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인류를 위한 길
“최소 100명의 사이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었는데.”
“유감입니다. 연락이 닿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거절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위기 상황 아닙니까? 머리에 총을 들이대서라도 끌고 갔었어야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정말로 맞는 말이었다.
맨해튼이 통째로 날아가는 것보다는 인권을 조금 무시하는 게 나았다.
물론 인권은 어떤 경우에도 훼손되어선 안 되지만 죽음이 확정된 건 아니지 않은가.
통수권자 입장에서 뉴욕을 보호하기 위해 수십 명의 신병을 잠시 확보하는 건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문제는 해군의 자부심이 지나쳐 자만심으로 변질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세계 최강 함대면 뭐 하나, 우주에서 온 괴물 하나 못 잡는데.
덕분에 미 해군은 항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괴물을 놓치기까지 했다.
그 결과는 맨해튼의 궤멸이었다.
번스타인 대통령은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십시오. 이번 사태로 최소 5만 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번스타인 대통령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죽어가는 자의 것이었다.
맨해튼이 궤멸된 가운데 감마 파이브는 언제 재출현할지 알 수 없고 내홍까지 일어났을 테니 죽을 맛이겠지.
여기서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스 플릿이 가서 플레이그를 유인하고 바다에서 반응탄을 터트리면 된다.
하지만 유지하는 뭐든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번 기회에 미국이라는 거인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었다.
‘모든 미국인의 의식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여론을 일으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기간에 여론을 환기시킬 목적으로 자주 이용되는 것이 전쟁이다.
다만 현재의 미국은 인류연합과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다.
괴물만 해도 골치 아픈데 우주전함에다 반응탄까지 가지고 있는 상대와 전쟁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제임스 상원의원을 비롯한 주전파도 유지하와 전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건 빈틈.
어떻게든 인류연합의 약점을 찾아서 쑤시고 싶은 심정이었고 유지하의 과거를 폭로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별 재미를 못 봤으니 버티면서 다음 수순을 밟을 텐데 그걸 극단적으로 가속화시키는 게 유지하의 계획이었다.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욕먹을까 봐 꺼려지는군요. 미국인들은 나를 싫어하잖습니까.”
“일부 극단적인 시민이 있을 뿐입니다. 전부라고 오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아무튼 그들의 목소리가 상당히 크게 들리는 건 사실입니다. 내 과거에 음모를 덧칠한 다큐멘터리도 그렇고요.”
역시 그걸 막았어야 했나…….
번스타인 대통령은 그가 기분이 나빠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유지하는 직설적인 인간이며 시간낭비를 적보다 더 싫어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돌리는 건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는 비서관을 포함해 주변을 물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누는 대화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겁니다.”
“좋습니다. 나는 전쟁을 원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때가 있죠.”
“그게 지금이라는 겁니까?”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지구인끼리 싸울 때가 아니며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요.”
“그건 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솔직히 말해 주십시오. 가능합니까?”
번스타인 대통령은 확신하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미국과 인류연합의 화합이 진심으로 가능한가?
미국은 인류연합의 대두에 대놓고 초조함과 불평을 쏟아내고 있었으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견제하려 애쓰고 있었다.
단지 그게 먹히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들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남기 위해선 인류연합을 꺾는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지만 군사 전문가들은 그것조차 어렵다고 평했다.
미군은 확실히 강하고 규모도 거대했지만 핵심 전력에서는 인류연합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메가시티를 제외한 여러 도시는 불바다가 될지도 모르지만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상실한다는 게 여러 군사 전문가들의 평이었다.
그렇게 서로 경계심과 적대감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협력이 가능하리라 생각되진 않았다.
‘아니, 미국이 일방적으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의외로 인류연합은 미국 자체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자기들의 계획이 더 중요하다는 거겠지.
다만 지구에 기반을 둔 이상 미국을 무시할 수도 없으므로 언젠가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오게 되어 있다.
‘그게 지금이라는 건가.’
번스타인 대통령은 생각을 가다듬고 말했다.
“한 번의 전쟁으로 그걸 바꿀 수 있겠습니까?”
“어렵겠죠. 하지만 여론을 환기시킬 수는 있을 겁니다. 인류연합을 적대적으로 대한다면 손해만 본다는 것을요.”
“많은 희생이 나겠군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큰 희생이 날 겁니다.”
바로 지금처럼…….
유지하의 말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큰 희생을 피하기 위한 작은 희생이 필요한가?’
이상론자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외치겠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인류 역사상 전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측의 의견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에는 전쟁밖에 해결책이 없을 때도 있다.
유지하는 거기에 덧붙였다.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딱 한 번만 할 겁니다.”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전쟁이라, 가능할까요?”
“가능하게 만들지 않으면 죽습니다.”
누구에게 죽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번스타인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쟁을 결심하더라도 의회의 승인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인류연합이야 유 대통령의 말 한 마디면 바로 돌입할 수 있겠지만…….”
“묵인만 하면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민주당 의원들이 자료를 대준 다큐멘터리가 마냥 헛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유지하를 위협했던 납치와 테러 같은 것들이 어쩌면 그의 의지와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직후 그걸 계획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유지하의 진짜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일단 이번 사태를 마무리 짓고 바로 사임하십시오. 그럼 승계서열상 제임스 상원의원이 대통령이 되겠죠.”
“아마도 그렇게 될 겁니다. 임기는 별로 안 남겠지만…….”
1년 남짓한 임기의 대통령을 누가 하고 싶을까마는 사태가 끝난 후라면 의외로 달려들 사람이 많을 수도 있다.
수습에서 적당한 리더십을 보이면 지지도가 올라가 최장 8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상원의원이 대통령이 되면, 나는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할 겁니다. 그리고 미국의 정보기관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여러 기술을 내놓을 거고요.”
“도저히 기다릴 수 없게끔 만든다는 겁니까?”
“양자통신이면 미끼로 적당하겠죠. 전투위성도 괜찮을 것 같고요.”
“그건 가지고 있던 걸 내놓는 겁니까, 개발하는 겁니까?”
“마음대로 상상하십시오. 아무튼 나는 제임스 의원이 그걸 확인하고도 참을 정도로 인내심이 많은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수를 쓰게 되어 있다…….”
“전쟁은 보좌관들이 필사적으로 말릴 테고, 아마 방미를 유도한 뒤 납치를 시도하겠죠. 나만 확보하면 인류연합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매우 극단적인 예상이지만 상당히 현실적이기도 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게 드러났고 제재도 전쟁도 어렵다.
그렇다고 이대로 몰락하는 걸 지켜보느니 차라리 뭐라도 저지르는 게 낫다는 것이다.
평소의 미국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그들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번스타인 대통령은 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승인해야 하는 처지이고 말이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계획이군요.”
진짜 놀라운 건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유지하 그 자체다.
하긴 미국과의 전쟁을 담담히 말하는 부분에서 그가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더 말도 안 되는 걸 알려드릴까요? 제임스의 후임은 바로 당신이 될 겁니다.”
“…….”
미국의 대통령을 입맛에 맞게 갈아치우겠다는 대담한 발상에 번스타인은 할 말을 잃었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군.’
정말로 그랬다.
미국이 닥친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으며 자칫 잘못하면 수백만 이상의 인명 피해를 낼 수도 있었다.
그걸 피하고 인류연합과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어 가자는데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는 유지하의 진정한 목적을 확인하고 싶었다.
“세간에선 이런 우려가 많습니다. 유지하 대통령과 인류연합의 진정한 목적은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세계를 정복하려 했다면 왜 전쟁에 패배한 중국과 일본을 그대로 놔두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건 인류의 평화입니다. 이제 무엇으로부터의 평화인지는 다들 알겠죠.”
우주괴물 플레이그로부터의 평화.
매킨리 전 대통령 시절부터 그렇게 말했으니 그 진의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번스타인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게… 미국을 위한 길입니까?”
유지하에게 묻는 건 아니었다.
스스로 납득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미국뿐만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길입니다.”
그리고 유지하의 대답 또한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확신에 가까웠다.
“당신이 꾸었다는 인류 멸망의 꿈… 자세하게 듣고 싶군요.”
“나중에 정식으로 대통령이 되시면 그때 말하도록 하지요.”
마치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하긴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둘은 이면 계약을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
“중요한 건 제임스 상원의원을 비롯한 강경론자들이 이번 협상에 비밀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래야 정권교체를 원하겠군요.”
“어스 플릿의 출동에 대가가 없으면 의심할 테니 일단은 땅을 넘겨준다는 식으로 냄새를 흘리는 게 좋습니다.”
“어디가 좋을까요?”
“알래스카는 덩치가 너무 크니 괌과 북마리아나 제도를 포함하는 게 낫겠죠.”
실제로 넘겨준다는 게 아니라 어물쩍 냄새만 풍긴다는 것이다.
그래야 주전론자들이 나설 테니까.
번스타인 대통령은 유지하의 계획대로 흘러갈 경우 미국이 많은 지출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적으로 갈등이 줄어들었으니 국방비를 감축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더 이상 미국이 세계경찰 노릇을 하면서 5대양 6대주를 마음대로 누빌 때가 아니었다.
‘인류연합의 조력자로서 함께 우주괴물에 대항할 때가 온 것 같군.’
그는 그것이 미국의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다른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 * *
델라웨어에 상륙해 워싱턴으로 향하던 감마 파이브는 난적과 조우했다.
테라 섬으로 복귀하던 어스 플릿이 태평양과 미국을 횡단해 들이닥친 것이다.
감마 파이브는 엄청난 에테르를 뿌리고 다니는 함대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채고 선공을 가했다.
하지만 어스 플릿은 그 모든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 내면서 바다로 향했다.
하필 워싱턴 DC 상공에서 벌어진 일이었는지라 대피하던 시민들이 그 공방전을 구경했다.
수많은 레이저와 탄자가 하늘을 가로질러 어스 플릿을 공격했고 함대는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그것들을 막아냈다.
“저 배들 싸우는 것 같은데?”
“우리가 보는 게 실제 맞지? SF 영화가 아니라?”
“더 이상 우리가 세계 최고라고 자랑할 수 없게 됐네. 참 잘 됐어, 진심으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미국이 최고가 아니라고?”
“몇 년 전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믿을 수 없는데.”
“하늘에서 싸우는 함대를 보고서도 하는 말이야? 저걸 가짜라고 믿는다면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
인류연합의 실체를 알고 나면 누구나 이런 반응을 보인다.
워싱턴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인 미국의 수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지만 밖의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말 믿기 어렵지만 미국이 더 이상 기술에서 우위를 점하기 힘들다는 것도 말이다.
어스 플릿이 프랑스에서 활동한 것이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고 우주에서 활동하는 전투순양함이 등장했음에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확증 편향 때문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
인류연합의 기술발달이 워낙 비정상적인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상식적으로 중국의 압박에 허덕이던 나라가 10년도 지나지 않아 거대한 영토를 거느린 기술대국으로 성장할 줄이야 누가 상상했겠는가?
음모론자들은 수많은 사진과 영상을 무시하고 가상의 인류연합을 만들어 냈지만 그게 오늘 완벽히 깨져 버렸다.
바로 눈앞에서 그 인류연합이 싸우고 있으니 더 할 말도 없다.
“우주전쟁이군… 정말 슬픈 건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야.”
누군가가 한 말이 미국 전역에 송출되어 다양한 반응을 일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스 플릿은 묵묵히 감마 파이브와 싸우면서 서서히 체서피크만 쪽으로 유인하고 있었다.
감마 파이브는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어스 플릿에 공포를 느끼고 피하려 했다.
철컹철컹.
블랙메탈 외피가 변형되더니 녀석의 외형이 우주선 모양으로 변했다.
하지만 녀석이 생체이온 부스터를 가동했을 때에는 저궤도까지 내려온 시비르 전투지원 위성이 사출한 반응탄이 근처까지 내려와 있었다.
감마 파이브는 민첩한 움직임을 자랑했지만 트랜스폼이 끝난 그 순간만큼은 무방비 상태였다.
어스 플릿은 그것을 정확하게 노렸고 한순간에 하프늄2 탄두를 퍼부어 녀석을 멈칫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는 지근거리에서의 반응탄 기폭이었다.
쿠쿵.
체서피크 만의 상공에 거대한 빛의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주변의 바닷물이 일거에 증발했고 해안가에 정박되어 있던 배들이 충격파에 휩쓸려 엉망진창으로 부서졌다.
그럼에도 큰 피해는 없었는데, 감마 파이브가 상공으로 꽤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블랙메탈 파편이 산산이 흩어졌고 어스 플릿은 녀석의 죽음을 확인한 후 코어를 회수해 고도를 높였다.
근처의 공원에 몰려와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워후! 정말 멋진 배들이야!”
“도와줘서 고마워!”
“안에 사람 있어? 나도 좀 태워줘!”
어스 플릿은 구름 너머로 사라졌고 이제 남은 것은 처참하게 변한 맨해튼뿐이었다.
뉴욕은 물론이고 연방정부와 인근 주까지 나서서 잔해를 수색하는 가운데 대피했던 의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어스 플릿이 온 건 나쁘지 않지만 분명 대가를 요구했을 것 같은데…….”
“그 건에 관해서 로비스트들이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괌과 북마리아나 제도를 거래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인류연합에 그 땅을 넘긴다고요? 그건 믿을 수 없군요.”
북마리아나 제도는 몰라도 괌은 절대 넘길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주요 군사기지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을 넘겨준다는 건 서태평양을 비롯한 동아시아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물론 현재의 동아시아는 인류연합의 영향력이 지대하고 미국의 입김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와 테라섬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는 괌을 버린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뭣하면 정부에 직접 물어보시죠.”
얼마 후 번스타인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번 맨해튼 사태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연방 정부 차원에서 케어에 나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일단 행정부의 실책이니만큼 기자들의 질책에 가까운 문의가 쏟아졌고 대통령은 최선을 다해 답변했다.
그리고 상원의원들에게서 뜻밖의 소스를 얻은 CNN의 한 기자가 질문했다.
“인류연합이 어스 플릿을 출동시킨 대가로 괌과 북마리아나를 요구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기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지는 가운데 번스타인 대통령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여태 진중하면서도 성실하게 질문에 답해 왔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왜죠? 사실이라서 그런가요? 괌을 넘긴다는 건 곧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관리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대통령께서 이걸 모르시진 않을 것 같은데…….”
현재의 미국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관리하고 있진 않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대통령은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 하더니 짧은 인사를 남기고 퇴장해 버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곧 워싱턴 정계에 후폭풍이 불었다.
정부가 인류연합과 모종의 딜을 했다는 소문이 확산된 것이다.
―인류연합은 절대 공짜로 뭘 해주지 않는다. 맨해튼을 박살낸 괴물을 처리하는 대가로 우리의 땅을 욕심낸 게 분명하다.
―생각해 보면 유지하라는 자는 땅에 욕심이 많다. 지금 인류연합이 보유한 땅을 봐라. 괌에 욕심을 내도 이상하지 않다.
―괌은 유사시에 한반도와 테라 섬을 동시에 정찰할 수 있는 곳이다. 절대 이 땅을 넘겨줘선 안 된다.
이런 소문이 무럭무럭 피어오르자 정부에서도 당황했는지 발언이 엇갈렸다.
행정부 관료들은 들은 바 없다고 일축했고 보좌관들은 애써 말을 아꼈다.
그러는 가운데 번스타인 대통령과 인류연합 유지하 대통령 간에 비밀통화가 몇 번이나 이뤄진 게 의심을 부추겼다.
내용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의회에서 폭언에 가까운 질타가 쏟아졌고 수많은 언론에서도 이를 지적하기에 바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임스 상원의원은 워싱턴 인근의 사무실에서 몇 명과 만났다.
같은 의원과 행정부의 관료들, 그리고 전 현직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제임스 의원이 토해내는 열변을 들었다.
“이 작자가 드디어 미쳤어요. 괌을 내준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괌 다음에는 하와이이고 그다음에는 알래스카일 게 뻔합니다.”
“인류연합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요.”
“아마 이번에 도움을 받은 국가들도 많이 뜯길 겁니다.”
이번에 온 플레이그 다섯 마리는 여러 지역에 낙하했고 결과적으로 모두 인류연합이 처리했다.
거기에 대가가 없을 리 없다는 게 참석자들의 인식이었다.
“대외적으로 공표하지는 않겠지만 압박이 많이 들어가겠군요.”
“땅 욕심이 엄청난 작자입니다. 목적도 인류의 평화 따위가 아니라 세계의 지배일 겁니다. 어쩌면 플레이그에게 우릴 넘겨주기 위한 사전작업을 하는 것일 수도 있죠.”
“행정부를 탄핵하는 게 우선이지만 그 동양인을 이대로 놔두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죠?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그게 최대의 문제였다.
인류연합은 최소한 군사력 측면에선 미국조차 제치고 초강대국의 반열로 올라서려 하고 있었으며 미국엔 이를 저지할 수단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다면 전쟁뿐인데 지금의 미국으로선 불가능했다.
제임스 상원의원이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고 은근히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을 위하고 나아가 인류를 위한 길이기도 하죠. 후유증도 전쟁에 비해서는 적을 것이고 가능성도 상당히 높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를 우리가 확보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는 납치한다는 뜻이다.
그 뜻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딱 벌렸다.
이 의원은 유지하가 테러를 몇 번 당했는지 잊어버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