먹고 잘 살라 말하는 태영이 차온의 옆으로 걸어갔다.
“이시열 씨도 군인이에요?”
버니는 차온의 눈에 서린 경계심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다른 것보다 차온은 시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버니는 눈치껏 손을 내리고 몸을 낮췄다.
“차온 양. 태영이랑 함께 떠날 생각입니까?”
“나를 실험체로 쓸려고 했나요?”
“아닙니다.”
“거짓말.”
연구는 계속될 테지만 차온을 실험체로 쓸 생각은 버니는 물론이거니와 시열에게도 없었다. 분명 시열은 이번 일을 계기로 차온이 제 직속에 속하도록 만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단단히 오해한 차온의 눈은 경계를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차는 어디 있어요?”
버니의 대답은 듣지도 않겠다는 것처럼 차온의 눈이 냉정하게 빛났다. 버니는 더 이상의 설득이 필요하지 않음을, 아니, 먹히지 않음을 깨우쳤다. 차온의 눈은 마음의 빗장을 굳게 닫아 버린 표정이었다. 잡아 둔다고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저건 잡아 두겠다고 가두어 놓으면 자결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버니는 마지막 설득을 계속했다.
“여기에 있으면 확실한 신분도 얻을 수 있고, 나중에 UT 행성으로 갈 수 있는 기회도 생길 겁니다. 내가 보장할게요.”
“남이 보장해 주는 건 이제 안 믿기로 했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차 어디에 있는지만 말해요.”
“나간다고 하더라도 추격이 따라붙을 겁니다. 그리고 태영이 신분증은 마련해 뒀지만 차온 양 거는 마련해 두지 않았어요. 3급 이상의 도시로 들어가기 어려울 겁니다.”
“그건 버니보다 내가 더 잘 알아요. 그러니까 충고 그만하고 차, 어디에, 뒀는지나, 말하라고요.”
차온이 총기에 충전을 하는 소리가 유치장 내에 윙 울렸다. 당장이라도 쏠 것 같은 그 눈은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가방을 챙긴 태영이 그 뒤에 서서 손가락 욕을 날렸다. 태영은 생각 외로 감정 정리를 빨리 끝낸 표정이었다. 설득을 포기한 버니는 코트 안쪽에서 울리는 전화 신호를 껐다. 기왕 떠난다면 두 사람이 잡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조금 있다가, 두 시간 뒤에 나와요. 왼쪽으로 나와서 빨간 표지판이 있는 쪽으로 걸어 나오다 보면 차가 있을 테니까. 문도 열어 둘 테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북쪽으로 달려요.”
버니의 제안에 차온은 수긍하지 않았다. 차온은 어깨로 뺨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오다 보니까 사람이 없던데. 윤태영 씨 보내 주려고 경비 서던 사람들 다 물린 거죠?”
“네.”
“그럼 지금 떠날래요.”
“두 시간 뒤에 더 안전하게…….”
“두 시간 뒤에 할 수 있는 일이면 지금도 할 수 있겠죠. 추적하지 말라고도 안 해요. 어쨌든 도와줄 거라면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게 해 줘요.”
두 시간도 기다려 주지 못할 만큼 신뢰를 잃었다는 소리였다. 버니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온은 총을 장전해 그의 등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유치장을 나가는 그의 뒤를 따라서 걸었다.
소녀는 여인이 되고, 여인에서 세상의 일원이 된 차온은 다시 한번 사람 믿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근래 들어 임무 밖의 건에 대해 소홀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복귀를 우선시하고 둘의 마음을 안중에 두지 못했다. 결국 그들의 실책이었다. 버니는 더는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