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459
#닥터 플레이어 459화 – 외전 7
‘전부는 무리여도, 최소 5천만 페나 정도는…… 아니, 3천만 페나라도.’
빚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니 의지가 불끈 치솟았다.
레이몬드는 홀 밖으로 나와 이공자 폰트를 찾았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모는 끝났으니…… 공자?”
이공자 폰트가 없었다.
대신 면사로 얼굴을 가린 한 여인만 있었다.
“레이몬드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당신은?”
“성에 머무는 식객입니다. 렘브란트 대공 전하의 신세를 지고 있지요.”
레이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폰트는 어디로 가고, 왜 처음 보는 여인이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폰트 공자는 성 내에 갑작스레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습니다. 저는……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짐을 말입니까?”
“네, 오랜 기간 폐하를 뵙고자 흠모해 왔거든요.”
면사 여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정말…… 오랫동안 폐하와 만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답니다.”
레이몬드는 어색한 얼굴을 하였다.
자신과 언제 봤다고 만나기를 바랐다는 말인가.
면사의 여인은 낮게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따로 폐하와 나눌 이야기도 있고요. 로즈테일 황제 폐하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레이몬드는 흠칫하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마 알고 계실 텐데요. 로즈테일 황제 폐하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
레이몬드는 긴장하였다.
상대의 표정을 살피려 하였으나, 면사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모를 위험한 분위기가 여인에게서 흘렀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로즈테일 폐하의 행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레이몬드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여인이 앞서 걸어갔다.
‘어쩌지?’
고민이 들었다.
무턱대고 따라가기에는 수상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로즈의 행방을 아는 이였다.
‘일단 따라가 보자. 별다른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아.’
묘한 느낌이었다.
딱 봐도 위험한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근거 없는 직감이었지만 한평생을 무사 안전 제일주의로 무장해 살아온 그의 직감은 굉장히 정확한 편이었다.
그래도 그는 여차하면 바로 등을 돌려 도망갈 수 있게 경계심을 끌어 올리고는 여인을 따라갔다.
여인은 한참이나 뒤에서 따라오는 레이몬드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안 잡아먹으니, 그렇게 멀찍이서 따라오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레이몬드는 잔뜩 경계심 어린 얼굴로 답했다.
면사 여인은 왜인지 아쉽다는 느낌으로 혀를 차더니 말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폐하께 로즈테일 황제 폐하는 소중한 존재인가요?”
레이몬드는 왜 그런 걸 묻는지 의아하단 얼굴을 했다.
“네,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입니다.”
진심이었다.
로즈가 없으면 그는 파산할 테니.
그런데 왜일까?
면사 여인은 어쩐지 놀란 기색으로 잠시 침묵하였다.
“……그렇군요.”
레이몬드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여인의 발걸음이 성안 깊은 곳으로 향했다.
창이 없어 빛이 전혀 들지 않고, 어딘지 으슥해 보이는 방이었다.
“여기는……?”
“다 왔습니다. 들어오시지요.”
여인을 따라 방에 들어갔다.
레이몬드는 경계심 가득한 얼굴을 하였다.
“여기는 왜 온 겁니까?”
“잠시만. 있어 보세요. 로즈테일 황제 폐하를 뵙게 해드리겠습니다.”
“로즈테일 황제께서 이곳으로 오시는 겁니까?”
“글쎄요. 어떨까요?”
알 수 없는 대답을 한 면사 여인이 물끄러미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시는지.”
“역시 참으로 아름다우시군요.”
“……네?”
레이몬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여인이 면사 속에서 미소를 짓는 게 느껴졌다.
“잠시, 눈을 감아보시겠어요?”
“……눈을요?”
“어서요. 그러면 로즈테일 황제 폐하를 보여 드릴 테니.”
레이몬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잠시 하고는 말에 따랐다.
그리고 눈을 감는 순간.
낯선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레이몬드의 몸이 굳었다.
낯선.
그러면서 익숙한 감촉이었다.
살면서 딱 한 번 느꼈던 감촉.
레이몬드는 화들짝 눈을 떴고, 볼 수 있었다.
마치 먹이를 보듯 짙게 웃고 있는 분홍빛 오드아이의 아름다운 여인을. 옆에는 쓰고 있던 면사가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다.”
로즈였다.
“내 VVVIP 고객님.”
그녀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 * *
“…….”
레이몬드는 넋을 잃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로즈와의 만남에 입맞춤 세례까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후후.”
로즈는 레이몬드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흘렸다.
뭔가 먹음직한 먹이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맹수처럼 보이는 웃음이라 레이몬드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습격을 당해 실종 중이었던 것 아닙니까?”
난데없이 성에 나타나다니.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습격이요?”
로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자작극이었는데요?”
“……!”
“일부러 정보를 흘려 습격을 유도한 후, 렘브란트 대공의 성에 은거해 있었던 거예요.”
로즈가 피식하였다.
“이 로즈가 그렇게 허술하게 당했을 리가 없잖아요. 고객님과 다시 만나지도 못했는데.”
“어째서 그런 자작극을?”
“황위를 되찾기는 했는데, 혼돈의 세력을 따르던 잔당이 숨어들어 좀처럼 뿌리를 뽑기 힘들어서 판을 흔들려 수를 쓴 거예요.”
로즈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를 노리는 잔당이 서공국의 공자 중 한 명과 손을 잡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일부러 서공국에 와서 빈틈을 노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망을 위장해 숨어든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하도록 의도했다고.
“최대한 빨리 놈들을 처리해야 VVVIP 고객님을 만나러 갈 수 있으니 무리했지요. 2년이나 못 보고 있으니, 너무 안달이 나서 말이지요.”
로즈는 레이몬드를 향해 위험하게 눈을 반짝였다.
레이몬드는 슬그머니 그 시선을 피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었지만, 역시나 로즈는 무서웠다.
‘괜히 걱정했네. 자작극이었다니. 하긴 그렇게 허무하게 당했을 리가 없었지.’
레이몬드는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저나, VVVIP 고객님이 오실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로즈가 짙게 미소를 지었다.
“감동했어요. 더구나 이 로즈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해주시고.”
“…….”
“저를 향한 고객님의 마음을 확인해 이 로즈, 가슴이 참으로 벅차오른답니다.”
레이몬드는 어색한 얼굴을 했다.
아까 면사 여인이 로즈인지 모르고 했던 이야기였다.
‘……돈 때문에 소중하다고 한 거였는데.’
어쨌든 소중하단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파산의 위기를 겪으며 로즈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은 레이몬드였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흐음?”
“이왕 온 것, 로즈 님께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레이몬드는 머리를 굴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팔을 걷어붙여 빚 감면을 받겠어!’
어차피 대부분의 일은 로즈가 할 거고, 그는 정말 한 손을 거드는 정도의 일만 하면 될 것이다.
그걸로 빚을 일부라도 줄일 수 있다면 어마어마하게 남는 장사였다.
그런 레이몬드의 흑심도 모르고, 로즈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십자 연맹 제국의 황제이신 고객님이 절 돕기에는 여러 정치적 무리가 있을 텐데요? 무엇보다 혼돈의 존재와 맞닥뜨려 위험할 수도 있고요.”
레이몬드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에 살짝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로즈를 믿었다.
‘위험하다고 해도 로즈 님의 성격상 이미 다 대책을 마련해 놓았겠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 빚을 감면받을 수 있다면 훨씬 남는 장사야.’
계산기를 두드린 레이몬드는 당당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위험해도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로즈 님은…… 제게 소중한 분이니까요.”
‘파산을 피하기 위해서’란 수식어는 본능적으로 뺐다.
로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잠깐 침묵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점점 더 참기 어려워지잖아요. 2년 동안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네? 뭘 참는다는 말입니까?”
“VVVIP 고객님을요.”
“……?”
‘날 뭘 참아?’
레이몬드는 여전히 이해 못 했고, 로즈는 뜻 모를 갈망이 담긴 눈빛으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순진한 VVVIP 고객님은 자세한 건 모르셔도 돼요.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테니.”
“……그렇습니까? 어쨌든 제가 어떻게 도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흐음.”
로즈는 그래도 레이몬드를 자신의 일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은지 망설였고, 빚 감면의 기회를 놓칠까 초조해진 레이몬드가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로즈 님의 일은 제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최대한 도움을 드리고 싶으니, 부담 없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로즈는 그 말에 훗훗 미소를 지었다.
“고객님께서 절 이렇게나 생각해 주실 줄은…… 믿기지가 않는군요. 꿈을 꾸는 것 같아요.”
괜히 제 발이 저린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꿈이 아닙니다. 모두 진심입니다.”
“그러면 다시 뽀뽀해도 돼요?”
레이몬드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를 보는 로즈의 눈빛이 깊게 일렁이고 있었다.
‘무, 무섭잖아.’
싫은가? 그건 아니다.
태어나서 딱 두 번 해본 입맞춤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심폐 소생술을 할 때 입을 맞추긴 하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야.’
머리가 뒤엉켜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로즈는 다행히 강요하지 않았다.
“순진한 고객님께는 아직 입맞춤도 과도한 것 같으니, 기다릴게요. 기다리기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고객님을 위해서라면, 이 로즈 참을 수 있으니까요.”
“…….”
기다린다고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로즈의 눈빛은 위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건 레이몬드의 반응이었다.
긴장감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괜히 가슴이 뛰어 레이몬드는 헛기침을 하였다.
“어쨌든 로즈 님께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겠어요. 지금 중요한 건 서공국의 누가 절 습격한 배후인지, 정확히는 누가 혼돈의 존재와 계약을 맺었는지 알아내는 거예요.”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혼돈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죠?”
“네, 루드비히 같은 놈들 아닙니까?”
루드비히.
십자 연맹 제국에 커다란 파국을 일으키려 했던 최종 원흉이었다.
그놈이 외대륙 요르문드에서 온 혼돈의 존재였다.
“루드비히만이 아니에요. 외대륙 요르문드의 혼돈의 존재들은 이전부터 호시탐탐 이곳 레이펜타이나 대륙을 노려왔어요. 우리 철의 제국은 그런 혼돈의 존재들과 싸워왔지요.”
철의 제국이 요르문드의 존재들과 싸우는 첨병이 된 건 지리적 요인 때문이었다.
그들이 있는 레이펜타이나는 세계 전체로 보면 서(西)대륙이다. 요르문드는 중앙 대륙이고.
십자 연맹 제국은 그 서대륙에서도 서쪽에 있어 요르문드와 거리가 멀었다.
반대로 철의 제국은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 외해를 넘으면 바로 요르문드와 접하고 있었다.
따라서, 철의 제국은 요르문드의 존재들을 막는 방벽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