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324
#닥터 플레이어 324화
그래서 왕녀파의 전횡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카탈 왕국에서 벌어진 불의의 사고로 에스텔 성녀는 죽었고, 어째서인지 에스텔 성녀를 비호하던 뒷배도 등을 돌렸다.
[에스텔 성녀가 있었던 왕녀파를 철저히 짓밟아주십시오.]황도에 있는 누군지 모를 뒷배에게서 이런 메시지가 전달되었던 것이다.
역시 치유의 탑 총본산을 통해 전달된 메시지였다.
‘그 뒷배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야 환영할 일이지.’
대공파와 귀족파도 실벤느 왕녀를 치는 걸 동의하였다.
이제 실벤느 왕녀는 마녀로 몰려 화형대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실벤느 왕녀는 이렇게 처리되겠지만, 앞으로는 레이몬드 왕세자가 문제이군.’
조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몬드!
최근, 그의 신경을 가장 거슬리게 하는 인물이었다.
‘실벤느 왕녀 이상으로 위험한 사상을 가진 인물이다.’
이미 조르스는 레이몬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세상 모든 환자와 백성을 위하겠다니. 하늘의 축복은 오로지 정당한 가치와 자격이 되는 이들을 위한 것이거늘.’
힐은 자격이 되는 이들을 위한 것.
이게 치유의 탑의 기치였다.
그래서 치유의 탑은 ‘정당한’ 가치를 지불하지 않으면 치유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건 하늘의 축복을 모독하는 것이리라 생각하기에.
더 웃긴 건 레이몬드 왕세자가 블레서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이다.
세인트 조르스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블레서는 하늘이 내린 전설의 재능이다. 그런 놈에게 발현될 리가 없지.’
세인트 조르스는 딱 잘라 생각했다.
확실히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찝찝한 정황이 있긴 했지만, 지나치게 황당한 이야기였다. 광명의 탑의 세인트들은 무언가 와전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야. 의술이라니. 절대 가만히 두면 안 돼.’
조르스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의술을 무작정 폄훼하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카탈 왕국과 휴스톤 왕국에서 어떤 기적을 일으켰는지 샅샅이 조사했기 때문이다.
조르스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의술은 잡술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커다란 가능성을 지닌 새로운 기적이었다.
이휘 격 세인트로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해본 조르스는 의술의 위험성을 곧바로 자각했다.
‘의술을 철저히 짓밟지 않으면 치유의 탑은 근간부터 흔들릴 수도 있어.’
이미 철의 제국과 자유 도시 연합은 치유의 탑의 영향력이 많이 희석된 상태다.
특히 철의 제국은 또 다른 고유의 치료법을 연구해 나가며 치유의 탑을 완전히 배척해 버렸다.
레이몬드의 의술이 퍼지면, 십자연맹제국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었다.
‘절대 안 돼. 그렇게 되면, 치유의 탑은 완전히 무너져 내릴 거야.’
조르스는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다른 세인트들은 여전히 의술을 무시하고 있지만, 조르스는 소름이 돋았다.
이건 치유의 탑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아직 씨앗에 불과한 지금 전심을 다 해 짓밟아야 했다.
‘방법을 마련해야 해.’
그때, 한 힐러가 다급히 뛰어들어왔다.
“큰일입니다, 부탑주님!”
“무슨 일인가?”
“화염의 연기 사건 현장에 레이몬드 왕세자가 도착하였습니다!”
“……!”
힐러는 곤혹스럽게 외쳤다.
“국왕 전하의 권한을 대리하여 사건을 재조사할 것이라 합니다!”
* * *
사건이 벌어진 마을은 수도 인근의 마을이었다.
‘설마 이 사건. 광명의 탑의 수작인 건가?’
사건 현장에 도착한 레이몬드는 퍼뜩 그런 의심이 들었다.
광명의 탑 힐러들이 완강히 조사를 거부한 것이다.
“안 됩니다. 재조사는 불가합니다.”
“국왕 전하의 명을 거부하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으나, 힐러들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이 사건은 이미 광명의 탑 주관하에 조사가 끝난 일입니다. 단순히 국왕 전하의 변심으로 재조사를 하는 건 국법에 어긋납니다.”
“……!”
“만약 재조사를 원하신다면, 왕국 의회의 허락을 받으십시오.”
레이몬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왕국 의회.
페닌슐라 왕국의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기관이었다.
참고로, 의회는 기드온 대공이 절반 과반수를 장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왕권을 무력화하기 위한 장치였으니까.’
기드온 대공은 의회에 사법권, 행정권, 입법권, 군권, 외교권 등의 모든 권한을 몰아넣었고, 의장으로서 왕국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이미 듣기는 들었지만, 정말 심각하구나. 국왕의 이름으로 이런 사건 하나 재조사하지 못하다니.’
아니,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번 일에 의회의 입김이 들어가 있다는 의미였다.
‘광명의 탑이 판을 짜고, 대공파와 귀족파가 힘을 실어준 거야.’
레이몬드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 합법적 절차를 받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어. 실벤느 왕녀는 마녀로 몰려 화형당할 거야. 어떻게 방법이?’
순간, 레이몬드는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재수사는 시행하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만…….”
“힐러로서 환자를 돌보겠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레이몬드는 입꼬리를 들어 올랐다.
“힐러는 언제 어디서든 환자를 치료할 의무가 있다, 라는 치유의 탑 수칙에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들을 치료하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게 분명해.’
참고로, 사망한 환자가 28명.
중독되어 죽어가는 환자는 35명이었다.
“그, 그건…….”
광명의 탑 힐러들은 당황하였다.
레이몬드가 이렇게 나오면 그들로서는 말릴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런 잡술로 치료받으려 하지 않을…….”
“글쎄요. 내 생각은 다른데.”
레이몬드는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사람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중독되어 죽어가는 환자의 가족들이었다!
한 명, 한 명 레이몬드 앞으로 나섰다.
“제발! 아버지를 치료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제 딸을……!”
“저희 가족의 모든 걸 바칠 테니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이들이 이렇게 서슴없이 나서는 이유가 있었다.
‘저 빛이라 불리는 분이라면 우리를 치료해 줄 거야!’
이미 레이몬드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기에!
광명의 탑 힐러들이 다급히 수습에 나섰다.
“너, 너희……! 환자들의 치료는 우리 광명의 탑에서 전담하고 있으니……!”
“닥쳐.”
“……!”
아내를 잃은 마을 사람 한 명이 으르렁거렸다. 그는 아들도 중독되어 죽어가고 있어 한없이 절박했다.
“제대로 치료할 생각도 없으면서 꺼지라고!”
“맞아! 광명의 탑 따위 꺼져!”
못 배운 마을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감이란 게 있었다.
다들 무언가 석연찮음을 느끼고 있었다. 확실한 건, 광명의 탑 힐러들은 환자를 치료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이, 이…….”
힐러들은 몸을 떨었지만, 뭐라 더 입을 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게 돌이라도 날아올 것 같았다.
“크음. 이야기는 끝난 것 같군요.”
레이몬드는 헛기침을 하였다.
마침 ‘진상 대처법’이 발현되어 적절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러면 다들 꺼져주십시오. 방해되니까.”
* * *
“뭐? 레이몬드 왕세자가 환자 치료를 시작했다고?”
세인트 조르스는 눈을 찌푸렸다.
“네, 부탑주님. 어떻게 조처할까요?”
소식을 전해온 힐러가 쩔쩔매며 물었다.
하지만 세인트 조르스는 도리어 웃음을 흘렸다.
“잘 됐군.”
“네?”
“놈이 환자들을 치료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야.”
세인트 조르스는 의미심장하게 생각했다.
‘중독된 환자들을 치료할 방법은 단 하나다. 스페셜 힐, ‘정명의 가호’밖에 없어. 놈은 오히려 망신만 당할 거야.’
세인트 조르스는 이번 기회를 철저히 이용하기로 하였다.
“언론사에 연락해 소문을 퍼뜨리도록. 레이몬드 왕세자가 화염의 연기에 중독된 환자를 치료하러 나섰다고.”
“……!”
힐러는 눈을 크게 떴다.
의중을 눈치챈 것이다.
세인트 조르스는 이번 일로 레이몬드와 의술의 평판을 바닥에 떨어뜨리려는 거다!
“언론사에 최대한의 돈을 주어 대서특필하게 하도록 해. 이왕이면 황도에 연이 닿는 언론사에도 연락하면 좋겠군. 연맹 제국 전체가 레이몬드 왕세자의 못난 모습을 알 수 있게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세인트 비른에게 연락하도록.”
세인트 비른은 정명의 가호를 사용할 줄 아는 일휘급 세인트였다.
레이몬드가 볼품없이 좌절하고 있을 때 영웅처럼 나타나 환자를 치료해내면 더욱 극적인 효과가 나타나리라!
“그러면 곧바로 진행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세인트 조르스는 진득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 됐군. 스스로 무덤에 걸어 들어가다니.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어.’
세인트 조르스는 페닌슐라 왕국의 모든 사람이 의술을 손가락질하는 상상을 하며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 * *
레이몬드는 환자들을 살핀 후, 침음을 삼켰다.
‘이건 중독 증상이야.’
옆에서 크리스틴이 말했다.
“화염의 연기를 마시고 호흡곤란 증상이 생겼다고 해요. 하지만 이건 연기를 들이마셔 생긴 호흡곤란이라고 하기에는…….”
레이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지 않죠. 확실히 다릅니다.”
레이몬드는 환자들이 호소하는 증상을 살폈다.
일단 호흡곤란.
광명의 탑이 원인을 화염의 연기로 지목한 이유였다.
하지만 호흡곤란은 사소한 증상일 뿐이었다.
혼미한 의식.
부어오른 몸.
무엇보다 소변량의 감소.
레이몬드는 정답을 말하였다.
“이건 요독증입니다.”
요독증(Azotemia)!
콩팥이 망가져 생기는 증상을 말한다.
몸의 노폐물이 밖으로 나가지 못해 독소가 쌓여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다.
‘어떤 원인에 의해 콩팥이 망가졌어.’
그것도 굉장히 심각한 상태였다.
‘화염의 연기를 들이마셨다고 이런 요독증이 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요독증의 원인이 되는 단골 원인은 따로 있었다.
레이몬드는 제자들에게 지시했다.
“무언가 마을 사람들이 새롭게 섭취한 특이 식품 등이 없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특이 식품이라면?”
“뿌리 달인 물, 새로운 약초 등입니다.”
약제, 달인 물, 특수한 차 등등.
이런 게 콩팥을 손상시키는 단골 물질이었다.
몸 안에 들어온 독소를 해독하는 기관이니, 과부하가 걸리며 손상이 오는 거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실벤느 왕녀의 누명을 벗길 수 없어.’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명확한 인과 관계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쉽지 않아. 레이펜타이나에서 요독증의 원인을 증명하는 건.’
또한,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중증 요독증…… 말기 신부전은 현재 나로서는 치료할 수 없는 병이야.’
레이몬드는 침음을 흘렸다.
그래,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투석을 시행해야 해.’
투석!
몸 안의 피를 밖으로 끌어내 외부의 기계적 정화 장치를 통해 노폐물을 거른 후, 몸 안으로 다시 집어넣는 처치를 뜻한다.
하지만 지금껏 여러 의학 도구를 구현해 내었지만, 투석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