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46
#닥터 플레이어 46화
가장 무거운 적혈구는 아래층, 중간은 하얀 백혈구, 그 위로는 혈소판이 포함된 맑은 혈장이 떠올랐다.
레이몬드는 그 혈장을 따로 분리해내 라오에게 주사했다.
“……도대체 이런 치료법이.”
라오는 다른 사람의 혈액이 몸 안에 들어오자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였다.
“혹시 불편한 느낌이 있습니까?”
“특별히 그런 건 없군요. 그냥 별 느낌 들지 않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수혈이 끝났다.
“이제 다 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위험한 출혈이 생길 확률은 적을 겁니다.”
정확한 혈소판 수치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수혈을 했으니 최소 2만은 넘었을 거다.
그 정도만 되어도 뇌출혈, 폐출혈 같은 치명적인 출혈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고비를 넘긴 것이다.
이후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났다.
라오는 차차 열이 떨어졌고, 아무런 출혈 없이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
라오는 붉어진 얼굴로 레이몬드 앞에 섰다.
레이몬드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크흠. 저한테 할 말이 있을 텐데요?”
“……감사했습니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요?”
무려 백작가 자제의 감사 인사다!
이런 호사가 또 언제 오겠는가?
레이몬드는 최대한 뽕(?)을 뽑기로 했다.
“감사합니…….”
“네? 뭐라고요”
“……감사.”
“제가 청력이 안 좋아서 목소리를 조금 더 크게 해주시겠습니까?”
“…….”
라오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개졌다.
더 놀리면 주먹이라도 날아올 것 같아, 레이몬드는 냉큼 태세를 전환했다.
그는 강약약강이니까. 눈앞의 주먹은 무섭다.
“크흠. 어쨌든 쾌차하셔서 기쁩니다.”
라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약속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도록 할 테니…….”
“됐습니다.”
“네?”
“그냥 해본 말이라고요.”
레이몬드는 쿨한 얼굴로 말했다.
“전 치료사. 당신이 회복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쁩니다. 다른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라오의 눈빛이 혼란에 물들었다.
도대체 레이몬드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눈치다.
‘무슨 의중이긴. 널 속이려는 거지.’
레이몬드는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형님으로 모시게 해봤자 마음을 얻지 못하면 헛것이다.
진심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오게 형님으로 모시게 해야 했다.
“도대체…… 당신의 속마음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환자를 생각하는 치료사일 뿐입니다. 환자분들이 좋아지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관심 없습니다. 그때 했던 내기도 당신을 치료받도록 하려고 도발한 것에 불과합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이다.
“…….”
라오는 혼란 속에 침묵에 잠겼다.
그때, 옆에 있던 한슨이 나섰다.
“감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페닌 준남작님은 환자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계신 분입니다. 바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요.”
“…….”
“그러니 그런 훌륭한 분을 의심의 시선으로 보지 말아주십시오. 솔직히…… 굉장히 불쾌합니다. 제가 기사였다면, 페닌 준남작님의 명예를 위해 결투를 신청했을 겁니다.”
한슨은 무뚝뚝한 평소와 다르게 이를 드러냈다. 마치 부모가 욕 듣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라오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모르겠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란 말인가?’
가슴속 한구석 찝찝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결국 라오는 무릎을 꿇었다.
레이몬드의 훌륭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질투심에 판단이 흐려졌던 것 같구나. 반성하자, 라오.’
재상 갈먼이 레이몬드를 치켜세우자, 질투심에 무턱대고 안 좋게 생각했던 것 같다.
‘……단순한 질투심으로 여기기에는 무언가 찝찝하긴 하지만.’
하지만 라오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이 찝찝함도 질투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탓일 거다.
‘추하구나, 라오! 이렇게 되었는데도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다니! 의심은 이제 그만! 조금 사기꾼 같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건 내 질투심 때문일 뿐! 저분은 훌륭한 분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내.
질투심 따위 용납할 수 없었다.
반성하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근거 없이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죄하겠습니다. 앞으로는 형님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몬드는 그 말에 속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론 겉으로는 쿨한 척 이렇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아닙니다. 앞으로 저 카플란 백작가의 라오는 페닌 준남작님을 평생 형님으로 모실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렇게 전도유망한 순진한(?) 청년 하나가 레이몬드의 사기(?)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앗싸!’
레이몬드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레이먼드와 라오는 동갑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이제 레이몬드가 형님이었다.
‘흐흐. 좋아.’
관리관이면 행정부 내에서도 고위직이었다.
즉, 앞으로 전도유망한 행정부 엘리트를 동생으로 삼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터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더구나 추가로 얻은 보너스.
[업적 : ‘최초의 수혈’을 달성하였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의학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보너스 레벨 업을 합니다!] [보너스 스킬 포인트가 100포인트 주어집니다!]덕분에 레벨도 38로 올랐다!
승급 기준인 40레벨이 코앞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계속 웃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환자가 계속 발생하였다.
“준남작님! 또 몸에 푸른 반점이 난 환자가 생겼습니다!”
“여기 환자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추가적인 희생자는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리 사람들에게 주의를 줘 환자가 생길 때마다 신속히 대처한 덕이었다.
다행히 빈민들은 수혈을 거부하지 않았다. 레이몬드를 향한 신뢰가 워낙 깊어서였다.
“왕자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
“우리 왕자님이 잘못된 방법을 권할 리가 없잖아?”
레이몬드를 믿고 수혈을 받은 환자가 멀쩡히 회복되자, 사람들은 ‘역시나 우리 왕자님!’이란 반응을 보였다.
“정말 다행이야. 왕자님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그래, 왕자님이 있으니, 전염병도 걱정 없어.”
사람들은 레이몬드를 칭송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사태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한편 그때, 어딘가에 존재하는 어두운 밀실 안.
어딘지 모르게 음습한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지금쯤 대혼란이 일어나야 하는데?”
바로 이번 음모를 계획한 배후의 이들이었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이번 사태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그게…… 빈민들 모두 큰 동요가 없습니다.”
“페닌 준남작이 완벽히 상황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생자도 거의 나오지 않고, 빈민들도 차분히 일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자, 블랙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수정구 안에서 정체불명의 배후에게 보고를 하던 인물로 현장에서 이번 일을 직접 계획하고 실행한 자였다.
“페닌 준남작 때문에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는다고?”
“네, 그의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은 큰 안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사람들끼리 전파되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니, 모두 그 말을 듣고 안정을 찾았고요.”
“아니, 그게 무슨…… 페닌 준남작이 말 한마디 했다고, 모두 네, 하고 알아들었다고?”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말 한마디로 모두를 안정시키다니. 얼마나 사람들이 믿고 따르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휴스톤 왕국의 국왕 오든이 와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거다.
“더구나 환자가 생기는 족족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조금 동요하던 빈민들도 그냥 그러려니 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치료 불가능한 병 아니었나? 우리가 확인했을 땐, 힐을 쓰면 오히려 악화했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고대의 비술 중 ‘수혈’이란 비기를 통해 치료하고 있다고…….”
블랙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였다.
어쨌든 상황이 의도한 대로 풀리지 않고 있었다.
‘전염병을 통해 베이 구역에 큰 혼란을 일으키려 했는데. 빌어먹을. 페닌 준남작, 그 천한 사생아 놈이 도대체 뭐길래?’
벌써 두 번째였다.
그 천한 사생아 놈이 그들의 일을 훼방 놓는 게.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은 초기 단계여서 통제가 가능한 거지, 곧 걷잡을 수 없게 환자가 늘어날 겁니다. 그러면 페닌 준남작 할애비가 와도 사태를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하들의 말이 옳았다.
이제 곧 수없이 환자가 늘어날 터. 그 천한 사생아 놈이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무리였다.
‘그래, 걱정할 것 없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누가 와도 우리의 계획을 막을 수 없어.’
블랙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계획의 성공을 기다렸다.
* * *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레이몬드는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자각하고 대책을 고민하고 있었다.
‘환자 발생이 점점 더 늘고 있어. 베이 구역 어디선가 원인체가 늘고 있는 게 분명해.’
레이몬드는 한시라도 빨리 원인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단 병을 옮기는 병원체를 정확히 알아내야 해.’
병의 발병 원리(Pathogenesis)는 명확했다.
모종의 병원체가 심각한 혈소판 감소증을 일으킨다.
문제는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전염병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진드기도, 이도, 벼룩도, 모기도, 낙타도, 쥐도, 파리도, 모두 이런 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를 옮길 수 있어.’
그중 어떤 게 원인인지 파악해 박멸해야 했다.
‘원래 왕국 수도에는 이런 전염병이 존재하지 않았어. 외부에서 유입된 거야. 뭘까?’
레이몬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뭔가 이상해. 페닌슐라 왕국이나, 황도, 자유도시연합같이 교역이 많은 곳이면 충분히 새로운 전염병이 유입될 수 있지만, 휴스톤 왕국에 새로운 전염병이라니?’
휴스톤 왕국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아니었다. 교역량이 적었다.
사람끼리 전염되는 전염병도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유의 전염병이 유입되다니?
‘혹시 누군가의 음모는 아니겠지?’
레이몬드는 섬뜩한 추측을 하였다.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 이 문제는 병의 정체를 밝혀낸 후 다시금 생각하자. 외부에서 어떤 병원체가 유입된 건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야.’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전염병이 더 퍼지면 걷잡을 수 없을 거야. 지금 당장 뿌리를 뽑아야 해!’
이제 완전히 몸을 회복한 라오가 레이몬드를 따라붙었다.
“뭔가 아시겠습니까, 형님?”
“크, 크흠. 라오?”
“네, 형님?”
“음.”
“……형님?”
레이몬드는 라오가 연달아 ‘형님’이라 부르자 본인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을 뻔하다 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라오가 형님이라 부르는 건 들어도 들어도 매번 좋네. 백작가 자제가 내 동생이라니! 큭큭.’
라오는 그런 레이몬드를 잠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환자들이 머물던 곳을 가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