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63
262화 싸우는 이유
―황녀가 살아 있다.
이 소문이 최초로 퍼진 것은 인간 왕국이 아니라 엘브랑데였다.
어디의 누가 퍼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문은 놀랍도록 상세했다.
―마르그레타 루스텔은 현재 로제론에 있으며 몸과 정신은 멀쩡해 보인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귀국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유가 무얼까?
―그녀는 엘프를 배신하고 인간의 편에 붙었다. 레오볼드 반다스 섭정이 그녀의 반려가 되었다.
첫 번째 문단을 제외하면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마르그레타가 귀국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드리즈덴이 있어서였다.
그가 자신을 환영하지 않을 게 뻔하니 바그란에 머물면서 방법을 찾아보려 한 것이다.
또한 그녀는 인간의 편에 붙지 않았고 레오볼드의 애인도 아니었다.
물론, 다소의 호감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연애 감정이라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엘브랑데에서 그녀의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소문을 접한 엘프들은 하나같이 신문을 바닥에 던지고 침을 뱉었다.
“더러운 배신자! 결국 인간에게 붙었구나!”
“인간 자치령을 뻔질나게 드나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황녀 주제에 인간의 아이를 밸 셈인가?”
“엘드그라실이 새로운 수호자를 지목하지 않은 것도 그 배신자 때문이다!”
엘브랑데는 워낙 폐쇄적인 국가이기에 선동이 쉬웠다.
대부분의 권력을 대의회와 원로원이 쥔 시점에서 이를 반박하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
자연스레 마르그레타 황녀는 자작극을 일으켜 엘브랑데에 내분을 불러오려다가 드리즈덴에 의해 저지당한 배신자가 되었다.
어린애도 웃을만한 엉성한 각본이지만 엘프들은 그걸 믿었다.
모든 신문과 주변 사람들이 그녀가 배신자라고 외치고 있어서 다르게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론을 몰아간 드리즈덴은 티렌델이 바그란에 붙었을 가능성까지 생각하고 암살자를 움직였다.
존재감 없던 황족들이 줄줄이 사망하자 엘브랑데 전체가 뒤집어졌다.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다… 이것은 누구의 소행인가?
―티렌델이 틀림없다! 그자는 켈로디안 재상을 급습해 죽였을 뿐만 아니라 대의회까지 공격했다!
―아직까지 숨어 있었나!
전례가 있다 보니 모두가 그가 흉수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덕분에 드리즈덴은 수호자 행사가 취소된 것을 숨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경한 여론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대의회의 본회장에 올라 연설했다.
“우리 엘프는 인간의 억압에서 벗어난 이후로 대단한 업적을 이 땅에 남겼다. 인간들이 즐겨 쓰는 비행선은 우리의 기술이 없으면 건조되지도 못했다. 오늘날 전쟁의 주축인 골리앗은 우리의 공학자들이 만들어 낸 골렘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토록 엘프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족속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많은 종족을 들 수 있겠지만, 나는 하나를 특히 꼽고 싶다. 바로 인간이다.”
드리즈덴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고 목소리도 우렁찼다.
덕분에 본회의장에 모인 엘프들은 그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보라, 인간의 배은망덕함을. 들어라, 인간들의 헛소리를. 그들은 우리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함에도 우리를 억압했고 탄압해 왔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황녀를 꾀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 대목에서 몇몇 엘프가 팔을 뻗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배신자 마르그레타!”
“황녀를 죽여라!”
당연하지만 드리즈덴이 미리 심어 둔 청중이었다.
그는 손짓을 해 소란을 가라앉힌 다음 힘 있게 발언했다.
“황녀는 인간의 편에 붙었고, 티렌델은 요인들을 암살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언가.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우리 엘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쟁! 전쟁!”
“좋은 인간은 죽은 인간뿐이다!”
본회의장에 환호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드리즈덴은 그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주먹을 불끈 쥐어 치켜올렸다.
“불행히도 현 황가엔 구심점이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엘브랑데를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자랑스러운 신민들이여, 대의회를 믿는다면, 인간을 증오한다면, 부디 내게 투표해 주길 바란다. 내가 그대들을 위해 일어선 것처럼!”
“오오오!”
“드리즈덴을 위하여!”
“단 하나의 반대표도 용납할 수 없다아!”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총투표가 시작되었다.
일부 의원들은 내심 드리즈덴을 반대했지만 그걸 표출할 용기는 없었다.
투표가 완전히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엘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히 반대표를 낼 의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시로 총통제를 실시하자는 법안이 99.5%의 표를 얻어 가결되었다.
초대 총통으로 지목된 사람은 바로 드리즈덴 페더우드 의원이었다.
그는 반대표를 자신이 냈다는 것을 밝혀서 더욱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모두가 나를 믿는다 하더라도 나만큼은 나를 의심하겠소. 그것이 나 드리즈덴이 사는 방식이오.”
“누가 그를 의심하는가!”
“이제 우리는 드리즈덴과 일체가 된다!”
“그를 공격하는 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엘브랑데의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드리즈덴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그는 엘브랑데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구경하던 레오볼드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솜씨였다.
“늙은 생강이 맵다고 했나… 선동 능력은 대단하군.”
“문제는 그 선동력이 통치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점이죠.”
“엘브랑데는 워낙 덩치가 크고 기술력이 좋아서 말아먹지만 않으면 적당히 돌아가게 되어 있어.”
하지만 지금부터는 좀 다를 것이다.
드리즈덴이 일개 의원직에 머물러 있을 때에야 모든 것이 쉽게 보이겠지만 총통직에 올라 레오볼드를 상대하기 시작하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낄 것이다.
“자살 혹은 분노한 군중에게 몰매질…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비참한 최후겠군.”
레오볼드는 총통으로 취임한 드리즈덴이 황궁으로 들어서는 걸 보았다.
300년이 넘는 세월은 엘프에게 있어서도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적당히 쉬고 싶은 마음이 있을 텐데도 정력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걸 보면 어떤 의미에선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단순히 탐욕 때문만은 아닐 것이고…….”
“저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누구의 정의가 옳은지는 전쟁의 결과가 가르쳐줄 것이다.
* * *
“티렌델 아즈우스라고 합니다. 레오볼드 님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인사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렸다.
티렌델이라고 하면 살아 있는 전설, 엘븐 나이트의 정점에 올라 있는 엘프 아닌가?
그가 나타났다 하면 인간 측은 전장을 포기하고 달아나기 바빴다.
긴 머리카락에 검은 안대는 엘븐 나이트, 더 나아가 엘브랑데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레오볼드의 부하가 되었다니.
상석에 앉은 레오볼드는 적당히 고갯짓을 하고 말했다.
“그간 티렌델 경과는 많은 일이 있었소. 내 목숨을 노리기도 했고 전장에서 싸우기도 했지. 그런 과거는 잊고 새 출발을 하기로 했소. 잘 지내라는 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 소란을 피우지만 마시오.”
이 자리엔 엘프라는 종족 자체가 불편한 사람이 꽤 많다.
특히 발가드.
대전쟁 당시에 쌓은 악연이 장난이 아니었는지 레오볼드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이를 드러냈다.
“반쪽짜리 엘프라, 그럼 반만 죽여야 하나?”
“덤빈다면 사양하지 않지. 죽는 것은 네 쪽이 될 테지만.”
티렌델은 숙이는 대신 맞받아치는 쪽을 택했고 발가드는 실소를 흘렸다.
“관두지. 우리가 싸우기라도 했다간 무서운 분께서 박살을 내놓을 테니.”
“맞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 알아서 처신하라고.”
상석에 앉은 레오볼드는 그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머리 뒤에 황금색의 작은 원이 떠올라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예전의 신들을 연상케 했다.
그랜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신화의 구절을 떠올렸다.
‘그를 원망하지 마라,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마라. 눈부신 빛이 그대를 감쌀 것일지니. 모든 것이 편안해지리라…….’
눈부신 빛이란 레오볼드의 머리 뒤에 위치한 고리, 즉, 헤일로를 말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마법이 아닌지 의심했지만 스테피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걸 보면 아닌 것 같았다.
‘저건 신이나 보여 줄 수 있는 권능이다… 드디어 영주께선 신의 길로 접어드시는가…….’
사실 레오볼드는 그 전에도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힘을 자주 보여 왔다.
이계에서 온 인간임이 드러난 마당에 저런 헤일로를 가졌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수백이나 존재하는 작은 신들보다는 차라리 영주께서 신에 어울리긴 하지…….’
대전쟁 당시의 신이나 드래곤이 지금 출현한다고 해서 영주가 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조차 멸망시키고 아스테라를 통일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귀족까지 없애고 완전한 통합의 길로 가는 것인가…….’
그랜든은 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토록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평민들을 위해 쓰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분명 영주의 눈에는 우리가 같은 존재로 보이는 것이겠지…….’
거인이기에, 너무 높은 곳에 있기에 작은 차이점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랜든은 그걸 부정하는 대신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몇 개월 동안 바꾼 로제론이 200년 동안의 변화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수인들의 출입 제한도 사라졌고 엘프도 거주의 자유를 얻었다. 탐욕스런 상인들은 철퇴를 맞았고 치안은 완벽해졌다.’
거기에 전반적인 수입이 늘어나 사람들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또한 직할령에 시도되고 있는 수많은 작물과 발명품 등이 드디어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몇 개월만 지난다면 우리의 생활이 뿌리부터 달라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곤 했다.
이 모든 것을 레오볼드가 이루다 보니 더 이상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랜든은 고지식한 기사였지만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귀족은 아니었기에.
아무튼 집무실 내의 사람들은 티렌델의 합류를 그럭저럭 인정한 것 같았다.
영주가 하겠다는데 대놓고 반대할 사람도 없겠지만.
그는 사람들을 둘러본 뒤 말했다.
“더 할 말은 없는 것 같군.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요.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지. 이미 준비는 되고 있으나 할 일이 남았소. 여러분들의 에테르 하트를 개조하는 것이오. 차례차례 시술할 테니 너무 겁먹지 말고 기다리시오. 먼저 발가드.”
호명당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알테마가 개조해 준 에테르 하트요. 건드리고 싶지 않소.”
“지금보다 두 배는 강해질 텐데 그걸 거부하겠나?”
“…잠깐 생각 좀 다시 해보겠소.”
“티렌델.”
“예, 레오볼드 님.”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티렌델의 태도는 전에 없이 공손했다.
레오볼드가 눈짓을 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갔다.
남은 사람은 티렌델과 아르마뿐이었다.
“내 정체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 있겠지.”
“이계에서 온 용사라고 들었습니다. 거대한 배를 타고 오셨다고요.”
“그 배의 힘이면 티렌델 너의 눈을 고쳐줄 수 있다. 물론 에테르 하트도 대폭 개조할 수 있지.”
“이 눈을… 정말입니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안은 한 번만 하지. 하겠는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눈을 고쳐주십시오.”
“아르마, 준비해 줘.”
“네.”
그때부터 티렌델은 레오볼드를 졸졸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른바 호위기사를 자처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레 카밀라가 짜증을 냈고 다른 사람들도 어이가 없어 했다.
죽이겠다고 분노를 터트리던 게 언제인데 저렇게 태도를 확 바꾸어도 되는 건가?
그런 목소리가 나오거나 말거나 티렌델은 따라다니는 걸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레오볼드는 그를 앉혀 놓고 말했다.
“날 따라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아.”
“뭡니까?”
“엘브랑데가 재무장을 시작했거든.”
티렌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워커가 보여 준 화면에는 열병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천 대의 골리앗이 정확히 대열을 맞추어 메데아의 대로를 행진했다.
놀라운 것은 드리즈덴을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이 사열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드리즈덴… 대체 무슨 낯짝으로…….”
“황제가 죽었다. 지금 엘브랑데의 핵심 권력을 차지한 건 대의회야.”
“…보나마나 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겠군요.”
“드리즈덴 총통은 티렌델 자네가 여전히 엘브랑데에 숨어 있다고 선동하고 있지. 황녀 또한 배신자라고 매도했고.”
뿌드득.
티렌델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제가 가서 놈을 죽이겠습니다.”
“아니, 놈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죽어선 안 돼.”
“엘브랑데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위함입니까?”
“내가 먹어치우기 좋은 상태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거야.”
“그런 식의 공작은 피해를 늘릴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피해가 늘어난다고 자신할 수 있나? 지금 드리즈덴을 죽여 봐야 다른 놈이 이어받을 뿐이야. 그놈을 죽이면 또 다른 놈이 튀어나오겠지. 근본적인 해결이 안 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면에서 깨부숴야지. 엘프가 더 강하며 아스테라의 지배종이라는 그 환상을 부숴야 돼.”
“대의회가 모든 것을 동원하면 진짜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끽해야 부유대륙을 떨어트리는 정도겠지.”
티렌델은 그걸 알면서도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오볼드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하기야 눈앞의 주인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에테르는 이미 발가드를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었다.
대전쟁 당시의 드래곤이나 신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맞서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을 알려 주십시오.”
“엘브랑데가 당장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할 테니 갈리스토 공략에 힘을 보태자고. 블랙 나이트를 준비해 줄 테니 눈 시술을 받고 훈련하고 있어.”
레오볼드의 목소리는 묵은 감정이라곤 전혀 없는 듯 부드러웠다.
그토록 저주하고 싸웠는데도…….
티렌델은 그를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나간 뒤 레오볼드가 투덜거렸다.
“눈빛 봤어? 여자였으면 어느샌가 침대에 들어와 있었겠어.”
아르마가 넌지시 말했다.
“언젠가 저를 찾아와서 육체를 바꿔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가능해?”
“정신의 에테르를 완벽히 분석했으니 얼마든지 가능하죠. 마스터의 영혼을 여성의 몸에 넣는 것도 가능해요. 그 몸이 버틸지는 미지수지만요.”
말하자면 선지자의 유물인 영혼 교환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거 끔찍하군.”
“아무튼 제가 보기에 그 육체는 더 이상 마스터의 힘을 버티지 못해요. 그래서 새로운 육체를 준비하고 있어요.”
“새로운 육체라… 가능하면 내 원래 얼굴과 닮았으면 좋겠는데.”
“지구에 복귀할 때를 대비하시는군요.”
“그게 아니라 언젠가 선지자를 만날 때는 원래 육체에 가까웠으면 해서 말이야.”
아르마가 보기에 레오볼드는 선지자라는 신을 숭배하는 신도였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광신도.
언젠가 선지자를 만난다면 그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신이나 다름없는 선지자가 거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겠지만 최소한 박대하지 말았으면 싶었다.
만나겠다는 일념만으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고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 * *
바그란과 엘브랑데가 내부 문제로 조용히 있을 때.
자이움 제국의 바라크 황태자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크로이츠 백작을 보내 놨더니 도통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예 통신구에서 신경을 끈 것 같았다.
“그녀를 보낸 게 잘못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황녀 사건과 티렌델이 투항한 사건 등은 철저히 바그란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 타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이움을 비롯한 여러 인간 왕국들은 반다스 백작이 사고를 치고도 뻗대는 걸로 해석했다.
그게 7월을 넘어가다 보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본국의 백작이라 하나 이렇게까지 방자하게 굴 줄은…….”
바라크 황태자는 반다스 백작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통신구에 시선을 가져갔다.
저기에 손을 얹으면 일이 의외로 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제국의 황태자였다.
사고를 친 백작이 적극 해명해야 할 일이지 그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는 황태자에게 뜻밖의 인물이 연락을 해왔다.
바로 판그랄 대공이었다.
그는 마차 한 대분의 선물과 백작급 인사를 전령으로 지목해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
평소 반목하기만 하던 대공이 이렇게 정중하게 나오자 황태자는 흡족해 하며 통신구를 받아들였다.
대공은 뜻밖의 말을 전했다.
“전하의 황위 계승을 적극 지지하겠습니다.”
“…공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기탄없이 말씀해 보시오.”
“전하께선 반다스 섭정이 벌이고 있는 일련의 행동이 마음에 드십니까?”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반다스 섭정은 엘브랑데의 황녀를 시해하고 갈리스토에서 보낸 사자의 팔을 잘랐습니다. 그러고도 아무런 해명도 않는군요. 이게 제국 백작의 책임 있는 자세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더욱이 섭정은 해명하라는 제 요구에도 불응했습니다. 아마 황태자 전하의 말씀도 받아들이지 않았겠지요.”
“으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바라크 황태자는 신음을 삼켰다.
반다스 섭정의 행동에는 확실히 지나친 바가 있었다.
그간은 이런저런 공적을 감안하여 눈감아주고 있었지만…….
대공은 흔들리는 황태자의 마음에 추를 하나 더 얹었다.
“혹시 그거 아십니까? 바그란에서 신병기가 만들어졌다는 소문 말입니다.”
“신병기? 블랙 나이트를 말하는 거 아니오?”
“골리앗이 아니라 대포랍니다. 에테르석을 발사해 폭발시키는 물건인데 위력이 대단해 어지간한 골리앗은 일격에 박살난다고 하더군요.”
“무엇이?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보고를 하지 않는단 말인가!”
“전하와 섭정의 신뢰를 흔들고 싶진 않습니다만, 그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없다면 왜 블랙 나이트를 양산하자마자 그런 것을 만들어 낸단 말입니까? 백번 양보하더라도 이미르 공화국이 아니라 전하께 연락을 하는 것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이미르 공화국에서 그것을 먼저 입수했단 말이로군…….”
“드워프들도 전율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답니다. 무쇠평의회에선 골리앗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
이제 바라크 황태자는 레오볼드가 사실은 배신자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판그랄 대공은 이 모든 것은 소문에 불과하다며 수습하려 했지만 황태자의 눈은 이미 뒤집혀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나와 공이 손을 잡자 이거요?”
“어쨌거나 같은 자이움의 귀족 아니겠습니까? 그는 제국의 백작 작위를 가지긴 했습니다만 태생이 바그란이지요. 거기에 병사들에게 귀족들에 대한 증오를 공공연히 부추기고 있습니다.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는 겁니다.”
“평등한 세상은 얼어 죽을…….”
실제 레오볼드는 병사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계급제가 익숙한 인류연합에서 태어나 자랐고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스스로 인류연합의 구성원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최소한의 삶은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그것이 곧 정의이고 효율이었다.
아무튼 레오볼드가 그런 소문을 흘리는 바람에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이제 바라크 황태자는 더 이상 그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당장 그를 불러 징계를 내릴 수도 없었다.
그를 직접 상대하는 건 너무 두려웠던 탓이었다.
판그랄 대공이 그를 위로했다.
“전하께선 황위에 오르십시오. 신이 갈리스토와 함께 배신자를 상대하겠습니다.”
“오오, 그래 주시겠소?”
“제국의 적을 상대함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신성교국과의 연합이 필요합니다.”
“반다스 섭정은 저 엘븐 나이트와 티렌델을 패퇴시킨 괴물이오. 신성기사단이라 할지라도 상대가 되진 못할 거요.”
“평범한 기사들이라면 그렇겠죠. 최근 신성교국에선 어떤 유물을 하나 캐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대전쟁 당시 쓰였던 신의 유물로 추측되는 그것이라면 충분히 백작을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왜 내가 아니라 공에게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해 없으셨으면 합니다. 전하께서 황태자에 오르시기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바라크 황태자는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 맡겨 보기로 했다.
최악의 경우라도 손해 보는 것은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도 반다스 섭정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엘브랑데와 손을 잡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겠군.’
그는 통신을 종료한 뒤 엘브랑데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은밀히 손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