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53
* * *
그 시각.
영국의 수도. 런던.
우진은 아침 일찍부터 숙소를 나섰다.
우연히 닿은 인연들과 함께 쌓았던, 평생 잊지 못할 밤.
그날 이후 우진은 이틀을 꼬박 숙소에서 보낸 뒤, 3일째가 되어서야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 이유는,
「릴리. 저를 뒤풀이에 초대해주셨던 날, 가면서 얘기했었던 제 출연작들입니다. 원활하게 보실 수 있게, 자막도 넣어놨어요.」
「헐?! 우진이 직접 자막을 추가했단 말인가요?」
「맞아요. 당신이 저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대한 작은 보답입니다.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어요.」
「와, 정말 고마워요! 우진의 연기가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집에 가자마자 윌리엄을 꼭 끌어안고 볼 겁니다.」
「아, 참! 그 어떤 피드백도 달게 받을 준비가 됐으니,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제 이메일입니다.」
약속한 대로, 노트북에 저장해두었던 출연작 리스트를 USB에 담아 릴리에게 주었다.
드라마 두 편과 영화 두 편(아직 미개봉작인 은 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한 작품이니만큼, 아쉽지만 제외하기로 결정했다.)에 직접 자막을 씌우는 작업은 굉장히 지치고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한 보람과 즐거움이 덕에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USB를 받아든 릴리의 눈빛에는 고마움과 기대가 잔뜩 섞여 있었다.
우진은 릴리에게 윌리엄을 찾아주었고, 릴리는 우진에게 극장 최고의 좌석과 더불어 세계적 인사들과 마음껏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에 대한 재보답으로, 우진은 일일이 자막을 씌운 본인의 출연작들을 릴리에게 아낌없이 주었고.
USB를 받아든 릴리가 재차 우진에게 보답을 주었으니,
「웨스트엔드에서만 통용되는 프리미엄 티켓이에요. 넉넉하게 공연 2~3일 전쯤에 극장 측에 제시하면, 그 어떤 공연도 본인이 원하는 날짜에 관람할 수 있죠. 티켓 뒷면에 적힌 기간 동안, 부담 없이 모든 공연을 즐길 수도 있고요.」
본인이 주는 것보다 항상 배 이상으로 큰 선물을 주는 릴리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 우진은 프리미엄 티켓만큼은 거절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Enjoy, your musical land!」
릴리는 뮤지컬의 본고장에서, 뮤지컬의 매력에 푹 빠져달라는 당부 아닌 당부를 하며 티켓을 우진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우진은 결국 감사한 마음으로 그녀의 선물을 받아들였고,
‘Give and Take’.
오고 가는 선물 속에서, 두 사람의 우정의 싹은 더 활짝 피어올랐다.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으며 앞으로도 종종 연락하기로 했다.
우진으로는 첫 영국인 친구가, 릴리로서는 첫 한국인 친구가 생긴 순간이었다.
베스트 프렌드가 준 티켓을 들고, 우진은 오늘도 웨스트드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 노선은 기존 계획과는 많이 달라질 것 같네.
이러다 여행 기간 내내 웨스트엔드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듯싶다.
…박미영 팀장님, 쏘리.
추천해주신 곳들은 꼭 다음 기회에 가도록 할게요….
릴리와는 마지막 공연 때 한 번 더 재회하기로 하였으니, 오늘은 어떤 작품을 관람해볼까나.
– ♬♬♬♬♬
그때였다.
인근 개방형 카페 라운지에서 공연 라인업 안내 책자를 보며 작품을 고르던 우진의 귓가에 아름다운 멜로디가 들리기 시작했다.
‘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길 한복판에 인파가 몰려있었다.
길거리 공연인가?
어느새 안내 책자를 덮은 우진은 자연스럽게 인파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악이, 그를 인도했다.
143화
버스킹(Busking).
공연자(Busker) 본인이 들고 다니는 악기나 마이크, 혹은 휴대용 앰프 등으로 길거리에서 행인들과 음악으로 소통하며 자유롭게 공연하는 것.
문화지구에서 버스킹이 활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 ♬♬♬♬♬.
작지만, 은은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
우진은 그대로 홀린 듯, 멜로디를 따라 인파가 몰려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
이내 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지어졌다.
눈앞의 광경은 흔히 머릿속에 그려지는 버스킹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두 명의 남녀 배우가 거리에 서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MR 외에는 어떠한 장비도 없다는 것.
심지어 마이크도 없이, 오직 본연의 목소리로만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뭔가 속삭이듯이 작게 들렸던 것도 이 때문이랴.
오호, 좀 신선한 형태의 버스킹인걸?
지나간 시절, 나는 꿈을 꾸었죠. 희망은 높았고, 인생은 살만한 것이었죠♪]
두 남녀의 합창곡.
뮤지컬에 갓 입문한 사람이 들어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남자는 테너(tenor)였고, 여자는 소프라노(soprano)임을.
종장으로 치닫는 노래는, 고음의 음역임에도 무척 편안하게 들렸다.
안정된 가창력이었고, 가사도 참 좋았다.
노래를 귀에 담는 와중에 핸드폰으로 가사를 검색해보니, 에 나오는 곡이더라.
[…But there are dreams that cannot be, and there are storms we cannnot weather!…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는 꿈도 있고, 이겨낼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칠 때도 있죠!] [I had a dream my life would so different from this hell I am living, so different now from what it seemed, Now, life has killed the dream I dreamed….
나의 꿈은 내가 사는 이 지옥 같은 삶과는 너무나도 달랐어요. 지금은 내 꿈과 너무나도 달라요. 인생은, 내 꿈을 짓밟았어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진실한 사랑과 꿈을 접어야 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팡틴.
그녀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노래의 요동치는 구성이 두 배우의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
“…….”
가만히 서서 눈을 감은 두 배우의 호흡이, 적막을 불러일으켰다.
자연스레 입가에 두 손을 모은 우진도 숨을 죽인 채, 슬픈 표정의 광대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 스읍.
두 명의 팡틴이 서로를 향해 몸을 돌리며 호흡을 다듬었다.
[The dream, the dream… that I, dreamed.꿈, 내가 꾸었던… 그 꿈을.]
마지막 가사는 마치 내레이션처럼, 힘을 쫙 뺀 상태에서 입 밖으로 흘렀다.
‘크으-.’
꿈이란 단어가 유독 강조되는 한 줄의 노랫말이 주는 힘은 강렬했다.
짜릿한 3분이었다.
“Woh!”
“Incredible!”
– 짝짝짝짝짝!
길거리 한복판이 3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웨스트엔드 극장 무대로 바뀌는 매직.
노래를 마친 남녀의 얼굴엔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I dreamed a dream’이 끝나자마자 쉴 틈 없이 노래를 계속 불렀다.
와 등 유명한 작품들에 등장하는 대표곡 공연이 이어졌고, 그들은 곡의 흐름에 맞추어 가벼운 안무도 섞어가면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와, 나도 진짜 노래 잘하고 싶다….’
웨스트엔드에 입성한 날부터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생각이었다.
음악만큼이나 버스킹이 자유로운 예술이 없을뿐더러, 목소리 하나만 있어도 지나가는 청중들과 즐겁게 소통할 수가 있을 테니까.
한참을 계속해서 노래를 이어가던 두 남녀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MR을 껐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당장 자리를 정리하는 건 아니었다.
끝난 건 아닌 것 같고, 인터미션인 건가?
웨스트엔드답게, 길거리 무료 공연도 유료 공연처럼 형식이 딱 정해져 있나 보다.
우진의 눈에는, 보면 볼수록 신기한 공연 문화였다.
“Thank you, to be continued!”
두 배우가 인사말을 외쳤고, 그제야 넋을 놓고 공연을 즐기던 청중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금세 조용해진 길거리.
우진은 두 배우 앞에 거꾸로 놓인 모자 속에 10파운드짜리 지폐 한 장을 넣었다.
“공연 잘 봤습니다. 좋은 노래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페에서 노래에 이끌려서 왔을 때 손에 들고 있었던 블랙커피는, 양이 그대로였다.
그 정도로, 공연에 푹 빠져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아티스트에게 제값을 지불하고 인사를 전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우진이 지나가는 청중들 사이를 뚫고 굳이 두 남녀에게 다가가 입을 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
그때였다.
우진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기도 전에, 두 남녀의 눈이 커졌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뭐지, 왜 그런 거지?
“혹시….”
남자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찰나, 여자가 슬쩍 남자의 팔을 터치했다.
남자가 말을 거뒀다.
“네?”
우진이 되물었다.
“아, 아니에요! 저희의 부족한 공연을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저희는 항상 여기서 공연을 하고 있으니, 언제든 찾아주세요!”
그들이 어색한 미소로 화답했다.
뭐지 싶었지만, 우진은 개의치 않고 그들에게 웃어 보인 뒤 돌아섰다.
아, 잠시만.
그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기에.
우진은 다시 몸을 돌려 눈이 휘둥그레져있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네네.”
“성함을 여쭤도 될까요?”
“저, 저희요?”
“네, 당신들의 공연이 참 인상 깊었어요. 관객으로서 아티스트에 대해 알고 싶어서 여쭙습니다.”
우진의 물음에,
“저는 피터(Peter), 이쪽은….”
“앤(Anne)이에요!”
얼굴에 화색이 돈 남녀가 대답했다.
“피터, 앤…. 기억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공연하시길 바랄게요!”
“네, 감사합니다!”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 호로록.
이미 식어버린 아메리카노의 맛과 향은 왠지.
뜨거울 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
* * *
Phantom of the Opera.
몇 번을 고심한 끝에, 오늘 첫 공연은 이 녀석으로 결정했다.
마침 세계 4대 뮤지컬이라 불리는 작품들인,
얘네들이 각각 2주일 간격으로 예정되어있는, 그야말로 ‘美친 라인업’이 대기 중인 시기에 웨스트엔드에 온 것이 참 행운이었다.
타이밍이 참, 살아있네!
“, 프리미엄 등급 티켓, R석 1자리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릴리가 준 티켓은, 사실 당일 예매도 전혀 문제없이 ‘프리패스’가 가능한 사기템(?)이었다.
엔딩 공연 때 반드시 선물을 하나 사 가야겠다고 뿜뿜하는 마음을 뒤로하고.
왕립 라이시움(Royal Lyceum)극장에 들어섰다.
‘와아.’
항상 느끼지만, 극장들부터가 예술이다.
예술의 전당이 수십 개씩 있는 것 같달까.
– 스윽.
우진이 펼친 수첩에 적힌 ‘왕립 라이시움’ 글자에 줄이 그어졌다.
웨스트엔드를 구성하는 50여 개의 극장 명을 수첩에 전부 표시해두었으니, 하나씩 지워가는 재미가 있다.
잠시 후,
– 뚜, 뚜뚜뚜뚜뚜! 뚜둔, 뚜뚜뚜뚜뚜!
무대의 막이 오르고, 웅장한 메인 테마곡이 연주되었다.
워낙 유명해서 첫 음부터 귀에 익숙한 음악이 관객들의 집중을 고조시켰다.
동시에, 배우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의 히로인은 에스메랄다였으나, 오늘의 무대를 빛내는 히로인은 바로 크리스틴.
그녀를 향한 ‘오페라의 유령’ 팬텀의 2시간이 넘는 감정의 습격.
음악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파워가 넘치는 음악으로 무장한 무대 위 배우들은 관객들의 혼을 쏙 빼냈다.
인터미션 후 공연장에 깔린 암전이 끝이 났을 때,
“어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