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15
214화 건방진 남작
아스테라의 인간이 얼마나 엘프를 혐오하는가는 한 문장으로 나타낼 수 있다.
―좋은 엘프는 죽은 엘프뿐이다.
이것은 엘프도 마찬가지라서 비슷한 문구를 읊곤 한다.
어쨌든 두 종족의 관계는 최소 수백 년 전부터 엇나가 있었고 드래곤 전쟁과 2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치고받으면서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학살, 노예화, 고문, 강간, 방화, 약탈 등 악랄하다 싶은 것이면 기꺼이 저질렀고 이건 현재진행형이었다.
최근 들어 전쟁이 비교적 짧게 끝나는 기류가 생겨났지만 관계가 진전된 게 아니라 엘프가 전략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하든 인간을 멸종시키는 건 어렵다. 그러니 그들에게서 땅을 빼앗는 식으로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비좁은 땅에서 살아라. 너희들이 뭘 하든 우린 신경 쓰지 않겠다.
엘브랑데의 전력이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최근 100년간 인간 측이 이긴 전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대륙력 1037년에 이르면 4개의 왕국이 엘브랑데에 복속되고 엘프들이 대륙의 1/4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전략은 인간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지만 전력이 밀리니 별수가 없었다.
애초에 자이움이나 신성교국 등 주축이 될 만한 국가들이 영향력을 잃고 있는 시점에서 인간들의 패배는 확정된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소수종족이 인간과 잘 협력하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드워프는 물론이고 실버드, 수인 등 아스테라에 존재하는 소수종족은 엘프에 못지않게 인간을 혐오했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 우리를 노예로 쓰고 학살했던 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엘브랑데 밑에 들어가 평화를 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최소한 우리를 죽이진 않으니까.
그렇게 판단하고 스스로 엘브랑데에 복속되길 원한 왕국도 몇 존재했다.
일단 복속되면 엘프들이 크게 박대는 못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일 뿐이었다.
엘프들은 복속되기를 택한 종족들을 황무지에 몰아넣고 제대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거기에서 끝도 아니고 암살자를 보냈다는 혐의도 있었다.
분리 독립을 외치는 귀족이나 유력자를 죽인 것이다.
당연하지만 엘프들의 손바닥 위에 놓인 시점에서 항의는 별 소용이 없었다.
복속된 종족이 할 수 있는 건 비좁은 땅에서 자중지란을 일으키며 서서히 멸종의 길을 걷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엘프들은 그들을 비웃으며 구경했다.
―괴로운가? 잔인하다고 생각하나? 잊지 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것은 너희가 우리에게 한 짓을 아주 조금만 돌려주는 것뿐이다.
―그러니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모든 것은 너희의 책임이다.
실제로 과거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전쟁을 거치며 상당수의 기록이 소실되었고 남은 것들은 엘프 측이 확보해 무한의 도서관에 숨겼기 때문이다.
또 이제 와서 진상이 드러난다고 해도 갈등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큰 의미는 없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서슴없이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현 아스테라 대륙의 정세였다.
덕분에 반다스 남작령으로 들어오는 엘프들을 반기는 영지민은 한 명도 없었다.
“대체 뭐 하러 여기 오는 거지?”
“다 죽여서 입구에 효시했으면 좋겠네.”
평생 엘프를 볼 일이 없는 사람들도 이런 증오를 드러낸다는 건 양측의 감정이 얼마나 악화되었는가를 말해준다.
다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고 영지로 들어오는 엘프들도 짜증 섞인 얼굴을 한 건 마찬가지였다.
개중에는 대놓고 냄새난다고 말하는 엘프도 있었다.
레오볼드는 그들이 아니라 선두에 선 티렌델에 집중했다.
그는 다른 엘프처럼 대놓고 짜증이나 증오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런 표정이 없어서 인형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아르마가 옆에 서서 그에 대해 조사한 것을 보고했다.
“티렌델은 자국에선 전쟁광으로 불리며, 엘븐 나이트가 된 후로 대부분의 전선에 참여했습니다. 엘브랑데가 최근 전쟁에서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건 티렌델이 있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단한 실력자인데도 하프엘프 혈통이라 입장이 미묘하겠군.”
엘프 순혈주의가 절대적인 엘브랑데 내에서 하프엘프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인간보다 더 지위가 낮다고 할 수 있었다.
일부 엘프들은 더러운 인간과 섞여 잡종이 됐다는 야유를 그에게 퍼붓곤 했다.
“그래서 엘브랑데 내부에선 정치적인 입지는 포기하고 군에서의 입지에 주력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있긴 합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싸우는 건 단지 인간에 대한 증오심 때문인가?”
“꼭 그렇진 않습니다. 티렌델이 대외적으로 인간에 대한 증오를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간을 포로로 잡으면 잘 대해 주진 않지만 가혹 행위도 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저 사무적으로 대할 뿐이죠.”
“보통 엘프와는 생각이 좀 다를 수도 있겠어. 그나저나 여긴 엄연히 적국인데 태연하군.”
“자기들을 못 건드린다는 걸 아니까요.”
엘프들이 적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트하트 지역에서 알테마 신앙을 뿌리 뽑겠다고 설칠 수 있는 것은 평화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협정이 끝나면 다시 전쟁이 터질 것임은 누구나 알고 있었고 수틀리면 협정 따위 무시하고 밀고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자이움을 비롯한 각국은 최소 1년을 벌었다고 생각했기에 심판관들이 뭘 하든 내버려 두었다.
고통받는 것은 수뇌부가 아니니까.
알테마 신앙도 희미해진 지 오래라서 진지하게 그녀에게 기도하는 신도들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정작 아스테라 판테온의 신전들이 즐비한 신성교국 팔마에는 가지 않는 걸 보면 의도가 의심스러워진다.
“그 건에 대해서입니다만, 엘프들의 목적은 알테마 신앙 탄압이 아니라 이스트하트의 정탐이라는 말도 있답니다. 뭔가를 찾고 있다는 거죠.”
“드래곤의 뼈 같은?”
“자이움 국경선 지하에 파묻힌 고대의 골리앗을 찾는 것일 수도 있고요.”
하여튼 반다스 남작령 같은 작은 영지는 심판관 몇 명의 입김에도 전전긍긍해야 하는 처지였다.
1년만 지나도 달라지겠지만 당장은 내쫓기가 어려웠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고 엘프들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서 만나는 것에 가깝다.
꿈에서야 많이 봤지만 실제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레오볼드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대로를 걷는 엘프를 바라봤다.
“서재로 데려와.”
* * *
아스테라에서 엘프가 인간을 만날 때면 자신의 힘이나 위치를 과시하곤 한다.
대부분의 경우 엘프가 우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 인간들은 아니꼬워하면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엘프들의 예절은 더더욱 개판이 되어 갔다.
만약 레오볼드가 이번 엘브랑데와 이스트하트 동맹 간의 협상에 참석했다면 반응탄을 쏠 것을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엘프들은 거만했다.
‘이 친구는 그런 점에선 조금 덜하군.’
티렌델은 서재에 들어와서도 방만한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고 다리를 벌리지도 않았다.
표정이야 무뚝뚝하지만 원래 그런 것 같으니 트집을 잡기도 좀 그랬다.
두 남자는 말없이 차를 마시다가 시선을 교환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티렌델이었다.
“오면서 봤는데, 비행선의 선수상을 떼지 않았더군요.”
특이하게 티렌델은 대륙공용어를 썼다.
보통의 엘프가 엘노페이어밖에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볼 때 특이한 일이었다.
“알테마의 선수상입니다. 아주 멋지죠? 비록 금박이지만 질감이 뛰어나서 전체가 금처럼 보이더군요.”
티렌델은 조금이지만 재미있어 하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구인지 압니까?”
“엘븐 나이트의 지휘관 중 한 명, 현재는 알테마 신앙을 척결하는 심판관.”
“내게 대놓고 알테마 선수상을 보여 주다니, 뒷감당이 되려나 모르겠군요. 이름을 바꾸지도 않았다는데.”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알테마의 신도가 아니니까요.”
“신앙의 증명은 마음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으로 하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알테마의 신도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인.”
“그거 특이하군요. 모든 엘프는 엘드그라실의 신도라는데,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까?”
엘븐 판테온의 중심인 엘드그라실과 기도를 언급하자 티렌델은 할 말이 없어 머뭇거렸다.
엘드그라실은 아스테라 전체를 지탱하는 세계수이므로 마음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모든 엘프가 낸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엘프라면 여기에서 화를 내며 윽박지르겠지만 티렌델은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더 마셨을 뿐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알테마의 신도가 아니니 상관이 없다?”
“왕가에서 빌렸을 때부터 선수상이 달려 있었고 이름도 알테마였습니다. 그걸 바꾸지 않은 것이 죄라고 생각되진 않는군요.”
“그래도 우리 눈치를 볼 순 있었을 텐데요?”
“거기에 노력을 들이느니 부유대륙 원정안을 점검하고 영지에 더 신경을 쏟겠습니다.”
알테마라는 이름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걸 밝힌 셈이었다.
그 말을 들은 티렌델은 상체를 약간 기울였다.
그의 멀쩡한 눈이 렌즈를 꼈나 착각할 정도로 빛났다.
“나는 100년 동안 전쟁터를 전전했고, 수백 대의 골리앗과 수만 명의 적군을 학살했습니다. 그런 나를 인간들이 뭐라 부르는 줄 압니까?”
“눈먼 반쪽짜리 잡종 엘프.”
하프엘프라는 손가락질 받기에 딱 좋은 혈통에다 안대까지 했으니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다.
순간적이지만 티렌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만용인지 여유인지는 잠시 후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와 싸운 인간들 중엔 반다스 남작도 포함되어 있었죠. 그 후계자까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레오볼드의 아버지, 형과 싸웠다는 말이다.
직접 죽인 건 아니겠고 같은 전선에 있었다는 뜻이겠지.
도발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레오볼드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원래 어떤 사람에게 감정을 느끼려면 관계부터 형성되어야 하는데 그게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형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전쟁터에선 원래 그렇게 싸우는 법이죠.”
티렌델은 담담하게 말하는 레오볼드에게 흥미를 느꼈다.
대놓고 압박을 하고 있는데도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분위기를 읽지 못할 정도의 멍청이이거나 나를 상대할 자신이 있는 것이거나.’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봤을 때 전자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다고 후자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바그란 왕가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능력이나 데노바를 압박하는 것을 봤을 때 정치적인 감각은 있을지 모르나…….’
정작 힘이 없다는 게 반다스 남작의 문제점이었다.
확실히 그의 영지는 이런 구석에 처박힌 곳치고는 꽤 발전되긴 했다.
그러나 휘하의 전력이라곤 엘브랑데에선 골리앗이라고 쳐주지도 않는 라움급 4기에 근위기사 한 명과 용병 둘이 전부였다.
엘븐 나이트 두 명만 나서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남작의 힘도 그리 강한 것 같진 않았다.
봉인마법진 같은 것을 새겼을 리도 없으니 지금 느껴지는 감응력이 전부라는 뜻인데 매우 평범했다.
‘대체 뭘 믿고 나를 도발하는 건지 모르겠군.’
설마, 엘프들이 적국에서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티렌델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약소 귀족 따위는 꼬투리를 잡아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레오볼드를 노려보았다.
“남작은 우리의 선의를 믿고 있군요. 그 선의가 무너졌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저런, 엘프가 선의를 베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엘브랑데에선 학살과 노예화, 강간 등을 선의로 부르나 보죠?”
도발적인 대응에 티렌델은 울컥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헛소리 집어 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당장 비행선의 이름과 선수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본국에 연락을 할 필요도 없이 내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그거 무섭군요. 그런데 그쪽이 한 가지 알았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뭡니까?”
“그렇게 드래곤이 싫다면 왜 드래곤의 뼈를 발굴하는 겁니까?”
“…….”
갑작스런 발언에 티렌델은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본국에서 드래곤의 뼈를 발굴하고 있다고?
“…왜?”
“이유는 나보다는 엘프인 당신이 더 잘 알겠죠. 엘프는 200년 전 드래곤 전쟁에서 수많은 드래곤과 싸운 것으로 아는데 특이하지 않습니까? 드래곤의 뼈 같은 대단한 것을 캐내서 뭘 할 작정인지…….”
사실 엘프의 편을 든 드래곤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는 기밀로, 아는 사람이 정말 몇 되지 않았다.
아르마조차 엘브랑데 수뇌부를 추적하다가 겨우 알아낸 것이다.
그러니 전장만 전전한 젊은 티렌델은 전혀 모를 수밖에.
“처음엔 골리앗의 재료를 생각했습니다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더군요. 흑마법을 이용해 부활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본드래곤은 블루 드래곤에 버금가는 충격을 가져올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디서 캐냈습니까?”
“데노바와 일을 좀 하다 보니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오더군요. 어쩌면 내부적으로 갈등이 불거진 것일지도 모르죠. 흑마법은 그런 갈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니까.”
참다못한 티렌델은 테이블을 쾅 쳐서 부수군 벌떡 일어섰다.
“헛소리! 본국에서 흑마법을 다시 꺼낼 리 없다! 우리는 최후의 네크로맨서, 그놈의 리치를 20년이나 추적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지 가능성이라는 거죠.”
“대체 이렇게 막나가는 이유는 뭐냐? 내가 최후의 끈을 놓지 않으리라고 착각하는 건가? 나는 얼마든지 네놈을 죽일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급기야 티렌델은 검을 뽑아들었지만 레오볼드의 눈은 차가웠다.
“뽑아 보시죠.”
“뭐라고?”
“말리지 않을 테니 검을 뽑아서 무저항의 상대를 죽여 보란 말입니다. 그게 엘프의 방식 아닙니까?”
엘프의 방식.
티렌델의 귀가 바르르 떨리더니 검자루를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는 엘프의 방식을 증오하는 하프엘프였다.
전쟁터를 전전하는 것도 엘브랑데의 영광이나 엘드그라실에 바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만둡시다.”
티렌델은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 충고하듯 말했다.
“당신 말대로 알테마 숭배자를 잡는 건 트집에 불과합니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죠.”
“보나마나 땅을 캐는 거겠죠. 엘프들이 잘하는 거잖습니까. 아, 드워프보다는 못하겠네요.”
“…배짱은 대단한 것 같은데 그게 전쟁터에서도 발휘될지 궁금하군요.”
“언젠가 만나면 직접 확인할 수 있겠죠.”
둘은 호전적인 시선을 교환했다.
“1년간 평화 협정이 체결되긴 했지만 그걸 믿는 멍청이는 아무도 없죠. 그때 당신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레오볼드가 내용을 물어볼 줄 알았던 티렌델은 잠시 인상을 쓰더니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말에 망연자실했다.
“부순 테이블 값은 주고 가야죠.”
“…….”
티렌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끌러 그에게 던졌다.
“손해 보는 짓은 안 하는군요.”
“가끔은 합니다.”
그 후로 엘프들은 목적이 따로 있었던 모양인지 의외로 조용히 영지를 떠났다.
레오볼드는 아르마에게 말했다.
“애송이치곤 꽤 절제할 줄 아는군.”
“인간을 증오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그가 감정을 드러낸 게 특이합니다. 평소의 티렌델은 나무인형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표정이 없는 엘프입니다.”
“그런 자가 내 앞에선 감정을 드러냈다… 어쩌면 목적이 인간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드래곤 뼈 발굴 등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긴 했지만 그게 유출되지는 않을 것이다.
티렌델 입장에서 타국의 정보 제공자를 족쳐봐야 얻는 이득이 없다.
오히려 앞으로도 정보를 제공받기 위해 본격적으로 접촉해 올 가능성이 높았다.
대가는 그때부터 받으면 된다.
한편 영지민들은 기세 등등하게 들어왔던 엘프들이 조용히 떠나자 어리둥절했다.
“뭐야, 선수상 떼라고 깽판이나 부릴 줄 알았는데 조용히 떠나네?”
“보나마나 영주님한테 한 소리 들은 거야. 우리 영지에 간섭하지 말라고 말이지.”
“시건방진 엘프들이 그 말을 들을 것 같진 않은데…….”
“어쨌거나 꺼졌으니 다행 아니겠어? 밀가루나 뿌리자고!”
“훠이훠이! 다시는 오지 마라!”
* * *
엘브랑데 심판관이 별 소리 안 하고 돌아갔다는 게 알려지자 주변 영지에서 반다스 남작령을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바뀌었다.
사실 반다스 남작령이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곤 하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각각의 영지는 완전히 다른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대륙 서쪽 끝에 처박힌 덕분에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도 극히 적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변 영주들은 반다스 남작령을 졸부 비슷하게 보곤 했다.
―돈만 많으면 뭐 해? 아버지와 형은 전쟁터에서 죽고 가신이라곤 아무도 안 남았는데. 친하게 지내는 유력자도 없지 아마?
―전형적인 졸부지. 이제 돈을 좀 벌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곤 있지만 오래 가진 못할 거야.
이런 비난 속에는 돈을 많이 번 주제에 귀족사회에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아니꼬움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란티스 백작령에 한 번도 방문을 하지 않았다는 게 영주들을 분개하게 했다.
아무리 독립적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란티스 백작은 바그란 서부 일대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대영주이기 때문이다.
―우리한테 돈을 쓰라는 말이 아니고 최소 백작님에게 인사는 해야 되지 않느냐는 거지.
―영지민에게 왜 돈을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만. 그런 무지렁이들에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데.
주변에서 이렇게 비난을 거듭하는 건 반다스 남작령이 어마어마한 돈을 번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청어는 이제 소소한 것이 되었고 부유대륙에서 가져온 금 등을 란티스 백작령에서 제련하면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다 합치면 4만 골드가 넘는다는데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군.
―소문에 의하면 다음엔 비행선 세 척으로 선단을 구성해 부유대륙에 간다던데. 왕가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국가는 전부 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더라고.
―그런데 그 영지… 의외로 전력이 시원찮은데? 고작해야 라움급 4대뿐이야.
―백작님의 재가만 있다면… 흠…….
다들 반다스 남작령에 군침을 삼켰지만 당장 움직일 수는 없었다.
란티스 백작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반다스 남작의 능력이 범상치 않고 특히 엘브랑데의 심판관들을 조용히 내보낸 것을 높이 샀다.
“자네들 중 눈먼 반쪽짜리 잡종 엘프를 상대로 알테마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보게.”
가신은 물론이고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귀족들까지 나서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자이움과 바그란이 방관하는데 엘븐 나이트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심지어 심판관 티렌델은 그 악명 높은 인간사냥꾼이었다.
그의 손에 파괴된 골리앗은 셀 수도 없으며 죽은 자를 따지면 호수를 메울 수 있을 거란 소문이 돌 정도였다.
란티스 백작은 혀를 차며 말했다.
“티렌델은 무섭고 그를 아무 일 없이 돌려보낸 반다스 남작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나? 내게 따로 생각이 있으니 어떻게 해볼 거라는 생각은 버리게.”
정작 그렇게 말한 란티스 백작도 반다스 남작이 사그리스 은광의 운영권을 1년 동안 확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했다.
“감히 내 은광에 눈독을 들여? 왕자란 놈은 그걸 덜컥 내주고?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사그리스 은광은 바그란 최대의 은 매장량을 자랑하는 광산으로, 그동안 왕가의 자금줄 역할을 든든히 해 왔다.
암석의 은 함유율이 워낙 높아 광산 안에서 횃불을 켜면 반짝반짝 빛날 정도라고 한다.
특히 자이움 제국이 눈독을 많이 들였는데 바그란 왕가는 매년 1톤에 가까운 은을 바치다시피 했다고.
그런 은광이 폐쇄된 것은 언젠가부터 마족들이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좁은 광산의 사정상 골리앗은 들어갈 수도 없었고 기사들은 튼튼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악마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그리스 은광은 바그란 3세의 지시에 완전히 폐쇄되었다.
바그란 왕국의 쇠퇴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전쟁 등으로 돈 나갈 구석은 많은데 자금줄이 말라 버렸으니 쪼들릴 수밖에.
그나저나 란티스 백작은 남작이 무슨 방법으로 은을 채굴할 건지 궁금했다.
‘신기술을 동원해도 인명 피해 없이 은을 채굴하는 건 불가능하다.’
큰 돈을 들여 시설을 만드는 것은 영지민의 환심을 사서 은광에 몰아넣기 위함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반다스 남작은 자신과 동류였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지켜보려 했건만 인사조차 오지 않는군.’
광석 제련 건으로 접촉하려 했으나 작업자들만 들락거릴 뿐 남작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 영역 안에서 돈을 벌면서 나를 무시한다 이건가. 이 란티스 백작을?’
주먹이 불끈 쥐어졌지만 일개 남작을 상대로 백작이 나설 수는 없었다.
바그란 왕가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자이움까지 주목하고 있다는 말이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언제까지 잘나갈지 두고 보도록 하지.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가 앞장서서 네놈을 잡아먹어 주마.’
란티스 백작 외에도 달려들 놈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반다스 남작은 많은 원성을 듣고 있었다.
원래 이웃이 많은 돈을 벌면 배가 아픈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