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14
213화 성녀와 용사, 그리고 지구
과거 유지하는 선지자의 유물을 몸에 받아들였을 때부터 묘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명백히 지구는 아닌 판타지 행성이었고 지나치게 생생했고 또 가혹했다.
유지하는 숲에서 엘프를 피해 달아나야 했고 거대한 로봇에 밟혀 죽기도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엔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
당시엔 개꿈이 따로 없다며 대충 넘겼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곳은 아스테라였다.
그러니까 그는 순항속도가 광속의 20%에 달하는 우주선으로 50년은 걸리는 먼 행성의 꿈을 꾼 것이다.
둘을 이어준 매개체는 신성교국 팔마의 성녀로 추측되었다.
아르마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그녀는 황금 신탁을 받았고, 팔마 전체가 나서서 갈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남자를 찾고 있다고 한다.
주변 국가의 어지간한 곳은 이미 들렀고 이제 반다스 남작령 차례였다.
레오볼드는 시비리 위성을 통해 영지로 들어오는 성녀를 지켜봤다.
“내게 아스테라의 꿈을 꾸게 한 게 저 여자란 말이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어.”
2180년 인류의 기술력으로도 그건 불가능해서 신이란 개념을 꺼내올 수밖에 없었다.
아르마가 그간 조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이 세계엔 마법을 제외하고 신성마법, 흑마법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근본은 에테르인 것 같은데 이렇게 나뉘니 특이한 일이죠.”
“석유 같은 거겠지. 원유에서 중유 경유 등유 이런 식으로 뽑아내는 것처럼.”
어쨌든 그녀에 의하면 흑마법은 네크로맨서 등이 부리는 것이고 신성마법은 신에게 기도하여 얻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기도가 간절할수록, 또 에테르 감응력이 뛰어날수록 신성마법도 강력해진다는군요. 물론 200년 전의 얘기죠.”
드래곤 전쟁으로 다수 신이 사망한 지금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들어주는 신이 거의 없단다.
신을 전지전능한 초월자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레오볼드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여기에선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라고.
아스테라에선 신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부활도 가능할까 싶지 않은데 거기까진 아는 바 없단다.
“신이 죽어서 지갈레온이 힐을 못 쓴 건가? 드래곤은 판테온의 신들에 대적하는 존재라며?”
“아스테라 판테온은 모든 신을 총괄하는 개념으로, 신의 성향과는 크게 상관이 없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한데 모아놓은 장소에 불과하죠.”
“드래곤에게 은총을 내려주는 신도 있다는 말이군.”
“그랑베르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문헌에 의하면 드래곤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다고 하네요.”
“혹시 날아다녀서?”
“그랑베르는 대지와 풍요의 신이니까요. 하늘을 날아다니고 파괴적인 드래곤과는 맞지 않죠.”
“신 주제에 쪼잔하군.”
아무튼 성녀가 신탁을 받은 것은 확실한데 대체 어떤 신인지 지금도 논쟁 중이란다.
아르마는 창조신 라사라고 예측했다.
“라사는 신이라기보다는 근원, 혹은 개념이라고 해야겠네요. 아스테라의 창조했지만 의외로 존재감이 약하다고 합니다. 기도를 해도 도통 들어주질 않아서요.”
“하긴 다른 신들은 다 들어주는데 라사만 제외면 신앙이 약해질 수밖에 없겠어.”
“심지어 아스테라 판테온 중에서도 라사를 모시는 신전은 없답니다. 하지만 이번 신탁은 라사의 것으로 추정되니 특이한 일이죠.”
“라사가 우리가 찾는 선지자겠군.“
유물에서 드러난 그 초월적인 기술력이면 아스테라, 아니 이 에테르 우주 전체를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레오볼드가 여기에 온 목적은 그를 만나기 위함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뚜렷한 단서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여러 방법으로 찾아볼 생각이었다.
거기엔 신성교국 팔마의 정보를 캐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장 접촉하기엔 이르지. 이쪽의 힘이 부족하니까.”
세틀러호에 보관된 반응탄이면 아스테라 전체를 멸망시킬 수도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기껏 선지자를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의 창조물을 박살내면 어쩌자는 말인가?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힘이 부족하다는 거고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지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완벽한 방어체계를 갖추는 것도 아니니 생각보다 금방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은 오리발을 내밀어야겠군. 성녀나 기사들이 알아채진 않겠지?”
“조사 명단을 보면 마스터가 마지막인데 유일하게 두 가지가 들어맞습니다.”
“갑자기 대두되었고 체격이 크다는 것 때문에?”
“네. 그걸 가지고 확신하지는 못하겠죠. 따라서 성녀는 그녀만이 알고 있는 뭔가로 마스터를 테스트하려 들 겁니다.”
“루시아가 봉인마법진을 그려줬으니 큰 문제는 안 될 거야.”
하지만 그 외의 방법이 없다고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여기는 에테르의 본고장이고 아르마도 자신 없는 분야인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엔 모두 붙잡아두고 세뇌라도 시켜야겠군.”
가급적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말이다.
레오볼드는 카슨 행정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곤 일어섰다.
* * *
성녀 베로니카는 바그란의 근위기사 그랜든과 카슨 행정관의 안내를 받으며 영주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목적은 신탁에 나온 용사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는 그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신탁에 나온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성인 남자.
―근육질의 큰 체격을 가진 젊은 남자.
―엘븐 나이트를 초월하는 엄청난 에테르 감응력을 가진 사람.
―길이가 500미터가 넘는 거대한 배를 타고 온 이계인.
―마지막으로 엄청난 능력을 가져서 최근 급격히 존재감을 드러낸 사람.
이는 팔마 내부에 알려진 조건이었고 성녀가 말하지 않은 조건이 하나 더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이 사람이다 싶을 때에만 물어볼 거야. 그가 있던 곳이 어스가 맞는지.’
다만 그걸 순순히 답할까에 대한 회의감이 들긴 했다.
이 세계에 왔으면서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건 정체를 드러내길 원치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고향이 어스라고 답할까?
베로니카는 자신이 신앙을 바친 신을 믿기로 했다.
헤르미나의 꿈을 통해 본 그 지식이라면 용사에게 동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차를 마시며 기다렸지만 영주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영지민에겐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하긴 영주는 자신의 영지에서 왕이나 다름없으니까.
누구 하나 지적할 생각을 못하니 막나가는 것이 당연해진 세상이다.
이렇게 구석에 처박힌 교통이 불편한 영지라면 그런 경향이 더 심할 것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청어를 팔고 부유대륙에 다녀온 돈으로 영지민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고 있다고 했는데…….’
베로니카가 확인한바 반다스 남작령은 바그란의 여타 영지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영지민을 위한 시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공동 우물을 몇 개나 파놓았고 취사장이며 목욕시설까지 완비했다.
인구는 천 명도 안 되는데 영지 전체에 포장도로를 깔아놔 이동이 쉽도록 했다.
그 외에도 시설에 엄청난 돈을 썼고 영지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바그란의 왕도나 번화한 여러 도시에 비하면 아직은 부족하지만 근처 영지와는 편의성에서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기다리게 할 리 없는데…….’
베로니카가 서재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을 때, 레오볼드는 루시아에게서 심각한 얘기를 듣고 있었다.
―굉장히 강력한 에테르를 숨기고 있네요. 아마 특정 신의 은총이 내려왔나 봐요.
“특정 신? 팔마의 성녀는 모든 판테온을 모신다고 들었는데.”
왜냐하면 성녀는 인간을 대표해 판테온의 모든 신에게 봉사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특정 신을 대변해서는 안 되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다만 현재 아스테라 판테온 중 살아남은 신이 몇 없었기에 성녀가 특정 신에 물들었을 가능성은 있었다.
“그래서 무슨 신일 것 같아?”
거기에 대해서 루시아는 말해 줄 수 없다.
이윽고 지온이 투덜거리며 들어오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방은 어떻게 된 거냐? 온갖 잡스러운 마법진이 펼쳐져 있는데?”
“시끄럽고 성녀를 지배하는 게 누구인지나 말해 봐. 넌 아마 알고 있을 거야.”
도망만 다닌 드래곤이지만 싸움의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므로 누구의 에테르인지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과연 지온은 에테르를 음미하듯 눈을 감더니 한 신의 이름을 내뱉었다.
“헤르미나. 꿈과 환상의 신이다. 아주 미약하게 느껴지지만 확실해. 대전쟁 당시엔 별 힘이 없어서 살아남았지.”
“너처럼?”
“내 쪽에서 리스크를 회피한 것뿐이야.”
아무튼 헤르미나의 관할 영역은 꿈이나 환상, 악몽 같은 것이라 대단치 않은 것으로 취급받기 딱 좋았고 실제로도 별 존재감이 없는 신이었다.
판테온의 힘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에게 신앙을 바치는 지적 생명체의 숫자나 염원에 의존하므로 헤르미나는 약한 신이었다.
성녀 베로니카는 그녀의 힘을 봉인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마법진을 새겼다.
실수가 있다면 능력을 발휘하기 쉽도록 봉인마법진의 일부를 훼손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감지하기 힘들겠지만 플레이그 퀸과 드래곤은 바로 알아챘다.
“꿈과 환상의 신이라. 그래서 나와 연결된 건가.”
특정 신에 지배당하고 있음에도 라사가 신탁을 내려준 것은 그가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나가 있어.”
지온은 영문을 모르는 채 쫓겨났다.
이제부턴 단독으로 신의 은총을 받은 성녀를 상대해야 한다.
신성마법을 펼쳐두었을 테니 어지간한 기만책은 통하지 않는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렇다고 에테르 차단기를 써버리면 그녀가 알아채게 된다.
‘꿈과 환상의 신이라… 내가 아스테라의 꿈을 꾸었듯이 그녀도 지구의 꿈을 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성녀는 자신에게 그 지식을 드러내 동요를 유도할지도 모른다.
그녀와 팔마의 목적은 영향력 확대로 보이기 때문에 이계에서 온 용사를 확보했다고 하면 신자들이 많이 몰려들 것이다.
‘진짜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로 봐선 그렇지.’
헤르미나가 은총을 내려준 목적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만간 드러나게 될 것이다.
레오볼드는 아르마에게서 주의점을 몇 가지 듣고 서재의 문을 열었다.
흰색에 가까운 은발의 여성이 거의 비슷하게 일어섰다.
“처음 뵙습니다. 아스테라 판테온을 모시는 베로니카입니다.”
“레오볼드 반다스. 이 영지의 주인입니다. 앉으시지요.”
* * *
베로니카는 반다스 남작을 찬찬히 뜯어봤다.
일단 신탁의 용사와 외모는 전혀 닮지 않았다.
꿈에서 본 용사의 얼굴은 부드러우면서도 입체감 있는 외모였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여성이라면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미남이었다.
그에 반해 눈앞의 남작은 우락부락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외모로 그다지 호감형은 아니었다.
‘머리색도 눈색도 완전히 달라…….’
요약하면 눈앞의 남작에게선 용사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이 남자가 용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근 청어를 잡아들이고 부유대륙에 상륙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사가 그런 일에까지 손을 대는 것은 이상하지만 어떤 목적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렇게 커다란 배를 타고 왔는데 보통 목적이 아닐 거야.’
그 배를 어디다 숨겼는가도 관심의 대상이지만 일단 정체를 밝히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은 뒤 말했다.
“남작께선 제가 신탁의 용사님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하도 소문이 많이 나서 별 관심이 없는데도 들리더군요. 그래서 용사님은 찾으셨습니까?”
“아직은요. 여러 국가에서 많은 분을 만났지만 용사로 추정되는 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처럼의 신탁이라고 들었는데 안타깝군요. 저 역시 용사가 아니니 헛걸음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레오볼드의 얼굴엔 전혀 미동이 없어서 베로니카는 자신이 잘못 짚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기의 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녀는 교국에 알리지 않은 자신만의 무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이 영지가 마지막이로군요. 시간도 꽤 남았으니 저와 용사님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부터 알려드리죠.”
말이 길어지는 걸 보면 안 좋은 징조다.
레오볼드는 아르마에게 최악을 대비하라고 일렀다.
여기서 들켜 신성교국과 전쟁을 하느니 이들을 전원 생포해서 세뇌시키는 게 나았다.
‘나를 그냥 내버려둘 위인들이 아니지.’
에테르 차단기를 써서 정보가 새어나가는 걸 방지하고 아르마와 더미 병력이 나선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이 살짝 풀리며 기가 막힌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용사님과 저는 꿈으로 연결되었답니다. 제가 용사님의 고향을 구경했듯, 용사님도 이곳 아스테라를 꿈에서 목도했겠죠.”
“…….”
찻잔을 쥔 레오볼드의 손이 살짝 떨렸으나 성녀는 알아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그곳은 아스테라와는 완전히 다르더군요. 수많은 높은 건물과 철로 된 거대한 배와 비행선이 바다와 하늘을 다니고 있었어요.”
‘지구가 확실하군.’
기억을 빼내는 능력인지 의심도 들었으나 루시아와 지온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즉, 성녀는 유지하라는 인간을 통해 지구를 구경한 게 확실했다.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꿈속이었지만 정말 생생하더군요. 사람들의 옷차림도 아스테라와는 전혀 달랐어요. 에테르가 없는데 그렇게 문명이 발달한 건 매우 특이하더군요. 거기에도 신이 있을까요?”
이제 성녀는 거의 확신하듯 레오볼드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싸구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다른 세계를 구경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재미있으셨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곳을 구경하고 있답니다. 웬일인지 제가 처음 봤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어요.”
지금도 보고 있다고?
그 한마디에 레오볼드의 얼굴이 짧게 굳어졌으나 곧 풀렸다.
“어떤 면에서 달라졌다는 말씀이십니까?”
“흥미가 생기셨나요?”
“아뇨. 완전히 다른 세계이고 갈 일도 없는데 무슨 흥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뒷말은 생략했지만 적당히 당신의 상대를 해주고 있을 뿐이라는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성녀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세계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혼란에 빠져 있다는 건 확실하더군요. 거대한… 정말 거대하다고밖에 설명되지 않는 구조물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로 보였답니다.”
레오볼드가 태양계를 떠난 지 50년 이상 흘렀다.
그가 만들어 놓은 것들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긴 세월이다.
‘가능하면 메가시티를 중심으로 발전해가기를 바랐건만… 어려웠나 보군.’
레오볼드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 그는 최종적인 목적과는 상관없이 아스테라에 뼈를 묻을 운명이었다.
몇몇 사람과 약속은 했지만 50년이 걸리는 여정을 다시 겪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성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신기한 건 사람들이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는 거였어요. 방금 말한 그 거대한 구조물 안에서, 때로는 황폐화된 대지 위에서 유지하를 내놓으라고 외치고 있더군요.”
뭔가 이상하다.
5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의 이름을 주워섬길 사람이 있을 리가?
물론 유지하는 역사서에 남을 정도의 기록을 남기긴 했다.
하지만 50년은 매우 긴 시간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사망했을 확률이 높았다.
안티에이징 시술은 노화를 억제하는 거지 수명을 늘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진작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야 할 그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이 많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50년이 지난 게 아니거나.’
이 에테르 우주가 태양계가 속한 우주와 같은 차원인지도 알 수 없는 시점에서 속단은 금물이었다.
분명 레오볼드는 50년의 세월을 겪었지만 지구 사람들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었다.
성녀가 거의 확신하듯 물었다.
“유지하님이시죠? 지금 제 앞에 계신 분은, 반다스 남작의 껍데기를 쓴 이계에서 온 용사님이시죠?”
이토록 직설적인 질문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레오볼드가 그간 겪은 세월과 경험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어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성녀님이 찾으시는 용사가 아닙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이 영지를 보존하고 조금 더 돈을 벌어 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소귀족일 뿐이죠.”
“진짜 소귀족이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고, 교국과 연결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죠.”
“그래서 저를 용사로 지목하시겠습니까?”
짧은 고민 끝에 베로니카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증거는 없어요. 하지만 제 직감은, 제 마음은 당신이 용사라고 외치고 있어요. 그 커다란 배는 어디에 두셨죠? 부유대륙에 있나요?”
직감이라고 말했지만 그녀가 신앙을 바친 헤르미나가 속삭이고 있는 것이리라.
레오볼드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알테마호를 말씀하시는 거면 계류장에서 정비를 받는 중입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가요. 아무튼 오늘은 남작님을 만난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증거를 찾진 못했으니 앞으로 계속 귀찮게 굴 거라는 뜻처럼 들렸다.
레오볼드는 그녀를 배웅한 뒤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르마, 세뇌가 가능할 것 같아?”
“특수 바이오칩을 삽입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권해드리고 싶진 않아요.”
“헤르미나의 지배 아래에 있는 성녀를 함부로 컨트롤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거군.”
“네. 당장 폭로할 것 같진 않으니 지켜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뜻밖이었어. 지구인들이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다른 차원이라서 시간축마저 다를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한동안 말이 없자 아르마가 그의 팔을 살짝 껴안았다.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약속한 게 있어서 말이야. 하지만 여기에서 할 일이 남았어.”
선지자를 만나고 감사의 인사를 하지 못하는 이상 그가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정작 방법마저 모르는 처지지만.
아무튼 성녀 베로니카와의 만남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그녀는 당장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영지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신성기사들의 태도도 나쁘지 않아서 그들이 머무르는 동안 영지도 적당한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엘브랑데의 심판관이 곧 여기로 온다는 소문이 퍼지며 팔마의 사람들은 서둘러 영지를 떠났다.
레오볼드는 십여 명의 엘븐 나이트를 대동하고 영지에 들어오는 한 엘프를 바라봤다.
곱상한 외모에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미남자였다.
균형 잡힌 체격과 왼쪽 눈을 가린 안대가 심상치 않은 자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티렌델 아즈우스.
엘브랑데의 엘븐 나이트이자 심판관인 그가 알테마 신앙을 척결하러 왔다.
성녀 때와 달리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할지 기대되는군. 이쪽으로 안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