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90
289화 터닝 포인트
폭탄이 된 인간과 골리앗이 마운틴포지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드워프들은 방어포대를 가동해야 하나로 한참을 고민했다.
쏘면 저들은 죽는다.
골리앗의 코어는 과부하가 걸려 있었고 신관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약간의 충격만 주더라도 곧바로 폭발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에테르폭탄 발사기를 몇 번만 가동하면 저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가 아닌 인간이라는 게 드워프들을 망설이게 했다.
최종 명령권자인 우르딘마저도 함부로 지시를 내릴 수 없었고 보다 못한 드워프들이 결정을 촉구했다.
“의장! 조금만 더 접근하면 정문도 폭발에 휘말리게 될 거요!”
“인간들에게 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저기에 탄 이상 죽은 목숨입니다! 쏩시다!”
“젠장, 뛰기 시작한다!”
“분명히 뒤에서 협박하고 있을 거야!”
이젠 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우르딘은 레오볼드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가급적 인간들을 죽이지 않으려 했지만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비틀비틀 뛰고 있는 골리앗들을 쳐다보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쩔 수 없군. 전 포대, 포격…….”
지시가 떨어지기 전 하늘에서 굉음이 터졌다.
다들 기겁하며 귀를 틀어막았고 청명한 하늘에 날씬한 비행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언제 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저, 저게 뭐냐? 비행선?”
“비행선치고는 좀 작고 날씬하지 않습니까?”
“특유의 나무 무늬도 없어 보이고…….”
“선체번호 6025! 바그란에서 몇 시간 전에 출발했다는 고속비행선이랍니다!”
우르딘과 불토른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바그란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그게 왜 지금 와?”
“뭘 싣고 왔지? 빨리 보고해라!”
“골리앗 한 기라고 쓰여 있는데 잘은 모르겠습니다!”
이 위급한 상황에 골리앗 한 기가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둘이 비행선의 하부를 쳐다보고 있는데 선창으로 짐작되는 부분에 구멍이 뻥 뚫렸다.
티렌델은 통신기를 통해 비행선의 선원들에게서 분리 절차를 보고받았다.
「바라쿠다 6025, 지금부터 리퍼 원의 분리에 들어갑니다. 고도 750.」
「락 볼트 해제. 구속 케이지 철거, 분리.」
순간 철컹,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리퍼급 골리앗이 비행선과 분리되었다.
티렌델은 골리앗에 탄 채 자유 낙하하는 스릴을 즐겼다.
보통 골리앗은 이렇게 상공에서 떨어지면 손 쓸 새도 없이 박살 난다.
그놈의 대마법방어력 때문에 다른 종류의 에테르가 제대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오볼드가 선물한 이 리퍼는 하늘 저 끝에서 떨어지더라도 안전하단다.
그는 비록 하늘을 난 적은 없지만 레오볼드를 믿었다.
“오직 당신만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귓가에 모함으로부터 짧은 통신이 들어왔다.
「에테르 추진기 역분사 시작. 5, 4, 3…….」
리퍼의 다리에 달린 에테르 추진기가 역분사를 시작하며 육중한 동체의 낙하 속도를 줄였다.
잠시 후 티렌델과 골리앗은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착지할 수 있었다.
‘아르마 님이 훈련시킨 선원들이라 그런가? 실수 하나 없이 능숙하군.’
얼마 전부터 비행선 선원 육성을 위한 아카데미가 활황을 띠었다는데 그 결실이 나타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티렌델은 골리앗을 일으켰다.
그가 탑승한 리퍼는 블랙 나이트보다 더 가볍고 기동성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무기는 단 하나, 리빙메탈로 만들어진 총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얼핏 보기엔 검은 작대기 같지만 코어에서 뿜어지는 최대 500E의 출력을 에테르 블레이드로 전환하는 게 가능했다.
이는 레오볼드의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현 아스테라의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넘쳐나는 출력과 티렌델의 실력이 합쳐지면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뚫는다!’
섀도우 스텝을 밟는 리퍼는 그림자만 남긴 채 어느새 한 골리앗 앞에 나타나 있었다.
무기도 없는 상대 기사가 반사적으로 피하려는 찰나, 티렌델은 에테르 블레이드를 짧게 뿜어내 코어와 신관을 정확히 꿰뚫었다.
아르마가 위치를 가르쳐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퍽,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자폭용 골리앗이 주저앉아 연기를 뿜어냈다.
골리앗이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티렌델은 용기를 얻어 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막강한 출력으로 섀도우 스텝을 쓰자 거의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관전자가 된 드워프 둘은 망원경으로 그의 활약상을 구경하기 바빴다.
“엄청나게 빠르군! 움직임이 안 보여!”
“저 골리앗은 뭐지? 바그란에서 새로 만든 건가?”
“레오볼드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뭘 만들고 있을 거라네! 음흉한 친구지!”
“그런 음흉함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일세!”
대처가 어려웠던 자폭용 골리앗을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무력화시키고 있으니 신이 날 법도 하다.
골리앗들이 우수수 쓰러지자 엘브랑데 원정군에선 대체 누구냐고 난리가 났다.
“드워프 중에 저런 실력자가 있었던가?”
“뻔하지! 레오볼드 그놈이다!”
“놈을 죽일 수 있다면 이번 전쟁은 우리의 승리다!”
원정군의 엘븐 나이트들 사이에서 탐욕스런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들은 크게 강해진 상태였다.
벨리알급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출력을 자랑했고 코어엔 작으나마 신의 파편이 들어가 있었다.
하나하나가 티렌델 정도의 강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부작용도 극심해서 피를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일념만으로 버텨왔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레오볼드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놈만 죽인다면 이 전쟁도 끝난다!
―놈은 혼자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죽이자! 죽이자!
소리 없는 증오가 모일 때쯤, 티렌델은 마지막 골리앗을 처리한 후 전장 가운데에 우뚝 섰다.
수십 기의 골리앗이 복부가 뚫린 채 쓰러져 있었고 해치가 덜컹 열리며 기사 한 명이 기어 나왔다.
티렌델은 기겁하는 그에게 무심하게 말했다.
“문 쪽으로 뛰시오. 적이지만 최소한 박대하지는 않을 거요.”
“고, 고맙습니다!”
티렌델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원정대 측에서 소란이 일었다.
“배신자의 목소리다!”
“저주받을 배신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드느냐!”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
리퍼가 천천히 원정대 쪽으로 걸었다.
“오히려 너희들이 배신자라고 할 수 있지. 내게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우고 본국의 엘프들을 선동했으니 말이다.”
“헛소리!”
원정대 사이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멜빈 에일리드.
그는 티렌델의 동료이자 제자로 티렌델의 배신에 큰 상처를 입은 엘프 중 하나였다.
티렌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났던지라 하프엘프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앙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후 그의 이름은 엘븐 나이트에서 삭제되었고 5천만 엘프의 증오를 사는 몸이 되었다.
“인간과 손을 잡고 총통을 시해하려 한 주제에 부끄럽지도 않느냐! 네놈은 죽어서도 엘드그라실 주위에 묻히지 못할 것이다!”
“묻히고 싶은 생각도 없다. 어차피 엘드그라실은 불태워질 테니까.”
그에겐 언제고 일어나야 할 일이었지만 엘프들에겐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멜빈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티렌델… 엘프로서 최소한의 자긍심마저 포기했구나… 하프엘프는 다 그런 거냐?”
그때 티렌델이 해치를 열고 나왔다.
“내 눈을 봐라, 멜빈.”
멜빈은 멀쩡한 그의 한쪽 눈을 보고 멈칫했다.
거의 실명으로 알고 있었는데 언제 멀쩡해진 걸까?
“너… 눈이?”
“이전의 나는 눈 하나를 잃은 멍청한 하프엘프에 불과했지. 실력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비전도 갖지 못했다. 상부에선 그럴 마음이 없는데도 자치령 총독을 맡을 수 있을 거란 망상에 빠져 있었지…….”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러나 그분을 만난 후로, 나는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눈먼 반쪽짜리 잡동 엘프가 아니다! 나는 엘븐 나이트 티렌델이다!”
“네놈은 우리를 배신한 그 순간부터 엘븐 나이트가 아니었어! 제명되었단 말이다!”
“내 정체성은 내가 규정한다! 그분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듯이, 아집과 교만에 빠진 너희들 구원하고 엘브랑데를 다시 세우겠다! 레오볼드의 이름으로!”
둘의 대화는 서로의 주장만 담고 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이라고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귀를 닫고 외치기만 하는 것이다.
“흐하하하… 이 반쪽짜리 잡종이 인간이 주는 먹이를 먹더니 미쳤나 보군.”
멜빈이 웃기 시작했고 티렌델은 해치를 닫고 리퍼를 일으켰다.
“대화는 마지막이다. 이제 행동으로 보여주겠다.”
“말 잘했다, 배신자!”
순간 티렌델의 에테르 하트와 리퍼의 코어가 동기화되며 총검에서 무시무시한 크기의 에테르 블레이드가 형성되었다.
엘븐 나이트 중에서도 뛰어난 멜빈이 흠칫 놀랄 정도였다.
“너희를 죽이고 엘드그라실을 불태우겠다. 너희들이 믿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보여 주마.”
“이젠 엘프라는 껍질마저 벗어던지겠다는 거냐, 티렌델! 네놈은 엘프냐, 인간이냐!”
“종족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아스테라를 통일할 레오볼드의 검 티렌델이다!”
“미친 소리!”
땅이 움푹 파이며 티렌델과 리퍼가 하나가 되어 원정대 진형으로 뛰어들었다.
설마 수백 대의 골리앗과 싸울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지 다들 깜짝 놀라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티렌델은 그들이 저지하기엔 너무도 빨랐다.
스컥, 하는 소리가 나더니 멜빈의 골리앗 팔이 하나 날아갔다.
그 순간 그는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다.
‘빠르다!’
‘멜빈이 순식간에… 원래 이렇게 강했었나?’
티렌델이 강하다 한들 상식 수준에서의 강함이었다.
개량 벨리알급의 출력은 블랙 나이트에 뒤지는 수준이 아니었고 따라서 몇 명이 붙으면 티렌델은 꼼짝 못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시커먼 골리앗이 원정대를 헤집고 있는 동안 누구도 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티렌델이 한 번 움직이면 어김없이 골리앗 하나가 박살 났다.
이를 보다 못한 아론드 사령관은 에테르폭탄 발사를 명했다.
“하지만 사령관님! 아군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직격하지만 않으면 상관없어! 놈을 먼저 잡아야 한다!”
이윽고 발사기가 날뛰고 있는 티렌델을 조준하여 가벼운 격발음을 냈다.
폭탄이 날아가는 그 짧은 순간, 엘프들은 기가 막힌 것을 목격했다.
티렌델이 탄 골리앗이 짧게 총검을 여러 번 휘두른 것이다.
에테르 불레이드가 번뜩일 때마다 폭탄이 반으로 갈라져 땅에 떨어졌다.
놀랍게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에테르폭탄을 전부 잘라버린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언제 이렇게 강해졌지?”
엘프들이 경악했고 자치령 기사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티렌델은 레오볼드가 준 힘에 절대적인 자신을 얻었다.
“그분을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도 구원이 내려지리니.”
총검을 든 그가 원정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 * *
“…피해는?”
“최종적으로 132명이 사망했습니다. 그중 엘븐 나이트는 45명이며 골리앗도 200대 이상 파손되었습니다. 현재 원정대는 마운틴포지에서 20km나 떨어진 상황입니다.”
“환장하겠군.”
드리즈덴은 회색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자치령 기사들이 문에 돌진할 때만 해도 곧 마운틴포지에 진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비행선과 티렌델이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오랜만에 본 티렌델은 상식을 초월하는 강자가 되어 있었다.
신격이 부여된 엘븐 나이트 수십 명을 손쉽게 상대했고 심지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가는 에테르폭탄을 벨 정도였다.
드리즈덴을 분노하게 하는 점은 그가 엘프의 정의를 부정했다는 점이었다.
“레오볼드가 대륙을 통일하는 게 곧 정의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군.”
“하지만 그라는 카드로 원정대가 수세에 몰린 것은 분명합니다.”
“어차피 한 줌도 안 되는 놈들이야. 대단한 기대는 하지 않았어.”
그래도 마운틴포지의 정문조차 뚫지 못하고 물러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당초의 계획에 의하면 지금쯤은 내부에 진입해서 여러 거점을 확보하는 단계였다.
레오볼드와 티렌델이 계획을 망가뜨린 것이다.
드리즈덴은 다른 것보다 대가문들이 자신의 통치력에 의문을 품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그건 대가문들이 묵인한 결과물이었다.
엘브랑데 사회에 뿌리내린 대가문들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고 만약 그들이 드리즈덴이 총통으로서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한다면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었다.
‘힘을 얻기 전까진 총통으로 있어야 한다…….’
엘드그라실에서 뽑아낸 불멸의 힘은 그를 젊게 하고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어 줄 테지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신성군을 동원할까?’
신성군이란 부활한 크리슈나를 포함한 엘븐 판테온으로 만든 부대를 뜻한다.
제대로 된 신격인 만큼 엄청난 권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게 오롯이 전투력에 집중되면 마운틴포지 함락쯤이야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신격이 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당장 필요한 건 시간이군.’
그것을 벌기 위해, 대가문들의 의심 어린 시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더 강력한 수단을 써야 했다.
‘전염병? 나쁘지 않지만 침투시키는 게 까다롭고 효과도 의심스러워. 미티어 스트라이크… 지금까지 두 번이나 실패한 게 이상해.’
미티어 스트라이크는 최근 두 번이나 발동되었다.
엘드그라실의 가지를 둘러싼 접경지대 전투에서 한 번, 판그랄 대공령에서 한 번.
미심쩍은 점은 둘 다 레오볼드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무위로 돌렸을 가능성은 낮지만 드리즈덴은 만의 하나 실패했을 때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만큼은 완벽하게 성공해야 한다.
그는 아인종 자치령의 지도를 들여다봤다.
엘브랑데에 비하면 황무지에 다름없는 좁은 땅이고 식량 보급은 지지부진했지만 그럼에도 수백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는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엘프들에겐 소름끼칠 뿐이었다.
―수명이 짧아, 감응력도 낮고 외모도 형편없어. 그런 주제에 아득바득 살아남으려 하니 추할 뿐이지.
―그 비좁은 땅에 수백만이 살고 있다니 벌레와 다를 게 뭐야?
대부분의 엘프들은 엘브랑데에 틀어박혀 살고 있기에 다른 종족과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가 자치령에 가보면 그 처참한 실상에 크게 실망하여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정말 끔찍한 곳이었다고 떠벌리게 되는 것이다.
엘프들이 여러 종족에게 가진 선입견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바가 많았다.
그건 드리즈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인종을 엘프와 같은 선상에 놓지 않았고 따라서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었다.
“우리 함대를 모두 동원하면 단기간에 어느 정도의 인원을 수송할 수 있지? 어린아이와 여자는 덩치가 작으니 많이 태울 수 있다는 걸 고려해 보면 말이야.”
섬뜩한 목소리에 에키드나는 흠칫했지만 곧 결과를 보고했다.
“꽉꽉 밀어 넣으면 한 척에 500명 정도는 태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큰 배에 겨우 500명? 내가 어떻게 더 태우는지 보여 주지.”
드리즈덴은 펜을 집어 들고 종이에 그림을 슥슥 그렸다.
널빤지를 몇 층으로 쌓아올리고 거기에 인간을 차곡차곡 채워 넣는 끔찍한 그림이 그려졌다.
친위대장 에키드나조차도 기겁할 만한 발상이었지만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떤가? 이 정도면 좁은 공간에 몇 배나 많은 인원을 실을 수 있다네. 아주 효율적이지.”
“자치령에서 난쟁이 나라까지는 얼마 안 걸려. 멀건 죽만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다음엔 저기 문을 향해 걸어가게 하는 거지. 자치령 기사를 위해 문을 연 난쟁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흥미롭지 않나?”
에키드나는 이 끔찍한 계획에 현기증을 느꼈다.
인간을 폭탄으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가축 취급하며 데리고 와서는 마운틴포지로 행진하게 하겠다니 보통 잔인한 발상이 아니었다.
‘그것도 여자와 아이들만이라니…….’
얼마가 죽든 그에겐 정의를 이루기 위한 작은 희생일 것이다.
더 끔찍한 점은 이걸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미르 공화국은 바그란과 꽤 떨어져 있었고 전략 물자는 몰라도 식량은 상당히 부족한 편이었다.
갑자기 먹을 입이 두 배가 되면 감당이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문을 걸어 잠그고 있으면 죽을 게 뻔하니 받아 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국 난쟁이들은 마운틴포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거야. 놈들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그때 우리 군이 들어가서 포획하는 거지. 그 와중에 얼마간 죽어도 아무도 모르지 않겠나?”
“…….”
데리고 오기도 귀찮으니 현지에서 죽이겠다는 잔인한 발언이었다.
에키드나는 자신의 귀를 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엘프였고 총통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레오볼드의 반발이 거세지 않을까요? 메데아에서 난리를 친 전적을 보면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됩니다.”
소극적인 반항이었지만 드리즈덴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크리슈나가 있는데 놈이 함부로 발을 들여놓았다간 역으로 당할 뿐이야. 걱정 말고 바로 시행해.”
“예…….”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브랑데의 함대가 움직였고 중력자 레이더와 시비리 위성이 이를 포착했다.
* * *
“노예무역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은.”
레오볼드는 착잡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자치령에 마련된 임시 계류장에 수많은 엘브랑데 함대가 정박하고 닥치는 대로 아인종을 포획하고 있었다.
굳이 포획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엘프들이 아인종을 다루는 방식이 동물이나 몬스터를 다루는 그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말 대신 폭력으로, 손보다는 발로 아이와 여자를 몰아붙였고 그들은 울부짖으며 비행선에 올랐다.
항해 중에 어떤 취급을 받을지, 도착한 뒤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는 뻔한 일이었다.
“엘프들에게 최소한의 양심과 죄책감을 기대했던 게 잘못이었나…….”
레오볼드의 목소리는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사실 엘프들이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주적은 레오볼드이며 이미르 공화국은 조력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당히 핑계를 대고 물러나도 될 텐데 이렇게 나온다는 건 드리즈덴의 상황이 예상보다 안 좋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더 잔인한 방법을 쓸 것이라는 얘기도 된다.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보다 더 잔인한 방법이란 무엇일까?
아르마는 묵묵히 그가 결정을 내리길 기다렸다.
대륙 통일 로드맵은 지금까지 일관적으로 이어져 왔다.
그녀의 주인은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꺼려해 최대한 전투를 피하려 했고 얼마 전까진 꽤 성공적이었다.
이번 전쟁도 드워프들만 빼내면 그 이상의 확전 없이 적당히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엘프들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마냥 인내할 수는 없었다.
신전 자체가 오염되었다면 차라리 부수고 새로 짓는 편이 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레오볼드는 자치령의 참상을 똑똑히 목격한 뒤 지시를 내렸다.
“함대를 가져와. 드리즈덴부터 죽여야겠어.”
그 함대란 비행선 따위가 아니라 우주함대를 뜻한다.
정지궤도에 머물러 있던 세틀러호와 그동안 우주 플랜트에서 생산된 순양함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