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98
197화 남작가 둘째 아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마스터께선 귀족이라는 겁니다…….”
아스테라 대륙은 봉건제와 전제군주정, 그리고 공화정 등의 정치 체제가 뒤섞여 있다.
사실 정치체제가 중구난방인 건 지구도 별다르지 않았고 귀족이 존재한다는 점까지 같다.
다만 지구의 귀족이 명예직인데 비해 이쪽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만, 아스테라의 귀족을 일컬어 붉은 피 대신 황금 에테르라고 합니다. 피 대신 에테르가 흐른다는 말도 있군요. 그만큼 귀족은 에테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죠.”
실제로 귀족은 어렸을 때부터 에테르와 밀접한 삶을 살아간다.
커서도 이 운명을 벗어날 순 없어서 대부분의 귀족이 기사, 마법사, 그것도 아니면 마공학자의 삶을 살아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골리앗이라는 결전병기가 있는 만큼 기사의 자격을 얻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마법사도 상당한 대우를 받는다.
가장 천대받는 것은 에테르 공학자로, 황금 에테르를 가진 귀족이 할 일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골리앗을 포함한 에테르 공학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공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엔지니어를 천시하는 건 어디나 똑같군.”
다만 천대받는다고 해도 귀족 사회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평민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인물의 육체를 쓰게 되면 인내심을 조금 버리셔도 좋습니다.”
“성격이 좀 괄괄한 모양이지?”
“아무래도 용병 일을 오래 했으니까요. 경고 대신 주먹이 나가는 성격입니다.”
“적이 많았겠군.”
“주로 엘프죠. 아무래도 아스테라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이다 보니.”
전란의 시대.
엘브랑데 제국의 눈에 들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배척당하는 시대가 왔다.
엘프들은 과거 자신들이 박해받은 것을 그대로 인간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그 과거는 기억하는 사람은커녕 기록조차 희미해질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수명이 긴 엘프들에겐 고작 몇 대 전의 일이었다.
이런 세월의 흐름에 대한 인식 차이는 엘프들의 콧대를 한껏 높여주었다.
지금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너희가 드래곤의 노예인 시절부터 마법과 문명을 꽃피워 왔다.
―우리의 숲은 너희들을 보호했고 세계수는 너희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숲을 불태우고 세계수의 가지를 꺾었다.
―그뿐인가? 너희의 선조는 우리의 선조를 노예로 삼기까지 했다. 이제 너희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인간들은 이렇게 외친다.
―수백 년 전의 일을 가지고 왜 우리한테 난리냐?
―너희가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는 거의 없지 않나?
그들의 이런 외침에 엘프들은 비웃음으로 대응했다.
―너희들의 선조가 일군 땅에서 살고, 그들의 문명을 이었다. 정말 별개라고 할 수 있느냐?
―정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그 땅에서 떠나라.
당연하지만 수백 년 전부터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땅을 그리 쉽게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인간 왕국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결사항전으로 버텼고 엘프들은 그런 인간들을 조롱하며 전쟁으로 땅을 넓혀갔다.
그리하여 현재는 아스테라 대륙의 1/4 가량이 엘브랑데에 넘어간 상태였다.
“덕분에 숲이 울창한 건 보기에 좋습니다만 문제점이 하나 생겼네요. 주로 인간의 입장에서요.”
“개발을 못 한다는 거군.”
“네. 엘프들은 숲을 개간하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최근 엘브랑데와 인간 왕국들의 갈등도 주로 이런 부분이었다.
어쨌든 인구가 늘어나고 왕국이 확장세에 들어서려면 개간을 해야 하는데 그걸 못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힘으로 밀어버리자니 엘프 쪽이 훨씬 더 강했다.
그들은 긴 수명과 뛰어난 에테르 감응력, 그리고 민첩성으로 전쟁을 수월하게 이끌어 나갔다.
제국 전체로 따지면 골리앗 탑승 자격을 가진 기사가 2천 명이 넘어간다고 하니 인간 입장에서는 연합해야 간신히 상대가 가능할 정도였다.
“물론 그런 연합은 꿈에서나 가능합니다. 차라리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는 게 더 빠르겠네요.”
지구를 떠난 지는 오래됐지만 그 이상으로 힘든 모양이다.
어쨌든 유지하는 아르마에게서 귀족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언행에 대해서 배웠다.
“중요한 건 영지 내에서만큼은 마스터가 왕이란 겁니다. 그건 국왕이나 다른 귀족이 와도 변하지 않습니다만…….”
“법전으로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귀족이 가진 군사력과 경제력에 따라서 고개의 각도가 달라지는 게 현실입니다.”
“현실은 원래 잔인한 법이지.”
각국마다 귀족에 대한 예법도 다르지만 유지하가 자리를 잡을 영지의 경우 전통적인 아스테라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영지 내에서는 왕이나 다름없고 다른 고위 귀족이나 왕족에게만 조금 신경을 쓰면 된다는 뜻이다.
“최근 전란이 길어지는 바람에 왕족의 권위가 더 실추된 면도 있습니다. 승리한다면 모를까 패배를 거듭하는 바람에 면이 안 서는 거죠. 우리가 확보할 영지는 더한 신세라는 게 문제네요.”
유지하는 스크린에 빛나는 영지를 눈여겨봤다.
앞으로 그가 지배할 곳으로, 대륙 서쪽 해안에 처박혀 있었다.
“땅이 바다에 연해 있다는 건 그렇게 나쁘지 않은 조건입니다만 이곳 테라 행성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해양 몬스터와 섀도우 엘프가 있기 때문이죠.”
“…또 엘프?”
“앞으로 계속 엘프들 얘기가 나올 겁니다.”
“미리 익숙해져야겠군. 계속해 봐.”
“섀도우 엘프는 지구의 흑인종, 백인종, 황인종처럼 피부색에 의한 구분에 더해 행동양상도 우드 엘프와는 다릅니다. 주로 해적질을 해서 먹고 살죠.”
“해적이라. 토벌이 어려운가 보지?”
“규모가 꽤 크거든요. 종족 전체가 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엘브랑데 제국의 진격을 막아내기도 어려운 판국이라 해적에 대항할 병력이 있을 리 없죠.”
“하긴… 그러면 대부분의 국가에서 바다는 비워 놓은 상태인가?”
“일부 여력이 되는 국가들은 제한적으로 어업활동을 하곤 합니다. 엘브랑데가 대표적이죠.”
유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같은 엘프라고 해서 봐주지는 않을 거고 모종의 뒷거래가 있다는 뜻인가?
그런 정보까진 나오지 않았지만 두 엘프 종족이 쉽게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일단 활동하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지는 어떤 곳이지? 점수를 매긴다면?”
“최악 중의 최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영주의 사망으로 행정력이 박살났고 남은 병력조차 얼마 되지 않습니다. 영지민도 살 길을 찾아 떠나고 있네요. 그나마 나은 건 영지를 노리는 큰 적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그만큼 쓸모가 없는 땅이라는 말이겠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필 그런 곳을 고른 이유는 마음대로 운영해도 주목을 받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발전을 거듭하면 결국 시선이 집중되겠지만 그때는 충분한 힘이 갖춰졌을 테니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마스터가 쓸 육체는 영주의 둘째 아들로서 영주 내외와 첫째 아들이 사망한 지금 유일한 남작위 계승권자입니다. 이름은… 레오볼드 반다스.”
“남작의 아들이라 그 말이군. 용병으로서 살다가 부고를 받고 부랴부랴 영지로 복귀하는 그림인가?”
“네. 어릴 적 영지를 나갔기에 영지민 중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왕궁에서도 대단한 역할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고요.”
유지하가 다소 수상한 언행을 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 장점에 비하면 영지가 엉망이라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척선단이 온 이상 빠른 발전은 확정된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주변 환경 분석은 이쯤 해두고 내가 알고 있어야 할 것부터 시작하기로 하지.”
“먼저 뿔새 타는 법부터 배우셔야겠네요. 아스테라의 기사들에겐 기본소양이랍니다.”
“…저걸 타야 된다고?”
스크린에는 타조보다 더 큰 새가 표시되어 있었다.
다리와 목도 상당히 두툼해서 성인 남자 둘 정도는 거뜬히 태울 것 같았다.
“저 정도면 몬스터 아닌가?”
“아인종에 한정해선 굉장히 유순한 동물이랍니다. 다른 육식동물이 다가오면 저 튼튼한 다리로 뻥 걷어차 버리죠.”
“덩치가 큰 걸 보니 고기가 꽤 많이 나오겠는데. 식용으로도 쓰이나?”
“주식이 풀인데 둘이 먹다가 셋이 달아날 정도로 맛이 없답니다.”
“그거 끔찍하군.”
하여튼 이 뿔새라는 동물은 아스테라 대륙에서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고 한다.
힘이 무척 세고 튼튼하기까지 해서 소와 말을 완벽히 대체했다고.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직접 경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한 마리 잡아오겠습니다.”
아르마는 셔틀을 동원해 진짜 뿔새를 잡아왔다.
유지하는 생각보다 큰 녀석의 덩치에 놀랐고 뿔새 역시 처음엔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아인종에게 유순하다는 말이 맞는지 얼마 가지 않아 경계심을 풀고 그를 등에 태웠다.
그렇게 유지하는 점차 레오볼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다만 진짜 레오볼드로 행세하기 위해선 필요한 절차가 남았다.
바로 골리앗을 조종하는 것이다.
* * *
골리앗은 아스테라 대륙에서 흔히 쓰이는 이족보행 병기를 말한다.
전고는 기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7에서 8미터 정도로, 10미터가 넘어가는 종류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의장용이었다.
“중량은 100톤에 가까우며 주무장은 검과 창 등입니다. 에테르 캐논 등을 쓰기도 하지만 동력계통이 다운되는 문제가 있어 실전에서는 못 쓴다고 하네요.”
동력으로는 다양한 코어를 사용하는데 주로 마족, 그러니까 플레이그에게서 나온 녀석이 주로 사용된다.
이 코어는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테르를 기체 전체에 공급하고 마법진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다.
유지하는 자그마한 코어 그래픽을 보며 물었다.
“저건 플레이그 코어와 같은 건가?”
“네. 구조가 완벽하게 동일합니다. 에테르를 다룰 수 있는 규모에서는 큰 차이가 있지만요.”
“우리한텐 코어가 많잖아?”
“플레이그 퀸급이 1개, 레비아탄급이 7개, 베헤모스급이 20개…….”
500개가 넘는 코어 중 대부분은 크기가 작은 비스트급이었지만 아스테라의 에테르 코어 크기를 월등히 능가했다.
“코어 크기가 출력에 비례한다면 엄청난 출력을 내는 골리앗을 만들 수 있겠군.”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바로 그걸 위해서 에테르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영지 외부와 마찰을 빚는데 어설트 아머나 세틀러호를 불러서 박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단계에 이르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긴 선지자의 고향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시끄럽게 굴고 싶지도 않았고 혹시나 존재할지도 모를 적을 자극하는 것도 삼가야 했다.
또 다른 플레이그나 사라진 지 오래라고 하는 드래곤, 혹은 신 같은 존재 말이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아스테라에서 보통 신이라고 칭하는 존재는 선지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꽤 여러 신이 숭배를 받고 있더군요.”
“실질적으로 힘을 내려주는 신도 있나?”
“네. 그렇게 신의 힘을 받은 자들을 챔피언이라고 합니다. 과거 드래곤 전쟁 때 대단한 활약을 했다는군요.”
그 외에도 신성교국이나 교단 등 신을 모시는 세력이 있고 아스테라 전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하긴 진짜 신이 있다는데 그걸 무시하기는 힘들겠지.
“우리 입장에선 신이라고 쳐주기는 힘들겠지만.”
“이 신들은 초월적인 그런 존재라기보다는 하위 인격신이라는 개념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드래곤들과 싸워서 패퇴하기도 하는 등 불완전하다는 기록이 많아요.”
“그럼 진정한 신은 선지자뿐이겠군.”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하여튼 에테르 연구를 위해서는 영지를 키울 필요성이 있었다.
에테르 공학자들은 대부분 귀족이고, 아무리 뒷배가 약하다 해도 허름한 영지에는 좀처럼 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르마는 스펙을 갖춘 취업 준비생들이 하위 기업에 지망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는 사례를 댔다.
“공학계는 온갖 신기술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유행에 민감하고 소문도 많아요. 그런 사회에서 버티려면 처음부터 잘나가는 영지에 취직할 필요성이 있죠.”
“한번 하위지망을 해버리면 올라가기가 힘들다는 거군.”
“네. 사람들의 인식이란 냉정하면서 잔인하거든요. 남작령에 들어간 에테르 공학자는 평생 남작급이니 최대한 위를 바라볼 수밖에 없죠. 형제자매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면 아버지의 영지에 눌러앉는 것도 좋은 선택이고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단 작위가 낮아도 에테르 공학자들이 선호하는 영지가 있었다.
“연구비를 많이 통용해 줄 수 있는 영지라면 선호도가 높아지죠. 에테르 공학이란 건 엄청난 자금을 필요로 하거든요.”
자금은 곧 금을 뜻한다.
인류 역사상 금을 중요시하지 않은 문명은 거의 없었고 아스테라 대륙에서는 그 이상으로 대우받았다.
에테르 공학에 금이 많이 들어간다나.
마침 개척선단에는 금이 많았다.
2177년 출항 당시에도 금이 100톤 가까이 실려 있었고 과거로 돌아온 후에도 차곡차곡 금을 모았다.
합하면 약 150톤쯤 되는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여튼 아르마는 골리앗을 보고 싶어 하는 유지하를 위해 한 대를 가져왔다.
격납고에 덩그러니 놓인 기계인형은 강인해 보이긴 했지만 너무 낡아 보였다.
케이지에 구속된 어설트 아머가 워낙 육중하다 보니 비교되는 것도 있었다.
“이건 어디서 가져온 거야?”
“엘브랑데의 전투에서 방치된 것을 가져온 거랍니다. 어차피 장래 충돌할 거니 미리 소유권을 이전했다고 보면 되겠죠.”
“대충 그렇다고 치자고.”
유지하가 골리앗을 살펴보는데 루시아가 날아와 어깨에 앉았다.
―이 기종은 상당한 구식이네요. 요즘에는 잘 안 써요. 이름은 자간이라고 하고요.
“그래? 골리앗에 대해서 좀 아는 모양이지?”
―하도 당하다 보니까… 그거 알아요? 골리앗은 골렘의 발전형이라는 거? 원래는 단순한 기계인형이었어요.
사념파로 속삭이거나 말거나 유지하는 자간급 골리앗을 살펴보기에 바빴다.
그는 파일럿이라서 무언가를 탄다는 개념에 익숙했고, 또 선호했다.
이 기계인형은 대단한 전투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족보행이라는 것만으로도 그의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거 어떻게 타는 거지?”
루시아가 날아가 골리앗의 위에 앉았다.
―모든 골리앗은 제작할 때 시동 마법진을 만들어 둬요. 그건 제작진과 전담 기사만 알고 있는데 이 녀석은 마법진이 파괴되어 있어서 그냥 열릴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지?”
―리빙메탈 잘 다루잖아요? 사이필드를 펼치면서 복부를 여는 상상을 해봐요.
평범한 블랙메탈, 아니, 리빙메탈 다루듯이 하면 된다는 얘긴가.
유지하가 골리앗에 손을 대고 사이필드를 펼치자 녀석의 복부가 덜컹 열렸다.
안에는 한 명이 간신히 앉을 듯한 의자가 있었다.
“콕핏치고는 영 좁은데.”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콕핏이 닫히기 전 루시아가 두 손을 모아 말했다.
―시동 마법진이 없으니까, 그냥 일어서는 상상을 하면 일어설 거예요.
“조언 고마워.”
잠시 후 콕핏이 닫히자 루시아가 아르마의 어깨에 앉았고 둘은 살짝 물러났다.
그리고 자간급 골리앗이 은은히 진동하며 일어서지… 는 않고 펑, 소리를 내며 연기를 내뿜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마스터.”
아르마는 급히 콕핏을 강제로 개방하여 유지하를 구출했다.
그 힘을 본 루시아가 어이없어 했다.
―대체 누가 마왕인 거야…….
유지하는 의료용 워커에 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뭐가 문제인 거지?”
―자간급 골리앗은 구세대 양산형이거든요. 그만큼 에테르 허용량도 낮죠.
“구식이라 나를 못 받아준단 말이군.”
하지만 이상한 게 있었다.
아무리 구세대라고는 하지만 기종 간 에테르 허용량이 몇 배로 차이가 나진 않는다.
언제든지 기사를 바꿀 수 있어야 하기에 넉넉하게 설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유지하가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뜻밖에 안 된다.
심지어 그는 에테르 회로가 망가져 있어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만약 그것을 모두 쓸 수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루시아는 과거 드래곤이 신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전설적인 골리앗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골리앗을 조종하던 챔피언도.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그들에게 맞먹을지도 몰라…….’
그걸 확인하기 위해선 일단 제대로 된 골리앗을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의료용 워커가 유지하를 옮기는 동안 루시아는 아르마의 어깨에 앉아 허공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내가 좋은 골리앗이 있는 곳을 아는데 말이야…….
* * *
유지하와 아르마는 메인 브릿지에서 레오볼드 반다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현재 그는 전투에서 패배해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쫓기는 신세였다.
뿔새도 동료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무작정 숲으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추적자들은 또 엘브랑데인가?”
“따로 고용된 수인족 용병들이 있네요. 누군가를 추적하는 데에는 따라올 종족이 없죠.”
그는 수인족을 처음 봤다.
온몸에 털이 숭숭해서 처음엔 아스테라 대륙의 개들은 이족보행을 하나 했는데 인간에 가깝단다.
아르마에 의하면 멀쩡히 말도 하고 지능도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고.
“솔직히 나는 다른 것보다 저 걸어 다니는 개가 제일 신기해.”
“날개가 달린 종족도 있다는데 아직은 거주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레오볼드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죽기 전에 그를 돕는 것은 금물이었다.
유지하는 시비리 위성의 카메라를 통해 그가 도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장시간 도주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걸 보면 체력 하나는 상당한 듯싶었다.
“용케 나와 비슷한 외모의 남자를 찾았군.”
“키가 워낙 크셔서 찾기가 힘들었답니다.”
“그나저나 내가 남작이 되어 영지를 계승하면 아르마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마스터의 하녀이자 집사가 되는 거죠. 용병 시절에 떠돌이를 주워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고 하면 믿을 거예요.”
“떠돌이치고는 외모가 너무 튀는 것 같지만 상관없겠지.”
영지 내에서는 그가 왕이니까.
다른 영주나 왕궁에서 아르마를 탐내더라도 그걸 구실로 삼아 하나씩 빼앗으면 그만이다.
일단 영지의 안정화가 먼저겠지만.
둘이 지켜보는 사이에 추적대와 레오볼드의 거리는 계속 좁혀지고 있었다.
아무리 체력이 뛰어나도 수인족을 따돌리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포위망이 좁혀지더니 기어코 엘프 한 명이 쏜 화살이 레오볼드의 허벅지를 꿰뚫는 데 성공했다.
“큭!”
그는 답답한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필 경사가 심한 비탈길에 가까운 곳이었던지라 데굴데굴 밑으로 굴러갔고 추적하던 수인족들이 멈췄다.
뒤늦게 엘프들이 와선 명령했다.
“뭐 해? 빨리 내려가서 확인하지 않고.”
“여기를 저렇게 굴러 내려가면 뼈도 못 추리겠는뎁쇼.”
“죽은 거 아닐까요?”
수인족 용병들이 내려가기 싫다는 티를 내자 엘프들이 잔뜩 화가 났는지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렇게 어리숙하게 구니까 너희들이 집도 영토도 없는 떠돌이 신세인 거다!”
“땅굴에서 사는 놈들이니 굴러 떨어지는 게 일상 아니야? 빨리 내려가!”
용병들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송곳니가 드러났지만 차마 대들지는 못했다.
아르마가 첨언하듯이 말했다.
“엘프는 모든 종족에게 저렇게 대합니다. 그나마 섀도우 엘프 대우가 조금 낫긴 한데 별 차이는 없답니다.”
“종족 전체가 인종차별주의자란 말인가?”
“그렇게 교육을 받으니까요. 우리가 아스테라의 주인이고, 모든 종족에 앞설 권리가 있다는 식이죠.”
“그거 참 대단한 종족이군… 레오볼드는 어떻게 됐지?”
“사망했습니다. 체력이 다한 상태에서 전신 타박상을 입어 쇼크사했습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영혼교환기를 쓸 수 있다.
“회수해.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 아는 놈들이 있나?”
엘프가 레오볼드를 알고 적대시한 거라면 향후 시비를 걸어올 가능성이 크다.
아르마는 고개를 저었다.
“용병으로 참가한 거고 워낙 약소귀족이라 상부에서는 모를 겁니다.”
“그럼 치워버려.”
“알겠습니다.”
지시가 내려지자 근처에 있던 셔틀이 워커를 내보내 시신을 회수했다.
투덜거리며 내려가던 수인족들과 절벽 위에 있던 엘프들은 별안간 주변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일단 공격해!”
그들이 시위에 화살을 메기기 전, 셔틀에서 쏘아진 코일건 탄두가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추적대가 전원 사망했고 곧이어 중력 크레인이 주변을 모든 것을 묻어 버렸다.
증거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