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74
제 174화
정광 역시 진천희에게 희미한 적의만 보내올 뿐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
장문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건 소백룡과 손을 잡는 건 무당에도 큰 이득일 터. 정광도 그걸 알아 주는 건가.’
비록 화주의각을 주력 의각으로 쓰고 있다고는 하나 백린의각의 위세를 모를 장문인이 아니었다.
명길 진인이 괴팍하게 일을 처리했다고는 해도 어찌 보면 굉장히 좋은 한 수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이렇게 뒤처리를 하게 하셨어야 합니까아…… 사숙…….’
눈물이 난다.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억지로 추스르며 장문인이 말했다.
“그러면 그리 알겠다.”
회의가 끝났다.
진천희는 생각했다.
‘속가제자라… 의무는 없고 권리만 챙기는 형국이라 나야 너무 좋은 상황이긴 한데…….’
어차피 암기술을 혈생님께 일부 배웠던 터라 큰 거부감은 없다.
거기다 무당 권제가 보여 준 태극권은 단순한 태극권이 아니었고.
진천희의 삼재검법이 단순한 삼재검법이 아니듯이.
‘스승님이 납득하실지 모르겠다.’
은(恩)으로 납득하실지, 아니면 칼 뽑고 여기까지 달려와서 진정한 스승을 가리자고 무당 권제와 칼부림을 할지는 알 수 없는 일.
“…….”
진천희는 벌써 밤이 된 무당산의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평화롭게… 해결되도록…… 어떻게든 해 봐야……겠……다……. 안 되면 미리 응급 외상이라도 치료할 수 있게 비무 전에 세팅이라도…….’
천하 십 대 고수 둘이 제자 하나 두고 싸우는 미친 짓은 설마 일어나지 않겠지.
진천희는 자기가 너무 자뻑을 한 것이다, 그건 미친 가설이다, 그리 생각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래도 일단 스승님 답신이 올 때까지 미뤄 보자.’
발언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에 닥치고는 있었지만 웃으면서 뭉개는 건 진천희 특기였다.
의국에서도 진천희가 작정하고 뭉개면 막을 자가 없었다.
그 미친 스킬이 무림에서 발동했다.
* * *
어느 흉가. 깊은 어둠 속.
목소리가 울렸다. 마치 손톱으로 철을 긁는 것 같은 불쾌한 목소리가 이렇게 물었다.
[혈선의 도를 받아들이겠는가?]목에서 나왔다기보다는 머리에서 울리는 듯한 소리. 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내 팔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
[받아들이겠는가?]“받겠다.”
[혈선의 도가 함께하기를.]어둠 속, 목소리의 주인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머리가 잘린 불상과 정광이었다.
정광의 앞에 놓인 것은 피처럼 붉은 단환이었다.
기이하게도 단환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맥동했는데 마치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정광은 슬픈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이리 만든 것은 장문 사형과 사숙, 당신들이오.”
정광은 생각했다.
무당은 썩었다고. 이제 바뀔 때가 되었다고.
도인이면서 팔을 잃은 자신에게 양의심공을 끝까지 주지 않은 그들이야말로 도인이 아니라고.
“내 고통을 알면서도 참으로 매정하시오. 무당에 몸을 바쳐 온 나보다 저 소백룡 애새끼가 훨씬 중했소이까.”
정광은 억울함을 담아 이를 으득 갈았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악인은 자신이 악인인 줄 몰랐다. 정광은 그저 자기가 가엾고 불쌍할 뿐이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소. 대체 고인의 유언이 무엇이기에 내게만은 양의심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오. 이게 무당이라면…… 이게 도(道)라면…….”
그는 혈선교가 남긴 붉은 단환을 삼켰다.
으드득-
이를 갈며 그것을 받아들인다. 온몸의 기혈이 순간 들끓기 시작했다.
“크윽… 혈선…… 혈선이로다……!”
그는 독기 어린 얼굴로 무당을 원망했다.
착한 자신에게 마지막까지 양의심공을, 그 여지조차 내어주지 않는 썩은 도인들을 원망했다.
그럴 바에는 혈선의 길을 가리라.
“크아아악!”
정광은 목숨을 걸었다.
* * *
유골을 전해 주고, 양의심공 역시 전달했고.
주해서 역시 돌려주었다.
엄청나게 커 버린 천우와도 해후했고 모든 목적을 완료했다.
아니 완료된 줄 알았다.
‘속가제자…… 그것은 무엇인가.’
우선 진천희는 현 상황에 대한 고찰을 담아 장장 12장에 걸쳐 스승님께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선물과 이것저것 전부 챙겨서 보냈다.
[스승님과 무당 권제님의 연을 알게 되어 이 제자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어찌 되었든 화는 가라앉혀야 할 거 아닌가.
정파고, 사파고, 마교고 어쨌거나 무림에 뿌리를 둔 이상 은원은 중요하다.
스승님의 폭주를 막기는 할 터……라고는 생각하나 백 프로는 없다.
주왕 전하니, 폐하니, 혈생노괴 님이니 전부 은근슬쩍 제자를 탐냈던 터라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데 옛 은(恩)을 들고 와서 공동 전인으로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일을 칠 줄 누가 알았나.
‘권제께서는 세간의 상식을…… 벗어난 분이시란다. 허허허.’
바람이 불면 푸스스 날아갈 것 같은 얼굴로 장문인이 말씀하셨다.
그걸 세상은 ‘미친놈’이라고 부르지만 차마 본인 사숙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일.
최대한 멋지게 표현하는 것이 장문인의 미덕이리라.
‘…….’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준비하는 게 좋다.
진천희는 스승님의 답신이 올 때까지 최대한 뭉개면서 생각했다.
‘여기에 배분도 중요하겠네. 속가제자라고는 해도 권제 명길 진인의 제자면 각 문파 장로급은 되는 건데…….’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현대인은 유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뻘 되는 분들에게 반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천우가 진천희가 머무는 방으로 들어왔다.
“형.”
“천우구나.”
묵빛 비단 장포에 머리는 전보다 단정하게 묶었다.
날카롭게 선 턱선이 유달리 도드라졌는데 안대까지 하니 과연 명문 정파……가 아닌 사파의 마두 같아 보였다.
천우가 형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특유의 분위기 탓인지 사람 열은 썰고 온 것 같은 미소였다.
진천희는 그런 천우를 보며 ‘쟤가 생긴 거랑 다르게 착한 애다. 착한 애다.’ 자기최면을 걸었다.
“무슨 일이니, 천우야.”
“속가제자로 형을 받아들이는 의식을 치를 예정이에요. 미리 준비하고 있으라고 태사숙조께서 말씀하셨어요.”
“벌써? 이렇게 빨리?”
“네. 태사숙조님 말을 그대로 빌리면…… 백린의선이 와서 난……동을 피우기 전에 빨리 끝내 놔야 한다고. 은(恩)을 비록 크게 입히긴 했지만 눈 뒤집히면 뭔 짓 할지 모른다고…….”
“난동이라고 표현하셨니?”
“아뇨. 정확히는…… 개……ㅈ……ㄹ…….”
“그렇……구나.”
나이 있는 무인일수록 스승님의 성격을 모르는 이가 없다.
진천희는 생각했다.
‘급성 배탈을 일으키는 혈이라도 미리 눌러 놔야겠군.’
형의 광기를 모르는 천우는 말을 이었다.
“태사숙조께서는 저도 직접 전수하고자 하신다고 하셨어요.”
“우와! 그건 정말 대단한데?”
“다 형 덕분이죠.”
천우가 방긋 웃었다. 그 미소가 사람의 간을 떨리게 했으나 자기최면을 끝마친 진천희에게는 아이의 천진한 웃음처럼 보였다.
천우가 말했다.
“형이 제 동문이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사실 꿈인가 싶기도 해요.”
“공동 전인이긴 하지만 말이지.”
“네. 공동 전인이라고 해도 동문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끄응…….”
좋은 일이긴 했다. 천우가 기왕 도명을 받게 된 이상 높은 곳까지 올라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걸 위해서면 진천희도 얼마든지 도울 생각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권제의 직계 제자면 천우의 앞날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진천희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내가 만약 여기서 무르면 너도 직계 제자가 취소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형에게 무조건 유리한 일인데 그럴 필요 있나요?”
“그건 그렇지.”
“거기다 인질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죠.”
진천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 그러면 알겠어.”
문득 진천희는 천우가 살짝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겁나?”
“네. 태사숙조께서 제게 실망할까 무서워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진천희는 그렇게 사제가 된 천우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형이 지켜 줄게. 천우야.’
이렇게 된 거 형으로서 길을 닦아 주어야겠다고 진천희는 굳게 결심했다.
* * *
의식은 금전 사원에서 이루기로 했다.
금전 사원은 가장 높은 봉우리의 도관이었기에 종종 이러한 의식을 주관하기도 했다.
무당은 잠시 금전 사원을 폐쇄하여 외인을 받지 않고, 의식 준비를 했다.
비록 약식으로 한다고는 하나 부족함이 없어야 했다. 장문인은 자신과 장로들, 그리고 도인들을 갈아서 의식을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천희는 생각했다.
‘신무협에서 공동 전인은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 전개인데 그걸 내가 하게 되었네.’
주인공이 여러 문파의 무공을 사용하는 일이야 무협에도 꽤 많이 있었으나, 이렇게 공동 전인으로 삼아 의식까지 치르고 정식으로 배우는 형태는 요즘 무협에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전개였다.
마니아로서는 흥미진진했고, 스승님을 생각하면 이래도 되나 싶다.
진천희는 일단 배탈 혈을 누르고 바닥을 굴러 시간을 벌었다.
그렇게 얼마나 뭉갰을까.
아침에 명길 진인과 장문인이 진천희의 상태를 보러 온 차에 전서가 도착했다.
진천희와 명길 진인 양쪽 모두에게 하나씩 전서가 전해졌다.
명길 진인은 서신을 받자마자 광소를 터뜨렸다.
아마 범상치 않은 글인 듯했다.
그걸 옆에서 읽은 장문인이 당장 목이라도 매달 것 같은 표정으로 명길 진인을 한 번, 무당산을 한 번, 그리고 자신의 발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셨는지 풀썩 주저앉았다.
장문인의 핏기 없는 얼굴이 시체 같았다. 이성을 잃고 장문인이 중얼거렸다.
“사숙… 아니…… 왜 나한테…… 뒤처리를 어찌하라고…….”
진천희에게 온 서신은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우리 희가 너무 사람이 좋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기왕 이리된 거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우렴. 무엇 하나라도 네 목숨을 구명할 수 있다면 이 스승은 기쁘단다.]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도리어 따뜻한 응원의 서신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스승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나도 더 이상 미룰 건 아니지만…….’
진천희는 머리를 긁었다.
‘그러면 대체 명길 진인께서는 무슨 서신을 받은 것이고…… 장문인은 왜 다리가 풀리신 것일까.’
설마 스승님이 명길 진인에게도 너무 따뜻한 서신을 보내서 감동해서 장문인이 쓰러지신 건가?
“…….”
“자, 그러면 만병통치약(전서)이 도착했으니 의식을 시작하자꾸나.”
명길 진인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백린의선을 따르는 불초 제자가 꾀병을 부린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곤란했다.
의원이 작정하고 부리는 꾀병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트집이라도 잡았다가는 천하의 피눈물도 없는 제자 도둑 놈이라고 손가락질당하기 딱 좋았다.
‘알면서도 속아 줄 수밖에 없는 판이 이런 게지.’
힘으로 밀면 포기하고 올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스승님 답장이 올 때까지 작정하고 구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허허허, 소백룡 이 독한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