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72
271화 정복의 첫 걸음
타소스 공국의 수도에 날아든 운석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곧장 낙하했다.
얇은 방어막 마법이 펼쳐지긴 했으나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운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일제히 머리를 쥐어뜯었고 시민들은 마치 쥐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인인 판그랄 대공은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챈 극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골리앗을 타고 도망치고 있었다.
성과 시민들을 버려둔 채로 말이다.
얼마 후 거대한 운석이 화염과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대지와 충돌했다.
순간 대공의 성이 증발하며 거인의 주먹에 맞은 듯 지면이 움푹 들어갔다.
그리고 거센 충격파의 폭풍이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쿠르르릉―
막대한 양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고 충격파에 휩쓸린 건물은 대부분 날아갔다.
남은 것은 커다란 크기의 크레이터와 먼지로 인해 가려진 칙칙한 잿빛의 하늘뿐이었다.
판그랄 대공은 충격파에 휩쓸려 굴렀으나 골리앗이 워낙 튼튼한 덕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 으윽…….”
그는 해치를 열고 뛰어내리자마자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평생을 바쳐 가꿔 온 성이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의외로 다른 피해는 크지 않았는데, 애초에 수도 중심지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공에겐 모든 것을 잃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악물린 이에서 신음과 절망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대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원인이 미티어 스트라이크인 것은 분명한데 왜 로제론이 아니라 여기로 날아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꼬장꼬장한 마법사들이 실수했을까?
아니면 중간에 이해하지 못할 어떤 힘이 방해했을까?
그는 모든 것을 레오볼드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었다.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자가 이 사태의 원흉이 되는 쪽이 마음 편했던 것이다.
“반다스 네 이놈…….”
분노로 인해 주먹과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하 기사들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달려오다가 흠칫했다.
저 멀리에서 거대한 비행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이움이나 엘브랑데의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녀석이었다.
판그랄 대공은 그걸 바라보다가 힘없이 웃었다.
“역시, 놈은 로제론에 있지 않았어…….”
로제론에서 목격되었다는 정보 자체가 기만이었던 건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알고 뒤에서 조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티어 스트라이크는 어떻게 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윽고 거대한 비행선이 하강하며 블랙 나이트 두 기가 뛰어내렸다.
기사들이 경계하는 가운데 판그랄 대공은 레오볼드가 탔음직한 골리앗에 눈을 돌렸다.
“이게 네놈이 한 짓이다! 속이 시원한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레오볼드는 대충 대답하며 그의 앞에 섰다.
옆에 선 카밀라는 분노가 채 가시지 않았는지 다짜고짜 대검을 겨누었다.
“내 영지를 짓밟은 주제에 뭐가 그렇게 억울한가? 대공이면 대공답게 굴어라!”
“흐, 흐흐…….”
판그랄 대공은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씹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분노와 증오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지만 간신히 말로 토해낼 수는 있었다.
“너희 두 놈을 그냥 놔두는 게 아니었어… 자이움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쳐야 했는데… 뿌리를 뽑아야 했는데…….”
레오볼드는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아르마의 신호를 받았다.
「바라크 황제가 탑승한 함대가 접근 중입니다. 35척입니다.」
놀랍게도 친위대까지 끌고 직접 행차하는 모양이다.
황제가 도착하면 아마 중재하고자 할 것이므로 대공을 죽이는 것은 물 건너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죽여야 한다.
“카밀라,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말이죠? 좋아요. 당신에게 맡기죠.”
그가 나서자 판그랄 대공이 골리앗 속에서 힘없이 웃었다.
“흐흐, 조금만 시간을 끌면 된다는 말이군.”
“너를 상대로는 1초면 충분하다.”
“무슨 헛소릴…….”
대공이 발악하듯 외치려 했을 때였다.
레오볼드의 대검에서 거대한 에테르 블레이드가 뻗어지더니 그대로 전방을 갈아버렸다.
대폭발이 일어나 골리앗 몇 대를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판그랄 대공은 빛이 장갑판을 뚫고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고는 눈을 감았다.
‘너무 강하군…….’
그리고 끝이었다.
에테르 블레이드는 모든 것을 증발시키고는 스윽 사라졌다.
대공이 탄 골리앗은 제대로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기사들은 에테르 블레이드의 위력에 벌벌 떨었다.
이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도 죽어 줘야겠다.”
기사들이 사망하자 그제야 자이움의 함대가 가까이 다가와 하강을 시도했다.
하이페리온 옆에 있으니 마치 조각배처럼 작아 보였다.
얼마 후 바라크 황제가 친위대를 이끌고 등장했다.
레오볼드는 카밀라에게 눈치를 주곤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
황제는 쑥대밭이 된 공국의 수도를 바라보며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지만 분위기를 보아선 대공까지 사망한 것 같았다.
함대를 출발시키기 전만 해도 멀쩡하던 타소스 공국이 처참하게 변한 것이다.
그 범인은 아마도…….
“반다스 경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어디까지 먹어야 만족할 거요? 얼마나 죽여야 만족하겠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건은 전적으로 갈리스토와 판그랄 대공의 잘못이지 않습니까?”
바라크 황제는 레오볼드가 엘브랑데의 황녀를 죽이고 갈리스토 사신의 팔을 자른 것이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쯤 되면 큰 의미는 없었다.
사태는 이미 벌어졌고 이 모든 것을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절대 맡기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경들에게 참으로 할 말이 많소. 하지만 어떻게 추궁을 해도 빠져나갈 테니 별 소용이 없겠지.”
“그러니… 한 마디만 하겠소. 이쯤에서 그만합시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요. 이 선에서 멈추시오.”
황제의 목소리엔 만약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레오볼드는 고개를 숙이는 편을 택했다.
당장 자이움 제국이 붕괴하면 귀찮아지는 것은 자신과 아르마였기 때문.
아무리 큰 배라도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 항구로 회항하여 피하는 법이다.
“폐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사면장은 낼 필요도 없었다.
그도 황제도 사면장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
둘이 고개를 숙이자 바라크 황제는 혀를 찼다.
이 지시가 미봉책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레오볼드의 눈이 돌아가서 제국을 멸망시키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판그랄 대공과 연계하여 레오볼드를 묻으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심지어 엘브랑데나 신성교국과도 연결고리가 있었고 그게 탄로나면 그냥 넘어갈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목소리에 힘이 빠질 수밖에.
“이 모든 재난을 여기에서 끝냅시다. 갈리스토와 타소스를 경에게 맡기겠소. 제발, 제발… 더 이상 날 실망시키지 마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사태가 종결되었다.
하지만 레오볼드에겐 대륙 통일을 위한 시작일 뿐이었다.
도합 1,500만에 달하는 인구는 뭔가 시도해 볼 만한 규모가 된다.
21세기의 지구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인구지만, 그래도 에테르 혁명을 일으키기엔 큰 부족함이 없었다.
나아가 자이움과 엘브랑데까지 집어삼키면 나머지 국가는 자연스레 복속되게 되어 있다.
레오볼드의 의무 중 하나가 드디어 끝나는 것이다.
그는 이미 대륙 통일을 끝내고 선지자를 찾으러 떠나는 여행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 *
갈리스토 공격함대에서 수도 함락 보고를 해왔다.
팔커스 2세는 그람 후작과 다투다가 테라스에서 떠밀려 생을 마감했고 대부분의 관료와 귀족들이 항복했다.
이로서 레오볼드는 갈리스토와 타소스 공국 두 땅을 얻게 되었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결말이 이렇게 날 줄은 몰랐는지라 심히 당황했다.
―갈리스토는 그렇다 치고 타소스 공국은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명 대공이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발동했는데 왜 로제론이 아니라 타소스의 수도가 박살난 거지?
―황제도 그걸 보고만 있다니 뭔가 이상하다. 둘 사이에 언약이라도 있었던 건가?
―확실한 건 반다스 왕이 너무 강하다는 점이다. 갈리스토와 판그랄 대공은 제국을 제외하곤 대륙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축에 들었다. 별다른 피해도 없이 둘을 제압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우려가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수뇌부를 깔끔하게 제거하고 황제에게서 인정도 받았지만 두 곳을 경영할 책임은 오롯이 반다스 왕에게 있다.
―전쟁 때문에 대부분의 물류가 멈춰버렸는데 어떻게 할 거지? 특히 타소스 공국은 관료들이 상당수 사망하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던데.
―당장 수만 명이 굶게 생겼는데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 의문이다.
―뭐 그런 생각도 없이 전쟁을 일으켰을까?
세간의 관심과 상관없이, 아르마는 이미 물류 정상화를 위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YJH 엔터프라이즈가 나서서 물류를 공급할 겁니다. 대부분의 식량은 부유대륙에 위치한 스마트팜에서 가져올 거고 회사 보유분 수레를 통해 각지로 실어 나르게 됩니다.”
YJH 엔터프라이즈란 유지하의 이름을 딴 회사를 뜻한다.
차마 이름을 그대로 쓸 순 없었기에 이니셜을 내세워 지금까지 아르마가 알뜰하게 키워왔다.
이 회사는 바그란 전체의 물류를 장악한 상태였다.
전쟁으로 기존 상단들이 죄다 도망갔기에 그 틈을 타 확장한 것이다.
상인이란 존재는 전쟁에서도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찾아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레오볼드가 얼마나 정신 나간 행보를 보였는지 알 수 있다.
일부 상인들은 바그란이 승리하자 뒤늦게 돌아와서는 기회를 달라고 문을 두드렸지만 아르마는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1인당 하루 필요 식량을 3천 칼로리로 계산해서 공급 계획을 짜놨습니다. 갈리스토와 타소스의 비행선을 징발해서 개조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홀로그램에 선단의 움직임과 물류망이 뻗어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당장 먹여 살려야 하는 인구가 수만 명이지만 억 단위의 인구를 관리해 온 아르마에게 있어선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부유대륙의 스마트팜에서 몰래 생산하고 있는 식량만 따져도 충분했다.
“그 후로는 재건 계획이 시작됩니다. 기존 바그란의 국가 발전 계획과 맞물려 진행될 예정이므로 스케줄에 큰 차질은 빚어지지 않을 겁니다.”
제대로 된 도로와 철로를 까는 것부터 시작해 비행선의 운항을 큰 폭으로 늘리고 도시화를 완료하면 1단계가 끝난다.
2단계는 본격적인 에테르 혁명의 시작이었다.
에테르를 마법사와 기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까지 공급하기 위한 계획이다.
미리 각 도시에 온갖 파이프를 설치해 두었기에 공급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곧 완성될 에테르 오리진의 출력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에테르 혁명의 강도도 달라질 것이다.
그에 대해 아르마는 기적적인 일이 벌어질 거라 호언장담했다.
“융합로 하나만 해도 지구의 인류가 지금까지 써온 에너지를 거뜬히 충당할 정도예요. 오리진과 동기화를 하면 출력이 대폭 늘어나니까 우주시대까지 에너지가 부족할 일은 없겠죠.”
레오볼드는 듣고 있다가 말했다.
“마레의 플레이그가 어떤 식으로 진화하는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우리가 쓰는 에테르의 총량에 따라 진화할 가능성은 있을까?”
“선지자의 유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마스터의 추측에도 일리가 있네요.”
아르마는 플레이그 퀸과 다를 바 없이 에테르를 다룰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아스테라 판테온의 몇몇 권능은 아직도 분석 중이었고 플레이그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많았다.
그중 하나가 행성 마레에 있는 마족, 그러니까 플레이그의 진화 조건이었다.
루시아가 만든 군단에 처참하게 박살날 정도인 보잘것없는 무리가 어떻게 22세기 인류를 멸망시킬 정도로 진화한 건지 그 과정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만약 우리가 쓰는 에테르의 총량에 따라 진화한다고 하면 어때? 마리의 노트를 참고해서 보면?”
마리란 마르그레타 황녀의 애칭이다.
그냥 부르기엔 이름이 길고 이젠 황녀도 아니기에 스스로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 것이다.
거기엔 그녀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레오볼드밖에 없다는 속사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녀이다 보니 눈높이가 맞는 사람은 레오볼드뿐이었고 덕분에 둘은 몇 번 여가 시간을 같이 보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같이 식사를 하거나 간단한 보드게임을 하고 현 대륙의 정세를 의논하는 정도지만 친밀감을 쌓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평소 쌓아뒀던 지식들을 레오볼드에게 풀어냄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함과 동시에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가능성은 있는지 검증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아스테라의 모든 존재가 평등한 권리를 가지는 게 가능한 일인가? 같은 주제 말이다.
레오볼드는 그에 대해 간단히 답했다.
“전하께선 로제론의 계류장에서 일하는 고블린과 권리를 향유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 그건…….”
엘프 중에서도 고귀하다는 하이엘프와 몬스터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아온 고블린을 예로 들자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평소 평등이란 주제에 관해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자부한 그녀였지만 머리가 하얗게 되어 생각나는 게 없었다.
레오볼드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제 고향에서 지적 생명체란 피부색이 다른 인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등의식이 싹틀 수 있었고 결국 보편적으로 자리 잡았지요. 하지만 아스테라는 좀 다릅니다. 드래곤과 고블린에게 같은 권리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둘이 살인죄를 지었다면 형량도 같아야 하는데 이게 공평할까요? 드래곤의 수명은 천 년에 가깝고 고블린은 30년이 고작입니다.”
참으로 애매한 문제였다.
레오볼드는 밀어붙이지 않고 그녀가 차분히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결과를 떠나서 이런 시간은 마르그레타에게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결과적으로 황녀의 입가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누군가와 얘기한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일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 말을 하고 다니다 보니 아르마와 카밀라가 경계 태세에 들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침대로 잡아끌면 모르는 척하면서 냉큼 들어가겠는데?”
“위험해요.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그때부터 아르마와 카밀라는 황녀를 풀네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르그레타 님의 노트 기록과 대전쟁이 발발하게 된 과정을 비교해서 보면 에테르의 총량에 따라 플레이그도 급격하게 진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같은 기울기의 그래프가 그려졌다.
하지만 인과 관계를 정확히 모르므로 이 그래프로 단정할 순 없었다.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치지. 그냥 우연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마스터, 엘브랑데에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드리즈덴 총통의 명의입니다.”
“총통이? 남은 건 전쟁뿐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군.”
엘브랑데는 드리즈덴이 집권한 이후 완전한 군국주의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가 발표한 30여 개의 칙령은 과거 지구에서 대전쟁을 일으킨 독재자들의 그것과 아주 흡사했다.
주된 내용은 당연히 엘프만이 아스테라의 온당한 지배 종족이며 엘브랑데의 모든 권리는 총통부에 귀속된다는 것이었다.
군사력도 엄청나게 증강하기 시작했는데 벨리알급을 오븐에서 빵 굽듯 찍어내고 있었다.
기존의 벨리알급이 아니라 코어의 과부하를 무릅쓴 개량 버전으로 보이는데 엘프를 태우는 건 아니고 자치령의 인구를 동원할 계획이란다.
“에테르석 폭탄도 빠짐없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과 수인들을 총동원해 방패로 내세우려는 것이다.
위급 시엔 폭탄으로 써먹을 수도 있으니 그 발상이 참 대단하다고 할까.
이렇게 긴장감을 높이다 보니 자이움도 본격적으로 군사력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고 아스테라 전체가 전운에 감싸인 상태였다.
“보나마나 선전포고 아니면 항복 권유겠지.”
레오볼드의 추측은 빗나갔다.
서신의 내용은 그와 단독 회담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장소를 고를 권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 참 대단한 결단이군. 우리 둘이 만나서 할 얘기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텐데.”
“드리즈덴의 성향을 생각하면 마스터에게 설교를 빙자한 조롱을 늘어놓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뭐 대화는 좋은 거지.”
레오볼드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전쟁보다 평화가 훨씬 낫다는 건 진리다.
대화가 평화로 이어질 확률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장소를 내가 골라도 된다고 했지? 여기로 하자고 해.”
서신이 보내졌고 드리즈덴은 심드렁하게 읽다가 흥미로운 얼굴이 되었다.
“회담을 여기서 하자고? 자진해서 적국으로 들어오겠다니 정신이 나갔나?”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자입니다. 거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언하는 자는 티렌델 이후로 엘븐 나이트를 지휘하게 된 엘나리온 탈리산드였다.
그는 티렌델의 제자이자 마르그레타 황녀의 큰 이해자였다.
하지만 둘이 인간 쪽으로 붙어 버리자 큰 배신감을 느끼고 현재는 그 누구보다 증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사로서의 실력은 티렌델에 약간 뒤쳐지지만 안정적인 신격을 주입받을 예정이었으므로 지금에 이르러선 오히려 능가할 것으로 추측되었다.
드리즈덴은 서신을 다시 훑고는 말했다.
“아니, 여기서 우리가 물러나면 웃음거리가 된다. 놈은 벌써 서신을 받은 것을 공표해 버렸어.”
“폭탄을 메데아에 들일 수는 없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놈 입장에선 메데아가 거대한 폭탄이야. 자진해서 들어오는 걸 막으면 내 입장이 우스워져.”
총통에게 질책은 못하겠지만 인간 하나 감당 못하느냐는 의심이 쏟아질 게 뻔했다.
이상한 건 반다스 왕의 자신감이었다.
메데아에 들어와서도 목숨을 보전할 자신이 있는 건가?
“우리의 실낱같은 호의에 기댈 멍청한 놈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힘으로는 완벽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으니 뭔가 더 있다는 소리다.
‘델피나가 말도 없이 도망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드리즈덴은 이번 기회에 그것을 알아내고 또 하나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지금처럼 헛짓만 계속하다가는 세상의 멸망을 앞당긴다는 걸 말이다.
“수락하지. 여기로 오면 우리 엘프가 어떤 종족인지,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짓인지 가르쳐 줘야겠어. 진행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