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26
225화 해적은 필요 없다
아스테라인의 주식은 빵과 고얌이라는 작물이다.
일부 육식을 하는 수인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아인종은 밀로 빵을 만들고 고얌을 쪄서 먹는다.
빵은 그렇다 쳐도 고얌이라는 작물은 참 고약한 편인데, 맛이 없었다.
맛이 떨어진다거나 쓰다거나 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 맛도 없다는 것이다.
식감도 퍼석퍼석해서 도무지 씹는 맛이 나지 않았고 장점이라곤 어디에서나 자라고 생장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장점으로 인해 고얌은 평민들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귀족들은 평민들이 빵과 고얌만 먹으면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도 잘 낳고 그럭저럭 사는군. 그러니 그 이상 해줄 필요는 없겠지.
실제로 이렇게 말한 건 아니고 이런 의식이 널리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엘드그라실의 혜택을 받아 각종 먹거리를 풍족하게 섭취할 수 있는 엘프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아스테라인들은 궁핍한 식문화를 가졌다.
그럼에도 빵과 고얌만큼은 비교적 풍족해서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었다.
대전쟁 후에도 존재가 확인된 그랑베르 덕분에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곧 미덕이었다.
그래서 원래 아이를 많이 낳는 수인족을 제외해도 아인종의 출산율은 4에서 5를 가볍게 웃돌았다.
어떻게 보면 귀족들이 평민들을 천시하는 이유도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인구 때문이었다.
“그렇게 평민이 넘쳐나니 광산에 인구를 갈아 넣을 생각을 하지.”
“정확하게는 많이 죽어도 인구수가 적당히 유지된다에 가깝습니다. 바그란의 경우 그렇게 인구가 많지는 않으니까요.”
바그란 왕국의 경우 소국이고 위치도 좋지 않아서 인구가 300만 정도에 불과했다.
바로 옆에 붙은 갈리스토 왕국이 700만의 인구를 자랑한다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작은 숫자다.
다만 레오볼드의 입장에선 위치가 상당히 좋은 편에 속했다.
대륙의 해안선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쓸 수 있다는 건 상당한 장점인데 아스테라의 바다엔 몬스터들이 득실대고 섀도우 엘프 해적까지 난리를 치는 통에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 현실이 식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쳐 아스테라엔 해산물 요리가 별로 없었다.
엘프들은 전통적으로 생선을 포함한 해산물을 먹지 않았고 다른 국가들은 예전에는 즐겼으나 해적 때문에 막힌 쪽에 가깝다.
오죽하면 자이움 제국 같은 곳마저 청어요리 열풍이 불까.
아스테라의 청어는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온갖 해산물을 즐겼던 레오볼드에겐 값싼 생선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 문화를 되살려야 돼. 문제는 사람들의 인식인데… 갑각류는 아예 안 먹는다며?”
“갯가재라는 갑각류 몬스터가 있어서… 사람들은 갑각류만 보면 몬스터로 생각합니다.”
“게라도 먹었다간 몬스터 먹는 영주로 소문이 나겠군.”
레오볼드는 21세기 한국에서 활동한 덕분에 해산물을 상당히 즐기는 편이었다.
원래 아무거나 잘 먹는 스타일이었고 한국인 흉내를 내다보니 익숙해진 것에 가깝다.
그의 입장에선 식량의 또 다른 보고라고 할 수 있는 바다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방해가 되는 것은 바다를 차지하고 있는 섀도우 엘프.
“역시 만악의 근원인 섀도우 엘프를 박멸해야겠어. 해적군도 인구가 얼마지?”
“약 5,000명에 가깝습니다. 이게 섀도우 엘프 전체의 인구는 아니고요.”
“다른 바다에도 넘쳐난다는 말이군.”
“중력자 레이더로 스캔한 결과 섀도우 엘프 해적과 그에 종속된 인구는 약 50만에 가깝습니다. 노예와 합친 숫자죠.”
“그 많은 인구가 해적질만 해서 먹고산다니 경이로워.”
“일부 해적들은 상인과 결탁을 해서 노예를 팔아넘기기도 한답니다.”
“그런 짓거리 하는 건 지구와 별 다를 바 없군.”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는 것이고 그건 아스테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레오볼드는 그들의 잔혹성에 분개하기보단 숫자에 관심을 가졌다.
“해적 40만에 노예 10만 정도면 꽤 쓸 만한 인력 아닌가?”
“혹시 섀도우 엘프 해적을 받아들이시려는 거라면 말리고 싶네요. 교화하는 비용이 더 크게 들 겁니다.”
“어느 정도이기에?”
아르마는 대답 대신 그동안 수집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폭행, 고문, 강간, 식인, 살인 등 온갖 잔혹한 내용이 홀로그램에 펼쳐졌다.
전쟁을 오래 겪어 어느 정도 면역이 있는 레오볼드마저 잠깐 눈을 돌릴 정도였다.
“…이거야 같은 아인종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엘브랑데의 엘프는 인간을 아인종이라고 인정은 해줍니다. 하지만 섀도우 엘프들은 가축 취급합니다. 그 결과가 이거죠.”
쉽게 말하면 섀도우 엘프에게 동족을 제외한 다른 종족은 식량 취급이었다.
언제든 처분할 수 있고 먹어치울 수 있는 식량 말이다.
“엘프 특유의 오만함을 막아줄 최소한의 장치가 없어서 그런가? 완전히 미쳐버렸군.”
“일부 인원은 교화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비용이 너무 높을 겁니다.”
“그렇게 말릴 정도라면 포기해야지.”
다만 엘프에게 붙잡힌 노예는 구제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모두가 인간성을 상실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10만 중에서 5만 정도는 인력으로 쓸 만할지도 모르겠네요. 적당한 영양 공급과 치료를 병행한다는 가정하에서요.”
“그 정도는 투자해야겠지.”
레오볼드는 손가락으로 대륙 동부에 위치한 해적군도를 지웠다.
그가 통일할 아스테라에 해적은 필요하지 않았다.
“여길 싹 쓸어버리고 해저를 샅샅이 뒤져보자고. 뭐라도 나올 테니까.”
데노바의 금고에서 나온 지도가 대체 뭘 가리키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평범한 것은 아닐 것이다.
* * *
대륙력 1037년 봄이 지나고 섀도우 엘프들의 인내심은 거의 한계에 달해 있었다.
몇 번째나 상륙이 실패했다.
목적지에 튼튼한 요새나 방어 병력이 깔린 것도 아니었다.
반다스 남작령은 전형적인 시골 영지로, 객관적인 전력은 대륙에서 가장 말단에 불과했다.
섀도우 엘프 수백 명이 나서면 화살이 종잇장을 꿰뚫듯 방어선이 뚫려야 하고 재화를 약탈당하고 노예를 헌납해야 한다.
꼭 그렇게 한다고 약속한 건 아니지만 섀도우 엘프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겨울부터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남작령의 영지민들은 앞바다가 자신들의 구역이라도 되는 듯 배를 띄우고 생선을 잡아 돈을 벌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짓이었다.
―언제부터 인간들이 바다에 배를 띄울 수 있게 되었지?
―아스테라의 바다는 우리 엘프의 것이다!
다만 조치할 방법이 없었다.
참을 수 없다며 배를 띄운 일부 파벌에선 영문을 모를 폭풍과 파도에 휩쓸려 병력 자체가 와해되었다.
겨울 외해가 사납긴 하지만 해적질로 단련된 섀도우 엘프들을 방해할 정도는 아닌데 가볍게 그들을 쓸어버린 것이다.
그게 몇 번이고 계속되다 보니 잔뜩 화가 날 수밖에.
―대체 누가 우리를 방해하는 거냐? 인간들의 거짓된 신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인간들의 신이 반다스 남작령 같은 작은 영지를 신경 쓸 리 없다.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수상쩍은 구석이 많다. 반다스 남작이라는 자, 보통이 아니다.
반다스 동쪽 바다에 위치한 해적군도를 점령한 검은해골 해적단은 잔혹하긴 하지만 멍청이들의 집단은 아니었다.
그들은 100명 이상이 높은 파도에 죽어 나가자 이상한 점을 깨닫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다스 남작이라는 자가 변화의 중심에 있음을 알아챘다.
―청어를 팔아 돈을 버는 것도 모자라 부유대륙에 상륙하고 엘븐 나이트로부터 알테마 신앙을 지켜냈다고? 500년 전 인간들이 쓴 허무맹랑한 소설 속의 주인공 같군.
―우리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그가 반다스 영지의 주인이며 많은 돈을 벌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가 나타난 것과 갑작스레 거칠어진 바다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그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감히 섀도우 엘프의 바다에서 허락도 없이 생선을 잡아 돈을 버는 것에 대한 대가 말이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그가 영지전에서 이겼다는 것이었다.
다만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하는 게 쉽지 않아 자이움의 기사가 파견된 것은 묻혔고 오하멜 자작과 싸운 것만 알려졌다.
검은해골 해적단의 해적들은 비행선에 골리앗을 탑재해 강습했다는 대목에 폭소했다.
―망상을 하다 보니 현실로 착각하게 됐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왜 자이움이 우리를 토벌하지 않는 거지? 비행선에 골리앗을 탑재해서 오면 그만인데.
해적군도엔 해적은 많지만 골리앗은 한 기도 없었다.
만약 비행선에 골리앗을 탑재해 습격할 수 있다면 토벌은 아주 손쉬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적들은 반다스 남작에 대한 소문이 전부 거짓은 아니더라도 과하게 부풀려졌다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게 너무 많았던 것이다.
검은해골 해적단의 우두머리인 델피나는 정보를 종합한 끝에 반다스 남작이 고만고만한 귀족들 사이에선 돋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바다까지 조종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인간의 신은 죽었고 더 이상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를 방해한 그 파도는 우연이다.”
그녀는 그 증거로 최근 몇 척의 갤리선이 반다스 남작령 가까이 접근해 정찰에 성공했다는 것을 들었다.
정말 신이 그 영지를 지켜주는 거라면 갤리선이 다가갈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동지들을 다소 잃은 건 사실이지만 거기에 움츠러들지 마라! 아이는 또 낳으면 그만이고 우리는 인간들을 약탈하고 노예로 삼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권리다!”
엘브랑데의 엘프들이 그렇듯, 섀도우 엘프 해적들도 인간에 대한 무한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사가 같으니 증오의 뿌리도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갈레온 같은 드래곤은 인간이 그렇게 악랄하진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그걸 언급하진 않았다.
별로 관심이 없었던 데다 레오볼드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증오는 인간에 대한 선민의식에 더불어 잔혹한 행위에 면죄부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인간의 노예였고, 노리개였고, 식량에 불과했다. 이제 너희들의 차례다.
이것이 엘프들의 행동 원리였고 섀도우 엘프는 거기에 야만성이 더해져 레오볼드가 본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의 고삐도 없다 보니 막 나가게 된 것이다.
그 선두에 서 있는 해적 델피나는 반다스 남작령에 대한 정찰을 지시했다.
* * *
“몬스터들을 동원해라, 약점을 찾아라! 건방지게 바다에 나와 생선을 잡고 있는 인간들의 목에 칼침을 넣어주자!”
그녀의 지시에 잘 훈련된 시체독수리가 날아올랐다.
이 독수리들은 거의 몬스터에 가까운 조류로서 해적들에 의해 잘 훈련되어 있었다.
수백 마리가 반다스 마을 상공에서 배회하자 마을 주민들은 무서워하며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해안가에 무수한 바다 몬스터가 들이닥쳐 목책과 함정 등을 부쉈다.
역시 섀도우 엘프들이 조련한 몬스터였다.
다만 완전히 상륙하지는 못했고 주민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다 몬스터 중 육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종은 꽤 있지만 전부 골리앗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아스테라에서 육상 몬스터가 괜히 멸종의 길에 접어든 게 아니다.
한편 레오볼드는 오하멜 시에서 몬스터들이 대거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인공위성으로 내려다본 결과 거의 천 마리에 가까운 바다 몬스터들이 해안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저거 다 독이 있다고 했지? 아쉽게 됐군.”
“가끔 독이 없는 종도 있긴 한데 끔찍하게 맛이 없는 건 똑같답니다.”
탈취공정을 거치고 향신료와 감미료 등을 배합하면 어묵처럼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 상태로선 크게 쓸모는 없었다.
먹을 수도 없고 위험하기까지 하니 치워버릴 수밖에.
“밤에 전부 치워 버려.”
지시가 내려진 날 밤.
몬스터들이 가득한 해안가에 죽음의 광선이 내려왔다.
이 광선은 시비리 전투지원 위성이 쏜 에테르 레이저로 몬스터들의 단단한 외피나 갑주를 종잇장 취급하며 뚫어버렸다.
―캬아아악!
―크어어억!
사방에서 단말마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에테르 레이저는 무차별적으로 몬스터를 학살했다.
허공에서 황금빛 선이 잠깐 보인 순간 아래에 있는 몬스터의 몸이 깔끔하게 절단되는 식이다 보니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일부 몬스터는 도망가려 버둥거렸지만 자기들끼리 길을 막고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조용하던 해안가가 피로 물들었고 1시간도 지나기 전에 대부분의 몬스터가 사망했다.
거기엔 갯가재, 드래곤 터틀 등 공포를 자아냈던 상위등급의 몬스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2시간이 지나자 몬스터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시체를 좀 치워야겠어. 바닷물도 좀 갈아놓고.”
“세틀러호를 동원하겠습니다.”
에테르 역장이 펼쳐지자 마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듯 해안가가 원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사체는 먼 바다로 사라졌고 피와 체액으로 가득한 모래와 바닷물이 해저의 그것과 바뀌었다.
그 광경은 마치 어린아이가 모래장난을 하는 것과 같았지만 결과는 심상치 않았다.
동이 터오기 전에 세틀러호는 모든 작업을 끝내고 에테르 역장을 회수했다.
완성된 것은 바다 특유의 비린내만 나는 멀쩡한 해안뿐이었다.
아침이 되어 망원경으로 해안을 들여다본 마을 주민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이 되었다.
“뭐야? 몬스터들 다 어디 갔어?”
“한 마리도 안 보이는 걸 보니 도망간 모양인데요.”
“그건 그렇고 해안 지형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저기 바위 있지 않았어?”
몇 개월간 생선을 잡으면서 익숙해진 지형인 만큼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주민들은 조심스럽게 해안가에 다가간 후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형이 모조리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최소한 몬스터 흔적은 있어야 할 텐데 어디로 간 거지?”
“일단 영주님에게 알립시다!”
몬스터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오하멜 시에 날아들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에 반해 검은해골 헤적단의 간부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애써 훈련시킨 몬스터들이이이!”
“반다스 놈들이 또 바다로 기어 나와서 생선을 잡고 있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두목! 우리가 반다스 놈들의 목을 따게 해주십시오!”
5천여 해적의 우두머리인 델피나는 일단 침묵을 지켰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니 정황을 확인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연한 조치였지만 다른 파벌의 해적들이 날뛰었다.
“겁쟁이가 따로 없구만, 델피나.”
“내 부하들이 쫄쫄 굶고 있는 거 안 보여? 반다스 놈들에겐 은이 많다지? 놈들을 죽이고 빼앗아 오자고!”
“골리앗 그 느려터진 놈을 왜 두려워하는 거야? 출동에만 한 세월인데!”
실제로 해적들의 상륙 시에 골리앗을 출동시키는 건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전투력은 압도적이라는 말도 부족하지만 기동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해적들이 갤리선을 이용해 치고 빠지면 에테르석만 낭비하다 멈추는 경우도 있었다.
해적군도의 섀도우 엘프들은 자이움의 해안가도 자주 털었기에 골리앗에 대한 경험이 비교적 풍부했다.
그들의 눈에 골리앗은 덩치만 큰 인형에 불과했다.
“그리고 델피나는 그 인형에 겁을 먹은 겁쟁이다!”
“눈앞에 있는 금은보화를 외면하는 해적은 누군가! 건방진 반다스 놈들을 비호하는 해적은 누군가!”
“델피나! 델피나!”
광기에 찬 수백 명의 섀도우 엘프 해적들이 델피나의 거처 앞에서 횃불을 들었다.
비교적 인내심이 있는 간부들이 그녀의 거처에 들어와 조언했다.
“상황이 너무 안 좋습니다. 저들은 당장 반다스 영지를 공격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델피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었다.
“…바다가 우리를 거부하고 천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깔끔히 사라졌는데도 싸울 생각이 드나?”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고 몬스터와 정보원에게서 많은 소문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반다스 자작령은 이상한 곳이었다.
자그마한 영지임에도 매번 외부의 압력을 수월하게 이겨냈고 심지어 자이움의 기사까지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바그란 동부의 대영주인 란티스 백작이 분노하며 이를 간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물론 검은해골 해적단은 그런 귀족들마저 약탈해 왔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녀는 그걸 다른 파벌의 제독들에게 어필했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델피나, 더 이상 망설일 순 없소. 우리는 은이 필요하고 그건 반다스 남작이 가지고 있소.”
“그 자리를 보전하고 싶다면 공격 명령을 내리시오. 지금 즉시여야 하오.”
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델피나가 부두에 거꾸로 매달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검을 차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들어라, 동지들이여! 저 반다스의 인간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
“우오오!”
“박해받은 우리의 역사를 기억해라!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정당하다! 아스테라의 바다는 우리의 것이다!”
당연하지만 해적들은 역사 따위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저 바다에 나와 생선을 잡는 인간들을 약탈하고 노예로 삼고 싶을 뿐이었다.
“배를 띄워라! 노를 저어라!”
“돌격!”
마침내 델피나의 지시가 내려지자 수백 대에 달하는 해적선이 섬을 떠나기 시작했다.
* * *
레오볼드가 반다스 마을을 지배하고부터 달라진 게 하나 있다.
바로 사람들의 눈에서 전의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해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지켜야 할 것이 생겼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고 결심한 것에 가까웠다.
그것은 영지의 암염광산과 온갖 편의시설, 생선을 잡기 위한 도구와 임금이었다.
귀족들이 보기에 하찮은 것뿐이었지만 반다스 마을의 사람들에겐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해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무기를 들었다.
“더 이상 해적들이 우리의 마을을 유린하게 둘 수 없지!”
“이제 돈 좀 벌어서 청혼하려는데 해적 놈들이 그걸 방해하러 온다고? 도저히 용서 못 한다!”
“싸우자! 해적 놈들을 바다에 처넣자!”
섀도우 엘프들이 인간에게 가진 증오심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반다스 자작령 사람들도 증오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살기 퍽퍽한데 갑작스럽게 쳐들어와선 약탈하고 노예로 잡아가니 좋은 감정이 생길 리 없었다.
그게 몇 년 동안 쌓이다 보니 다들 악에 받쳐 있었던 것이다.
영주를 대신해 마을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은 카슨 행정관은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사람들에게 무기를 나눠주고 방어전에 대비하게. 버티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네.”
“행정관님, 얼마나 버텨야 합니까?”
“해적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정찰조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엘븐 갤리가 바다에 새카맣게 깔렸답니다.”
“최소 천 명은 넘는 것 같습니다.”
“천 명이나…….”
엄청난 숫자에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이 마을에 상주하고 있는 병사라고 해봐야 50명 수준에 불과했다.
골리앗이 한 대 있긴 하나 예비용이었고 움직일 수 있는 기사는 오하멜 시에 있었다.
카슨 행정관은 그저 버티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영주가 다른 영지와의 마찰에만 신경을 쓰다가 해적의 준동을 놓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 불안은 수백 척의 엘븐 갤리가 수평선 너머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몇 배로 증폭되었다.
“섀도우 엘프들이다…….”
“정찰조가 보고한 것보다 숫자가 더 많다!”
“어, 어떻게 하지?” 많다! 최소 2천 명은 되는 것 같다!”
전의에 불타오르던 주민들도 막상 수백 척의 엘븐 갤리를 확인하고는 공포에 휩싸였다.
골리앗이 없으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고, 그 골리앗의 태반은 오하멜 시에 있었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골리앗을 탑재할 수 있는 비행선 3척이 부유대륙으로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영주에게 보고는 들어갔겠지만 당장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점점 커지는 엘븐 갤리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꼼짝없이 죽겠군…….”
“몇 개월이긴 해도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잘 지냈지. 아내는 영주님께서 잘 돌봐주실 거야.”
“어차피 우리가 도망칠 곳은 없어.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싸우자고.”
절망적인 상황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영주가 몇몇 병사를 이끌고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골리앗도 함께 왔길 기대했으나 그런 건 없었다.
“영주님과 그랜든 기사님, 그리고 병사들 몇 명만 왔습니다! 골리앗은 없었고요!”
대체 어쩌려고 몸만 달랑 온 걸까?
해안가에 긴장감이 흐르는 사이 레오볼드가 그랜든과 함께 도착했다.
“비행선을 돈 벌러 보냈더니 해적들이 난리를 치는군.”
“제가 싸우겠습니다, 영주님.”
그랜든이 나섰지만 레오볼드가 그를 만류했다.
“경은 할 일이 따로 있소. 해적군도를 털 거니 병사들에게 준비를 시키시오.”
“예? 어디를 턴다고요?”
평소 담대하다는 평을 받는 그랜든마저도 경악할 만한 발언이었다.
해적군도가 어디인데 역공을 간단 말인가?
레오볼드는 개의치 않고 라움급 골리앗에 올라탔다.
전고 7미터짜리 기계인형이 육중한 무기를 집어 들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