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31
230화 죽일까요?
자이움에서 도는 레오볼드에 대한 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이루어냈다는 호평과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경계해야 한다는 악평이다.
공통적인 게 있다면 그가 이룬 업적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소문이 도는 사교계는 물론이고 정계나 군부에서도 레오볼드 반다스란 인물 자체를 미심쩍어하는 시선이 많았다.
쥐꼬리만 한 영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잔 후작이 바그란 내부에 개입했다가 호되게 당한 후로.
그리고 골칫거리이던 섀도우 엘프 해적들이 박멸된 후로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해적이 사라졌다. 여름만 되면 해류를 타고 올라와 해안가 마을을 습격하던 놈들인데.
―비행선으로 정찰을 한 결과 해적군도가 텅 비었다고 한다. 반다스의 전초기지로 보이는 시설만 있다는데 우리가 가서 선점해야 하지 않나?
―대국으로서 소왕국이 이루어 낸 성과에 손을 올리는 건 가능하면 삼가야 하지 않겠나? 그 작은 섬 몇 개를 장악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반다스 자작이란 자… 그 외에도 사그리스 은광을 정상화시키는 등 업적이 꽤 많다. 요주의 인물인 건 확실한 것 같다.
―기록을 살펴보니 아직 젊다고 하는데 그만한 인물이면 혼인으로 묶어둘 수 있지 않나? 제국엔 남편감을 찾는 영애들이 넘쳐난다. 반다스 자작 정도면 1등 남편감이다.
―아쉽지만 크로이츠 백작이 눈독을 들였다. 언젠가 클럽에 들러서 선수 치는 년은 입을 찢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갔다.
―군부의 암고양이가 너무 거친 말을 쓰는군.
―그녀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나?
카밀라 크로이츠 백작.
자이움 철쇄기사단의 단장이며 중앙군 7군단을 지휘하는 장군이기도 하다.
휘하에 하이 나이트 여럿을 거느리고 있으며 여성의 몸임에도 실력은 진짜라는 평이 많았다.
외모까지 아름다운 그녀의 단점이라면 지랄 맞은 성격.
수틀리면 결투를 신청해 상대를 죽여 버리는 통에 자이움 황실에서도 그녀에게 조금 자중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자연스레 적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 암투와 내전이 횡행하는 자이움에서도 실력 하나만으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레오볼드는 그녀가 7군단장이라는 정보를 듣곤 한국군 7군단과 붙으면 어떻게 될까 살짝 고민했다.
‘돌파력은 압도적이겠지만 마법이 있으니까 예측이 어렵군.’
한국군의 대공방어 시스템은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요격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였다.
그때 갈색 피부에 화려한 은발을 가진 크로이츠 백작이 그에게 다가왔다.
“경이 반다스 자작이군. 나는 카밀라 크로이츠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백작님.”
그녀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하려는데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경은 나를 귀족으로 보는군. 레이디로 봐줄 수는 없겠나?”
손등에 키스하라는 말이다.
레오볼드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살짝 얹었다가 떼었다.
“실례했습니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쩐 일이신지요? 조촐한 행사여서 제국의 백작께서 지루해하지 않으실지 염려스럽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그 기차인가 하는 장난감 때문이 아니니까.”
에테르 기관을 탑재한 기차는 결코 장난감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크로이츠 백작의 시선은 마치 레오볼드를 뚫어버릴 듯 꽂혀 있었다.
어지간히 사랑에 빠진 남녀라도 이런 식으로 시선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한참 동안 레오볼드의 전신을 훑은 뒤 말했다.
“생각보다 에테르는 평범하군. 에밀이 당할 정도는 아니야. 뭔가 숨기는 게 있나?”
“누구에게나 숨기는 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체격은 훌륭하군. 얼굴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고.”
레오볼드는 카밀라 크로이츠라는 인간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차렸다.
‘전형적인 자기 할 말만 하는 타입이군.’
작위도 제국 내에서의 위치도 높으니 그런 습관이 들 수밖에.
아스테라에선 그리 드문 인간형은 아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행사가 끝난 뒤에 하도록 하지. 나는 시간이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진행해줬으면 좋겠어.”
“…일단 여기에 앉으시지요.”
이후로 레오볼드는 루아드 왕자를 비롯한 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란티스 백작에게도 초대장을 보냈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듯 오지 않았고 대신 가신 둘을 보냈다.
그들이 레오볼드에게 적의의 시선을 드러내었음은 물론이다.
“오하멜시라… 설마 그분의 성을 그대로 쓸 줄은 몰랐는데.”
“영지민들에게 워낙 익숙해서 말이죠. 굳이 다른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바로 그 오만이 당신을 해칠 무기가 될 거요, 반다스 자작.”
“글쎄, 두고 보시죠.”
얼마 후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궤도 위에 기차가 등장했다.
사람들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엘브랑데나 자이움에서 볼 수 있는 크고 화려한 기차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했던 것이다.
화차도 작았고 뒤에 달린 수레는 말 그대로 네모난 상자에 불과했다.
안에 의자를 놓아두긴 했지만 사람이 타기엔 영 불편해 보였다.
개발을 총괄해서 진행한 불토른이 가슴을 펴며 나왔다.
“불과 망치의 신 주르트의 이름을 걸고, 이 기차는 지금까지 개발된 그 어떤 기차와도 비교가 되지 않소. 왜냐! 에테르 기관의 효율을 대폭 상승시켰기 때문이오!”
그때 발언권을 얻은 귀족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저 기차 움직이기나 합니까?”
“하하하.”
“기차 외형이 좀 그렇긴 해.”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의 웃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아무리 봐도 작동될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불토른은 레오볼드를 흘깃 쳐다보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만! 비웃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요. 그러나 내가 장담하는데 이 기차는 정말 많은 것들을 바꿀 것이오. 어쩌면 우리의 생활 전부를 바꿀지도 모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뭔가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자가 있는 것 같은데 안에 탈 수 있을까요?”
“뭐 달리긴 하겠죠. 아주 느리겠지만.”
불토른은 금방이라도 울화통을 터트릴 듯한 얼굴이 되었다.
시연회에 맞추느라 며칠 밤낮을 고생했는데 겨우 이따위 녀석들이!
뿐만 아니라 그가 에테르 기관을 뜯어내고 재설계한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연회를 망칠 순 없었기에 일단은 진행하기로 했다.
기차의 문이 열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귀족들을 태웠다.
불토른은 화차에 올라탄 후 에테르 기관에 시동을 걸었다.
푸시이이익―
에테르석이 보일러에 든 물을 끓이자 배관을 통해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객차에 탄 승객들 중 에테르 공학자들은 깜짝 놀랐다.
“잠깐, 벌써 시동이 걸렸다고?”
“이거 최소한 30분은 예열을 해야 할 텐데?”
그때 경적이 길게 울렸다.
불토른이 화차 밖으로 수염투성이의 얼굴을 내밀고 크하하 웃었다.
“출발! 이제부턴 엄청난 속도를 맛보게 될 거요!”
엄청난 속도라고 해봐야 시속 20km 정도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오버페이스였다.
하지만 아스테라의 사람들에겐 생전 처음 맛보는 속도임에 분명했다.
피스톤이 움직이며 기차가 속력을 내자 다들 당황해선 난간을 붙잡았다.
“어어! 움직인다!”
“뭐가 이렇게 빨라?”
“흐하하하!”
사람들이 놀라자 불토른은 레버를 최대로 밀었다.
기차가 수증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들판을 달렸다.
* * *
그날 공개된 에테르 기차는 많은 사람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에테르 기관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일수록 충격이 컸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 기차는 움직여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기차는 그 어떤 기차보다 빠른 속도로 질주했을 뿐만 아니라 연료 효율도 대단했다.
보일러 옆에 붙은 연료 투입구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에테르석 하나만으로 몇 시간을 운행했다는 증거.
기차에서 내린 에테르 공학자들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자기들끼리 회의에 들어갔고 상인들은 레오볼드에게 매달렸다.
“자작님, 정말 이 기차가 뿔새를 대체할 수 있는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믿기지가 않습니다.”
레오볼드는 기차의 난간에 앉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들어 보시오. 뿔새가 하루에 끌 수 있는 화물은 어느 정도요?”
“대략 1톤 정도일 겁니다.”
말은 뿔새보다는 힘이 세지만 지구력이 약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게다가 겁도 많아서 어지간한 몬스터를 뻥뻥 차고 다니는 뿔새에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다.
몬스터 자체를 찾아볼 수 없는 지금은 옛날얘기가 되었지만.
“그것도 사료를 포함한 거잖소? 실제 화물 운송량은 더 낮을 텐데.”
“아, 예. 물까지 포함하면 약 2할 정도는 뿔새에게 할당될 겁니다.”
“그런 무게까지 화물로 꽉꽉 채워 넣을 수 있다면 어떻겠소? 그것도 시속 20km의 속도고 쉴 새 없이 달리는 거요.”
“쉴 새 없이 달린다라…….”
뿔새가 끄는 수레는 아스테라의 주력 운송수단이었다.
아스테라 어디를 가든 뿔새 수레가 보였고 기차가 개발된 지 꽤 되었음에도 그것을 대체하긴 어려웠다.
장점이 많은 뿔새 수레지만 단점이 없진 않은데 생명체라 쉬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말처럼 오래 쉬진 않지만 시간이 곧 돈인 상인들에겐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리고 뿔새 자체는 빠르지만 뒤에 수레를 달아놓고 보면 생각보다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도시를 벗어나면 기껏해야 시속 10km 정도였고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도 70km 남짓했다.
레오볼드는 난관을 퉁퉁 치며 말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두 시간 동안 40km를 아무 탈 없이 달렸지. 물을 달라는 소리도 안 하고, 먹이도 안 먹소. 아 물론 에테르석이라는 비싼 연료를 소모하긴 하지. 하지만 여러분들도 확인했듯이 연료 효율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오.”
“그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정말 놀랍더군요. 수십 톤의 화물을 끄는데도 그 정도의 효율이라니…….”
“기본적인 관리는 해줘야겠지만 뿔새 수십 마리를 관리하는 노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유일한 단점이라면 저 궤도입니다.”
상인들이 궤도에 주목했다.
에테르 기차가 가진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궤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하멜 시와 반다스 마을을 연결하는 궤도만 해도 거의 3개월 동안 수백 명이 달려들어 완성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채산이 나올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레오볼드의 의견은 달랐다.
“궤도가 단점이라고? 오히려 장점 아니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기차를 달리게 할 수 있는데. 심지어 밤에도 달릴 수 있소.”
“어?”
“그, 그러고 보니…….”
확실히 밤에도 달릴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장점이었다.
종점에 적당한 시설만 갖춰 놓으면 멀리서 보고 정지할 수 있으니 운영에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상인들은 이제 기차가 가져올 변화에 대해 꿈꾸기 시작했다.
처음에 자금을 투자해 궤도만 건설해 놓으면 기차를 몇 대라도 놓을 수 있었다.
모든 영지와 도시를 연결하는 것이다.
“뿔새는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스테라의 운송을 책임졌으나 한계가 명확하오. 생명체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기차는 아니오. 더 많은 화물을 나를 수 있게 될 거고 속도도 빨라지게 될 거요.”
레오볼드가 이렇게 긴 설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이다.
21세기 지구인들은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서 뭔가 내놓으면 쉽게 알아듣고 그 영향력까지 바로 유추해냈다.
하지만 아스테라인들은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니 어떤 것이 이익인지 설명이 곁들여져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게 먹혀들었는지 상인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빠르고 안정된 운송수단은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겠지. 나는 열린 마음으로 투자를 받아들이고자 하오. 단, 조건이 하나 있소.”
“어떤 겁니까?”
“제 아내를 내놓으라는 것만 아니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보통은 반대 아닌가?”
상인들이 하하 웃었고 레오볼드는 조건을 제시했다.
“란티스 백작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나에게 말하시오. 왕자 저하께 보고할 증인이 되어주면 고맙겠소.”
“…….”
이건 란티스 백작을 적대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다들 놀라 입을 다무는 가운데 늙은 상인 한 명이 물었다.
“실례지만 저희를 다 죽이실 셈이십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저희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죽여서 입을 막을 생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아니오. 이건 선전포고요.”
“선전포고…….”
“어차피 나와 란티스 백작은 공존할 수 없소. 그가 대놓고 나를 적대시했으니 나도 선전포고 정도는 자유롭게 해도 되잖소?”
“무슨 의도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란티스 백작께선 그럴 의향이 아니실 겁니다. 이번에 밀 공급이 줄어든 것은 어디까지나 작황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늙은 상인 메로드는 여유 있게 말했지만 이어진 레오볼드의 발언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렇소? 내겐 란티스 백작이 갈리스토 왕국과 내통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
메로드의 눈이 희미하게 떨렸고 다른 상인들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은 걸까?
란티스 백작이 갈리스토 왕국에 밀을 공급한 것은 극히 일부의 측근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증거를 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뭔가를 오,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자작님.”
레오볼드는 고개를 저었다.
“오해가 아니오. 나는 이번 행사가 끝나자마자 왕자 저하께 이번 일을 소상히 알릴 예정이오. 물론 란티스 백작과 협력하는 사람들의 명단도 말씀드려야겠지.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말하라는 거요. 최대한 선처할 테니까.”
“…….”
메로드를 포함한 상인들의 눈에 긴장이 서렸다.
정황상 반다스 자작이 이번 거래를 알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왕자가 알게 되면 모조리 처형감이었고 빠져나갈 길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로 반다스 자작에게 투항하는 것이다.
“영주님.”
여유 만만하던 메로드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송구스럽습니다만, 모든 책임은 란티스 백작에게 있습니다.”
“메로드 님!”
“그, 그걸 말씀하시면…….”
다른 상인들이 일어서는데 레오볼드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쉿. 계속 말씀해 보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메로드는 완전히 그에게 압도당해 란티스 백작의 계획을 몽땅 털어놓고 말았다.
끝장이다…….
상인들은 하나같이 눈을 감았다.
* * *
그날 저녁, 루아드 왕자는 일정을 취소하고 레오볼드의 관저에 머물렀다.
왕궁엔 반다스 자작과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고 알렸지만 사실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나는 네놈을 믿었는데!”
프레드릭은 란티스 백작의 이름이지만 그걸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튼 왕자는 그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긴 갈리스토 왕국은 예전부터 바그란과 자주 갈등을 일으킨 바 있다.
레오볼드는 그 역사를 찾아본 후 그리스와 터키를 떠올렸다.
“예전에 바그란이 갈리스토를 지배한 적이 있군.”
「거의 200년이 지난 얘기지만요. 그람 제국이 해체되면서 많은 국가에서 영토와 자원 문제로 갈등을 빚었는데 바그란이나 갈리스토도 그걸 피해갈 수 없었답니다.」
“제국이 찢어지면 비명이 크기 마련이지…….”
이후로 벌어진 여러 전쟁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영토와 자원 문제는 자이움의 중재로 간신히 마무리가 되었지만 대전쟁 당시 활약한 챔피언의 혈통 문제로 또 갈등이 일어났다.
당시 그람 제국엔 골드 드래곤 알테마의 힘을 받은 챔피언이 있었는데 그의 성이 바그란과 갈리스토 양쪽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양 귀족이 나서서 그 챔피언이 자신의 선조라고 우겨댔고 양측은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였다.
「그 뒤의 기록은 없지만 한바탕 싸운 것은 확실해 보이네요.」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보이지만 원래 역사란 게 그렇다.
“그나저나 알테마의 챔피언이라… 우리가 데리고 있는 그 남자일지도 모르겠는데. 상태는 어때?”
「가끔 눈꺼풀을 깜빡거리고 있습니다만 아직 코마 단계를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일어나면 알려줘.”
레오볼드는 역사책을 덮고 루아드 왕자의 방으로 다가갔다.
노크를 하기 전 그가 말했다.
“경이오? 들어오시오.”
“술은 좀 깨셨습니까?”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소. 그나저나 경이 권한 그 갑각류 요리, 정말 맛있더군. 장담한 대로 내가 먹은 것 중 최고였소.”
“맛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지.”
루아드 왕자의 눈에서 분노의 빛이 뿜어졌다.
“나는 프레드릭 그자를 용서할 수 없소. 감히 왕가를 무시하고 갈리스토에 밀을 공급해? 무슨 핑계를 댄다 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놈들은 왕가의, 바그란 전체의 적이란 말이오!”
“하면 그를 치시겠습니까?”
그는 잠깐 고민했으나 곧 술 내음이 섞인 한숨을 뿜어냈다.
“어렸을 적 나는 그를 숙부라 불렀소. 부왕께선 바그란의 기둥 중 하나라고 깊게 신뢰하셨지. 그런 그가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소. 나는, 나는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저를 믿으십시오, 저하.”
고개 숙인 루아드 왕자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믿어도 되겠소?”
“제 목숨이 다하는 한 바그란의 이름과 함께할 것입니다, 저하.”
레오볼드는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바그란의 이름을 버리지만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껍데기는 별 의미가 없었기에 한 말에 불과했지만 루아드 왕자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고맙소. 경만 믿겠소.”
“란티스 백작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제게 토벌을 맡겨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루아드 왕자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이를 앙다물고 말했다.
“해야겠지. 그래야 두 번 다시 프레드릭 같은 자가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그가 무너지면… 그 땅은 레오볼드, 그대에게 맡기겠소.”
“삼가 받들겠습니다.”
얼마 후 루아드 왕자는 시종인들과 함께 왕도로 복귀했다.
그리고 프레드릭 란티스 백작을 갈리스토 왕국과 내통한 반역자로 확정하고 규탄하기 시작했다.
“…모든 정황을 확인했을 때 그가 동부에 밀 공급을 하지 않고 갈리스토로 빼돌렸음이 확실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영지민들이 고통받고 있음에도!”
“그는 수많은 사람을 배신했다. 영지민들을 배신했고, 나를 배신했고, 부왕 전하와 바그란 전체를 배신했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책임을 묻고자 한다. 의기가 있는 자 나서라, 정의를 바로 세워라!”
워낙 뜻밖의 선언인지라 선뜻 나서는 귀족이 없었다.
란티스 백작의 이름값이 그만큼 큰 것이다.
그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왕궁에 출석해 해명하라는 왕자의 지시를 무시하고 성에 틀어박혔다.
가까스로 이뤄진 루아드 왕자와의 대담에서도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은 반다스 그놈의 탓이오!”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갈리스토 왕국에서 거병할 움직임이 보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어떻게든 바그란에 개입할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보고받은 바그란 3세는 격분한 나머지 란티스 백작의 작위를 박탈하고 토벌을 명했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었고 둘 중 하나가 파멸하는 일만 남았다.
반다스 자작령이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그때까지 오하멜시에 머물고 있던 크로이츠 백작은 레오볼드를 불러냈다.
“흥미롭군.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린 것처럼 보여.”
“시간이 없다고 하셨는데 꽤 오래 머무시는군요.”
그녀는 다리를 꼰 채 픽 하고 웃었다.
“가치 있는 남자에게는 많은 시간을 써도 아깝지 않은 법이지. 내가 관찰한 결과 그대와 나는 동류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든 손에 넣지.”
“그걸 말씀하시려고 저를 불렀습니까?”
“물론 아니지. 이번 일… 내가 도와줄 수 있다. 본국에 연락만 하면 갈리스토 왕국은 출병하지 못할 거다.”
양국이 아무리 싸워도 결판을 내지 못하는 건 자이움 제국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도 제국에서 큰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넘어가는 쪽에 가까웠다.
만약 크로이츠 백작이 힘을 쓴다면 레오볼드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란티스 백작을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바그란 내부의 일입니다.”
“경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 많은 기사를 홀로 감당하긴 어려울 텐데. 갈리스토의 기사들은 멍청이지만 약하진 않거든.”
“그들이 오기 전에 끝낼 겁니다.”
“고집이 센 남자군. 잠깐…….”
크로이츠 백작은 귓속말을 하는 척하며 레오볼드의 볼에 키스했다.
놀라 볼을 문지르는데 그녀가 웃음을 날리며 사라졌다.
“통신구를 놓고 가지. 언제든 연락해도 좋아. 그럼…….”
그녀가 나간 뒤 아르마의 메시지가 시야에 떴다.
「마스터, 죽일까요?」
“뭐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나를 적대하지도 않는데.”
「그래도…….」
“오히려 그녀를 통해 자이움의 내부사정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 우리 기술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
아르마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레오볼드는 어깨를 으쓱하곤 기사들을 소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