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02
201화 청어와 해적
반다스 영지 앞바다에 청어가 몰려들었다.
청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과 정소로 바다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바다의 반이 청어입니다! 청어!”
“저 먼 바다까지 새까맣다니깐요!”
보고를 들은 어민들은 황급히 어구를 챙겨 출항에 나섰다.
해적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 소금에 절인 청어 한 통이 얼마인지 알아? 저게 다 돈이야, 돈!”
“빨리 잡으러 나갑시다!”
전쟁과 척박한 겨울이 겹치니 다들 힘든 시기였다.
이 시기에 청어를 대량으로 잡는다면 엄청난 이득을 올릴 수 있었다.
낡은 어선들이 앞을 다퉈 바다로 나갔고 수많은 그물이 청어를 덮었다.
여기도 청어, 저기도 청어.
그물만 던지면 배 가득 잡아올 수 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실 어민들이 신나서 그물질을 시작한 배경에는 레오볼드 영주의 선언이 존재했다.
“앞으로 세금은 70%만 받겠다. 남는 것은 그대들의 것이다.”
세금 70%는 주변 영지에 비하면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 청어를 대량으로 잡을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거기에 영주는 잉여 생산물을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0%는 그대들의 것이며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든 상단에 판매하든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 단, 판매할 시에는 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단일 창구를 만들어 과도한 경쟁을 방지하려는 계획이었다.
단시간에 많은 판매처를 뚫다 보면 공급 과다로 가격이 내려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기까진 몰랐지만 어쨌거나 한몫을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들의 눈에 바다에 가득 찬 청어는 전부 돈으로 보였다.
영주의 말을 믿지 못하며 배 수리와 어구 손질을 소홀히 했던 사람들이 땅을 쳤다.
“진작 영주님 지시를 듣는 건데…….”
“그, 지금이라도 허락을 받으면 안 될까요? 행정관님만 믿습니다!”
카슨 행정관이 건의했지만 레오볼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체 인구에 비하면 100명도 많은 거야. 다른 사람들은 맡길 일이 따로 있으니까 초조해하지 말라고 해.”
“예, 영주님.”
카슨은 영주를 다시 보게 되었다.
청어가 돌아올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현실이 되었다.
혹시 그는 예언자가 아닐까?
의심은 걷히고 약간의 신뢰감이 쌓였다.
어민들이 하루 만에 잡은 청어만 해도 영지 전체가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잡아도 청어는 여전히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른 생선도 많이 잡혔는데, 주로 청어를 따라 온 포식자였다.
이런 잔치에 바다 몬스터가 빠질 수 없지.
레오볼드는 대부분의 바다 몬스터를 먹지 못한다는 행정관의 말을 듣고 인상을 썼다.
“드래곤 터틀이나 갯가재 같은 건 못 먹는다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독이 있습니다. 그걸 무릅쓰고 먹어 본 어민들에 의하면 고약한 냄새가 난다더군요.”
탈취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21세기 같았으면 공정을 추가해 어묵으로 만들었겠지만 이 시대에선 비효율적이었다.
레오볼드는 아르마에게 지시했다.
“큰 몬스터의 접근만 막아. 그리고 섀도우 엘프는 아직 안 왔나?”
“청어가 몰려든 걸 감지했습니다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
“갤리선을 타고 다닌다는데 본거지는 어디지?”
“대륙 서쪽 바다에 수천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 군도에 세력을 숨기고 토벌을 피하고 있죠. 요즘은 토벌도 없지만요.”
섀도우 엘프에 시달린 영주들은 토벌을 포기하고 해안선에서 영지민들을 철수시켰다.
그들은 단순히 약탈만 하는 게 아니었다.
노동력으로 쓸 만한 어민들을 납치하는데다 재물은 약탈하고 민가에는 불을 질렀다.
총체적인 재앙 그 자체라 영지의 빈약한 전력으론 도저히 맞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골리앗까진 운용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언젠가 손을 봐야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그럼 감시만 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아르마가 해줄 게 하나 있어.”
바로 잡아 올린 청어의 유통이었다.
이 시대에 냉장차와 잘 깔린 포장도로가 있을 리 없으니 대부분의 유통은 뿔새 수레가 맡는다.
에테르 공학이 발달한 국가는 화물기차로 실어 나른다지만 이런 시골 영지와는 상관이 없는 얘기였다.
그런고로 식량, 특히 생선의 경우 대개는 소금에 재워서 유통이 이루어졌다.
소금 자체도 비싼데 생선 값도 공짜도 아니라서 내륙에서 생선을 맛보기란 어지간한 귀족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제일 큰 문제는 그놈의 해적 때문에 공급 자체가 많지 않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청어를 유통하기 위해선 통에 소금을 꽉 채워서 출하해야 했다.
여러 상단들은 운송 도중에 청어가 썩는 것을 원치 않았고, 따라서 통에 채워진 소금 양을 체크하곤 했다.
상인들이 통의 윗면만 확인한다는 점에 착안해 바닥은 흙으로 채우는 등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아무튼 생선을 유통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자금이 들어가는데 그걸 줄이자는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대에서 쓸 수 있는 방법으론 염수 보관이 있겠네요.”
염수는 바닷물을 끓여 짜게 만든 소금물이다.
청어의 내장과 가시를 제거하고 통에 함께 담아 보관하면 신선도가 상당히 오래 유지되었다.
소금 소모량도 엄청나게 줄어서 청어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고안된 이 보관법 덕분에 네덜란드는 작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해양 산업에서 상당히 앞서 나갈 수 있었다.
전성기에는 먼 바다를 돌아다니는 청어 선단과 그들을 호위하는 함대까지 수백 척의 선단이 돌아다니다가 영국 등과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
레오는 거기까진 바라지 않았다.
“아낙네들 모아서 칼을 나눠주고 방법을 가르쳐. 적당한 품삯을 주면 서로 하겠다고 달려들 거야.”
“알겠습니다. 제가 시범을 보이면 되겠네요.”
아르마는 영지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화젯거리였다.
생전 처음 보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영주의 곁에서 생활하니 소문이 돌 수밖에.
단순한 하녀라는 소문은 상관없지만 밤 시중을 드는 애첩이라는 건 조금 곤란했다.
앞으로 많은 일을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녀가 나서자 청어를 유통하는 과정이 확 바뀌었다.
소금물을 보관하는 통 제조가 문제였는데 뱃밥과 밀랍으로 틀어막으니 그럭저럭 쓸 만했다.
제조에 동원된 아낙들은 아르마가 쉬지도 않고 청어를 해체하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생선은커녕 조개도 못 깔 것 같은 아가씨가 엄청나네…….”
“시종들 말 들어 보니까 아주 저택을 꽉 잡고 있다는데요? 돈 계산도 그렇고 살림도 그렇고 야무진 게 보통을 넘는다네요.”
“저 외모면 수도로 올라가서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을 텐데.”
“혹시 노예 출신 아니야?”
다들 그녀에 대해 관심을 가질 뿐 새로운 보관법에 대해선 별 반응이 없었다.
바닷물에 보관해 봐야 얼마나 오래 가겠냐는 의문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지에 들른 상인들이 염수로 채운 청어통을 반신반의하며 사가고 얼마 있지 않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청어통을 사간 상인들이 허겁지겁 돌아온 것이다.
“아르마양, 아르마양! 청어 좀 더 살 수 없겠습니까?”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한 통이라도 더…….”
“저희 상단과 독점 계약을 맺는 게 어떻습니까?”
상단을 오래 경영한 능구렁이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은 이 청어통이 엄청난 사업이 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청어는 공급이 부족할 뿐 상당한 선호도를 가진 생선이었다.
바그란 뿐만이 아니라 이웃 국가나 심지어 자이움 제국도 청어에 대해서는 익히 알았고 요리법도 널리 퍼져 있었다.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선호도가 높아지지만 안타깝게도 유통 문제로 공급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비싼 소금으로 푹 절여서 운반하려면 돈이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었기 때문.
하지만 반다스 영지에서는, 아르마가 운영하는 청어조합에서는 그 비용을 수십 분의 1로 낮춰 버렸다.
거기에 물량도 엄청나게 많아 수십 대의 수레로 꽉 채울 수 있었다.
가져가기만 하면 이문이 남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판로마저 청어조합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협상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아르마가 달라는 대로 줘야 했다.
그녀는 상인들 앞에서 협상 불가를 통보했다.
“청어통 1개에 1골드 5실버. 물량은 나중에 조금 더 공급해드릴 순 있어요. 그리고 어민들과 뒷거래를 하는 건 좋은데 들키진 않아야 할 거예요.”
영지가 너무 좁아서 뒷거래를 하다간 언젠가 들키게 되어 있고 그건 곧 퇴출이었다.
상인들은 가격이 너무 높다며 투덜거렸지만 어쩔 수 없이 구입해야 했다.
일단 신뢰라도 쌓아야 나중에 공급량을 늘려달라고 요청이나 해보지.
“이문은 얼마 안 남겠지만 공급량이 늘면 그때부터 시작이지.”
“청어 이게 참 맛있는 생선이라서 선호도가 높단 말이야. 자이움까지 가져가면 대박이라고.”
“대체 왜 이 간단한 걸 생각 못했을까?”
청어통이 워낙 많이 팔리는 바람에 반다스 영지는 모처럼의 활기에 들떴다.
영지에 돈이 도니 자연스레 영지민들의 어깨도 펴지고 표정도 밝아졌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들이 돈을 쓰기 시작했다.
청어를 구입하기 위해 드나드는 상인을 호위하는 경호원과 일꾼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참 좋았지만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인들은 청어통을 구입하면서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 악명 높은 섀도우 엘프 해적들이 언제 쳐들어오지 않을지 염려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시끄러운데 그 빌어먹을 엘프들이 모를 리가 없지.
―지금이야 제법 번창하지만 한 달도 채 못 가서 대대적인 습격을 받을 거야. 그럼 여기도 끝이지.
―그때까지 최대한 팔아치우고 영지 밖으로 돈 빼야 될걸.
그러나 영주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오히려 영지 내의 부상병들을 돌보고 무기를 사들이는 등 전력을 보강하려 했다.
상인들은 부질없는 행동이라며 혀를 찼다.
어차피 돈만 벌면 되니까 상관할 바 아니지만.
* * *
청어통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바그란의 왕궁에도 도착했다.
원래 가장 좋은 것은 왕족이 먼저 손에 넣는 법이다.
루아드 왕자는 청어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보존력이 훌륭하다는 것에는 관심을 쏟았다.
“뿔새 수레로 자이움까지 옮겼는데 멀쩡하다고? 그게 사실이냐?”
궁내문관이 고개를 숙였다.
“예, 저하. 소금물에 절였음에도 신선도가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맛도 좋고요. 지금 자이움에선 청어 요리 열풍이 불고 있답니다.”
전쟁을 시작하고 끌어들인 주제에 그런 사치라니.
하기야 자이움 제국쯤 되는 곳이라면 전쟁의 풍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부류가 전쟁을 일으킨다.
루아드 왕자는 메스꺼움을 느꼈지만 참고 말했다.
“그거 놀라운 일이군. 통을 앞뜰로 가져와라.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이윽고 루아드 왕자 앞에서 통이 열렸다.
그는 손이 소금물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어를 꺼내 확인하고 냄새도 맡았다.
“흠. 굉장히 신선하군. 소금에 절인 것보다 나을 정도야. 내장을 제거해서 그런가? 여기 내장은 왜 그대로인지 궁금한데.”
옆에서 지켜보던 기사 그랜든이 조용히 첨언했다.
“그건 요리에 자주 쓰이는 부위라서 그럴 겁니다. 아주 맛있지요.”
“오오, 그랜든 경, 청어에 대해 조금 아시오?”
“남들이 아는 정도입니다.”
턱수염 가득한 얼굴에 지친 눈을 한 그랜든 올머스는 바그란의 근위기사이자 루아드 왕자의 어릴 적 검술 스승이었다.
검술 실력은 매우 뛰어나지만 젊은 시절엔 성격이 워낙 불같아 부하 기사들 사이에선 악마라고 불리곤 했다.
최근에야 나이도 들고 딸도 봐서 성격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냉소적으로 변했다는 게 흠이었다.
둘은 청어를 가지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소금물에 절이면 보관 기간이 엄청나게 늘어난다고 하는데 전선에도 투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죄송합니다만 저하, 이 청어통의 가격은 어떻게 됩니까?”
“잘은 모르겠는데. 1통에 5실버쯤 하나?”
둘은 궁내문관을 쳐다봤고 그는 서류를 뒤적이더니 말했다.
“1골드 5실버라고 합니다.”
“비싸군.”
“소금 양이 적다고 해서 가격까지 싼 건 아니군요.”
“그러나 생각해 보시오. 당장이야 이 청어통을 공급하는 곳이 영지 한 곳밖에 없지만, 곧 있으면 늘어나지 않겠소? 이렇게 만드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긴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물에 절이는 정도니까요. 암염광산을 가진 곳이면 시도할 수 있죠.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요?”
“해적입니다.”
섀도우 엘프가 언급되자 루아드 왕자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젠장, 그런 문제가 있었군.”
기사 그랜든은 청어를 통에 툭 넣고 손가락을 닦았다.
“반다스는 저도 들어 본 영지입니다. 최근 새로운 영주가 계승했다더군요. 그 얼치기가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해안가에서 영지민들을 철수시켜야 할 겁니다.”
“엘프들이 그렇게 무섭소?”
“무섭다기보다는 짜증나지요. 그리고 끈질기기도 합니다. 기동력이 좋은 갤리선을 이용해서 빠르게 약탈하고 빠집니다. 물론 불을 놓는 것도 잊지 않지요.”
듣고 있던 루아드 왕자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왜 비행선을 빌려달라고 한 거지?”
“그 장난감… 죄송합니다. 그걸 빌려달라고 했습니까? 영주가 정신이 나갔군요.”
비행선은 어지간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 에테르 공학의 산물이다.
그러나 놀라움 외에 큰 쓸모는 없었다.
하늘을 날아 봐야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운영비는 바그란 왕가의 허리를 휘게 만들었다.
부유석은 그렇다 쳐도 에테르석이 뭐 그리 많이 필요한지.
이런 정보를 토대로 그랜든은 반다스의 새로운 영주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루아드 왕자가 웃고 있었다.
“이걸 어쩌지? 나는 그 미치광이 영주의 밑에 경을 보내고 싶은데.”
“…저하, 제게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잘 알고 있소. 에일리가 아프다는 것도. 하지만 매번 야근하느라 보모에게 맡긴 실정 아니오? 시녀들이 잘 돌봐줄 테니 겨울 동안만 다녀오시오.”
그랜든은 왕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이상 거부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하나, 나는 반다스의 영주가 어떤 자인지 궁금하오. 도대체 그 비행선을 어디다 쓸 것인지 궁금하거든. 둘, 무슨 생각으로 영지를 위협하던 용병단을 단체로 죽여 버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소.”
“마지막이 청어군요.”
“이 정도면 이유로 충분하지 않소?”
그리고 교국의 성녀가 말한 것도 있고…….
왜 하필 이 시기에 홀연히 나타난, 키가 큰 남자를 찾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랜든은 슬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중이라 기사들이 대부분 전선에 나가 있어서 근위기사인 그가 나서야 했다.
왕자가 믿을 사람이라곤 별로 없으니까.
“제가 떠나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걱정 마시오. 에일리와 잘 놀아줄 테니까.”
“요즘 에일리가 검을 갖고 놀던 게 저하께 영향을 받아서였군요.”
“귀족이라면 응당 검을 들어야 하지 않겠소? 경의 딸이라면 분명 훌륭한 기사가 될 거요.”
“에일리는 네 살입니다.”
루아드 왕자는 헛기침을 하곤 돌아섰다.
“아무튼 다녀오시오. 반다스 남작이 어떤 자인지 소상히 알려줬으면 좋겠소.”
별수 없이 구석에 처박힌 시골 영지로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왕자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 * *
원래 잘나갈 때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반다스 남작령은 충분히 깨어 있는 쪽에 속했다.
청어를 잘 파는 것도 좋지만 해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영주가 아닌 영지민들이 주장했다는 게 특이한데 아무래도 이득을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바다에 나가서 청어만 잡아도 지금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돈을 벌 수 있는데 그걸 방해받아서야 되겠는가?
그리하여 병사들을 주축으로 해안가 마을에 감시탑이 올라가고 목책이 생겨났다.
“창과 칼도 갈아둬야지. 해적놈들이 우리 돈을 약탈하게 둘 순 없어.”
“목책은 3중으로 높게 세워! 그 엘프놈들 엄청 날렵하니까!”
엘프와 인간이 싸우면 100에 95는 엘프가 유리하다.
종족 전체가 수련한 기사급으로 강했고 에테르까지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긴 수명은 그 자체로 상당한 이득이라 전선에서 엘프 군대와 맞붙은 기사들은 그 능수능란한 움직임에 경악하곤 했다.
“젠장. 제식만 연 단위로 하는 놈들을 어떻게 이기겠어?”
“애초에 이건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야.”
엘브랑데는 엘프가 긴 수명을 제대로 쓰기 시작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대륙 전역에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에 비하면 섀도우 엘프는 조금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영지민들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반다스의 영지민들은 믿는 바가 있었다.
골리앗.
원래 하피 발톱단의 소유이지만 지금은 영주의 소유물이었다.
좀처럼 움직이진 않았지만 가끔 일어설 때면 땅이 울리곤 했다.
영지민들은 그 압도적인 거인이 자신의 편이라는 데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조종하는 기사가 자신들의 영주라는 것도.
하여튼 영지민들은 약탈당하기 싫었기에 필사적으로 전투를 준비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해적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렇게 기다려줄 놈들이 아닌데.”
“그 귀쟁이들이 여길 모를 리가 없어.”
섀도우 엘프들은 그 몸놀림만큼이나 소식을 전파하는 속도도 빠르다.
일설에는 재력가들만 쓴다는 통신 수정구로 정보를 교환한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본거지에 가본 사람이 없으니 진상이야 모르지만 놈들이 코볼트보다 더 냄새를 잘 맡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왜 안 오지?”
청어가 찾아 온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고 반다스 영지는 상당한 이득을 올렸다.
주변 영지는 물론이고 왕궁에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이쯤 되면 냄새를 못 맡는 게 이상한데?
영지민들이 초조해하며 마무리 조업을 이어가고 있을 때, 정작 그 해적들은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빠른 습격을 위해 갤리선을 탔다가 높은 파도에 휩쓸린 것이다.
평소 잔잔한 것으로 알려진 이 바다가 왜 사납게 돌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 살려어어!”
“거기 아무도 없어? 도와줘!”
엘프 해적 수백 명이 바다에 빠졌다가 구출되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해저 깊은 곳에 위치한 탐사정 몇 척이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는 건 몰랐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 전장 700미터짜리 우주선이 있다는 것도 말이다.
해적들은 갤리선이 뒤집어지기 시작하자 동료를 구출하기는커녕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
반다스 남작령 원정은 대실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