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38
237화 정당한 거래
카밀라 크로이츠는 갑작스런 황제의 명을 받고 바그란 왕국에 급파되었다.
명령은 이번 함대 포격전의 원인이 된 반다스 백작으로부터 모종의 기술을 알아오라는 것이었다.
크로이츠 백작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그 기술을 쉽게 내줄 것 같지 않았지만 어명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포격전 사태를 논의할 겸해서 바그란의 왕궁에 들렀고 얼마 후 레오볼드까지 방문했다.
루아드 왕자는 황제에게서 별도의 전언을 들은 터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다시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다들 바쁜 것 같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도록 합시다. 크로이츠 백작, 여기에 온 목적을 말하시오.”
“폐하께서 내리신 어명입니다.”
테이블 위에 황제의 직인이 찍힌 봉투가 놓이자 둘은 일어서서 예의를 표했다.
작은 나이프가 서류를 개봉했고 크로이츠 백작은 소리 내어 읽었다.
“게일로드 자이움 반델 2세가 명한다. 바그란 왕국의 루아드 바그란 왕자는 즉각 엘브랑데에 대한 응전태세를 갖추고 크로이츠 백작에게 이를 보고하라.”
“또한 바그란 왕국의 레오볼드 반다스 백작은 이번 사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크로이츠 백작에게 제출하고 비행선 선단의 상륙 방법, 혹은 기술을 이전할 준비를 하라.”
“…….”
루아드와 레오볼드는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포격전 때문에 자이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듯 황제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그는 늙었고 조만간 양위에 들어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늙은 육체에 갑자기 활기가 깃든 것일까?
먼저 입을 뗀 쪽은 루아드 왕자였다.
“이스트하트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전쟁이라… 바그란의 재정은 그리 튼튼하지 않소이다.”
“그 점에 대해선 심려하지 마시지요. 재정국의 관리들이 도움을 줄 것입니다.”
루아드 왕자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도움이라고 해봐야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준다는 거겠지.
애초에 돈을 빌릴 생각도 전쟁을 할 생각도 없었던 그에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슬픈 것은 이걸 거부할 순 없다는 점이었다.
바그란은 자이움의 속국까지는 아니어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왕자는 최후의 반항을 하기로 했다.
“내 옆에 앉은 반다스 백작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소. 안타까운 일이오.”
적당히 하자는 이야기였는데 크로이츠 백작은 그걸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족이 필요하겠군요.”
‘헛소리도 정도가 있지…….’
루아드는 그녀의 결연한 얼굴을 보며 파병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사실은 제국 황제가 명령을 내렸을 때부터 결정되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소리 없는 한숨이 새어나왔고 이번에는 레오볼드가 말문을 열었다.
“이번 사태에 대한 보고서는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운 좋게 도망치기만 한 입장에서 제출할 게 없습니다만.”
“바로 그 도망친 경위에 대해서 상세하게 제출하라는 것이다. 폐하께선 제 3자의 시선으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
다행히 책임을 물을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상륙 방법, 혹은 기술에 대해서인데… 이건 부유대륙에 상륙할 수 있는 수단을 넘기라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목소리가 딱딱하자 크로이츠 백작은 그를 달래듯이 말했다.
“폐하께선 제국이 그대에게 과중하게 기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충분한 보상을 줄 것이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건 자이움도 부유대륙이라는 꿀에 국자를 담그고 싶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런 리스크가 없어 보이니 하나 만들어 줘야겠지.
“그 보상을 제가 지정해도 되겠습니까?”
크로이츠 백작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가 건의하는 상황은 예정에 없었지만 그녀에겐 상당한 재량권이 주어져 있었다.
“어떤 거지?”
“기술을 넘기는 거니 저도 기술을 하나 받아야겠습니다. 제국의 골리앗 생산 라인을 하나 받고 싶군요. 관련된 설비와 노하우, 정규 골리앗을 단독으로 생산할 수 있는 라인 말입니다.”
대담한 요구에 다른 둘은 숨을 멈췄다.
이건 제국의 비밀을 송두리째 넘기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국가건 골리앗 제조 기술은 극비리에 취급되고 있었고 정규 골리앗이라면 더욱 그랬다.
크로이츠 백작은 어렵사리 말했다.
“…그대의 요구는 다소 과한 구석이 있군.”
“저는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단이 부유대륙에 다녀온 게 몇 번인지 아십니까?”
“4번인가?”
“3번입니다. 겨우 3번 다녀왔음에도 우리는 50만 골드에 달하는 막대한 재정을 얻을 수 있었죠.”
“50만 골드!”
루아드 왕자가 벌떡 일어섰다.
그 정도면 바그란의 재정을 몇 년 동안 감당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생각보다 큰 숫자에 크로이츠 백작도 당황했다.
꿀통인 줄 알았는데 꿀로 된 호수가 아닌가?
“제 입장에선 제국과 그 부를 나누는 것이 되니 과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대의 요구는 합당한 구석이 있군. 내게 재량권이 주어져 있긴 하나 이 건은 폐하께 상신해 보겠다. 다른 조건이 있는가?”
“골리앗 기술과 인력을 먼저 받았으면 합니다.”
다소 이상한 조건이었지만 기술을 넘기기로 한 마당에 중요한 건 아니었다.
크로이츠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고 루아드 왕자는 다소 억울한 목소리가 되었다.
“경이 그렇게 많은 돈을 벌고 있었을 줄은 몰랐소.”
“모두 왕가와 영광을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영광을……? 미안하지만 지금껏 선단은 자유롭게 행동하지 않았소?”
“현재 부유대륙엔 계류장을 포함해 다양한 시설이 지어지고 있지요. 전초기지가 완성되면 왕가 소속의 비행선도 문제없이 부유대륙에 다녀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군.”
“물론 재정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제가 한 맹세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걸 어찌 잊겠소? 경의 충성은 나도 충분히 헤아리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유감스럽게도 바그란과 자이움은 그런 돈을 만지지 못할 것이다.
곧 엘브랑데의 카이로스가 활동을 시작하면 대륙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기 때문.
상당수의 왕족이 사망할 것이고 이는 각국을 전쟁 속으로 몰아넣을 게 분명했다.
제국 황제나 루아드 왕자 또한 그 운명에서 벗어나진 못한다.
암살자는 레오볼드에까지 마수를 뻗치겠지만 이미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루아드 왕자는 재정을 점검한다며 어디론가 달려갔고 남은 둘은 정원에서 차를 마셨다.
카밀라 크로이츠는 왕가에서 애써 가꾼 정원은 구경하지 않고 레오볼드의 얼굴만 똑바로 바라봤다.
“경은 볼 때마다 위상이 달라지는군. 다음에 만날 때는 국왕이라도 되어 있는 게 아닌가?”
“무슨 말씀을. 이런 저도 바그란 왕가에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농담이다. 그건 그렇고 란티스를 축출한 건은 아주 놀랍더군. 본국의 장군들도 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며 내게 알아봐달라고 하던데.”
“운이 좋았습니다. 란티스도 바보 같은 선택을 했고요.”
“란티스는 탐욕스러운 자이긴 하나 바보는 아니지. 그대는… 야망을 숨기고 있군. 자신을 낮추려는 태도에서 그게 보인다.”
레오볼드는 입을 다물고 차를 마셨고 카밀라가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내가 볼 키스를 하고 갔었지.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겠나?”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우리 같은 입장에 밀애의 단어는 어울리지 않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내 파트너가 되어주지 않겠는가?”
서로를 지지해 주는 계약 부부가 되자는 것이다.
두 귀족은 목적은 다를지언정 각자의 국가에서 비슷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힘을 합쳐 서로를 돕는다면 상당한 시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 카밀라가 더 이익을 볼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가 당장 레오볼드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제국 내의 정보와 그의 입장에 대한 지지 정도였기 때문이다.
여성치고는 단단한 손이 그의 손을 위에서부터 꾹 쥐며 눌렀다.
“사실은 이번 사태가 끝나면 바로 신방을 차리려 했었다. 며칠이라도 내 영지에 들러준다면 그걸로 결혼식을 대신하려고 했었지. 그대의 표정을 봐서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떤가?”
“저로선 나쁘지 않은 이야기군요. 제국에서 상당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데다, 카밀라 님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 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카밀라 크로이츠를…….”
그녀의 눈빛이 게슴츠레해지더니 레오볼드의 얼굴에 가까이 접근했다.
둘은 단숨에 입술을 겹쳤고 잠시 후 그녀가 얼굴을 떼어내며 입술을 핥았다.
“동의한 걸로 알지. 이후의 일은… 이번 사태가 끝나고 이어갔으면 좋겠다.”
“그땐 영지에 방문해도 박대하지 않을 걸로 믿겠습니다.”
“…남의 정원이라서 보는 눈이 많다는 게 애석하군. 그럼…….”
그녀는 은발을 휘날리며 떠나갔고 레오볼드는 남은 차를 마셨다.
유감이지만 그녀가 정성껏 만든 신방에 들를 일은 없을 것이다.
황제가 사망하면 제국은 엉망이 될 거고 그녀도 정신없이 바빠질 테니까.
골리앗 관련 기술만 쏙 빼먹고 빠지는 격이 되겠지만 상황이 그런 걸 어떡하겠는가?
레오볼드에게 있어서 이건 정당한 거래에 속했다.
최소한 주려고 했었으니.
* * *
제국의 황제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
진상을 받으면 하사품을 내리는 식으로 거래가 진행되며 유일한 예외는 엘브랑데뿐이었다.
그러니까 자이움의 황제에게 있어 엘브랑데를 제외한 다른 국가는 동등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다만 이게 타국에 불리하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 관료들은 황제의 하사품이 볼품없어 보이지 않도록 많은 신경을 썼고 대부분의 경우 진상을 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었다.
그래서 갈리스토 같은 국가는 진상품의 규모를 계속 늘리려 했고 제국에선 적당히 하라고 은근한 압력을 가했다.
하사품 꾸리다가 관련 기관의 예산이 바닥나면 되겠는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제국 황제가 반다스 백작에게 내린 하사품은 상당한 규모였다.
비행선 10여 대가 골리앗 관련 인력과 시설을 실어 날랐고 그걸 설치하기 위한 기술진까지 파견되었다.
에테르석과 마법에 필요한 각종 도구와 자재가 선창 하나를 꽉 채웠을 뿐만 아니라 금으로 만들어진 세공품까지 한가득이었다.
거기에 크로이츠 백작 개인의 선물까지 포함되어 있다 보니 사람들이 수군거리게 되었다.
“이 표식은 혼기가 찬 여성 측에서 보내는 지참금이라는 뜻인데…….”
“자이움에선 여성이 지참금을 보내나 보지요?”
“지참금치고는 엄청나구만… 크로이츠 백작인가 하는 분이 우리 영주님을 마음에 들어하나 본데?”
“아, 그 백작님이 평범한 분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제국의 최고 귀족 중 한 명이라고.”
“고작해야 백작인데?”
“작위가 백작에 머물러 있더라도 실세야, 실세. 크로이츠 하면 제국 군부에서 유명한 가문이잖은가.”
“그러면 아르마 양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네.”
“후처 하나쯤은 들일 수 있는 거지.”
“저저 아르마 양이 옵니다!”
“쉬쉬쉿.”
“표정 보게. 누구 하나 잡아먹겠어.”
아무튼 골리앗 생산 설비는 불토른을 포함한 대장장이들을 날뛰게 만들었다.
“이보게!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제국의 골리앗 생산 라인을 하나 뜯어왔습니다. 베파르급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오세급이군요.”
오세급 골리앗은 자이움의 주력 양산기로 출력은 130E에 달한다.
베파르급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어지간한 국가의 주력기보다 우위였다.
레오볼드가 이걸 원한 이유는 베파르급의 출력을 낮추고 이런저런 기능을 뺀 것이 오세급이기 때문이다.
포텐셜에서 베파르급과 거의 비등하다는 것이고 이는 출력을 올렸을 때 문제없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국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베파르급 이상을 양산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저기 파견 온 기술진이 있군요. 철저히 기술을 뽑아내서 우리 것으로 해야 합니다. 이 시설도 두 달 안에 가동되어야 하고요.”
“두 달!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우리 쪽과는 계통이 달라서 가동 절차 숙지하는 데만도 반년은 걸린다고. 테스트도 수십 번은 해봐야 돼.”
“3천 골드를 드리지요. 본국에서 인력을 데려오십시오.”
“…5천 골드, 3개월. 이는 최소한일세.”
그 이하로 줄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레오볼드는 그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후로는 부유대륙에 간 발가드가 보고를 해왔다.
“여긴 재미있는 곳이오. 지상과는 뭐랄까, 유식한 말로 식생이 완전히 달라.”
“뭐 특이한 거 있었나? 도움이 될 만한 것 말이야.”
“날지 못하는 희한한 새가 있던데 일단 몇 마리 포획해서 가져가기로 했소.”
화조다.
부유대륙에는 지상에는 없는 동식물이 많은데 화조도 그중 하나였다.
생긴 건 닭과 칠면조를 합친 것과 비슷했고 덩치도 중간쯤이었다.
아르마의 분석에 의하면 맛도 비슷하고 키우기도 쉽다고 하니 가축으로 길러봄직했다.
발가드는 전초기지의 공정 진행률과 자원 확보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영주가 지시한 엘드그라실의 가지를 확인했소. 섬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데.”
그래서 위성으로 확인이 안 되었군.
“확보할 수 있겠나?”
“영주가 보면 알겠지만 이 녀석이 무식하게 커서 말이오. 그리고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알 수 없어서 함부로 뽑기가 좀 그런데.”
세계수 엘드그라실의 본체는 엘브랑데에 있지만 그 가지는 대륙 곳곳에 위치해 있다.
에테르의 흐름을 분석하면 정확한 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근방을 추정할 수 있었다.
엘프들이 하는 짓을 보면 에테르 저장 외에도 이것저것 쓰임새가 많은 모양이었다.
아르마는 엘드그라실 주변의 토양이 비옥하게 변한다는 점을 보고했다.
「이 시대에서 효율 좋은 질소고정법이 있을 리가 없는데 엘프들이 가꾸는 밭은 굉장한 생산력을 자랑합니다. 만약 제대로 삼림을 개간하고 농지를 확보했다면 아스테라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겠죠.」
“엘드그라실이 천연비료 역할을 한다는 거군.”
「그걸 역으로 이용하면 주변의 땅에서 지력을 빼앗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접경지대의 두 국가가 그렇게 당하고 있죠.」
엘브랑데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그들이 개입되어 있는 건 명백했다.
결국 엘프들이 목표는 인간을 포함한 아인종을 멸종에 가깝게 몰아붙이고 아스테라를 그들의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세간에서는 엘브랑데가 1년 협정을 받아들인 것을 두고 태도가 바뀌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레오볼드가 보기엔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방법을 바꾼 것뿐이다.
전쟁이라는 파괴적이고 소란스러운 방법보다는 암살과 기아로 말려 죽이는 방법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레오볼드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지온과 루시아를 보내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요 며칠 신경 쓰이는 녀석이 있는데…….”
“뭐지? 혹시 드래곤인가?”
“드래곤은 아니고 신의 파편이오. 아, 영주는 그게 뭔지 모르겠군. 짧게 말하자면 신이 죽으면서 그 힘이 어딘가에 스며든 거요. 생명체 혹은 물건… 개념도 가능하오.”
“대전쟁 당시에 죽은 신의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나 때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소. 비행선에 한 신의 힘이 깃드는 바람에 굉장한 위력을 자랑했지.”
“통제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되는데…….”
“의식은 있으나 자신이 신이라는 자각은 없으니 적당히 타이르면 알아들을 거요.”
“힘으로 말이군.”
“설득해도 되는데 꼭 찍어 누를 필요가 있겠소? 가만 보면 영주는 나보다 더 막무가내라니까.”
“하여튼 계속 수고해 줘야겠어.”
“지상이 시끄러운 모양인데 내가 가지 않아도 괜찮겠소?”
“괜찮아. 그 시끄러운 게 필요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젠장, 어쩌면 그 모든 사태에 영주가 개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데. 이거 앞으로 아스테라 전체가 전쟁에 휩싸이는 거 아뇨?”
“내가 만든 건 아니야.”
“바라는 건 맞다는 소리군.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아스테라를 통일해서 뭘 어쩔 계획이오? 뭐가 목적이오?”
“세계 평화.”
간단하고도 어이없는 답에 발가드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나는 신들과 드래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인 온갖 종족의 수많은 헛소리를 들었소. 그러나 맹세컨대 지금 영주가 말한 것보다 어이가 없는 소리는 듣지 못했소.”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좋소. 어차피 나는 영주에게 묶인 몸이니까, 세계 평화든 정복이든 잘 해봅시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소.”
* * *
에테르 연구소가 본격적으로 데이터를 쌓으면서 아르마는 수많은 정보를 취득했다.
그래서 에테르가 대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는 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 이외에는 빠른 속도로 진전을 이뤄가고 있었다.
개인의 에테르 하트에 대한 출력 측정도 그중 하나였다.
골리앗에 이어 개인의 전투력까지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 이는 순수하게 시간당 처리할 수 있는 에테르의 용량일 뿐 진짜 힘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전투력이란 건 개개인의 경험과 마음가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기에.”
“최대치만 측정할 순 있다는 말이군.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예로 들어 보면 어떻지?”
“바이오칩을 통해 마스터의 시야에 표시해 드리겠습니다.”
에테르 하트 시술을 받자 레오볼드가 사람들을 볼 때 옆에 숫자가 하나 나타났다.
카티나와 엘윈은 50E로 거의 비슷했고 스테피나가 70E, 그랜든이 75E라는 숫자를 기록했다.
불토른은 25E로 평민보다는 우위였지만 에테르 혈통을 가진 귀족보다는 낮았다.
지온과 루시아는 부유대륙으로 갔기에 측정할 수 없었지만 아르마에 의하면 1,000을 넘어간다고 한다.
발가드도 아마 그쯤 될 것이다.
그리고 레오볼드는 아르마가 직접 측정하려다가 기기가 고장 나고 말았다.
펑, 하고 스파크가 튀었고 그녀는 묵묵히 잔해를 치웠다.
“회로가 마스터의 에테르 출력을 버티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허용량이 5천을 넘어가는데 정말 놀랍네요.”
즉, 레오볼드는 발가드나 지온보다 다섯 배 이상 강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도 최소치고 실제 수치는 얼마나 나올지 모른다.
대단한 성적표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덤덤했다.
100억 인류가 만든 기적의 사이커가 선지자의 유물을 두 개나 흡수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리고 아스테라에 그에 대적할 가능성이 있는 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에테르 출력 2,000에 육박합니다. 굉장한 힘이네요.”
블랙 드래곤 그라키에스의 힘을 흡수한 엘프가 크게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악!”
고통 어린 비명이 충격파를 일으켰고 주변의 시설물이 죄다 쓸려나갔다.
그는 전신에서 연기를 뿜어내다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엘프 특유의 긴 귀는 잘려 나간 상태였다.
미친 살인귀 카이로스.
그가 마침내 눈을 떴다.
아르마는 그를 추적한 결과를 보고했다.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걸로 보입니다. 자아가 매우 불안정하며 가끔 기억을 잃기도 하는 것 같네요.”
“그거 참 편리하군. 불리할 때면 기억을 잃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의 범행을 부정하진 않아요. 단지 대답하지 않을 뿐이죠. 대의회가 감금 명령을 내렸을 때에도 순순히 응했고요. 다만 그렇게 순응하는 건 동족뿐입니다.”
“타 종족에겐 악마로 돌변한다 이건가.”
“특히 인간에게요. 가족을 인간과의 전쟁에서 잃었거든요.”
“그래서 수천 명을 학살할 권리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착각은 자유겠지만 당장 그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레오볼드는 주변의 시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건 뭐지?”
“라이징 데드라는 흑마법의 일종입니다. 그라키에스가 흑마법에 조예가 깊은 드래곤이었기에 가능한 거죠.”
“시체를 일으켜 좀비로 만든다니 끔찍하군. 저거 분석할 수 있겠어?”
“유전자 데이터와 에테르 하트 분석이 필요합니다.”
즉, 포획해야 한다는 뜻이다.
엘브랑데의 계획서를 뜯어 보면 그는 마지막에 처리하게 되어 있으므로 그때 잡아들이면 될 것 같았다.
그때 카이로스가 갑자기 힘을 폭주시키며 주변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사지가 단숨에 분해되었고 연구소가 산산 조각났다.
사정이야 어쨌든 저래서는 전력으로 써먹기엔 힘들어 보였다.
레오볼드는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여기에 오면 포획해서 연구에나 쓰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