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16
215화 신뢰를 얻는 방법
봄이 지나가며 반다스 남작령은 본격적으로 내실 다지기에 박차를 가했다.
단지 시설만 확충하는 게 아니라 영지민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다양한 직군에 종사하게 한 것이다.
영지민들은 행정, 군사, 광업, 건축, 어업, 취사, 시설 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 가지 이상의 일을 맡아 임금을 받게 되었다.
노동시간도 거의 정해져 있었다.
이젠 해가 지면 집에 들어가는 생활에서 시계탑의 종이 울리면 퇴근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몸에 익지 않아서 이런저런 불평이 많았으나 점차 익숙해졌다.
다만 이런 활동이 대단한 이익을 창출하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쥐꼬리만 한 영지에서 경제활동을 해 봐야 소소한 것이었고 외부에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했다.
어디까지나 내부에서 돈과 노동력이 교환되는 원시적인 시스템이었고 이는 노동 의욕을 고취하기 위함이었다.
레오볼드는 영지민들에게 임금을 받아서 먹고살 수도 있다는 의식을 일깨워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전적으로 4만 골드가 넘어가는 금에 의지하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카슨 행정관이 그런 경우로, 장부를 만지다 보니 날이 갈수록 줄어만 가는 재정을 보고 노이로제에 시달릴 지경이었다.
수차례 장부를 수정하던 그는 레오볼드에게 애원했다.
“영주님… 영지민들에 지급하는 임금이 너무 높습니다……. 지금의 절반 정도로 줄여도 큰 불만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왜, 돈이 부족해서 그렇소? 걱정 마시오. 돈은 부유대륙에서 가져오면 되니까. 그리고 수백 명 정도의 규모로 이 영지가 어떻게 되진 않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예…….”
카슨의 우려는 이해하지만 레오볼드의, 아니 아르마의 연산유닛 속엔 이 아스테라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로드 맵이 꽉 짜여 있었다.
그 거대한 규모의 계획과 천문학적인 숫자에 비하면 이 자그마한 영지에 투입되는 재원은 정말이지 티끌에 불과했다.
그래서 레오볼드는 선지자를 만나는 것 외에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그것은 아스테라 전체를 통일하고 문명을 19세기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엘브랑데나 자이움 일부 지역에서 갖춰 놓은 인프라를 아스테라 전체로 확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인류가 선지자에게서 선물을 받아 위기를 넘겼고 또 문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걸 조금이라도 갚으려다 보니 선지자의 창조물로 여겨지는 아스테라를 발전시키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선지자가 이걸 좋아할지는 의문이지만…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있을 테니 해 보는 수밖에.”
하여튼 레오볼드의 굳건한 의지와 재정이 뒷받침된 덕분에 반다스 남작령은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다른 곳으로 도주했던 유민들이 영지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선대 영주가 사망하고 영지가 쇠락에 접어들자 살길을 찾아 떠났던 자들이었다.
“처자식이 굶어 죽을 처지라 살기 위해 영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디 저희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영주님.”
희끗한 흰머리를 가진 노인과 남루한 옷차림을 한 여인 등 수백 명이 레오볼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랜든은 그에게 귓속말로 조언했다.
“한번 영지를 떠났던 자들입니다. 영주께 충성심 같은 건 있을 리 만무하니 선별해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이 많은 숫자를 받아들이게 되면 부작용이 클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었겠지만 레오볼드의 생각은 달랐다.
“충성심? 굶기 싫어 영지를 떠난 사람들에게 충성심이란 게 있으리라 생각하시오?”
“그건…….”
“굳건한 군신 관계로 맺어진 왕과 귀족마저 끊임없이 배신하고 숙청하지. 거기에 충성은 없소.”
울컥한 그랜든은 정색하고 말했다.
“하지만 국왕 전하와 왕자 저하를 향한 제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경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게 아니오. 다만 영지민에게 그걸 바랄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오.”
“그럼 충성심 대신 무엇으로 저들을 분별하시겠습니까?”
“돈으로 엮은 신뢰. 그것이야말로 변치 않는 가치지.”
정확하게는 행동에 대한 대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즉각적인 피드백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 행동을 바꾸게 된다.
긍정적인 경우라면 연봉을 인상하기 위해 야근을 하는 것이나 체육대회에서 메달을 따기 위한 노력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사례로는 레오볼드가 도입한 드론 감시 시스템이 있다.
실시간으로 자신의 재산이 깎여 나가는 것을 보고도 미친 짓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결과 인구수 1억에 달하는 메가시티의 범죄율이 0에 가깝게 떨어졌다.
누군가는 그것을 공포정치의 폐단이라고 표현했지만 레오볼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그 시스템을 도입했고 후회하지도 않았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돈은 대부분의 경우 강력한 동기부여를 일으키지. 영지민들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임금이 달라지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낄 것이고 변화할 거요. 그렇게 맺어진 신뢰는 내가 돈을 계속해서 공급하는 한 변하지 않소.”
하지만 그랜든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돈이라… 데노바의 상인들에게나 친숙한 것이군요.”
“경에게 지급하는 급료도 거기에 속해 있음을 잊지 마시오.”
“잊지는 않을 것이나 기사로서 가까이 할 종류는 아닙니다.”
워낙 고지식한 사람이니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내 영지에 있는 이상 바뀌어야 할 거요. 이곳은 올머스 경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할 테니까.”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어지간하면 받아들이시오. 단, 반복적이고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제외요. 그 명단은 아르마에게서 받으시오.”
400명이 넘는 유민을 어떻게 조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랜든은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워낙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다 보니 포기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레오볼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지온이 수상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지?”
“후후… 영주, 내가 듣기로 돈이 중요하다고 한 것 같은데.”
“사람 말을 이상하게 듣는 재주가 있군. 돈에서 형성되는 신뢰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영지 내에서 마법 쓰지 마.”
“어쨌든 돈도 중요하다는 이야기 아냐?”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레오볼드가 슬슬 짜증을 내자 지온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돈을 버는 방법을 알려 주지. 지금 당장 데노바에 사람을 보내서 1만 골드로 부유대륙과 비행선 관련 주식을 되는 대로 빌려. 그리고 그걸 현 시세에 팔아 버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음엔 내가 나서서 부유대륙 근처의 비행선을 신나게 가라앉힐 거야. 그럼 관련 주식이 폭락하겠지? 바로 그때 주식을 사들여서 갚는 거야. 거의 절반은 하락할 테니 5천 골드가 넘는 수익을 낼 수 있지!”
“…….”
“어때? 너무 대단한 발상이라 놀랐나? 나도 데노바 놈들을 연구하다가 알게 된 거야. 이 친구들 없는 주식에 수수료를 매겨서 팔아먹고 있더라고. 그러니까 미리 거래를 하라는 거지.”
워낙 주식시장이 침체라 수수료라도 받아먹자는 심보인 모양이다.
이 블루 드래곤은 거기에서 공매도를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고.
이런 걸 보면 지온의 머리가 안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단지 700년이 넘는 생애 전체가 잔꾀로 점철되어 있을 뿐.
레오볼드는 혀를 찼다.
“연구소에 틀어박혀서 에테르 연구는 않고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었군.”
“돈이 필요하다며? 이거면 돈을 잔뜩 벌 수 있다고! 수익금 절반만 나한테 줘. 돈 벌어다 줄 테니까.”
“에라이, 이 멍청아.”
빡!
지온은 뒤통수를 얻어맞고 펄쩍 뛰었다.
“왜 때리는 거야?”
“그게 바로 공매도라는 거다. 주식시장이 활발하게 돌아갈 때라면 모를까 지금 그걸 하겠다고? 네놈이 반다스 남작령 소속이라는 걸 광고하고 싶은 거냐?”
“아뿔싸.”
“대륙과 전쟁을 치르고 싶은 게 아니면 닥치고 연구나 해. 곧 있으면 스테피나가 올 테니까 신경 좀 써 주고.”
스테피나는 레오볼드의 초대를 받아 영지에 정착하기로 한 마법사다.
처음엔 다소 망설이는 듯하다가 연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겠다는 편지에 바로 짐을 쌌단다.
지온은 음흉하게 웃었다.
“보나 마나 멀쩡한 녀석은 아니겠군. 이런 시궁창에 제 발로 찾아올 리는 없을 테니까.”
“700년이나 살았으면서 비행선 몇 척 처리 못 하는 너보다는 멀쩡하겠지.”
“그땐 내가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였다고. 또 몇 척이 아니라 수십 척이었어!”
“쉿. 목소리 낮춰. 그리고 돈에 대해서는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1년도 지나지 않아서 금은에서 헤엄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내 본체가?”
“그건 좀…….”
2,500톤짜리 덩치를 헤엄치게 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이 필요할 것이다.
못 할 건 없지만 지온이 히죽히죽 웃는 걸 보니 왠지 부정하고 싶어지는 레오볼드였다.
“하여튼 빨리 연구소로 가서 에테르 논문 준비해. 대체 개괄 쓰는 데 며칠이나 필요한 거야?”
“젠장, 영주는 바람에 대해 논문을 쓸 수 있어? 우리에게 에테르란 그런 거라고.”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
사실 레오볼드는 수십 년 동안 기초과학에 대해 공부했고 아르마로부터 강의도 들었기에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지온에게 떠벌릴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러려니 했다.
그가 사라졌고 레오볼드는 저택으로 향했다.
이제 1년 동안 사그리스 은광을 파먹을 준비를 해야 한다.
* * *
“사그리스 은광은 왕가 직할령에 속해 있는 광산으로 마족이 출현하기 전 산출량은 매해 30톤 정도에 달했습니다. 이는 아스테라 전체 수요의 약 5%에 해당합니다.”
“아스테라의 인구가 많지 않은 걸 감안하면 상당히 수요가 높군.”
현재 아스테라 전체 인구는 3억 가까이 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가장 인구가 많은 자이움이 1억 정도이고 엘브랑데가 그 절반, 나머지는 수십 개의 국가가 차지한다.
인구 3억이 매년 필요로 하는 은의 양은 약 600톤으로, 지구와 비교하면 수요가 2배 정도로 높았다.
아르마는 에테르 연구에 대량의 은이 소모된다는 결론을 냈다.
“또한 은으로 레어메탈 중 하나인 미스릴을 합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이움이나 엘브랑데의 수도에선 매달 엄청난 규모의 은 거래 시장이 열린다는군요.”
“은으로 미스릴을 합성할 수 있다고? 하긴 물성이 비슷하지…….”
레오볼드는 사이커들에게 인공 에테르 회로를 시술하기 위해 미스릴을 필요로 했고, 화성의 매리너 계곡을 잔뜩 파헤쳤다.
그런데 겨우 은으로 미스릴을 합성할 수 있다니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르마가 그를 위로했다.
“합성법은 각국이 워낙 기밀로 취급하고 있어서 당장은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곧 찾아낼 겁니다.”
“아르마만 믿어.”
이렇듯 쓰임새가 많았기에 아스테라에서 은의 시세는 금에 비해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진짜 금보다 비싸다는 건 아니고 약 20%에 달하는데 이는 16세기 명나라에서나 볼 수 있었던 비율이었다.
괜히 바그란 왕가가 겨우 은광 1개 폐쇄에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반다스 남작이 은광의 1년 운영권을 빌리니 관심이 집중되는 게 당연했다.
세간에선 영지민을 얼마나 죽일 거냐고 비아냥거리는 귀족도 있을 정도였다.
“그 친구는 왕가에 힘이 없어서 은광을 못 여는 줄 아나?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 나간다는 결론이 나와서 그런 거다. 영지라면 모를까 직할령에서는 감당이 안 돼.”
“반다스 남작령의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줄로 아는데 어디서 동원할 것인지 궁금하군요.”
“조금 캐다가 사람들이 죽어 나가면 앗 뜨거라 하고 도망갈 수밖에 없어.”
“그런 것도 예상을 못 하다니… 결국 청어와 부유대륙으로 운 좋게 큰돈을 번 졸부였다는 거지.”
졸부에 소통 불가까지 겹쳐 레오볼드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개중에는 오랜만에 관 장사나 해야겠다고 떠벌리는 상인도 있을 정도였다.
“돈 많으니까 영지민에게 관을 써 줄지도 모르지.”
“그런 것치고는 사지에 몰아넣는 솜씨가 대단하지 않나? 배불리 먹이고 광산에 밀어 넣을 생각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비아냥이 난무하는 중에도 반다스 남작령은 은을 채굴하기 위해 장비를 들이고 이미르 공화국에서 기술자를 초청하는 등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조리 위장에 불과했다.
진짜는 워커가 투입되어 캐게 되는데 당연하지만 왕가에는 알리지 않을 계획이었다.
아르마는 하루에 10톤 이상 채굴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냈다.
“들키지 않는 선에서 작업을 계속한다면 1년 동안 5,000톤 정도는 채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네요.”
“그 정도면 매장량의 얼마나 되지?”
“1만 3천 톤 정도로 추산되니까 약 38%입니다.”
“1년 만에 38%를 파먹고 빠진다라… 누군가는 분해서 울겠군.”
어차피 바그란 왕가는 물론이고 주변 국가까지 병합할 예정이므로 그리 억울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루아드 왕자가 어떻게 생각할진 의문이지만.
이렇게 많은 은을 캐는 것은 장차 은화 발행과 연구에 필요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루시아가 원했기 때문이다.
플레이그 퀸인 그녀는 진화를 위해 많은 양의 무기물, 그중에서도 금속을 필요로 했다.
그녀의 다음 진화에 필요한 것이 바로 금이었다.
―은을 왕창 먹으면 진화가 좀 빠를 것 같은데, 마스터는 어떻게 생각해요?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레오볼드는 여성의 상체와 거미가 결합된 듯한 외형의 플레이그 퀸을 바라봤다.
그간 루시아는 세틀러호에 실린 금과 각종 금속을 알뜰하게 먹어 치워서 상당한 덩치로 성장했다.
본체 크기가 어설트 아머와 거의 맞먹었는데 더 진화한다면 감당이 안 되는 사태가 올 수 있었다.
물론 인류를 멸망시킨 플레이그 퀸에 비하면 아직은 작고 약하지만 언제까지 마음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레오볼드는 자신에게 물었다.
‘루시아를 믿을 수 있는가?’
수차례 고민했지만 그리 긍정적이진 않았다.
그가 루시아에 가진 두려움은 모른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플레이그 퀸에 대해 모르기에 어떻게 행동할지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루시아는 태양계를 침공한 성체 플레이그 퀸과는 별개의 존재다.
하지만 의식이 옮겨질 수도 있었기에 완벽히 별개라고는 할 수 없었다.
레오볼드는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루시아를 수용할 가치가 있는가?’
당위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현재로서는 인류를 멸종시킨 플레이그 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레오볼드 자신은 확실히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의식을 옮길 수 있으므로 지금쯤은 다른 차원에서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통제 가능한 플레이그 퀸이란 존재는 상당한 가치를 가진다.
‘문제는 루시아가 언제까지 내 통제를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거겠군.’
지금이야 어깨에 앉아 애교를 부리는 등 고분고분하지만 충분히 힘을 가졌을 때에도 그런 태도를 유지할까?
세틀러호만 박살 내면 레오볼드나 아르마조차 별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과연 어떻게 나올까?
실제로 행동에 옮기진 않겠지만 가능성이 0인 것과 낮지만 존재한다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레오볼드는 선지자를 만나기 전까진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 그녀를…….’
고민이 깊어지는 와중에 아르마가 드릴 말씀이 있다며 그를 세틀러호로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해서 탐사정을 타고 가 보니 루시아의 본체 옆에 익숙한 용기가 있었다.
1기가 톤짜리 반입자 반응탄이었다.
레오볼드의 눈이 좁아졌다.
저게 기폭되면 세틀러호고 뭐고 이 근방이 깔끔하게 증발한다.
그의 의심이 깊어지기 전 루시아가 의사를 전달했다.
―마스터가 제게 품은 의심은 잘 알고 있어요. 사실 저도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거든요. 그냥 먹고 자고 싸기만 했을 뿐인데…….
“그래서 결론은 뭐지? 설마 반응탄을 안고 자폭하겠다는 건 아니겠고.”
―반응탄을 먹을게요. 마스터가 언제든 저를 죽일 수 있게끔요. 그럼 되는 거죠?
“반응탄을… 먹는다고?”
설명이 필요하다 느꼈는지 아르마가 나섰다.
“루시아가 반응탄을 삼키고 체내에서 해체할 경우, 반입자와 입자가 결합하여 기폭됩니다. 따라서 그녀는 결코 반응탄을 해체할 수 없으며 마스터는 이 스위치를 통해 기폭을 조절하실 수 있습니다.”
그녀가 작은 스위치를 건넸다.
레오볼드는 녹색 빛이 들어와 있는 스위치를 말없이 보다가 물었다.
“루시아가 나를 배반할 것 같으면 언제든 죽이라는 건가?”
―그렇게 하면 마스터께서 저를 믿어 주실 것 같아서요.
루시아의 의사는 상당히 떨리고 있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플레이그인 그녀조차 죽기를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레오볼드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정작 그랜든에겐 충성심으로 만들어지는 신뢰 관계란 거의 없다고 말했는데 루시아가 이런 모습을 보여 주다니.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의심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딱 한 번만 믿어 보기로 하자.’
그는 스위치를 아르마에게 돌려 주었다.
“반응탄 같은 걸 먹으면 몸에 안 좋아. 믿을 테니까 저건 치워.”
―믿어 주시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루시아가 해 줄 일이 있어.”
―어떤 거죠?
“은광에 나타나는 마족을 물리치는 거야.”
―문제없어요, 저한테 맡겨 주세요!
루시아는 엄밀히 말하면 마왕이다.
행성 마레에 존재하는 그 어떤 마왕보다 크고 강력한 마왕.
당연히 하수인도 많이 부릴 수 있는데 현재는 레오볼드의 요구대로 숫자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그 하수인이 바로 반다스 남작령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골렘이었다.
영지민들은 외부에서 구입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루시아가 만든 것으로, 에테르석이나 별다른 관리 없이 움직인다.
일종의 생명체라서 전투력도 상당한데 어지간한 골리앗은 손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단지 그럴 필요가 없기에 하지 않을 뿐.
아무튼 루시아는 사그리스 은광에 출현하는 마족을 퇴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주인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도, 다음 진화를 위해서라도 이번 임무는 완벽하게 성공해야 한다.
바그란 왕도 외곽에 위치한 사그리스 은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장비를 동원해 목재며 바위 같은 것들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시아는 은광 가장 깊은 곳에 요정 형태로 들어가 있다가 본체를 소환했다.
어두운 공간에 소규모의 에테르 폭풍이 몰아치더니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거미 형태의 플레이그 퀸이 나타났다.
―후우… 여긴 어둡고 쓸쓸하구나…….
루시아의 이 본체 소환은 드래곤의 폴리모프나 엘븐 나이트들이 골리앗을 소환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아공간을 열어 무언가를 불러오는 굉장히 편리한 마법이라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스테피나가 영지에 오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될 것이다.
루시아는 갱도에서 소문의 마족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에테르 폭풍이 불더니 푸른 문이 열리며 인간 형태의 악마 몇 마리가 나타났다.
이들은 루시아의 존재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어, 어머니?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