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62
261화 황녀는 살아 있다
22세기 인류에게 있어 에테르란 대단히 골치 아픈 에너지였다.
선지자의 유물을 통해 쓰고는 있지만 이게 입자인지 파동인지조차 구분을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다행히 인류가 에테르를 쓰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어린아이도 컴퓨터를 다룰 수는 있듯, 더듬거리며 선지자의 유물을 연구한 끝에 다양한 물건을 생산해 낸 것이다.
레오볼드, 유지하가 21세기로 돌아와서도 에테르에 대한 본질은 거의 연구하지 않았다.
강인공지능인 아르마는 대부분의 연산력을 메가시티 건설과 그에 파생된 계획에 쏟아부었고 에테르에 대한 연구는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 할 게 없었다.
인류가 가진 어떤 관측 수단이나 도구로도 에테르를 분석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르마는 인류연합이 기록해 놓은 에테르 관련 데이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21세기에 나타난 플레이그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에테르 우주에 와서는 루시아나 지갈레온, 그리고 스테피나 등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에테르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이론적인 설계를 시작한 것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에테르란 에너지는 입자도 파동도 아니었다.
에테르 자체를 를 물질의 단위 중 하나로 정의할 수 있으며 진동이나 얽힘, 융합, 파괴, 소멸 같은 변화를 통해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각각의 변화에는 미지수가 포함된 방정식이 많은데 이걸 풀려면 직접 그 마법을 관측할 필요성이 있었다.
드래곤 이터가 블랙 나이트에게 여러 마법을 쓴 것처럼 말이다.
아르마는 테라 행성에 도착한 후 이런 마법들을 빠짐없이 관측해 왔다.
그러나 정신계 마법이나 타임스톱 같은 위험한 마법은 좀처럼 관측할 기회가 없었다.
대전쟁 이후 대부분 소멸의 길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관측하기 위해선 대전쟁 당시의 존재들을 끄집어 낼 필요가 있었고 티렌델에게 굴욕감을 심어 준 것도 그런 계획의 일환이었다.
자기 힘으로는 안 되니까 신격을 주입해서라도 레오볼드에게 덤비는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 의도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티렌델은 드래곤 이터라는 신격을 주입받고 레오볼드 앞에 섰고 녀석은 타임스톱이라는 대전쟁 당시의 마법을 펼쳤다.
그리하여 아르마는 마침내 에테르 이론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깨달음과 같았다.
에테르의 본질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 기원까지 추적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플레이그 퀸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위치에 올라선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에테르 기본 방정식 해석 완료.」
「에테르 태양, 에테르 차원 해석 시작.」
「1,372개의 마법에 대한 해석 중…….」
수억 개의 연산유닛이 가동되어 에테르 우주와 테라 행성에 대한 비밀을 풀어나갔다.
그렇다고 아르마나 레오볼드가 당장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월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선지자를 만나기 위한 길을 닦을 유력한 도구를 확보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레오볼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이젠 에테르에 대해 물어봤을 때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오진 않겠군.’
「이론은 확립했으나 연구용 에테르 오리진을 만들 필요성이 있어서요. 몇 개월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게 좀 있기는 하지?’
「이제 아스테라에서 마스터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답니다.」
전에도 거의 그랬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흑마법을 포함한 신격의 권능이라든가 그 어떤 힘으로도 레오볼드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진짜 신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은가?
‘그런 주제에 정신은 여전히 인류연합의 일개 군인에 가깝지만…….’
최근에는 그런 정신도 깎여나가서 노인과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지금 그를 지탱하는 건 오로지 선지자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레오볼드는 에테르 역장에 갇혀 있는 드래곤 이터를 바라봤다.
이쪽에서 역으로 타임 스톱을 펼친 덕분에 녀석은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단 이 마법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디까지나 에테르 역장 안에서만 구현되는 것이고 한 번 건드리면 바로 깨어납니다. 외부에서 건드려도 깨어나고요. 또한 멈출 수 있는 시간은 시전자의 에테르 하트 출력에 비례합니다.」
‘드래곤 이터와 나를 비교하면 어떻지?’
「전자는 겨우 10초, 마스터는 1분을 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가하게 노닥거릴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것도 끝낼 때가 왔다.
레오볼드는 아르마가 전해주는 각종 데이터 중 좋은 것을 하나 골랐다.
‘늘 어설트 아머가 이온 캐논을 못 쏘는 걸 아쉽게 여겼지. 이제 한을 풀 수 있겠어.’
그가 고른 것은 대구경 에테르 캐논이었다.
아스테라에서 비행선에 탑재하는 것과는 이름만 같을 뿐 사정거리와 파괴력 면에서 차원을 달리했다.
에테르 분석이 완전히 끝났기에 리빙메탈 최적화를 할 수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철컹철컹하며 바닥에 버려져 있던 메이스가 어설트 아머에 달라붙더니 포신으로 변했다.
「마스터께선 이제 적당한 리빙메탈만 있으면 마음대로 이온 추진기나 에테르 레이저 등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진짜 플레이그처럼요.」
‘그거 환영할 만한 일이야. 역장 걷어.’
「3초 후 역장이 걷힙니다, 2, 1…….」
타임 스톱 마법이 완전히 사라지자 완전히 정지해 있던 드래곤 이터가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경악했다.
―이 에테르… 네놈, 타임 스톱을 썼구나.
“눈치가 빠르군. 그럼 이게 뭔지 알아보겠어?”
레오볼드가 에테르 캐논 포신을 들이대자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따위 장난감으론 이 형체에 작은 피해밖에 입히지 못해. 그리고 네놈의 에테르가 친절하게 복구해 줄 거고 말이야.
“그래? 그럼 얼마나 버티나 보자고. 에테르 공급 시작해.”
「에테르 융합로의 재구축에 들어갔습니다. 융합로 출력을 2%로 설정합니다.」
지금까지 융합로가 1% 이상의 출력을 낸 것이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지구가 지금까지 써온 모든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는 에테르 융합로를 완전히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구경 포신은 물론이고 어설트 아머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레오볼드의 시야에 온갖 경고가 깜박거렸고 아르마조차 경고했다.
「포신을 3도 이상 올리는 것을 권합니다. 이대로 쏘면 지상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젠장, 겨우 에테르 캐논 쏘는 건데.’
「이 상태로도 대도시 하나를 증발시킬 정도의 위력입니다, 마스터.」
그럼 얌전히 따라야지.
한편 드래곤 이터는 눈앞의 녀석이 에테르에 물들어가는 것을 불길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재빨리 아공간을 열어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마법을 쓸 수 없었다.
―나와! 나오란 말이다!
“미안하지만 아공간은 안 나올 거야. 내가 에테르 공급을 멈췄거든.”
정확히 말하면 아르마가 멈췄다.
에테르 해석이 끝난 이상 그녀에게 불가능한 것은 거의 없었다.
―뭐? 그건 불가능해!
“그런 말을 하는 녀석은 얼마 못 가서 퇴장하더라고. 하여튼 덕분에 좋은 데이터를 많이 얻었어. 고맙다고 해두지.”
―안 돼!
드래곤 이터는 너무도 전형적인 대사를 뱉으며 부리나케 도망쳤다.
녀석의 뒤로 에테르 캐논이 발사되었다.
거대한, 정말이지 너무도 거대한 빛의 기둥이 그를 집어삼켰다.
막대한 에테르는 그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드래곤 이터의 형태를 증발시켰다.
그러고도 대부분의 에너지를 잃지 않고 대기권을 돌파해 우주 저 너머로 나아갔다.
주변의 대기가 몽땅 증발하는 바람에 메가톤급 핵탄두라도 터진 듯 강렬한 후폭풍이 일었다.
‘보호막 마법 아무거나.’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벨리알급에 배리어 마법과 리버스 그래비티 마법이 씌워졌다.
덕분에 티렌델과 벨리알급은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고 지상에 착륙할 수 있었다.
잠시 후 티렌델이 파리한 얼굴로 벨리알급에서 뛰어내리곤 털썩 무릎을 꿇었다.
레오볼드는 어설트 아머에서 나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직도 날 죽이고 싶나?”
티렌델의 하나밖에 없는 눈이 그를 쳐다봤다.
일순간 그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 * *
사실 티렌델은 의식을 빼앗기긴 했지만 드래곤 이터와 레오볼드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싸움은 자신으로선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둘은 대전쟁 당시의 챔피언들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고 써대는 마법도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레오볼드는 이상한 무기를 꺼내더니 타임 스톱 마법을 파훼하기까지 했다.
티렌델의 상식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서 멈췄다면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볼드가 쏜 빛의 기둥은 할 말을 잃게 했다.
100여 척이 넘는 엘브랑데의 함대가 에테르 캐논을 집중해서 쏘아도 그 위력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좌절했다.
이제 레오볼드를 죽이는 것은 한낱 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신격조차 사라지고 없는데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
티렌델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졌다. 죽여라.”
“말 잘했다. 기다려라, 죽여 주마.”
레오볼드는 손에서 에테르 블레이드를 만들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티렌델은 일렁이는 황금빛을 보며 힘없이 말했다.
“이제 넌 그 힘으로 엘브랑데를 공격하겠군…….”
“당연하지. 날 가로막는 모든 것을 죽이고 대륙을 통일하는 것. 그게 내 목표다.”
“얼마 전까지라면 우습게 여겼겠지만 오늘 그 힘을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게 되는군…….”
“왜, 갑자기 목숨이 아까워졌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다. 네 힘 앞에 죽어나갈 내 동족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누굴 살인귀로 보는 거냐?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필요할 때만 죽일 뿐, 취미로 살인을 하지는 않아.”
“그렇다면 황녀 전하는 왜 죽였나! 죽일 이유가 없었는데!”
“결국 그게 문제가 되는군.”
“나는 네놈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그분은 우리의, 내 미래였어! 비록 네놈에 비해 힘은 보잘것없지만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단 말이다!”
“힘이 없는 정의는 무의미하다고 분명 내가 말했을 텐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티렌델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화를 내었다.
지난 시간 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을 한꺼번에 토해내려는 듯했다.
“그분은 젊다! 대전쟁을 겪은 세대는 곧 있으면 퇴장할 것이고 조금씩 엘브랑데를 바꿔나가면 되는 일이었어! 그런데, 네놈이 그걸 망쳤다!”
“그 드리즈덴이 얌전히 퇴장한다고? 웃기는 소릴 하고 있군.”
이 대목에서 티렌델은 흠칫했다.
뭔가 아는 게 있는 건가?
레오볼드는 무릎을 꿇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엘프는 대전쟁 이후 200년 동안 바뀌지 않았어. 오히려 더욱 폐쇄적이고 음침하게 변해갔지. 섀도우 엘프 해적들이 저지른 짓을 알고 있나? 그들을 교화할 수 있겠어?”
직접 델피나를 만나 본 티렌델은 도저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엘브랑데 내부에서도 섀도우 엘프 해적들의 분탕질은 지지하는 자가 드물었다.
단순 살인이나 약탈은 그렇다 치더라도 잔인한 고문이나 식인은 어지간한 엘프도 외면할 지경이었다.
레오볼드는 그의 멱살을 쥐었다.
“말해 봐라, 하프 엘프. 너는 반은 엘프지만 반은 인간이다. 평소 황녀와 함께 인간 자치령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자주 봤겠지. 거기의 인간들이 어떻게 사는지 말이다.”
“…….”
“그리고 로제론을 지나치면서 이곳의 인간과 엘프들이 어떻게 사는지 똑똑히 봤을 거다. 비록 완전히 평등하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럭저럭 얽혀서 살고 있다. 네 눈에는 어디가 더 좋아 보이나? 하룻밤에 수백 명이 죽어나가도 쉬쉬하는 인간 자치령인가, 내가 몇 개월 만에 만든 로제론인가?”
티렌델은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알지만 납득할 수가 없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마르그레타는 왜 죽였단 말인가.
“…황녀 전하를 죽인 이상… 네 말에는 진정성이 없어.”
“만약 내가 황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순간 티렌델은 레오볼드의 멱살을 역으로 움켜쥐었다.
“죽은 자를 모독할 생각인가! 네놈도 드리즈덴과 같은 부류인가!”
“아니, 그녀는 죽은 적이 없어. 죽기 직전에 내가 살려냈으니까.”
“…뭐, 라고?”
경악스런 발언에 티렌델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드리즈덴은 황녀를 고이 보내 줄 생각이 없었어. 그래서 그녀가 탄 비행선에 에테르석으로 만든 폭탄을 설치해두었지.”
“그럼 그녀는 어떻게…….”
“비행선이 폭발했지만 그녀는 운 좋게도 휘말리지는 않았어. 마침 블루 드래곤이 근처를 지나간 건 우연이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
“…….”
티렌델은 먹먹해져서 레오볼드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이 말이 맞다면,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 아닌가.
“참고로 말한다면 네 골리앗에도 에테르폭탄이 숨겨져 있어. 네 에테르 하트와 골리앗의 코어를 공명시켜서 신격으로 기폭시킬 예정이었지.”
“…신격이 죽음과 파괴만 외치던 건 그것 때문이었군…….”
“어차피 나한테 죽은 이상 폭발은 물 건너갔지만 말이야. 더 할 말 있나?”
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전하를 뵙고 싶다…….”
“그게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해주지. 아르마, 보내.”
잠시 후 마르그레타를 태운 셔틀이 대지에 착륙했다.
셔틀에서 내린 그녀는 안색이 다소 좋지 않았는데 멀미를 한 것 같았다.
티렌델의 얼굴이 감격으로 넘쳐흘렀다.
“황녀 전하! 살아계셨군요!”
“티렌델 경…….”
그녀는 다가와 손으로 그의 볼을 감싸 쥐었다.
“더 이상 싸울 필요는 없어요, 제가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저, 전 당신께서 죽은 줄 알고…….”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둘이 얼싸안자 레오볼드는 분위기를 깨고 검을 들이밀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선택을 해야겠어. 여기서 죽을 것인지 다른 길을 찾을 것인지.”
티렌델은 잠시 생각하다 결연한 눈빛이 되었다.
“전하께서 살아계시니… 더 이상 복수를 외칠 필요는 없겠지. 엘브랑데에 복귀하지도 못하는 몸, 더 이상 살아 있을 의미가 없다. 그러니 죽여라.”
“티렌델 경!”
마르그레타가 안타깝게 외쳤고 레오볼드는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잘 생각해라. 내 밑에서 일할 생각은 없나?”
“네 밑에서 일하라고? 너를 위해서?”
“인간 자치령의 총독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지? 그걸 조금 바꾸어서 엘프 자치령의 총독이 되는 건 어때?”
“엘브랑데를 멸망시킬 생각인가…….”
“내가 여기 온 이상 그건 결정되어 있는 미래였다. 다만 나는 엘프들을 괴롭히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귀찮기도 하고, 별 원한도 없거든.”
“이계에서 온 용사이기 때문인가?”
“좀 있으면 알게 되겠지. 하여튼 너와 나의 목적은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방향만 달랐을 뿐이지. 이제 서로의 길이 합쳐졌고 너에겐 한 번의 기회가 있다. 그러니 선택해라.”
“…….”
티렌델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여기에서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그가 선택한 미래를 보고 싶었다.
“너를 위해서 일하겠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네가 믿는 것을 위해서다. 아무튼 잘 선택했다. 피곤할 테니 셔틀로 돌아가서 쉬어도 좋아.”
“그러고 보니 저 이상한 물건들은 도대체 뭐지?”
어설트 아머와 셔틀을 말하는 것이다.
발가드와 지갈레온은 익숙할 테지만 나머지 측근들은 구경하지도 못한 물건이다.
“나중에 설명할 시간이 있을 거야. 일단 로제론으로 돌아가서 쉬어. 아르마, 보내.”
둘은 아르마의 인도에 따라 셔틀에 탑승했다.
레오볼드는 남겨진 골리앗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원래는 티렌델을 살려둘 생각이 아니었다.
그의 효용가치는 신격을 주입당하고 데이터를 제공하는 시점에서 끝날 예정이었다.
방금 그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고 죽였더라도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석 정도면 대륙 정복에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반응탄을 몇 발 꽂고 시작하는 것보다는 선지자의 창조물을 앞세워서 정복하는 편이 마음이 편안했다.
거기에 티렌델과 마르그레타는 소수 엘프를 규합하는 구심점이 될 수도 있었다.
‘엘프 5천만을 학살해 봐야 별 의미는 없으니까…….’
레오볼드는 아공간을 열어 골리앗과 어설트 아머를 몽땅 집어넣었다.
“참 편하군. 그나저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텔레포트 같은 거 없어?”
「얼마든지요.」
그의 앞에 푸른 문이 하나 등장했다.
9번째 행성 녹스에 있었던 워프게이트와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이거면 지구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아?”
「시간축 계산이 상당히 어려워서… 아무래도 두 차원은 시간의 흐름이 다른 모양입니다.」
“베로니카 성녀도 그런 말을 했었지… 하여튼 당장 돌아갈 순 없다는 거군. 알았어.”
레오볼드는 워프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집무실의 풍경이 그를 반겼다.
* * *
최근 엘브랑데의 수도 메데아 근교에 위치한 대신전에선 비밀리에 의식 하나를 치르고 있었다.
바로 엘드그라실의 수호자를 교체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마르그레타 황녀가 사망한 것이 확실시되었고 더는 수호자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 없다는 대의회 원로원의 판단에 따라 새로운 황족이 선출되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황제 이하 대부분의 황족이 대의회가 제시한 달콤한 생활에 푹 빠져 있었고 제대로 된 직위나 업무는 맡지 못하고 있었다.
드리즈덴은 그런 자들에게 대단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냥 있어주기만 하면 돼. 허수아비처럼 말이야.”
그런 면에서 마르그레타는 좋은 허수아비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적당히 수호자로서의 명예에 만족하고 좋은 생활을 즐기면 될 것을 괜히 나섰다가 죽음을 자초하지 않았는가?
그녀가 원한 인간과의 화평은 있을 수 없다는 게 그와 엘프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이제 편히 쉬시오. 당신의 짐은 다른 황족이 짊어질 테니.”
드리즈덴은 자리에 앉아 의식을 지켜보았다.
엘드그라실이 수호자를 지정하면 환한 빛기둥이 내려오게 된다.
하지만 신전의 사제들이 아무리 기도문을 외워도 빛이 내려오지 않았다.
다들 당황해 웅성거렸다.
“뭐야.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
“추기경, 어떻게 된 건가?”
사제들도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드리즈덴은 얼굴을 굳혔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황녀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불가능해. 그 어떤 마법사라도 그 폭발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하지만 누가 도와주었다면 어떨까?
사태의 책임을 바그란에 떠넘기기 위해 바그란 상공에서 기폭시켰는데 그게 뜻밖의 방해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사제들이 처음부터 다시 의식을 거행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엘드그라실은 새로운 수호자를 지목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고 드리즈덴은 벌떡 일어섰다.
‘황녀가 살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계획이 근본적으로 틀어졌음을 의미한다.
티렌델이 탈주한 상황에서 이것까지 알려진다면 그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를 만회할 방법은 하나.
‘황녀를 배신자로 매도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대한 규모의 전쟁이 필요했다.
그것만이 드리즈덴의 위신과 지위를 지켜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