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73
272화 엘브랑데 방문
원래 양국의 회담을 위해선 조율해야 하는 과정이 참으로 많다.
기본적인 스케줄부터 VIP의 동선과 보안, 그리고 의전에 이르면 담당자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아스테라도 별반 다른 건 아니었다.
특별한 힘이 없다면 무기 제한이나 화살에 대한 대비 등을 단단히 하는 데에서 그치겠지만 마법과 비행선, 골리앗 등 온갖 특별한 것들이 있다 보니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메데아에서 벌어지는 엘브랑데와 인간 왕국 간의 회담이라 더더욱 그랬다.
생각해 보라.
대전쟁 이전 엘브랑데에 인간의 수장이 발을 들여놓은 사례는 한 건뿐이었고 그마저도 비극적으로 끝났다.
인간을 증오하는 수천만의 엘프가 있는 곳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할 줄 안단 말인가.
사정이 이렇다 보니 레오볼드의 공표에 관료들이 머리를 쥐어뜯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합병 작업이 한창인데 전하께서 가시면 큰일이다!
―말려라! 죽어도 말려야 한다! 전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집무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마라!
몇몇 관료가 각오하고 찾아갔으나 재상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말만 듣고 나와야 했다.
호위는 최소한으로 구성할 거라는 충격적인 발언은 덤이다.
“가볍게 다녀올 테니 별일 없을 거요. 걱정 말고 하던 일 계속하시오.”
그들은 아르마 재상이 말려 주길 기대했지만 이미 합의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사절단의 인선은 국왕인 레오볼드와 마르그레타, 그리고 소수의 기사와 시종뿐이었다.
20명도 안 되는 단출한 인원이었는데 지갈레온이 끼려다가 퇴짜를 맞았다.
“네가 거기 가면 진짜 사생결단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이번은 참아.”
“젠장,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그간 지갈레온이 엘브랑데에 입힌 손해는 모르긴 몰라도 작은 도시 하나 정도는 세울 정도일 것이다.
그는 마르그레타를 데려가서 충격을 줄 모양이냐고 물었고 레오볼드는 이렇게 답했다.
“죽었다고 알고 있다면 모를까 배신자로 매도하는 실정인데 크게 놀라진 않겠지.”
“그럼 왜 데려가는 거지?”
“직접 드리즈덴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더군.”
“순순히 돌아가게 놔두진 않을 텐데…….”
“뭐 그럴지도. 그래도 최소한 직접 건드리진 않을 거야. 아마 여론을 동원하겠지.”
현재 엘브랑데는 드리즈덴 총통이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언론이나 여론도 마찬가지라서 도처에 전 황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넘쳐났다.
그들을 동원한다면 총통이 무리수를 썼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상당히 축소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사절단은 새롭게 단장한 하이페리온호를 타고 가겠노라고 엘브랑데 측에 통보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하이페리온을 알아본 엘프 측에서 절대 안 된다고 거부했던 것이다.
대전쟁 당시 수많은 엘프 함대를 홀로 상대한 고귀한 귀부인의 자태를 상상하고 PTSD라도 느낀 것일까?
인간이라면 세대가 교체되었겠지만 엘브랑데엔 드리즈덴을 포함해 대전쟁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노인이 꽤 많았다.
그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저주받을 배를 타고 오겠다고? 절대 안 된다!
―당장 부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메데아에 그 배를 들이는 건 무슨 심보냐?
―반다스 왕은 그 배를 어디서 발굴한 걸까? 분명 우리 쪽의 기록에는 당시 은빛함대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고 되어 있는데…….
하이페리온의 존재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었다.
발가드의 존재가 드러나면 더 충격을 받겠지만 전쟁 당사자만 아는 얘기고 보고를 받은 수뇌부에선 그럴 리 없다며 애써 무시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드리즈덴은 고민에 빠졌다.
“하이페리온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배인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대놓고 싸우자는 건가.”
“어쩌면 자신들이 그람 제국의 후손임을 증명하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원로원 의원의 말에 드리즈덴은 헛웃음을 지었다.
“200년 전에 멸망한 그람 제국을 지금 가져와서 뭐 어쩌자는 건가.”
아무튼 대단히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레오볼드가 하이페리온을 공개한 덕분에 엘브랑데 내에선 격렬한 찬반양론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절대 들여선 안 된다는 주장이 대부분이었지만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배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주로 대전쟁 후의 세대였고 그걸로 인해 엘프 사회에서 여러 말이 오갔다.
―이래서 젊은 놈들은… 그 배가 얼마나 많은 엘프를 학살한 줄 알긴 하는 거냐? 나 때에는 하이페리온 이름을 꺼내지도 못했었는데.
―역사상 가장 거대한 비행선이랍시고 좋아하는 꼴이 참으로 역겹다. 인간이 만든 배가 그렇게 좋으면 엘브랑데를 나가지 그러냐?
그에 반해 200년 전의 케케묵은 역사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측도 있었다.
―그놈의 대전쟁 얘기는 왜 계속 꺼내는지 모르겠다. 졌다면 모를까 우리가 승리한 전쟁인데.
―겨우 배 따위에 과민 반응하지 말고 분석할 때다. 하이페리온을 끌고 온다면 제원은 얼추 공개된다는 뜻이고 우리도 그런 배를 건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총통부에서 에테르 공학에 투자되는 자금을 줄인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들은 초고출력의 골리앗을 배치하고 비행선을 찍어내고 있는데…….
당연하게도 이런 주장은 대전쟁의 원인을 기억하는 엘프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드리즈덴은 그 모든 것을 보고 들으면서 혀를 찼다.
“여론이 분열되었군. 애초에 이걸 노렸다면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어.”
“그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정 가져오고 싶으면 한 척으로 만족하라고 하게. 다른 배를 타면 호위선을 풀어주겠다고 전하고.”
사절단의 총 톤수를 제한하겠다고 하면 레오볼드가 놀라서 철회하지 않을까 하는 계략이 숨어 있었지만 그는 하이페리온으로 충분하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엘브랑데에 들어가는 이상 위험은 무릅쓴다는 뜻인데 그렇게 되면 한 척이라도 큰 상관은 없었던 것이다.
하여튼 이런 우여곡절을 통해 레오볼드의 방문이 성사되었다.
마르그레타는 마리라는 이름으로 레오볼드의 시녀로 분장해 따라가기로 했다.
그녀는 잠시나마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기쁜 기색을 보였지만 곧 울적해했다.
그 고향이 자신을 반기지 않는 듯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녀는 하이페리온호의 시설에 놀라면서도 레오볼드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울적함과 씁쓸함을 털어내 버리기라도 하듯이.
* * *
하이페리온호는 덩치도 그렇지만 속도도 기존의 비행선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륙 횡단일정을 거의 절반 가까이 단축했고 이는 마르그레타를 포함한 사절단 일행에게 상당한 놀라움을 선사했다.
또한 엘브랑데에서 마주 나온 함대도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낑낑거렸다.
속도를 최저로 낮추어도 여느 비행선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메데아로 진입한 하이페리온호는 엘프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대체 저런 건 어떻게 만든 거야? 다른 비행선들이 어린애로 보일 정도로 크다니.”
“인간이 만든 것이긴 해도 위엄차긴 하군.”
“저 배가 우리 선조들을 죽였단 말이지…….”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가 오갔고 레오볼드가 비행선에서 내리자 관심이 그야말로 폭주했다.
“인간치고는 키가 상당히 큰데?”
“우락부락하니 못생겼어.”
“그래도 근육이 상당히 붙어 있고 잘 단련된 것처럼 보여.”
“근데 머리 뒤의 저 마법은 뭐지?”
엘프들은 그의 헤일로를 장식용 마법으로 착각했다.
그게 신격을 가진 증거임을 알아본 건 드리즈덴을 포함한 극소수뿐이었다.
“신격을 가졌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부유대륙에서 얻은 건가.”
“보나마나 이름도 모르는 잡신이겠지요.”
“광역 축복을 뿌리고 다닐 정도니 평범한 신격은 아니야.”
하여튼 메데아에 두 번째로 발을 들인 인간의 왕은 엘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절단이 엘븐 나이트의 호위를 받으며 대로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엘프들이 나와 그들을 구경했다.
“인간이다…….”
“적진에 홀로 들어오다니 용기가 대단한데.”
“혼자 들어온 건 아니잖아? 호위도 있고…….”
“저 인원으로 여기에서 뭘 하게? 우리가 인간 왕국에 간다고 생각해 보면 쉽지.”
“그런 입장치곤 전혀 위축된 것 같지가 않은걸…….”
“살아 나갈 자신이 있는 거겠지.”
“여긴 메데아라고. 신조차 살아 나가는 건 불가능해.”
증오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리 심하지 않은 건 홀로 적진에 왔다는 점을 엘프들이 높이 샀기 때문이다.
엘브랑데의 주요 인사가 인간의 왕국에 갈 수 있느냐를 생각해 본다면 레오볼드의 행보는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드리즈덴은 엘프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호감이 높아지는 걸 느끼고는 혀를 찼다.
그래 봐야 몇 안 되는 엘프들의 변화일 뿐인데 무리수를 뒀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미약한 것에 목숨을 걸었나? 한심한 작자군.”
“회담 결과에 따라 미약한 변화가 거대한 파도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을 걸세. 놈이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멀쩡하게는 못 나가.”
“설마, 반다스 왕을 붙잡으시려는 겁니까?”
그런 일을 저질렀다간 드리즈덴을 지지하는 엘프들도 등을 돌릴 것이다.
그들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레오볼드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지만 하여튼 그를 붙잡는 건 좋은 수가 아니었다.
드리즈덴은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내가 굳이 저지를 필요는 없지. 하여튼 시민들이 저놈의 이름을 외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 빨리 데려오게.”
아닌 게 아니라 대로변에 몰려든 엘프들 가운데에서 그의 이름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메데아에 온 용기 있는 인간의 왕을 위한 자그마한 찬사일까?
확실한 것은 그에 대해 익숙해질수록 인간에 대한 혐오감도 한 꺼풀 정도는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엘프의 인간에 대한 혐오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엘드그라실의 가호 아래에서 태어나 평생을 엘프만의 사회에서 살다 보니 인간이라는 존재를 멀게 느끼고 편파적인 소문만 접하다 보니 혐오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레오볼드의 존재는 그걸 조금이나마 깨고 있었다.
얼마 후 엘드그라실 바로 아래에 위치한 전망 좋은 회의실에서 호위를 뒤로하고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한 명은 300년 이상을 산 엘프이자 엘브랑데의 전권을 쥔 총통이었고 다른 한 명은 최근 몇 개 국가를 병합해 세력을 불리고 있는 인간의 왕이었다.
둘은 서로를 보자마자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 사이엔 많은 일들이 있었지. 하지만 과거는 잠시 묻어두고 기탄없이 미래에 대해 얘기해 보도록 합시다.”
“바라는 바입니다.”
시녀가 차를 나르고 퇴장하자마자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되었다.
먼저 포문을 연 쪽은 드리즈덴이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옛날을 좀 들춰 보지요. 공은 대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알고 있소?”
“인간의 발전하고자 하는 욕구를 엘프가 가로막아서겠지요.”
에테르 공학으로 대변되는 발전의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대전쟁의 원인에는 많은 것들이 붙겠지만 하나만 꼽자면 이렇다는 얘기다.
“틀렸소.”
드리즈덴은 상체를 기울였다.
“그 말은 틀렸소. 대전쟁은 세상의 멸망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우리 엘프가 나선 결과물이요. 왜인지 아시오?”
“에테르 공학이 일정 이상 발전하게 되면 마족이 침범할지도 모른다는 겁니까?”
그는 레오볼드가 정확하게 집어내자 상당히 놀랐다.
보나마나 엉뚱한 것을 주워 섬길 줄 알았는데.
“…맞소. 공은 잘 모르겠지만 저 하늘 너머 어딘가에 마족이 있소. 지금은 광산에서나 나타나는 존재지만, 예전에는 달랐소. 200년 전에는 정말이지 심심하면 게이트가 열렸었지. 놈들은 지능도 없고 파괴 욕구만 살아 있는 몬스터나 다름없소.”
글쎄, 플레이그가 지능이 없다고 보기는 좀 어려웠다.
진화 전의 작은 개체들이라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레오볼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고 그게 드리즈덴의 설교 욕구를 부추겼다.
“이쯤에서 좋은 정보를 하나 주도록 하지. 놈들의 출현 빈도는 아스테라 전체가 쓰는 에테르 총량과 정확히 비례하오. 똑똑한 사람이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우리가 에테르 공학을 발전시킬수록 마족의 출현도 잦아진다는 겁니까?”
“훌륭하군. 과거 인간들은 이걸 이해하지 못했소. 그래서 드래곤들을 부추겨 전쟁에 나섰지. 참으로 어리석은 종족이 아니오?”
“그게 무섭습니까?”
순간 드리즈덴은 허탈함에 실실 웃게 되었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멍청이였던 건가?
“대전쟁 이전의 마족을 겪어 보지 못한 자들은 늘 그들을 폄하하지. 하지만 이걸 명심하시오. 지금 공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 강대하던 악마들과 싸워왔소. 200년 전이 어떤 세상인지 알기나 하는 거요?”
“잘 알지요. 에테르 공학이 발달해 하이페리온급의 비행선이 태연하게 하늘을 떠다니고 골렘이 인간을 돕는 세상. 누구나 마법을 쓸 수 있었으며 하늘 저 너머에 대한 탐구심이 가득하던 좋은 시절 아닙니까?”
“…자만하고 있군.”
“뭘 말입니까?”
“공이 만들었다는 에테르 기관과 블랙 나이트 정도로 자만하지 마시오. 우리 엘프들은 200년도 더 전에 그보다 훨씬 대단한 걸 만들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지. 왜인지 아시오? 아스테라의 평화와 미래를 위해서요!”
이제 드리즈덴은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통하나 했더니 대전쟁 이전의 인간들보다 꽉 막혔군. 땅딸보들의 꾐이 그리도 달콤했소? 좋은 시절이 뭐 어떻다고? 부끄러운 줄 아시오. 인간들은, 아인종들은 우리 엘프의 혜안 덕분에 생을 연명해온 종족에 불과하오.”
“당시 악마들은 지금 공이 만드는 블랙 나이트를 어린애 취급할 정도로 강했소. 아스테라의 평화를 위해 그걸 막아온 게 바로 우리 종족이란 말이오.”
조금 건드리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과연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 종족임에 틀림없었다.
그 자만심이란 바로 자신들만이 아스테라를 생각하며 미래를 이끌어나갈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레오볼드가 말없이 차를 홀짝이자 드리즈덴은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열변을 토해냈다.
“그것도 모른 채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소. 공이 말하는 에테르 공학의 발전이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것임을 왜 모른단 말이오?”
“모르는 건 잘못된 게 아니오. 하지만 알면서도 아집을 부린다면 그건 멍청한 것이지. 여러 말 않겠소. 당장 에테르 기관의 개발을 중지하고 블랙 나이트의 생산도 끝내시오. 우리의 검증을 거친다면 평화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소.”
레오볼드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말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둘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 같군요.”
“그렇게 말했는데도 모르겠다 이거요? 아니면 아스테라에 닥쳐올 위험을 무시하는 거요?”
“엘프들에겐 마족이 위험 요소일지도 모르겠으나 나한테는 아닙니다.”
“이젠 정도를 넘어서는 자만심까지… 이계에서 왔다는 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소.”
“그 이계가 어떤 곳인지 압니까?”
“모르오.”
드리즈덴은 사납게 고개를 저었다.
“거기가 어떤 곳이든 당신이 아스테라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소. 부디 그걸 깨닫고 내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하지 마시오.”
“이미 극단적인 방법을 두 번이나 쓰지 않았습니까? 에테르폭탄을 동원하고 과거로 엘프를 보내 나를 죽이려 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입니까?”
“…알고 있었군. 그 신격이 알려준 건가?”
“덕분에 티렌델을 얻었죠. 총통께선 뭘 좀 얻었습니까?”
마치 델피나가 도망갔다는 걸 알고 있는 듯한 발언이었다.
노쇠한 엘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티렌델은 쓸 만한 녀석이었지. 하지만 우리가 진심을 다하게 되면 아무것도 아니오. 그만한 자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이오.”
“그 진심이란 걸 보고 싶군요.”
“미리 경고하겠소. 나중에 후회할 말을 하지 마시오.”
“안타깝게도 나란 인간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좋소. 엘프가 어떤 종족인지, 지금까지 아스테라를 위해 어떻게 해왔는지 알려드리지.”
“참, 부유대륙을 떨어트릴 때엔 미리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거기에 시설이 좀 있거든요.”
이제 드리즈덴은 분노로 인해 손을 떨기 시작했다.
“그걸 알면서도… 이리도 오만방자한 거요?”
“진짜 오만방자한 것이 누구인지 조만간 깨닫게 되겠죠. 참, 한 분이 할 말이 있다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레오볼드가 존칭을 쓸 정도라면 한 명밖에 없었다.
“이젠 황녀도 아닌 평범한 엘프겠군. 좋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봅시다.”
잠시 후 마르그레타가 들어와 후드를 벗자 드리즈덴이 씨익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황녀 전하.”
* * *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죠? 날 죽이려고 해놓고선…….”
떨리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과 눈에서도 분노가 묻어났다.
하지만 드리즈덴은 연륜을 자랑이라도 하듯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현 엘브랑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간과 손을 잡고 뒤엎으려 한 배신자가 아닙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내게 무슨 힘이 있어서 그게 가능하다는 거죠? 안 그래도 대부분의 권력은 원로원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작은 권력이나마 티렌델 같은 추종자가 있었죠. 밖에서 인간의 협력을 얻으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신 게 아닙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발상입니다마는.”
“사람을 마음대로 매도하지 마세요. 나와 내 가족을 죽이려 한 건 바로 당신이잖아요!”
“황녀님을 제가 왜 시해하려 들겠습니까?”
드리즈덴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고 그게 마르그레타를 분노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레오볼드가 어깨를 토닥이며 앉히자 드리즈덴의 눈이 빛났다.
“인간과 협력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붙어먹기로 한 모양이군요. 과연 폐황족답습니다.”
“어디서 감히!”
도를 넘는 모욕에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드리즈덴에게 다가갔다.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려는 모양이었지만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호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 하시죠. 황녀 전하… 아니, 이제는 마르그레타라고 불러드릴까요?”
그녀는 손목을 잡힌 채 울먹거리듯 외쳤다.
“엘나리온 당신이라면 알고 있지 않나요? 말해 주세요! 드리즈덴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선동했는지!”
“배신자에게 할 말은 없습니다.”
“뭐, 뭐라고요?”
마르그레타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설마 자신과 티렌델의 가장 큰 이해자이자 추종자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분노한 눈으로 씹어뱉듯 말했다.
“엘프를 배신하고 인간에게 붙은 당신에게 할 말은 없다는 얘깁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같이 엘브랑데를 개혁하자고 했잖아요!”
“더러운 탕녀 주제에 더 이상 엘프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란 말이다.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여줄까?”
급기야 그의 손이 마르그레타의 목을 향했다.
당장 죽여 버리겠다는 험악한 분위기에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때 묵직한 한 마디가 화살처럼 날아왔다.
“손가락 끝이라도 댔다간 넌 죽는다.”
“호오.”
재미있는 것을 보는 듯한 드리즈덴의 시선을 받은 엘나리온이 피식 웃었다.
“여기가 메데아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바그란의 국왕 양반.”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궁금하면 건드려 봐라. 최후의 숨결을 내뱉을 때까지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
엘나리온은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드리즈덴은 그를 타이르듯 말했다.
“폐황족에 대한 예의치고는 거칠군. 흥분을 가라앉히게.”
“…예, 총통 각하.”
손이 떨어지자 마르그레타는 거의 울듯이 달려와 레오볼드의 품에 안겼다.
“평행선임을 확인했으니 여기에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레오볼드가 회담 종료를 선언하자 드리즈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이대로 얌전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소?”
“가능하면 학살극은 벌이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당신들이 그걸 원하면 어쩔 수 없죠. 자, 나를 막아 보십시오.”
회의실의 분위기가 당겨진 시위처럼 팽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