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72
제 972화
“……어……. 진 아우.”
남궁운은 엎드려있는 진천희와 현수막을 번갈아 본다.
거대한 붓으로 일필휘지로 써 있는 글씨는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자의 글씨.
이윽고 진천희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힘내시게. 진 아우.”
진천희는 엎드려있는 채로 말했다.
“……예. 남궁 형이야말로 힘든 일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그 모습에 남궁운은 다시 웃고 말았다.
본가에 마교의 첩자가 있고 그게 작은어머니고.
그녀가 오랫동안 남궁세가에 있었던 만큼…… 어디까지 남궁세가에 마교의 세력이 뻗쳐져 있는지 알 수 없고.
배다른 어린 남동생인 남궁수는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고.
가주로서 미칠 것 같은 상황임에도,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건 이 녀석 덕분이겠지.
남궁운은 역설적이게도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진천희를 시야 속에 오랫동안 담았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웃을 거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진 아우님은 결코 웃길 생각은 없어 보이나, 결론적으로 좀 재미있는 사람 아닌가.
‘그래.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지.’
만약 본가의 위기 속에서 등 뒤의 칼을 받아야 했다면 남궁세가는 강호에서 이미 한 줌 핏물이 되었으리라.
“그러면 나 감세.”
“잘 가십시오. 남궁 형.”
남궁운은 휘파람을 불며 멀어진다.
가까이에서 보이는 남궁운의 등은 정겹지만, 멀리서 보이는 남궁운의 등은 서늘하다.
각오를 다지기라도 하는 걸까.
허나, 여기서부터는 남의 집안싸움.
진천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남궁운이 부디 집안의 간자를 잘 색출하길 바라는 것 정도겠지.
남궁 형은 낭만주의자지만, 동시에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니까.
점점 멀어지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던 진천희.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큰 소리로 말했다.
“남궁 형—!”
“음?”
남궁운이 몸을 돌린다.
진천희는 말 대신 전음으로 답했다.
[제 동생 하륜이가 빚을 졌습니다. 하륜이의 은(恩)은 저의 은(恩)이기도 하니 언젠가 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한 가지 말씀하십시오. 어지간하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거참 쪼잔하군. 시원하게 뭐든 다 들어준다고 하면 덧나나?]진천희는 맑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술 마셔도 남궁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시면 그건 안 들어드릴 테니까요.]그 웃음에 먼 곳에 있는 남궁운도 그만 마주 웃고 말았다.
[천하제일신의이자 현경을 바라보고 있는 검수에게 빚을 지운다라. 왠지 우쭐거려지는군. 그래. 그때가 된다면 한 손 부탁하네.] [네.]한번 받은 은(恩)은, 반드시 같은 은(恩)으로 갚아준다.
그것이야말로 강호의 인연 아닌가.
남궁운이 멀리서 손을 흔들고는 다시 걸어갔다.
아까보다는 좀 더 걸음이 따뜻하다.
가족조차 믿을 수 없는 강호에서, 누구 하나라도 자신의 편이 되어준다는 건 그런 것이겠지.
‘이제 나도 돌아갈 시간이다.’
진천희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스승님을 무슨 낯으로 봐야 하나, 이거.’
* * *
돌아가니 유호가 말했다.
“오셨군요. ‘활인천마.’”
털썩.
진천희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기운을 찾았는지 진천희가 일어난다. 유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주인님께서 ‘활인천마’를 기다리십니다.”
털썩.
다시 주저앉았다.
“활인천……?”
털썩!
“활인?”
털썩!
“활……?”
털써덕!
무슨 망가진 목인도 아니고 활인천마를 읊을 때마다 네발로 주저앉는단 말인가.
유호는 재미있어졌지만, 그래도 참기로 했다.
이러다가는 삼보일배하게 생겼고 무엇보다 그의 뒤에서 제갈린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야, 왔구나. 그래. ‘활인……’을 하고 돌아온 기분은 어떠니?”
우뚝.
“……?!”
엎드리려다가 진천희가 멈춘다.
“이야기는 잘 들었단다. 오랜만에 널 보니 ‘활…’기찬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우뚝?
다시 엎드리려다가 멈췄다.
“그래그래. 내 제가가 또 ‘활인’을 하여 ‘천…’기를 바꾸었구나.”
우, 우뚝?
제갈린은 그렇게 오랫동안 제자를 놀렸고.
진천희는 덩달아 엉거주춤한 코어 운동을 해야만 했다.
스승님이 질릴 때까지.
계속.
* * *
대체 스승님과 유호는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걸까.
일단 도청기처럼 모든 대화 내용을 알고 계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조건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토용이 중요한 매개체인 건 확실할 거고.
생각해 보면 목격자 중에 백린의각에 연이 있는 사람이면 서신이 갈 수도 있겠다 싶고.
사람들을 구함에 따라서 유호의 힘이 조금씩 더 강해지는? 모양이니 그 또한 뭔가 영향이 있겠다 싶기도 했다.
어쨌거나…….
‘후, 스승님… 유호……. 크윽… 하필 가장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을 알리고 말았다니… 고통스럽구나.’
스승님은 제자가 당황스러워하시는 모습을 좋아하신다.
그렇게 몇 번 놀리시더니 만족하셨는지 차를 한 모금 삼키셨다.
“그래. 마교가 마공서를 뿌리고 있는 게 작금의 가장 큰 문제이지. 생각해놓은 것이 있느냐?”
“남궁형을 만났을 때 떠오른 생각이 있긴 합니다.”
진천희가 반짝이는 눈으로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너는 여전히 제정신 아닌 발상을 하는구나. 하지만… 이성은 될 거라고 말하고 있으니…….”
강호의 상궤를 벗어난 계획.
허나, 이번에도 제갈린의 두뇌는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좋구나. 해 보거라.”
허락이 떨어졌다.
진천희는 곧바로 인쇄소로 향했다.
* * *
목판활자 인쇄술은 자그마치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도장 자체가 일종의 활자인쇄니까.
때문에 이 세계에도 목판활자 인쇄 기술은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 널리 퍼지지는 않았는데.
첫째가…….
‘문맹률이 무려 구 할에 달하기 때문이지.’
이 시대의 사람들은 글자를 배우는 것보다 당장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노동을 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밤낮으로 바느질을 해서 아이가 글을 배우게 지원할 수 있는 부모는 고사에나 나올 정도로 흔치 않고.
보통은 공부보다는 생업이 우선이다.
그도 그랬다.
비록 노예제를 폐지했고, 신분과 상관없이 사람을 뽑는다고는 하나.
그래도 결국 태생이 어느 수저냐에 따라 계급이 분명한 사회이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이 장원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것은 준마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확률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글을 가르치는 부모가 대단하니까 미담인 거고.
보통은 글을 익히지 않는다.
그리고 익히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
당장 우리 할머니 세대만 해도 한글을 모르신 채로 그냥 사시다가 노인 학교 들어가서 그제야 글 배우는 일도 왕왕 있지 않나.
이 시대는 당연하지.
그리고 또 한 가지.
글을 아는 10%는 인쇄물보다는 명필가가 쓴 글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다.
물론 인쇄물은 이 시대도 당연히 있고, 필요에 따라 대량 인쇄도 하고.
그러한 인쇄소도 있지만 이게 현대 지구처럼 책을 낼 때 당연히 인쇄소를 거쳐서 출력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고 할까.
‘거기다 강호 특유의 문화가 또 있지.’
제철 관련 기술처럼, 비인부전이라는 이름하에서 지역마다 목판인쇄의 기술 격차가 다르다.
같은 목판인쇄 기술도 쌓아온 노하우가 다르다 보니까 그렇게 찍은 인쇄물들의 수준이 들쭉날쭉하다.
‘그래서 마공서를 대량으로 푸는데 일일이 손으로 누군가 필사해서 썼던 거지.’
그리고 기왕이면 ‘있어 보이는’ 쪽이 더 좋아 보였으리라.
앞에서 말했던 직접 쓰는 쪽을 더 있어 보인다고 친다는 그 인식.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그게 뭐 대단한가 싶지만 이 시대에 책은 엄연히 사치품이며 소장품이기도 하다 보니.
비급을 목판으로 찍는 미친놈은 없다.
‘심지어 저잣거리 삼재보법도 누군가가 필사해서 돌아다니니까.’
그러나 여기 있다.
비급을 목판인쇄로 찍으려는 놈이.
‘그래. 백린군의 인쇄소는 제국 제일이라고 할 만하지.’
특히나 의학서… 아니, 이곳 표현을 빌리자면 의서는 당연히 삽화도 들어가야 하니 이걸 손으로 다 그리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목판으로 찍어낸다.
인체의 세밀한 부분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목판을 제작하고 찍어내는 기술은 단연 최고라 할 수 있었고.
그 인쇄 장인들의 수준도 상당하다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의서가 가능하기에 의보도 이걸로 찍어서 보내고 있고, 요리서도 틈틈이 찍어서 보내고 있고, 기술서나 사람들이 잡서라고 하는 것들도 다 찍어서 보내고 있지.’
심지어 어린이 동화나 협객 소설도 찍어서 팔고 있다.
‘그게 가능한 건 우선적으로 종이 단가를 엄청 낮췄기 때문이고. 그렇게 찍은 서적들을 팔 수 있게 백린군과 강소성 전체 교통이 발달했기 때문이겠지.’
강소성 하나가 얼마나 되냐, 하겠지만 그 크기가 대한민국 정도는 되다 보니 소비시장도 크다.
강소성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인구 수만 해도 수백만이나 되니까.
거기다 X튜브나 모바일 게임도 없는 시대이니 사람들의 유흥거리가 몇 없지 않던가.
예전에 시험 삼아서 십자 낱말 퍼즐도 의보 뒤에 넣어서 뿌려봤는데 미친 듯이 팔렸다.
그래서인지 백린군의 문맹률은 크게 격감했다.
한때는 40%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백린현이 군으로 확장되면서 다시 한번 치솟고.
지금은 50% 선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중.
이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성과라 할 수 있겠지.
다른 지역에 비해 무려 40%나 많은 이들이 글을 쓰지는 못해도 최소한 읽을 줄은 안다는 뜻이니까.
그런 인쇄소.
“이번에는 뭘 들고 오셨습니까. 소각주님?”
백린인쇄소 소장.
백허란이 묻는다.
백허란은 장인이자 식자로 세상 모든 책을 좋아하고 그것을 목판으로 남기는 것이 세상의 가장 큰 낙이다.
인쇄소장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주신 동화책은 꽤나 인기가 좋아서 중쇄를 할 계획입니다.”
“오우, 그래요?”
“네. 무엇보다 짧아서 책값이 싸요. 애들이 천자문 떼기 좋다는 평이 많다고 하네요.”
진천희는 헤헤헷,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에는 뭔가요? 역시 평소대로 의서? 아니면 교재? 요리서도 좋지요.”
진천희가 말했다.
“…무공서.”
“네?”
인쇄소장이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무공서요.”
“……?”
잘못 들었나 싶어 귓구멍을 팠다.
* * *
목판인쇄.
사실 목판인쇄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다.
목판(木版).
글자를 해석해 보면 나무로 만든 판이라는 뜻인데……. 판이라는 게 무엇인가?
넓고 납작한 형태를 판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그렇다.
목판이라는 건 하나의 널빤지에 문자나 그림을 새겨 넣는 형태다.
제작도 상당히 어렵고, 인쇄에서도 여러모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나온 게 활자 인쇄 기술이다.
글자 하나하나를 따로 조각하고, 인쇄할 적에 조각 모음 하듯이 합쳐서 인쇄하는 것!
거기서 더 발전하면 금속활자가 나오게 되는데…….
놀랍게도 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대한민국에서 나왔다.
13세기 고려에서 발명한 것이니까!
진천희는 그런 금속활자까지는 만들지 않았지만.
이 시대의 목제활자 인쇄 기술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단계까지는 머리를 쥐어 짜내서 예전에 전수해둔 상태였다.
사람이 손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손잡이를 꽈악 돌리면 포도 압착하듯 기관진식이 돌아가면서 종이를 누르도록 되어 있다.
사용하는 먹 역시 수성이 아닌 유성.
구텐베르크 방식을 응용했다.
이러면 일일이 인쇄판을 어루만지며 균일하게 누르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으니까.
거기다 나무판의 강도가 금속판보다야 못하기에 각오를 했는데 이 강호의 장인들이 뭔 짓을 했는지 목판으로 검수의 칼을 막아내더라.
그러고도 흠집이 안 나는 걸 보고 어떻게 한 거냐고 물으니.
원래 불경 찍을 때 쓰는 나무는 영산에 있는 걸 베어다가 건조하고 깎고 특수한 유약 처리를 반복하는데.
그걸 하면서 한 달 동안 살생을 하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은 장인이 경건한 마음으로 하다 보면 목판이 철보다 단단해진단다.
이러한 목판은 오랫동안 찍어도 갈라지지가 않는다고.
‘처음에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했지.’
그런데 믿음이 진짜가 되는 이 세계를 얕본 모양이다.
불경이 아닌 다른 활자를 깎게 시켜 보니 진짜로 강철이 아닌데도 그 강도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물론 불경 깎는 것보다는 좀 약하다.
믿음이 덜 들어간 모양이다.
‘그냥 영산에서 자라는 나무에 유약 처리만 해도 엄청 단단했지.’
하지만 그건 믿음이 아예 안 들어가는지라 좀 더 약하다.
그런 이유로.
지구의 인쇄 역사&중원 월드의 kiiiiiii의 콜라보가 합세하여.
백린인쇄소의 인쇄 기술은 제국 제일. 생산량도 압도적이다!
‘미친 소리 같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런 압도적인 생산 능력을 이용, 직원을 추가 모집해서 3교대로 돌리면서 전력으로 무공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진천희가 하려는 일은 간단했다.
무량연화범심공(無量蓮華梵心功)을 대량 인쇄해서 강호에 뿌리는 것.
무량연화범심공(無量蓮華梵心功).
이것은 기공이라기보다는 마음을 가다듬는 심공(心功)으로 그 연원은 세림 교국과 담진 왕국이 자리한 서장 지역.
고대의 불가에서 파생되어 나온 이 심공은 아주 놀라운 효능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종진기를 전부 범심공의 불가의 기운으로 바꾸어 준다!
즉, 마공을 익혀도 주화입마에 들거나 미치게 되는 것을 막아주는 놀라운 효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공의 부작용을 제거하고 마공 특유의 미친 성장 속도로 개같이 강해진다, 개꿀!’ 이런 건 아니다.
불가의 기운으로 바뀌면서 마기의 절대량이 완전히 줄어들기 때문.
‘즉. 마공 익히고 이거 익히면 대충 쌤쌤이 되어 버리지.’
차라리 이걸 단독으로 익히는 게 마공 익히는 것보다 나은 상황!
이것도 신공절학에 속하는 무공이기 때문.
“진짜로요? 이걸 대량 인쇄해서 팔아먹겠다고?”
인쇄소장은 경악하여 바라보았다.
“아, 네. 마공서처럼 공짜로 뿌리기는 좀 그러니까 금전 하나는 받고 팔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쇄소장 평생 들어본 소리 중에 가장 미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