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97
196화 새로운 세계
우주에 나간 사람들이 지구를 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하얀 베일을 쓴 신부 같다고.
유지하는 그 말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다른 행성에 비해 지구가 아름답다는 것에는 동감했다.
그런데 여기, 지구가 있다.
녹스의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뒤 50년이나 걸려 도착한 곳이다.
과거, 혹은 평행세계의 지구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구름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대륙의 모습이 지구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유지하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지자가 마중 나와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막막하군… 그래서 여기는 확실히 지구가 아닌 거지?”
“네. 이곳은 지구가 아니며 태양계조차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우주입니다.”
아르마는 그 증거로 근처의 행성을 보여 주었다.
“이 행성은 약 80% 부피를 가진 행성과 같은 공전주기와 자전주기를 가집니다. 이중행성계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행성은 대기는 있으나 전형적인 암석행성입니다.”
“위성은 두 개로 행성의 덩치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고요. 크기는 비슷한데 공전궤도가 달라서 저 행성에서 보면 크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겠네요.”
도합 4개의 행성이 어지럽게 얽혀 돌아가는 게 이 행성계라고 할 수 있겠다.
아르마는 그만큼 중력도 어지러워서 위성을 궤도에 올릴 때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만약 이 행성에 우주탐사를 진행할 문명이 있다면 초기에 위성을 쏘아 올리는 건 거의 실패했을 겁니다.”
“그래서 문명은 있나?”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중력자 레이더와 시비리 위성을 통해 살피면 다양한 정보가 나올 거예요.”
하긴 지금 막 도착한 모양인데 대단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무리다.
유지하는 의료용 워커에 탄 채로 지구와 닮은 행성을 하릴없이 바라봤다.
지금까지 꾼 꿈이 저 세상의 것이라는 것은 그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말로만 듣던 판타지 세상에 온 건지도 모르겠군…….”
“그럼 마스터, 시비리 위성 사출하겠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저 행성을 살펴봐.”
“네.”
현재 세틀러호엔 시비리 위성 외에도 다양한 위성이 탑재되어 있지만 지상을 정밀하게 관측하는 데에는 그만한 게 또 없다.
유지하는 개인실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몇 년 사이에 형편없이 변했군…….”
그런 말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몸은 많이 상해 있었다.
수명 한계에 달했다는 아르마의 진단이 맞는 것인지 피부가 쭈글쭈글했고 외모도 3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특히 오른쪽 가슴에 핏줄처럼 울퉁불퉁 튀어나온 선이 문제였다.
에테르 회로인 듯한데 검붉은 색에서 지금은 아예 시커먼 색으로 변해 있었다.
씁쓸하게 가슴을 쓰다듬는데 뒤따라 들어온 루시아가 그의 어깨를 의자 삼아 걸터앉으려 했다가 실패했다.
유지하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쳐다봤다.
“너 어떻게 날고 있는 거야?”
그녀는 허둥지둥하더니 허공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이건 에테르를 이용한 마법이에요.
“마법이고 자시고 사념파 보내는 방법까지 잊어버린 건 아닐 텐데.”
―아, 실수.
아르마와 있다 보니 까먹은 게 분명하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우주선도 중력을 다루잖아요? 마스터가 둥둥 떠다니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내가 걸어 다닐 수 있다고?”
유지하는 지금 워커에 몸을 의지하는 신세였다.
루시아는 입을 합 막더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평소에요, 평소에.
“평소라고 하지만 20년 전이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아무튼 둥둥 떠다니는 그게 마법이라 이거지? 대규모의 에테르 역장으로나 구현할 수 있는 건데.”
―여기에선 이 정도는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때에 따라서는 개인도 쓸 수 있죠.
“흥미로운 곳이군. 그래서 여기는 어떤 곳이지? 아는 대로 말해 봐.”
―일단, 어깨에 좀 앉아도 될까요?
“그 정도는 봐주지.”
40cm짜리 금속 재질 인형이 그의 어깨에 앉았다.
―이제 집에 돌아온 것 같네. 아무튼, 에테르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자 에너지예요. 마스터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자면 마나라고 할 수 있죠.
“에테르 역장 같은 것도 마나로 구현되는 마법이라고?”
―중력마법은 개인 수준에선 구현하기 까다롭긴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그런 자들을 우리는 마법사라고 부르죠.
“그럼 저긴 판타지 세계인가.”
―그리고 전 장차 마왕으로 불릴 존재이구요.
“마… 왕?”
갑자기 정신이 아득한 하늘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소행성대에 있었던 플레이그 퀸이 마왕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란 말인가.
루시아도 자신의 설명이 부족하다는 걸 눈치채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믿기지 않겠지만 편견을 가지지 말고 들어 보세요. 편견은 나쁜 거예요.
“플레이그 퀸이 그렇게 말하니 신빙성이 없는데.”
―어쨌든! 따지고 보면 인류 입장에서 플레이그 퀸은 마왕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마스터도 알겠지만 우리는 에테르 폭풍을 통해 먼 거리를 뛰어넘어요. 일종의 텔레포트 개념이죠. 저 행성의 사람들에게 그게 어떻게 보일까요?
유지하는 인상을 쓰며 그 풍경을 상상했다.
평화롭게 밭을 갈고 있는 판타지 세계의 주민들.
어느 날 대기가 불안정해더니 이상한 폭풍이 사정없이 몰아친다.
곧이어 등장한 것은 검은 야수 형태의 기계 괴물들.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바쁘고 괴물들은 주변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다…….
“…악마 그 자체군.”
―그렇게 저 행성의 문명을 파괴한 운명을 타고난 게 바로 우리에요. 이 우주 여기저기에서 살다가 때가 되면 저 행성으로 이주하는 거죠.
“저 푸른 행성?”
―아까 아르마가 쌍둥이 행성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럼 그쪽은 마계인가 보군.”
―오, 정확하세요.
판타지니 마왕이니 하는 얘기를 들으니 어쩐지 현실성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유지하는 거울 속의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은 그럴 마음이 안 드나?”
―무슨 말이에요?
“너 말이야. 마왕이 될 운명이라며?”
―운명은 결정지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거예요.
자그마한 기계인형이 한 것치곤 제법 울림이 있는 발언이었다.
유지하는 여기까지 온 이유를 떠올렸다.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 선지자를 만날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항로도는 여기가 끝이었으므로 앞으로 더 나아갈 수는 없었다.
즉, 이곳은 개척선단의 종착지였다.
‘일단 저기로 내려가기 전에 상황을 살펴봐야겠군.’
그다음엔 세력을 만드는 것이 좋을까?
아르마가 가져온 정보를 분석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루시아를 어깨에 얹은 채로 워커를 조종해 메인 브릿지로 이동했다.
몸은 비록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배가 고픈 걸로 봐서 아직 죽을 때는 아닌 모양이었다.
* * *
개척선단에는 스마트팜의 핵심 설비가 구비되어 있다.
다양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비교적 멀쩡했다.
다만 다양성이란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지상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아르마가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식량 공급안을 계획했지만 그게 유지하의 입맛에 맞는다는 보장은 없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물론 유지하는 선지자의 고향으로 가는데 밥투정을 할 정도의 인간은 아니었고 지금까지는 잘 버텨왔다.
“그래도 가끔은 지상에 내려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어지는군…….”
한국의 식물인간 환자의 몸에 들어갔을 때에는 나쁘지 않았다.
비록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확실히 신선하고 고급스러웠으며 얼마 가지 않아 적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행성에 그런 문명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마가 워커 한 대를 끌고 메인 브릿지로 들어왔다.
워커 상부에는 놀랍게도 연어로 보이는 요리를 메인으로 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이건 연어처럼 보이는데.”
“네. 단백질 조성에서 연어와 거의 흡사합니다. 외형도 그렇고요.”
탐사정을 보내 잡아온 모양이다.
행성에 대한 정보 정리는 얼추 끝났다는 뜻도 되었다.
“먹을… 수는 있겠지?”
“일단 독은 없답니다. 저쪽의 사람들도 꽤 즐겨먹는 식재료거든요. 물론 고위층에 한해서지만요.”
서민층은 잘 못 먹는다는 건 문명의 수준이 대단하지 않다는 뜻도 된다.
통상적으로 발달된 문명은 서민층에까지 여러 혜택을 안겨주는 법이니까.
“맛은 어떨까…….”
한 입 썰어서 맛을 보니 기억 속의 연어 맛과 차이점이 없었다.
너무 오래 잠을 자서 기억력이 퇴화된 건 아니겠지.
유지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두툼한 연어 스테이크를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이제 좀 살 것 같군…….”
아르마가 옆에 서서 음료를 따라주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저 행성에서 선지자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쉽게 찾을 순 없겠지.”
“다만 여러 종족의 신화에서 공통적인 창조주를 발견했습니다. 서로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만큼은 공통됩니다.”
“그가 선지자란 건가? 정보에 접근할 방법은?”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유지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지금 개척선단은 2025년 지구에 갓 도착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대부분의 시설과 장비가 멀쩡하며 플레이그와 전투도 치를 수 있을 정도였다.
정찰용 마이크로드론이나 나노유닛을 투입해도 될 텐데?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아르마는 도서관으로 보이는 장소를 메인 스크린에 출력했다.
“중요한 문서는 대부분 이런 곳에 보관되어 있는데, 보안이 삼엄합니다. 물리적으로는 별거 없으나 마법적인 방어막이 상당한 수준으로 추측됩니다.”
“나노유닛도 못 뚫고 들어가나?”
“네. 허가된 자를 제외한 외부의 모든 존재를 차단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나노유닛에도 적용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쨌든 유지하는 그 화면에서 엘프를 처음 목격했다.
“정말 공교롭게도, 꿈에서 본 엘프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군.”
“엘프들의 나라는 엘브랑데 제국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자치령 수준이었으나 해방전쟁을 벌이면서 급격히 국력을 신장시켜 마침내 주변의 여러 국가를 복속시키기에 이르렀죠.”
“보통 전쟁을 하면 국력이 저하되기 마련인데 특이하군.”
“거기에 대해서는 선지자라고 불리는 한 엘프의 도움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이름은 에일리드라고 하고 대단한 수준의 마법사라고 합니다.”
“대마법사인 선지자라…….”
유지하가 찾는 선지자와 동일인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는 거의 신의 영역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란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원본 루시아도 선지자의 물건, 특히 에테르 융합로를 가리켜 신의 심장이라고 언급했다.
22세기 인류연합의 기술력으로도 말도 안 되는 물건이란 것이다.
“본인은 아니고 선지자에게서 힘이나 계시를 받은 거겠지.”
“아무튼 그가 엘프들 사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음은 분명합니다. 위치를 특정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아르마가 실패했다면 당분간은 찾기 어렵다는 뜻도 된다.
유지하는 그녀가 모아 놓은 정보를 천천히 훑어봤다.
문명 수준은 대략 14세기에서 19세기까지 다양하다.
엘브랑데 제국이나 인간 왕국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는 기차가 돌아다니지만 변방의 주민들은 상당히 척박한 삶을 살아간다.
꿈속에서 봤듯이 인간이나 엘프 외에도 다양한 종족이 살아가고 있었으나 사이는 그렇게 좋지 못한 듯싶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몬스터도 있고 그야말로 판타지 세계라고 봐도 무방하군. 문제는 선지자가 어디에 있느냐인데…….”
“반응탄을 엘브랑데 제국의 수도에 한 발 떨어트리고 정보를 요구할까요?”
그게 가장 효율적일지는 모르나 유지하의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었다.
어쩌면 상황을 꼬이게 만들 수도 있었다.
“선지자의 고향까지 와서 그럴 순 없지. 엘브랑데가 그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니까.”
“그렇다면 지상에 내려가서 세력을 형성할까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요.”
“그걸 다시 반복하자니 골치가 아프군.”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개척선단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은 없으며 이 행성이 좋든 싫든 당분간 머물러야 할 것 같았다.
“이만한 우주선을 숨길 곳이 있나 모르겠는데…….”
“지시를 내려주시면 제가 적당한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가능하면 저 엘프들 땅에선 조금 떨어진 곳으로 해. 주변 모든 국가에 시비를 거는 걸 보니 보통 족속들이 아닌 모양이야.”
심지어 지금도 엘브랑데 제국과 한 왕국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양상은 흔히 생각하는 보병과 기병이 동원되는 그런 류가 아니었다.
쿵쿵 뛰어다니는 거대한 로봇들의 전쟁이었다.
“희한한 걸 가지고 싸우는군.”
―골리앗. 드래곤들이 마족에게 대항하라고 내려준 무기라고 하죠.
어느새 그의 어깨에 앉은 루시아가 속삭이듯 설명했다.
유지하는 귀가 간지러워 손으로 털다가 그녀를 멀리 날려 버리고 말았다.
―아! 너무한 거 아니에요?
“시끄럽고 자세히 설명해 봐. 드래곤이란 종족도 있다고?”
―지금은 아마 보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 행성의 마법에 관련된 대부분의 것은 그들로부터 유래된 게 확실해요.
“드래곤이라… 그들도 선지자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군.”
―근데 대체 누구예요? 그 선지자란 존재는?
“신.”
―신?
“그냥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어. 나도 만나 보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거대한 우주선을 건조할 능력을 가진 마스터가 신이라 부를 정도면… 이 우주선으로 행성 전체를 정복할 수도 있잖아요.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지.”
지구에서 독재자 노릇한다고 온갖 욕을 들어먹었는데 여기서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플레이그라는 궁극적인 적에 대항한다는 목표도 없으니까.
하지만 플레이그가 존재하는 이상, 그리고 개척선단이 여기로 온 이상 다시 세력을 키우고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확정된 미래일지도 모른다.
어떤 생명체이건 자기 밥그릇은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마찰 없이 선지자를 봤으면 좋겠는데…….”
유지하의 궁극적인 목적은 별거 없었다.
죽기 전에 선지자를 만나 고맙다는 말을 한 뒤엔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아르마와 함께 호젓한 자연에 은둔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삶도 나쁘지 않겠지.
지구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으니 이 행성에 정착하는 것도 고민할 만했다.
우선 이 행성의 대기조성과 미생물 등을 분석한 결과가 나와야겠지만.
유지하는 엘프랑데의 전쟁을 살피며 아르마의 보고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어느새 그의 어깨에 앉는 데 성공한 루시아가 놀라며 입을 가렸다.
―저 엘프들은 정말로 잔혹하네요. 항복조차 받아주지 않아요.
“역사적으로 갈등이 많이 쌓이면 저럴 수 있겠지.”
인류의 역사를 감안해 보면 저 정도 행위는 대단한 것도 못 되었다.
다만 엘프들이 승전한 후 취한 행동에는 다소 우스운 구석이 있었다.
“누가 파시스트 아니랄까 봐 엘프 주제에 절도가 있군.”
흔히 각이 잡혔다는 말을 한다.
그가 본 엘프들은 통일된 제복을 입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절도가 있었다.
군 장교들은 상관에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식사시간에도 엄정한 군기가 감돌았다.
―참 피곤하게 사는 엘프들이네요.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이웃으로 두고 싶지는 않아.”
만약 유지하가 저들과 이웃이 된다면 둘 중 하나는 완전히 박살날 것이다.
그는 루시아의 참견을 들으며 다른 정보를 살폈다.
고대의 드래곤 전쟁과 신들의 챔피언 등 재미난 역사가 꽤 많았다.
“신화 속의 전쟁이라는 게 여기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나 보군.”
왠지 여기서의 삶도 순탄치는 않을 것 같았다.
* * *
“결론적으로 이 행성의 환경적인 부분에서 마스터에게 해를 끼칠 만한 요소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대기조성은 다음과 같으며…….”
아르마의 보고를 보니 이 행성에서 유지하가 사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더미로 미생물이나 병원균 테스트도 진행하고 있으니 곧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게 하나 있었다.
아르마가 손가락으로 유지하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마스터의 에테르 회로가 새카맣게 타버린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지상에서는 에테르 중독현상이라고 부르더군요.”
“그건 알콜 중독과 비슷한 건가?”
“명칭은 비슷하지만 기전은 다릅니다. 이쪽은 마스터의 몸이 에테르를 버텨내지 못하는 것에 가까우니까요.”
아무리 개조를 해도 에테르 태양에 가까운 곳에서는 버티기 힘든 모양이다.
아르마가 취합한 정보에 의하면 모든 에테르는 저 태양에서 나온다.
자동차로 따지면 플레이그 코어니 하는 것은 엔진이고 에테르 회로는 ECU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럼 방법은 있나?”
“육체를 생산해 봐야 다시 중독 현상에 시달릴 겁니다. 현재로선 이 행성 원주민의 육체를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방식으로 육체를 옮겨야 하나…….
원하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장 에테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로드맵을 한번 보지.”
당연하지만 아르마가 짜온 로드맵에는 그 육체를 얻는 부분은 물론이고 세력을 형성하는 부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끝은 희미했는데, 어떻게 선지자를 만날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건 세력을 만들어서 부딪치는 수밖에 없는 건가…….”
“네. 여기 세력과 얽히다 보면 여러 정보가 들어오겠죠. 에테르 연구도 진행할 수 있을 거예요.”
“결국 이전과 같은 일의 반복이군.”
선지자를 만나기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 힘들 줄이야…….
유지하는 속으로 한탄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죽지 않고 50년을 버텨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아르마가 도와준 덕분이었지만, 어쨌든 그의 숙원은 이뤄지기 직전이었다.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애초에 포기할 생각도 없지만.
“만약에 한다면 부모가 없는 쪽으로 진행했으면 좋겠어.”
지구에서 부모가 크게 방해가 된 건 아니었지만 리스크는 가급적 줄이는 편이 낫다.
“그 부분도 충분히 고려해서 후보자를 선정할 예정입니다.”
몇 명의 후보자가 스크린에 나타났다.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한 남자였고 현 상황이 위태로웠다.
아무래도 멀쩡한 사람 몸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유지하는 그중 한 명을 눈여겨봤다.
어린 시절 자신이 영지를 이어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 일찌감치 밖으로 나와 세상을 떠돈 용병이었다.
나이는 27세로 상당한 경험과 인맥을 쌓았고 특이하게도 로봇, 그러니까 골리앗을 조종할 수 있는 기사였다.
“이 행성에서의 기사는 말이나 뿔새를 타고 기동전을 펼치는 병력을 의미했습니다만 지금은 골리앗에 탑승할 자격을 지닌 자로 의미가 바뀌었다고 하는군요.”
“뿔새?”
“말보다 더 유용한 동물이랍니다. 최소한 여기에서는 그렇다는군요.”
중무장을 한 기사가 낙타, 아니, 타조를 탄다고 생각하니 영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로봇에 타고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건가?”
“네. 고위급 골리앗의 경우 다른 차원에 수납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냥 끌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용병이라 돈이 없어서겠죠.”
“…….”
이쯤 되면 이게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아, 여긴 판타지 행성이었지.’
유지하는 정신을 차리고 화면의 남자에 집중했다.
아르마가 골랐으니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가 개입해서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 그런 환경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원인은 아무래도 엘브랑데의 엘프.
지구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한 국가를 지목하면 대략 50% 정도는 맞는다는 얘기가 이곳에서도 통용되었다.
일단 엘프를 욕하면 50% 정도는 들어맞는다고 하는데 그건 앞으로 유지하와 엮일 일이 많다는 뜻도 된다.
세력을 키우고 에테르 연구를 하다 보면 안 부딪칠 수가 없을 테니까.
아르마의 로드맵에는 그 부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독재자가 아니라 황제가 되게 생겼군.’
원치는 않았지만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