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28
기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곧바로 후회했다.
‘아! 실력을 숨겨야 귀찮은 일도 생기지 않는데…’
그러나 방금의 상황은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놔뒀으면 나도성과 화산파 제자들은 분명히 옥면공자를 공격했을 것이고, 옥면공자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었다.
무림맹 진영에 기수 한 사람을 믿고 단신으로 따라 온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배짱이 좋고, 어떠한 도전에도 등을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항마대사가 말했다.
“기소협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기수는 그에게 공손히 포권을 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무림맹 쪽 수장이니까 그에겐 최대한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했다.
항마대사가 물었다.
“아미타불…. 여기서 빠져나갈 때까지 한시적으로 마교와의 싸움을 중단하기 바란단 말씀이시지요?”
“예. 그렇습니다.”
항마대사는 옥면공자에게 물었다.
“마교 측은 이 사안에 동의했소?”
“우리는 기소협을 믿고 그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소.”
무림맹 사람들 모두 놀란 표정으로 기수를 봤다.
뭘 어떻게 했기에 마교 쪽 수장 입에서 믿는다는 말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일부는 혹시 기수가 마교로 돌아선 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수의 언행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지는 않았다.
기수가 항마대사는 물론 무림맹 사람들 모두가 듣도록 말했다.
“나는 마교건 무림맹이건 강자가 약자를 쓰러트리고 목숨을 빼앗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흉계에 빠진 게 분명한데 그 안에서 서로를 죽이는 바보 천치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절대로 봐줄 수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무림맹과 마교가 워낙 오랜 숙적이기 때문에 삼황맹만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서로에 대한 공격의 손길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기수가 나타나서 마교 측 수장을 데려오기까지 했으니, 일단 못 이기는 척 하고 마교와 휴전할 명분이 생겼다.
그것은 곧 이 끔찍한 곳에서 빠져나갈 길이 열린 것과도 같기 때문에 다들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항마대사가 말했다.
“좋습니다! 이곳을 빠져나갈 때까지 우리 무림맹도 잠시 마교를 적으로 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기수는 기뻤다. 돌아보니 옥면공자의 입가에도 슬쩍 미소가 번졌다.
무림맹 군웅들 모두 기수의 존재에 대해 놀라기도 하고 고맙게도 생각했는데, 딱 하나 화산파만 예외였다.
나도성은 기수에게 다시 덤빌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웃는 낯으로 그를 대할 수도 없어서 슬그머니 뒤로 물러가 어둠 속에 숨었다.
다른 화산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수는 그런 그들을 보며 씩 웃었다.
사실, 실력을 드러낸 건 좀 후회가 되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운기조식 한 보람을 찾은 기분이었다.
이미 예전부터 나도성을 이길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나도성 정도 되는 상대의 검을 피하면서 뺨을 때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쯤 성취가 이루어졌으면 나머지 11명을 만나도 되는 거 아닐까?’
그러나 기수는 그 생각을 곧 지웠다. 자기 목숨이 걸린 일인데 서둘러서 좋을 일은 없었다. 더 강해질수록 더 안전해지는 것이다.
옥면공자는 항마대사와 출구 찾기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으르렁거리던 때와 달리 하나의 공동목표가 생기자 의외로 말이 잘 통했다.
기수는 그 회의에서 슬그머니 빠졌다.
여기까지 됐으면 이제 자기는 뒤로 물러서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앞으로 동굴을 빠져나갈 때까지 한 마디도 안 하고 항마대사와 옥면공자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었다.
그때쯤 되면 사람들이 자기 존재도 좀 잊어주었으면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무림맹엔 절대로 자기를 잊지 못할 사람이 있었다.
“기소협! 굉장했어요!”
“오빠! 정말 멋졌어요!”
두 여인이 거의 동시에 활짝 웃는 얼굴로 기수에게 말을 걸었다.
“헉!….”
기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나기를 포함해서 총 네 사람이 서로를 관찰하고 견제하느라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세 여인. 당운영과 호운혜, 그리고 탁지연의 눈빛은 점점 한기를 띠어가기 시작했다.
“이, 인사들 해….그, 그러니까….”
세 여인이 동시에 기수를 노려봤다.
기수는 그들을 서로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좋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당운영은 약을 받아먹다가 여성이 되기 위한 수술까지 하게 된 환자고, 호운혜는 몸 어디건(특히 가슴) 건드리기만 스위치가 켜지는 멜론가슴의 긴 다리 아가씨, 탁지연은 예쁜 데다 머리까지 좋은, 특히 특정 부위의 라인이 예술인 큐트 걸이었다.
그리고 서로 초면인데 한 자리에 동시에 모인 것이다.
당운영이 호운혜에게 먼저 물었다.
“언니도?”
그러자 호운혜는 기수를 한 번 노려본 후 당운영에게 물었다.
“넌 너무 어리지 않냐?”
당운영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탁지연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기수에게 물었다.
“저 년은 누구야?”
탁지연은 발끈했다.
“년이라니!”
당운영은 지지 않았다.
“흥! 난 사천 당가의 당운영이고, 이쪽 언니는 9파 1방 4문 5가 중 4문에 속하는 사해문의 호운혜다. 넌 어디 출신의 누구냐?”
“난….”
탁지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곳에서 약선문이 몰살당한 것을 미지의 사건으로 조용히 덮고 넘어가려면 자기가 철산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혀선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가나 사해문에 비하면 철산문이 좀 처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가 대답을 못하자 당운영과 호운혜 모두 기가 살았다.
“넌 뭔데 우리 오빠와 함께 있는 거지?”
기수가 급히 나서서 탁지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러지들 마. 지연은 너희들과 달라.”
그러자 당운영과 호운혜 모두 표정이 변했다.
“뭐가 어떻게 다른데? 우리를 어떻게 생각한 거야? 그리고 저 년은?”
기수는 자기가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지연은 내 모사야. 머리가 엄청나게 좋다고.”
“정말 그것뿐이야?”
기수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때 탁지연이 나섰다.
“기공자와 나는 미래를 함께 하기로 한 사이야!”
당운영과 호운혜의 질투가 폭발했다.
“기소협이 나를 놔두고 그럴 리가 없어!”
“오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저 년 하는 말이 사실이에요?”
기수는 당황한 얼굴로 탁지연을 봤다. 그녀와 미래를 약속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탁지연은 기수에게 메롱~!으로 답했다. 기수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방식으로 복수를 한 것이다. 그 표정이 완전 귀여워서 잠시 멍해졌다.
당운영이 다그쳤다.
“어서 대답해 봐요!”
기수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솔직히, 세 명 중 한 명만 고르라면 당연히 탁지연이었다.
그녀의 힙 라인은….. 꼭 몸이 그래서라기보다는, 탁지연에겐 이제까지 같이 잔 그 어떤 여자들과도 다른 감정적 교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녀가 복수라는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함께 노력하고 오랜 시간 같이 있다 보니까 그런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심지어는 사랑한다는 말까지 해버린 것이다.
그 말 한 것이 후회되지도 않았다. 탁지연은 예쁠 뿐만 아니라 머리도 굉장히 좋고 엉덩이…. 어쨌거나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기수가 탁지연을 감싸고돌면서 변명조차 못하자 당운영과 호운혜는 더 흥분했다.
기수는 당운영의 손이 소매 안으로 숨는 것을 보고 독 묻은 암기를 던지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잽싸게 그녀의 혈을 짚었다.
무림맹 사람들이 전부 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귀를 열고 있는데 여기서 더 소란이 확대되면 곤란했다.
“하핫! 많이 피곤한가보네. 운혜 너도 피곤하냐?”
호운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기도 시끄럽게 굴면 당운영처럼 점혈 당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 아이 좀 당가 사람들에게 데려다주겠어?”
“그 전에 확실히 얘기하세요. 나도 만나 줄 거죠?”
그녀는 확실히 쿨했다. 어차피 한 남자한테 일부종사할 마음이 없어서인지 기수를 독차지할 생각도 없는 듯 했다. 그녀의 관심은 다만, 이따금씩 안쪽 깊은 곳을 시원하게 긁어달라는 것, 딱 그 정도였다.
“그럼! 기회가 닿으면 언제라도… 으헉!”
기수는 말을 하다 말고 신음을 토했다. 등 뒤에서 탁지연이 꼬집었기 때문이다.
호운혜가 당운영을 안고 자리를 피해주자 기수는 돌아섰다.
그리고 탁지연의 부릅뜬 눈을 마주봐야 했다.
조금, 아주 약간 무서웠다.
“얘기해보세요. 저들은 누구죠?”
기수는 남녀관계에 있어 솔직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잘 모르는…. 헉! 그, 그만… 꼬집지 마.”
“어서 바른대로 얘기하세요!”
“예전에 사귀던 여자들이야. 지금은 사랑이 식었어.”
“흥! 그녀들은 안 그런 것 같던데요?”
“그래 봤자지 뭐. 사랑이란 게 원래 양쪽이 다 동의해야 이뤄지는 거잖아.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건 무효라구.”
탁지연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저 두 사람이 끝인가요?”
“그럼! 당연하지.”
“솔직히 말하세요. 지금 말하면 다시 따지지 않을 게요.”
기수는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양손을 활짝 펼쳐서 그녀 앞에 내보였다.
“10명? 그렇게 많아요?”
기수는 잽싸게 손을 오므렸다가 다시 활짝 펴는 동작을 몇 번 반복했다.
탁지연은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홱! 돌아서서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기수는 급히 그녀를 따라갔다.
‘아! 놔…. 난 이런 거 잘 못하는데….’
그래도 왠지 모르게 토라진 여친 따라가서 달래주는 게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한적한 곳에서 탁지연을 붙잡고 말했다.
“미안해.”
“뭐가요? 뭐가 미안한데요?”
기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맞아. 난 미안할 게 없네.”
“뭐라고요?”
“사귄 여자가 많건 적건, 어차피 너를 만나기 전의 일이었어. 그러니까 너한테 미안할 이유는 없는 거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기수는 씩 웃었다.
“후후….! 내가 깜빡하면 넘어갈 뻔 했는데…”
“넘어가다니… 뭐를요?”
“너 지금 머리 굴리는 거지? 날 길들이려고.”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하하! 난 너를 만나기 전에 다른 여자들 사귀었던 거 전혀 미안하지 않아.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앞으로도 다른 여자가 있으면 만날 거야.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떠나가도 잡지 않을 테니까 좋을 대로 해.”
기수는 이쯤에서 탁지연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하면서 눈물을 흘릴 거라고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아온 상투적인 루틴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슬피 울어도 마음 약해지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는데, 탁지연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기소협이 저만 사랑해주기를 바래요. 하지만 영웅은 호색이라고 했으니 저 혼자 독차지하는 건 욕심이겠죠? 그래도 다른 여인 만나는 건 최대한 자제해주세요.”
기수는 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곧 여성의 인권을 억누르는 봉건제도. 능력 있는 남자의 일부다처를 용인해주는 사회 분위기에 박수를 보냈다.
‘아무래도 지금 시대가 나한테는 딱 맞는 것 같아!’
기수는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걱정 마. 내겐 너밖에 없어.”
그러자 탁지연도 기수를 세게 안았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당장은 듣기 좋은 얘기였던 것이다.
기수가 슬그머니 손을 아래쪽으로 내려 우월한 라인의 탱탱한 힙을 더듬으며 그녀 의사를 타진해보았다.
“마침 이 구획에 사람도 없는데 우리 한 번…. 아야!”
그녀가 꼬집어서 더 이상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무림맹과 마교가 휴전을 하자 상황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일단 가능한 모든 구획을 조사하여 외부로부터 바람이나 물이 새어 들어오는 틈을 찾았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약해 보이는 암벽을 찾기까지 이틀이 걸렸다.
그 다음은 집중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바위산을 사람의 힘으로 뚫고 나간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수백 명이 쉬지 않고 교대하면서 긁어내니까 구멍은 점점 커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작업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환호성이 터졌다.
“바람이다! 바람이 들어온다!”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함성을 터뜨렸다.
마교도와 무림맹 사람 중 일부는 서로 마주보고 웃으면서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그때 옥면공자의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무림맹주에게 묻겠소. 우리의 휴전은 정확히 언제까지요? 확실히 합시다.”
이제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으니까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순간 동굴 안에 긴장감이 흘렀다.
항마대사가 대답했다.
“아미타불…..! 지금부터 열흘 동안 유지합시다.”
그 정도면 양쪽 모두 홍안산을 완전히 벗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무림맹 군웅들과 마교도들은 안심한 표정으로 서로를 봤다. 이렇게 적개심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 진영을 보는 것은 무림 역사상 아마 최초일 듯 했다.
한 사람에 의해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기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운영이 독침 들고 찾아다닐 거라는 사실을 알고, 불필요한 말썽을 피하기 위해 탁지연과 함께 숨어 다니기만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