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89
288화 각자의 정의
엘븐 나이트가 탑승한 100여 대의 골리앗이 녹아내렸을 때, 마운틴포지 내부에 위치한 전쟁사령부는 환호의 물결로 뒤덮였다.
드디어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그동안 굉장한 인내심을 발휘해 왔다.
전 국민에 소개령을 내리고 마운틴포지를 요새화하는 것은 어지간한 인내와 결단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오볼드의 조언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엘프의 성향상 주력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걸 정확하게 간파했다.
현장에서라면 모를까 수천 km는 떨어진 곳에서 그걸 맞히니 신기한 일이었다.
드워프들 사이에선 하도 엘프에게 많이 데인 사람이라 그럴 법하다는 논리를 폈다.
“워낙 많이 부딪쳤잖아. 그만큼 잘 안다는 거지.”
“그래도 몇 년에 불과한데… 우린 수백 년 동안 당해왔는데도 모르겠던데?”
“대충 그렇다 치고 넘어가자고.”
드워프들은 계산이나 공학적인 분야는 끝까지 따지지만 그 외에는 적당히 넘어가는 경향이 강했다.
하여튼 그들은 한 번의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레오볼드는 엘프들이 보다 과감하고 잔혹하게 나설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한 방 먹었다면 10배 이상 보복하려는 것이 그들의 심리다.
레오볼드 또한 비슷한 성향을 가졌기에 그들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자네가 가줘야겠는데…….”
시선이 닿은 곳에는 티렌델이 서 있었다.
발가드가 주인을 따라 가버린 뒤 그가 전투에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지갈레온은 바그란의 수호룡인 만큼 어지간한 상황에선 내세울 수가 없었고 그랜든과 카티나, 엘윈은 내부 치안과 훈련을 맡았다.
카밀라는 강하긴 하지만 왕비가 될 사람을 혼자 밖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티렌델이 시선을 느끼고 무릎을 꿇었다.
“하명하십시오, 레오볼드 님.”
실명 수준이었던 한쪽 눈이 치료된 후 레오볼드에 대한 그의 태도는 거의 신앙을 바치는 신도의 그것이었다.
진짜 엘프의 신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레오볼드만큼 숭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드워프들을 좀 도와줘야겠어. 엘프 친구들이 잔혹하게 나올 것 같아서 말이야.”
“단단한 암반과 강철의 문이 드워프들을 지켜주지 않겠습니까?”
“골리앗 폭탄으로 그 문을 뚫어버릴 거야. 엘프도 아니고 자치령에서 강제로 소집한 인간 기사들을 동원할 예정이지.”
“골리앗 폭탄이라…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고통 없이 보내주는 정도입니다만.”
“평범한 골리앗을 쓴다면 그렇겠지. 자네에게 이걸 주겠네. 아르마, 보여줘.”
아르마가 패널을 조작하더니 집무실 한쪽 벽에 화면을 띄웠다.
직할도시 어딘가에 있는 격납고에 골리앗 한 기가 구속되어 있었다.
그건 블랙나이트와도 다른 완전한 신형이었다.
티렌델은 홀린 듯 화면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 골리앗은…….”
“내 옥좌기를 만들면서 파생된 여러 기술을 적용한 기종이야. 출력은 300E 수준에서 안정되어 있지만 고통을 감수한다면 500E까지 올릴 수 있지.”
그 외의 스펙이 줄줄이 나열되었다.
개량형 벨리알급은 물론이고 블랙 나이트조차 아득히 능가하는 엄청난 성능이었다.
티렌델은 딱 하나를 물었다.
“저걸 타면 발가드를 이길 수 있습니까?”
은근히 라이벌 의식이 생기는 모양이다.
하긴 발가드는 그동안 레오볼드와 바그란의 검으로서 대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가 사라졌는데 자신은 그의 역할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으니 조바심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레오볼드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자네가 제 2의 발가드가 되길 바라지 않아. 그나저나 괜찮겠나? 드워프를 도와 엘프를 치게 되는데.”
“상관없습니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지금까지는 은둔에 가까웠기에 엘프들도 자네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 하지만 이번에 참전한다면 양상이 완전히 달라져. 엘브랑데의 공적이 될지도 몰라.”
그는 씨익 웃었다.
“레오볼드 님께서 공적 1호, 황녀께선 공적 2호이시니 저는 3호가 되겠군요. 영광입니다.”
“각오는 된 모양이군. 이제 자네가 고향으로 가려면 엘드그라실이 불타오르고 제국이 무조건 항복을 한 이후일 거야.”
“그때가 되면 제게 자치령 총독을 맡겨주십시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좋아. 저게 자네를 데려다 줄 거야.”
새로 화면에 뜬 것은 작고 날렵한 비행선이었다.
“고속비행선 바라쿠다… 운송은 완전히 포기하고 속도만 극한으로 올린 기종이지. 저거면 이미르 공화국까지 7시간이면 갈 수 있을걸.”
“이미르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들었는데 엄청난 속도로군요…….”
“엘프들이 그리 오래 기다릴 것 같진 않으니까 서둘러줘야겠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티렌델은 상체를 숙인 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레오볼드는 시비리 위성을 통해 전송되는 마운틴포지 앞의 전경을 지켜봤다.
그와 드워프가 아직 진짜 힘을 발휘하지 않았듯, 엘프 또한 마찬가지였다.
엘브랑데의 잠재력은 겨우 이 정도가 아니었고 앞으로 전장은 더욱 격렬해질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치명상을 입히면 곤란하다는 점이었다.
‘호되게 당하고 움츠러들면 로드맵을 다시 짜야 될 수도 있어.’
그로선 엘프들이 앞뒤 모르고 날뛰는 쪽이 편했다.
물자는 드워프들이 달라는 대로 주겠지만 병력은 티렌델이 끝이었다.
‘그라면 어지간한 신격이 나타나도 대처할 수 있겠지.’
신형 골리앗의 출력을 500E까지 올리면 그 발가드도 누를 정도가 된다.
사실상 변수가 없어지는 셈인데 알테마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그렇다.
만약 이번 전쟁에 그녀가 참전한다면 양상은 상당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일 크게 키우지 말자고. 나는 드워프를 받아들이는 선이면 만족하니까.’
이번 전쟁을 방관하다시피 한 이유가 그것이다.
드워프들은 그 천성적인 기질 때문에 각종 공학을 전수받는데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그들이 있다면 아스테라의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드워프 노예를 원하는 알테마가 얌전히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레오볼드는 창밖 너머로 바라쿠다급 고속비행선이 항해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프레임부터 새로 설계하고 고출력 에테르 추진기를 탑재해서인지 다른 비행선들이 거북이처럼 보일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지구에서 선보였던 각종 우주선들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런 우주선들을 다시 쓸 일은 없어야 하는데…….”
불안한 예감은 항상 맞아떨어진다고 하던가?
그는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왠지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드리즈덴 총통의 잔인한 명령은 신속하게 원정대에 하달되었다.
원정대 사령관 아론드는 처음에 그 명령서를 보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건 아예 죽이라는 말 아닌가…….”
함량 미달 자치령 기사라고 해도 엄연한 동료였다.
여태까지 같이 고생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령관으로서의 책임을 벗어던지고 항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양심과 책임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다가 무언가를 결심하고는 부관들을 불렀다.
“지원자를 받지. 유족에겐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하겠네.”
죽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 태연히 골리앗에 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치령 기사들은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대부분 타지 않으려 했다.
몇 안 되는 기사들만 체념한 후 골리앗에 오르며 한마디 했다.
“아직도 엘프들을 모르는군. 안 타면 강제로 태울 거야.”
“나중에는 아마 해치를 봉인해 버릴걸? 두고 보라고.”
잔인한 예상은 사실로 드러났다.
보고를 받은 드리즈덴 총통은 생각보다 낮은 지원율에 실망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줘야겠나? 엘븐 나이트를 동원해서 즉각 의용군을 무장해제 시키게. 그리고 하나씩 골리앗에 집어넣고 해치를 봉인해. 참, 종군마법사가 신관 마법을 설치하면서 협박하는 것도 빼먹으면 안 되네. 당신이 하지 않으면 자치령에 있을 가족이 죽는다고 말이야.”
참으로 잔혹한 명령이었다.
아론드 사령관은 총통부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으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숨겨둔 것들을 지금 써서는 안 된다는 건가.’
그것은 향후 바그란과의 일전에서 성대하게 선보여질 것이다.
하여튼 총통의 명령은 그대로 이행되었다.
자치령 의용군 전원에 하차 명령이 내려지더니 엘븐 나이트들이 사방을 둘러쌌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시끄럽고 얌전히 통제에 따라라. 본국의 명령이다.”
골리앗이 자치령 기사들을 해치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으아악!”
“제발… 집에 아내와 자식들이 있단 말입니다…….”
“누구는 없나?”
“그 가족을 위해서 희생 좀 하라고.”
엘프들은 잔인하게 웃으며 마법진을 설치하고 해치를 완전히 봉인해 버렸다.
마운틴포지 정찰구에서 망원경으로 그 꼴을 보고 있던 드워프들이 경악했다.
“저놈들 인간을 강제로 골리앗에 집어넣고 있어!”
“기어코 폭탄으로 써먹겠다 이거군. 질릴 정도로 잔인한 놈들이야…….”
“대전쟁 당시에도 저랬을까?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족속들이야.”
“인간들이 참으로 불쌍하구만…….”
자치령 기사들은 비록 적이지만 반강제로 동원되었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적대감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문으로 돌격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인간과 골리앗이 폭탄이 되면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불토른은 아르마가 챙겨준 선물을 꺼냈다.
“이거면 제 2의 방어벽을 세울 수 있을 거야.”
“그게 뭔가?”
“놀라지 말게. 리빙메탈 분해기라고 하네. 그러니까 리빙메탈을 재구성할 수 있는 거지.”
“반다스 왕처럼 말인가?”
“그의 능력을 약간 부여한 일종의 아티팩트라더군. 엘프들보다 더 정교하고 거대하게 리빙메탈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데.”
“솔직히 못 믿겠어.”
“신도 아니고 그게 되나?”
“반다스 왕은 신이나 다름없다는 소문도 못 들었나? 머리 뒤에 헤일로까지 있다고.”
“헤일로 있다고 다 신인가?”
“그 동부 촌구석에 있던 바그란을 발전시키고 엘브랑데와 한판 뜨려 하고 있는데 어지간한 신보다 낫지, 안 그래?”
“하긴 신형 비행선하고 에테르 기차 뽑아내는 거 보면 그 친구 완전히 미쳤다니까.”
“어허, 그 친구가 아니라 반다스 왕이라고 부르라고.”
드워프들이 쑥덕거리거나 말거나 불토른은 분해기를 끼고 즉석에서 리빙메탈을 재구성했다.
철컥철컥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리빙메탈 주괴가 정교한 방패 형상을 갖추어 갔다.
“오오오!”
“정말 대단하군…….”
“확실히 우리 드워프와는 다르다니까.”
불토른은 분해기를 낀 채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이걸 준 게 아니겠나? 일단 이걸로 버텨보자고. 리빙메탈 문이면 귀쟁이 놈들도 그리 쉽게 깰 수는 없을 거야.”
그러나 우르딘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드워프들이 신이 나서 정문을 향해 달려 나가자 그는 불토른을 붙잡고 말했다.
“우리가 이대로 버티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
“그럼 항복하자고?”
“잘 생각해보게. 우리의 저항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엘프들의 공세도 거세질 거야.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 자네도 알잖나.”
“그러니 우리도 쉽게 포기할 순 없지!”
“반다스 왕도 그렇게 생각할까?”
“응?”
“우리가 버틸수록 그의 부담도 늘어난다네. 지금 이 순간에도 비행선이 뭘 나르고 있잖나. 그거 절대 보통 일이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
솔직히 말한다면 바그란 외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 나라는 어찌된 일인지 에테르석을 물 쓰듯 하고 있었고 이는 아스테라를 지배하는 두 제국에게조차 버거운 일이었다.
“정말 대단하고 고마운 일이지만 어차피 질 거면 빨리 걷어치우고 후퇴하는 게 낫다는 거지. 스카디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네.”
“그 애가…….”
이건 깊이 생각해 볼 문제였다.
젊은 드워프라면 그저 엘프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면서 한번 붙어보자는 식으로 열을 올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우르딘과 불토른은 무쇠평의회를 이끌어가는 주축으로서 보다 신중하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마운틴포지 내부에서도 이 문제로 약간의 언쟁이 오가는 실정이었다.
―어차피 질 전쟁인데 끝까지 항전하는 게 옳은가?
―대충 졌다 치고 바그란으로 이주하는 게 더 효율적이야. 버텨봐야 피해가 늘어날 뿐이라고.
―그렇다고 귀쟁이 놈들에게 항복할 수는 없지!
―누가 항복하자고 했나? 바그란으로 후퇴해서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발전하면 돼. 반다스 왕이 바그란 발전시킨 거 못 봤나? 우리가 지금까지 이룬 것보다 더 빠르게 발전할 수도 있다고.
―그렇다고 천혜의 요새도시인 마운틴포지를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모든 결정권과 책임은 무쇠평의회, 그중에서도 나이가 든 우르딘과 불토른에게 쏠렸다.
둘은 자신들의 결정이 주변 왕국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했다.
“대전쟁이 끝난 후 200년 동안 아스테라는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해 왔지. 우리도 자이움과 엘브랑데 사이에서 저울질을 했고… 이제 그게 끝날 때가 온 모양이야.”
“우리가 바그란에 붙으면 자이움과도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거네. 다른 왕국들에도 눈과 귀가 있을 테니 고민을 시작할 거고.”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과연 바그란에 그 정도의 힘이 있을지는 생각해 볼 문제였다.
레오볼드가 쌓아올린 여러 업적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최종적인 목적이 대륙 통일이라면 다소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불토른은 잘라 말했다.
“옆에서 그 친구를 지켜봐 온 날 믿게. 선택의 여지는 없네. 우리는 바그란과 함께해야 돼.”
“나도 그건 알아. 문제는 버티느냐 후퇴하느냐일세. 젊은 녀석들이 날뛴다고 우리까지 경거망동할 필요는 없잖나?”
“그 결정은…….”
불토른이 뭔가 말을 하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바그란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비행선 한 척을 보냈으니 잘 쓰라는 것이었다.
우르딘은 가볍게 투덜거렸다.
“뭔가 중요한 걸 실은 모양인데 몇 시간 전에 출발했다지 뭔가. 도착할 때쯤엔 전쟁이 끝나 있겠어.”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전쟁사령부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엘브랑데 원정군 진형 재편성 중.
―자치령 의용군 소속 골리앗이 전열로 나서고 있음. 아무런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음.
불토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차피 폭발시킬 거니 무기가 필요 없겠지! 그놈들 기어코 인간과 골리앗을 폭탄으로 쓸 작정이군!”
“리빙메탈로 만든 문이 얼마나 버틸지 걱정이군. 일단 가보세.”
둘은 정찰구에 도착한 후 망원경으로 엘브랑데군의 진형을 살폈다.
선두에 나서는 골리앗들은 정말이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뒤에서 뭐라 소리치자 그제야 움직이는 척하는데 참으로 불쌍할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귀쟁이들, 기어코 인간을 문에 처박을 작정이군. 무슨 방법이 없겠나?”
“있을 리가 없지. 발사기를 동원해 봐야 저 친구들 명줄을 짧게 할 뿐 아닌가.”
“저놈들 뒤에서 환호하는 것 좀 보게. 완전히 미쳤어.”
둘은 엘프의 잔혹성에 새삼 진저리를 쳤다.
가증스러운 건 그런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정의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엘프들은 자신들이 아스테라를 지킨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게 모든 갈등의 근원이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한들 그들이 저지르는 모든 행패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닐 텐데도.
어쨌든 인간 폭탄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드워프들은 강압에 못 이겨 마운틴포지로 힘겹게 다가오는 골리앗들을 보며 갈등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 * *
“으헉!”
짧은 비명이 밀실에서 새어 나왔다.
그것은 섀도우 엘프가 알테마에게 에테르 하트를 헌납하면서 내지르는 단말마였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아인종의 에테르 하트는 거의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엘프라면, 그리고 에테르 하트를 부숴서 자신의 것으로 삼는데 익숙한 알테마라면 최대의 효율이 만들어진다.
발가드는 밖에서 비명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골드 드래곤이 흑마술을 하고 있다니, 신도들이 알면 놀라 자빠지겠군.’
그녀의 탐욕이 무한한 것은 알았지만 한 종족을 절멸의 위기에 몰아넣을 줄은 몰랐다.
밀실로 들어간 섀도우 엘프는 벌써 수백 명이 넘었고 그들의 시체는 꼭두각시로 변한 신성기사단에 의해 처리되었다.
섀도우 엘프의 수장인 델피나는 챔피언이 되어 알테마에게 남은 인생을 저당 잡혔다.
‘덕분에 나의 주인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현 시점에서 알테마의 힘은 마지막으로 그가 본 레오볼드에 크게 뒤쳐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만약 그녀의 육체가 완성된다면?
그때도 레오볼드는 여유롭게 대응할 수 있을까?
물론 알테마에겐 세력이 부족하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드래곤의 영혼까지 모으고 있으니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두렵군…….’
한편으로는 레오볼드가 이걸 모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거대한 우주선을 가지고 아스테라 곳곳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고 있었다.
그런 자가 알테마의 탐욕과 목적을 모를까?
만약 안다면 무슨 이유로 저지하지 않는 것일까?
‘선지자 라사의 소환. 역시 목적은 그것이겠지…….’
둘의 표면적인 목적은 창조신 라사를 만나는 것이므로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오볼드가 단지 만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알테마는 그에게 소원을 빌려 하고 있었다.
창조신 라사는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도 참 의문스러웠다.
그때 밀실 안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발가드는 기사 한 명이 축 늘어진 섀도우 엘프 시체를 치우는 것을 외면하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소.”
“흐음… 인상이 안 좋구나. 기분이라도 전환할 겸 바람이라도 쐬고 오거라.”
“설마 이미르 공화국에 가라는 거요?”
“바로 맞췄다. 내게도 드워프 몇 마리는 필요하거든. 엘프나 레오볼드 그놈만 차지하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니.”
“양측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내가 가봐야… 데리고 올 수단도 마땅치 않소.”
“이리 오너라. 텔레포트 마법진을 새겨줄 터이니.”
그녀가 나긋나긋하게 손짓했고 발가드는 어쩔 수 없이 시술을 받게 되었다.
“오래 유지하긴 힘들겠지만 몇 명 정도는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핵심 인물이 좋겠지.”
“…왕이 이걸 모르진 않을 거요.”
“놈이라고 해서 모든 걸 알지는 못하겠지. 네가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알테마의 눈이 가늘게 웃었고 발가드는 시선을 외면했다.
그녀는 발가드를 불러 옆에 앉혔다.
“미안하구나. 네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겠지. 하지만 이 또한 나름의 정의이니라.”
“내가 바그란에서 본 것이 있소.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어린아이들이 마음 놓고 거리에서 뛰어노는 모습이었지. 정의의 기준은 각자마다 다르겠으나 나는 그런 것이라 생각하오.”
“나 또한 이 몸의 주인을 통해 그의 과거를 보았다. 원래 이름이 유지하였다지? 많은 사람이 그를 알고 있더구나.”
“한때 그쪽 세상을 지배했다고 했소. 이름을 모르면 이상한 일이겠지.”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대부분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이유를 너는 알겠느냐?”
“증오? 증오라고?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왔다고 했는데…….”
알테마는 작게 웃었다.
“자세하게 듣지는 못한 모양이구나. 나 또한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확실한 것 몇 가지는 들었지. 그가 자신의 세상을 버렸다는 것을 말이야. 그러니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토록 증오로 가득 찬 게 아니겠느냐?”
“포기한 게 아니라 버렸다고……?”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모종의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는 한 번 자신의 세상을 버린 자다. 아스테라를 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너는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
그는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알테마의 긴 손가락이 말수를 잃어버린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들어라, 나의 챔피언이여. 아스테라에선 내가 정의다. 그것을 항시 잊지 말도록 해라.”
희한한 일이었다.
레오볼드는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을 정의라고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이게 효율적이라는 말은 입버릇처럼 해도 자신을 정의로 포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알테마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행동은 전혀 정의롭지 못함에도 말이다.
발가드는 그녀를 따르는 것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