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325
#닥터 플레이어 325화
‘투석을 구현하려면 얼마나 정교한 마도 기술이 필요할지. 가능은 할까?’
레이몬드는 컴컴한 마음이 들었다.
지구에서도 투석은 1950년쯤에나 사용하기 시작한 치료법이다. 그전에 말기 신부전 환자는 모조리 사망하였다.
그때, 린든이 외쳤다.
“마스터! 환자 한 명 심정지가 와요! 심실 부정맥이에요!”
레이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콩팥의 기능이 망가져 칼륨 수치가 올라가 심정지가 온 것이다.
“칼슘 투약하고, 전기 충격!”
“네!”
다급히 심폐소생술을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원인이 되는 콩팥 부전을 해결하지 않는 한 살릴 수 없었다.
‘이런.’
레이몬드는 막막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단순히 환자를 위하는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현재 그의 능력으로는 불가했다.
‘제길, 하지만.’
환자의 가족들이 절박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지금 요독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은 모두 죽는다.
‘어떻게든 방법을 내야 해.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행히 제가 늦지 않게 도착한 것 같군요.”
딱딱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평범한 외모였지만, 레이몬드는 곧바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세인트 비른!’
유명한 이였다.
‘스페셜 힐, ‘정명의 가호’의 소유자.’
정명의 가호.
몸 안의 독소를 해독하는 스페셜 힐이었다.
정확한 기전은 알 수 없지만, 콩팥이나 간의 기능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지닌 것 같았다.
‘페닌슐라 왕국에서 특히 유용한 스페셜 힐이라 명성이 높아.’
페닌슐라 왕국은 만마전.
툭하면 독살 사건이 일어난다.
그래서 정명의 가호를 쓸 줄 아는 세인트 비른은 모든 귀족이 가까이하려고 선호하는 힐러였다.
‘확실히 세인트 비른이면 이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레이몬드는 순간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그는 지금 광명의 탑에 조금도 밀리면 안 되는 처지이다.
그가 치료 못 한 환자를 세인트 비른이 치료하면, 광명의 탑에서 어떻게 떠들지 아찔했다.
실제로 비른과 동행한 언론사의 기자들이 보였다.
‘날 짓밟은 걸 기사로 퍼트릴 계획인 거야. 그러면 페닌슐라 왕국에서 돈 벌려는 내 계획에도 어마어마한 차질이 올 거야.’
하지만 레이몬드는 질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하지 마. 광명의 탑은 나중에 이기면 돼. 지금은 일단 환자가 우선이야.’
그때, 비른이 물었다.
“역시 역부족이신 것 같군요. 괜한 잡술로 환자를 괴롭히는 건 그만하고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전하?”
제자들이 발끈하였다.
레이몬드도 기분이 상했지만, 뭐라 하지 않고 자리를 비켰다.
그런 레이몬드의 반응에 비른은 뜻밖이란 얼굴을 하였다.
당연히 훼방을 넣을 거로 예상한 거다.
‘본인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있는 건가? 최악은 아니군.’
어쨌든 비른은 환자 앞에 섰다.
“화염의 연기에서 흘러나온 사악한 기운이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있군요. 하늘의 축복을 통해 정화해야겠습니다.”
비른은 조르스의 지시에 따라 일부러 ‘화염의 연기’와 ‘호흡곤란’을 언급했다.
언론사의 기자들이 빠르게 그의 말을 기록했다.
이후, 본 막이 시작되었다.
세인트 비른은 두 손을 모았다.
마치 기도하듯 성스러운 모습.
반짝.
푸르른 빛의 입자가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기자들은 감탄을 터뜨렸다.
“저게 바로 정명의 가호!”
“정말 성스럽군요.”
기자들은 고가의 광(光) 속성 마도구를 꺼내 세인트 비른의 모습을 촬영했다.
‘이건 대박 특종이야.’
‘광명의 탑이 레이몬드 왕세자를 짓밟는 거니.’
레이몬드는 페닌슐라 왕국의 떠오르는 신성이었다.
그런데 광명의 탑이 그런 신성을 짓밟는 광경이니, 어마어마한 파란을 일으킬 것이다.
기자들이 미리 돈을 받은 대로 최대한 자극적이고 확실하게 레이몬드의 의술을 폄훼할 문구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푸르른 빛의 입자가 환자의 몸에 내려앉았다.
마치 성스러운 하늘의 축복을 받는 듯한 광경이었다.
“된 것입니까?”
기자가 물었다.
“그렇소. 이제 천천히 회복할 거요.”
과연 환자는 조금 의식이 깨어나는지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오오!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세인트 비른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용무가 끝났다는 듯이.
“그러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겠다고요?”
레이몬드는 놀라 물었다.
세인트 비른이 치료한 환자는 단 한 명뿐. 아직 수많은 이가 죽어가고 있었다.
세인트 비른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저 많은 환자를 다 치료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제 힐을 필요로 하는 더 귀중한 분이 많습니다.”
“……!”
레이몬드는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말인즉슨, 어차피 돈도 안 될 저런 평민들에게 자신의 힐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실제로 세인트 비른이 이 자리에 온 건 레이몬드를 짓밟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것에는 관심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레이몬드는 빠득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세인트 비른은 일말의 가책도 못 느끼는 얼굴로 마차를 타고 떠났다.
미리 약속된 귀족가로 떠난 것이다.
기자들도 곧 떠났다.
“바로 신문을 내자고.”
“오래간만에 특종이야.”
이제 그들은 자극적인 논조로 이번 일을 대서특필할 거고, 페닌슐라 왕국 전체에 이번 일이 퍼질 것이다.
어쩌면 십자연맹제국 전체에 이번 일이 퍼질 수도 있었다.
‘아니,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환자들을 치료해야 해.’
환자의 가족들은 더욱더 커다란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때, 린든이 다급히 외쳤다.
“마, 마스터! 아까 스페셜 힐로 치료받은 환자의 상태가 이상해요!”
화들짝 가 보니, 반짝 회복한 후 다시 악화하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콩팥의 손상이 심해 정명의 가호의 효과가 떨어지는 거야!’
정명의 가호는 간과 콩팥의 기능을 극대화해 몸의 독소를 해독하는 거였다.
그런데 이미 콩팥이 망가진 상태이니 효과가 부족한 거다.
‘아예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환자를 살리려면 더욱 지속적으로 스페셜 힐을 퍼부어야 해.’
당연히 세인트 비른한테 그런 일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제길, 내가 정명의 가호를 사용할 수는 없나?’
레이몬드는 그런 마음마저 들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의학적 난관에 맞닥뜨렸습니다!] [속성, ‘의학의 도전자’가 발현됩니다!] [말기 신부전의 의학적 치료 원칙은 ‘투석’입니다!] [만약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시 환자 집단의 예상 사망률은 100%로 판단됩니다.]100%.
레이몬드는 그 메시지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보았다.
“마스터?”
“아니, 방법이 있어.”
레이몬드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 메시지가 전달하는 의미는 명확했다.
혈액 투석을 해야 한다는 것.
문제는 방법이다.
혈액 투석을 구현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불가능하지 않아.”
레이몬드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실벤느 왕녀의 도움을 받으면 돼.”
실벤느 왕녀.
그녀의 조작계 혈인 능력이면 혈액 투석을 구현할 가능성이 있었다.
* * *
레이몬드는 곧바로 셔트폰을 타고 실벤느 왕녀가 투옥한 감옥으로 날아갔다.
깊은 곳.
도저히 왕녀가 투옥되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음습한 곳에 한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 여인이 실벤느 왕녀인가.’
레이몬드는 곧바로 알아보았다.
에스텔과 똑 닮았으니까. 쌍둥이답게 거의 같은 외양이었다.
“실벤느 왕녀님. 레이몬드라고 합니다.”
실벤느 왕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는데, 레이몬드는 흠칫하였다.
눈빛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비관하고 있구나.’
레이몬드는 실벤느 왕녀의 마음을 눈치챘다.
백성을 위하다가 음모에 빠져 이런 처지가 되었으니, 좌절하는 것도 당연했다.
“왕녀님, 저는 레이몬드라고 합니다. 왕녀님을 도와주러 왔습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힘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레이몬드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이 다소 안 좋긴 하지만, 제가 힘을 다해 도와드릴 테니…….”
“……괜찮으니 돌아가세요.”
“네?”
“……도움 따위 원하지 않으니 돌아가 달라고요.”
레이몬드는 멈칫하였다.
실벤느 왕녀의 눈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전부 지쳤어요. 전 언니의 옆으로 갈 테니, 돌아 가주세요.”
‘아.’
레이몬드는 자신의 실책을 눈치챘다.
실벤느 왕녀는 단순히 자신의 상황에 비관한 게 아니었다.
얼마 전, 사망한 쌍둥이 언니 에스텔의 비극에 좌절한 것이었다.
‘그러면, 이번 음모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도 좌절해서 자포자기했던 건가?’
사실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실벤느 왕녀가 너무 속수무책으로 음모에 당했던 것이다.
인제 보니, 언니를 잃은 슬픔에 모든 걸 포기했던 거였다.
‘하지만 가만히 놔둘 수는 없어.’
이대로 두면, 실벤느 왕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될 거다.
‘그건, 에스텔 성녀도 원하는 바가 아닐 거야.’
사실 레이몬드는 에스텔에 대해 잘 모른다.
여러모로 많은 의문을 남기고 사라진 여인.
사실 레이몬드는 그녀가 ‘그들’과 모종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하였지만, 이제는 죽어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에스텔 성녀는 실벤느 왕녀를 진심으로 걱정하였어.’
‘……제발…… 실벤느를…… 부탁…….’
에스텔이 마지막 순간, 남긴 말이었다.
희미하게 읊조린 거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그러니 실벤느 왕녀가 이런 꼴로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문제는 섣불리 설득할 수 없다는 건데.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야.’
레이몬드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왕녀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혹시 에스텔 성녀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전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인가요?”
레이몬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많이 사랑한다고, 행복 하라고 하였습니다.”
“……!”
실벤느의 눈동자가 격랑을 만난 듯 파르르 흔들렸다.
뚝. 뚝.
그리고 눈물이 끝없이 떨어졌다.
감옥에서 소리 없는 오열이 퍼졌다. 고요해 더욱 괴롭게 들리는 울음이었다.
레이몬드는 씁쓸히 웃고는 말을 이었다.
“에스텔 성녀님은 마지막 순간, 당신의 행복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전 그분의 뜻을 잇고 싶습니다.”
그는 조심히 오열하는 실벤느의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도와드리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 *
실벤느는 한참이나 지난 후 안정하였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죄송해요.”
“아닙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네, 고마워요.”
“이번 일은 광명의 탑의 음모로 보입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반드시 놈들을…….”
레이몬드는 그렇게 설명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소문과 조금 다르네? 백성을 위해 대쪽 같은 성격이라더니.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에스텔이 부드러운 물 같다면, 실벤느는 화염 같다고 들었는데, 그냥 힘없어 보였다.
‘아직 슬픔이 가시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었다.
사실 실벤느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백성들을 위하는 건 그만하고 싶어.’
뜻밖의 생각이었다!
‘소수파로서 살아남기 위해 백성을 위하는 척하긴 했지만, 이제는 다 지치고 힘들어.’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위했던 게 모두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같이 대쪽같은 모습도 왕녀파를 이끌기 위해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었을 뿐이었다.
‘물론 언니는 성녀에 걸맞은 분이었지만, 난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니야.’
실벤느 왕녀는 씁쓸히 생각하고는 말했다.
“……아니, 이제 백성들을 위하는 일은 관두겠어요.”
“……네?”
“전 사실 제 이익을 위해 백성들을 위했을 뿐이에요. 거짓된 가면을 쓰는 것도 지쳤어요.”
레이몬드는 당황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인가?
‘백성들을 위하는 숭고한 왕녀라며?’
실벤느 왕녀는 자신의 자세한 속내를 레이몬드에게 털어놓았다.
레이몬드는 실벤느 왕녀가 진심임을 깨달았다.
‘어, 어. 이러면 곤란한데.’
실벤느 왕녀가 왕녀파의 중심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건 그의 황금귀 프로젝트에 꼭 필요했다.
실벤느 왕녀는 아련한 눈으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언니의 유지가 눈에 밟혀 이런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지만, 당신 같이 숭고한 분이 나타나서 다행이에요. 앞으로 페닌슐라 왕국 백성들을 부탁해요.”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소리 마! 페닌슐라 왕국 백성을 왜 나한테 맡겨!’
레이몬드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는 정색했다.
방법을 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