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44
기수는 가능하면 강대원을 피해서 움직였다.
같은 편, 그것도 자기 직속상관을 이렇게 눈치 보면서 피해야 하는 상황은 별로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원하던 바를 이루었으니 상관은 없었다.
속좁은 상사와 천년 만년 함께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목표는 수로맹주를 만나는 것. 그때까지만 동행하면 되었다.
수로맹 선단은 전투준비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적의 정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해가 지고 밤이 깊자 순식간에 대형이 이루어졌고 일제히 강변으로 돌진했다.
그동안 물 위에서 계속 훈련을 해서인지 3개 수채가 합동으로 움직이는데도 줄이 딱딱 잘 맞았다.
하달된 명령은 단순했다.
최고 속도로 치고 들어가서 강변 갈대숲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배부터 차례로 불을 지르면서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문제는 적이 배들을 넓게 퍼뜨려 놓아서 전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기 어렵다는 것인데, 각 수채마다 구역을 정해서 가능한 많은 배를 태우는 데서 만족키로 했다.
그런데 수로맹 배들이 거의 다 도달했을 무렵 다급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강가에 떠있던 경비선에서 습격을 알아차리고 경보신호를 울린 것이다.
그러나 발각되었다고 해서 멈출 수로맹이 아니었다.
선두부터 갈대숲으로 파고들어가 작전대로 불을 질렀다.
기수의 배도 맨 먼저 강변에 도착했다.
어유 단지와 횃불을 던져 배에 불을 붙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었다. 빈배만 묶여 있는 곳이라 화살 한 대 날아오지 않아서 거의 거저먹기였다.
“완전히 기습 성공이군!”
그러나 목표물이 흩어져 있는 게 문제였다.
“아! 좀 한 군데 모여 있으면 얼마나 좋아.”
물론 수로맹 쪽에만 좋은 일이 될 것이었다.
잠시 후 강변이 시끄러워지면서 백리세가와 응원 온 문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것이다.
장원까지는 거리가 먼데 금방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근처에 집결해 있었던 것 같았다.
기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도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수로맹 쪽이 딱 한 발 빨랐던 것이다.
‘나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냐?’
그런데도 질시만 하는 강대원이 참 바보같이 느껴졌다.
강변 여기저기 불꽃이 치솟으면서 수로맹의 작전은 대성공으로 보였다.
그러나 진척이 예상외로 더뎠다.
백리세가 쪽 병력이 의외로 빨리, 대규모로 쏟아져 나와 방해했기 때문이다.
기수는 그들을 그냥 놔두면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가 가서 혼란을 좀 일으켜야겠다.”
기수는 육대기를 불러 배를 근처 강변에서 배회하도록 지시했다.
언제든 자기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탁지연이 따라나섰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형님!”
“좋을 대로 해.”
말린다고 따라오지 않을 그녀도 아니었다.
갈대숲에 내린 기수는 적진을 향해 달려갔고, 오래지 않아 백리세가 무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기 수적 놈들이 있다! 잡아라!”
기수는 씩 웃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칼을 땅에 던져버렸다.
예전에는 놈들의 목을 뎅겅 뎅겅 잘도 잘랐지만 그동안 며칠 함께 있다 보니까 그래도 같은 편이었다고,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공격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배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죽어랏!”
선두에 달려온 자가 장창으로 기수의 가슴을 찔렀다.
기수는 그 창을 피하면서 확 잡아당겨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검지로 수혈을 눌러 재워버렸다. 그리고 창의 날을 떼어낸 후 창대를 반으로 뚝 잘라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몽둥이 2개를 가지게 된 것이다.
“덤벼라!”
적의 수가 많았지만 기수는 여유 있게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의 몽둥이가 한 번 파공음을 낼 때마다 적은 팔이 부러지거나 다리가 부러져서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쓰러졌다.
기수는 백리세가 무복을 입은 상대는 그나마 좀 덜 아프게 때렸고, 응원 온 문파 사람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마구잡이로 팼다.
그러면서 가끔씩 탁지연 쪽을 봤는데, 그녀는 자기 뒤에 붙어서 방어만 할 뿐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지는 않았다.
‘뭐야.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날 감시하러 온 건가? 설마 이런 상황에 다른 여자를 만날까봐?’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기수가 한참 솜씨를 발휘하자 등 뒤가 점점 밝아졌다.
기수가 적 병력의 발을 붙잡아준 덕분에 27채 수적들은 방해 없이 불을 마음껏 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자 백리세가 쪽에서도 원인을 파악하고 고수 한 명이 기수를 향해 덤벼들며 외쳤다.
“멈추어라! 네놈은 누구냐!”
나타난 자는 기수도 익히 아는 얼굴.
바로 백리세가의 세째 아들 백리익이었다.
“나는 범장이라고 한다! 수로맹 27채의 선장 중 한 명이지.”
기수는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밝혔다.
그때 백리세가 무사 중 한 명이 기수를 가리키며 외쳤다.
“삼공자님! 바로 저자입니다! 저 자가 우리 동료의 목을 베어 간 자입니다.”
사방에 불길이 번지니까 범장의 얼굴을 알아보는 무사가 있었던 것이다.
백리익은 대노하여 외쳤다.
“이놈! 잘도 우리 무사들을 해쳤겠다! 내가 오늘 네놈의 목을 잘라주마!”
기수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하하하!…. 살살 하자고. 살살…”
기수는 백리익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몇 대 때려주고 나서 탁지연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달리 백리익은 어떻게든 기수를 죽일 생각으로 처음부터 살초를 썼다.
기수는 뭔가 붉은 색이 갑자기 얼굴을 향해 날아오자 깜짝 놀라 창대로 쳐냈다.
그러자 그 붉은 색이 다시 백리익에게로 돌아갔다.
‘이건 무슨 암기지?’
손에 닿은 느낌은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가는지 신기했다.
그러나 그 정체는 곧 밝혀졌다. 암기가 아니라 유성추였다.
생긴 건 참외 비슷하고. 크기는 주먹만 한 쇳덩어리 2개가 긴 줄 양 끝에 매달린 무기인데 카우보이 로프처럼 돌리기도 하고, 채찍처럼 휘두르기도 하고, 첫 공격처럼 던졌다가 회수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몇 차례 방어를 하면서 생각했다.
‘이런 무기는 거리를 확 좁혀 버리면 별 거 아니잖아?’
처음엔 솔직히 좀 당황했지만 유성추 상대하는 방법을 간파한 것이다.
기수는 선풍비로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헉! 어, 어떻게….”
백리익은 기수의 눈부신 보법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공격이 계속 막힐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방금의 그 보법은 정말 아무나 펼칠 수 없는 절정고수의 수법이었다.
“뭘 그리 놀라나?”
기수는 창대로 백리익의 머리를 한 방 때려 혹을 달아줄 생각이었다.
그때, 유성추가 쌩! 하고 얼굴로 날아왔다.
기수는 깜짝 놀랐다. 분명 유성추는 뒤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상태였는데 어떻게 해서 갑자기 자기 얼굴로 날아오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급히 피하고 나서 보니까 유성추의 줄이 백리익의 들어 올린 발바닥을 휘감고 있었다.
자기 몸을 감도록 해서 추의 움직이는 각도와 방향을 순간적으로 바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달아 자기 어깨와 팔꿈치를 휘감도록 하면서 몸을 회전시키니까 추 2개가 점점 더 빨라져서 기수도 뒤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햐! 고것 참 재미있는 무기네.’
기수는 백리익의 기술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예전에 18반 무예에 대해 배운 적이 있어서 낭아추나 유성추가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때 배운 것은 완전 기초적인 수준이라서 백리익의 수법들과 차이가 많았다.
그는 형들보다 키가 작아서 팔다리도 짧기 때문에 이런 특이한 무기를 익힌 모양이었다.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백리익이 기수에게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어째서 수적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냐!”
기수의 보법에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후후…. 나는 범장이다! 그리고 우리 수로맹에도 고수는 얼마든지 있다!”
각 채주들이 저마다 비전 절기를 익히고 있으니 만만히 보지 말라는 일조의 경고 의미가 담긴 얘기였다.
“흥! 그래봤자 수적이지! 각오해라!”
백리익은 유성추의 추 2개를 번갈아 좌우로 회전시키면서 처음보다 훨씬 신중한 태도로 기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수는 유성추의 움직임을 모두 간파한 상태.
이젠 백리익의 허점이 훤히 보였다. 그가 이길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기수는 간단히 승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우선, 범장이란 캐릭터는 그 정도로 뛰어난 고수는 아니었다.
그리고 유성추 사용법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다.
그렇게 싸움이 한창 이어지자 탁지연이 약간은 걱정되는 어조로 말했다.
“형님! 그만 끝내시죠.”
그녀는 기수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싸움이 길어지면서 주변이 적에게 겹겹이 포위되고 있었다. 살짝 겁이 나는 상황이었다.
기수는 조금 더 백리익의 기술을 보고 싶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한 무리의 여인들이 나타났다.
바로 아미파의 제자들이었다. 선두엔 무정선자와 송란이 있었다.
기수는 그녀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무정선자는 자기가 잘 되기를 응원하던 소검평의 애인이고, 송란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을, 그것도 속살을 비비던 사이,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점을 봐주면서 친해졌기 때문에 꽃으로도 때리기 싫었다.
기수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유성추를 창대로 후려쳐서 라이너성 타구로 투수의 얼굴을 향해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백리익이 깜짝 놀라 주저앉으며 피하는 사이 돌아서서 탁지연의 손을 잡고 경공을 시전했다.
“잡아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그러나 기수가 뚫고 나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포위망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개개인의 무공이 백리익과 무정선자쯤 된다면 또 모를까, 일반 무사들은 창대에 두들겨 맞기만 할 뿐이었다.
강변 모래사장 쪽으로 빠져나온 기수는 육대기의 배를 발견하고 큰소리로 부른 후 탁지연이 먼저 타는 동안 적들을 맞아 싸웠다.
아미파 무정선자가 가장 먼저 검을 휘둘렀지만 기수를 어쩌지는 못했다.
송란과 협공하니까 좀 위협적이 되어서 기수도 창대를 집어던져 상대를 물러나게 한 후 배를 향해 잽싸게 도망쳐 버렸다.
기수가 타자 배는 즉시 강변에서 멀어졌다.
아미파와 백리세가 무사들은 멀어져가는 배를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배가 충분히 멀어지자 탁지연이 기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저 여자들 중 한 명이죠?”
“무슨 소리야?”
어떻게 알았지? 천잰데?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지만 속마음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몽둥이로 때리면서 왜 아미파 여자들은 한 대도 안 때렸죠?”
그걸 다 관찰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야, 아미파의 무공이 백리세가보다 고강해서 내 공격을 막은 거지.”
“아녜요. 아무래도 뭔가 있어요.”
기수는 씨익 웃었다. 만약 현대였고, 탁지연이 여자 친구였다면 이런 상황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기수는 여유만만이었다.
중원무림은 능력 있는 남자의 천국.
게다가 지난번에 송란을 통해 마음가짐을 한 번 정리했기 때문에 탁지연이 아무리 심리적으로 휘두르려고 해도 절대 끌려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미파 제자 중에 예쁜 애들이 있는 것 같던데….한 번 사귀어볼까?”
기수가 오히려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자 탁지연은 약이 바짝 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질투가 나도 자기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자 기수는 그녀의 어깨를 당겨서 품에 안아주었다.
“사람의 일생이란 말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거야.”
탁지연은 기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그를 쳐다봤다. 기수가 말을 이었다.
“다들 100살까지 아무 문제없이 살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지만 내일의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기수는 생명보험 영업을 하는 게 아니었다.
점쟁이 행세를 하면서 느낀 점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런 말씀은 왜 하세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정신을 파느라고 현재를 놓쳐버리기엔 삶이 너무 아깝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야. 넌 내게 있지도 않은 다른 여자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놓치고 있잖아.”
“아!…. 그, 그렇군요.”
탁지연은 기수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이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동굴 안에서 당운영이 하는 짓을 억지로 보게 된 이후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게 된 면이 있었다.
하지만 기수의 말을 듣고 나니까 뭔가 깨달은 느낌이었다.
자기가 너무 과도하게 긴장하고 욕심을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기수 쪽으로 상체를 바짝 밀착시켰다.
단순히 무공이 고강하고, 잠자리에서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자기를 깨닫게 해주는 남자. 세상 어디에서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기수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달라붙자 등 뒤에서 육대기가 긴장하여 노를 꽉 움켜쥐었다.
‘서, 선장님! 설마… 갑판 위에서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제발 그것만은….’
두 사람의 취향은 존중해주지만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만 하라고 창고까지 얻어주었는데 갑판에서 저렇게 끌어안으면 어쩌란 말인가.
조마조마한 육대기의 마음을 읽었는지 기수와 탁지연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기수가 온통 불바다로 변한 강변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것으로서 백리세가의 발은 완전히 묶였군.”
배를 전부 다 태우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수상공격의 의지를 꺾기엔 충분한 피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불현듯 어떤 상황이 생각났다.
“저글링 잔뜩 뽑아서 발업까지 했는데 섬맵이라니. 크크크….”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게 있어. 히드라에 울트라까지 있어도 수송업이 안 됐으면 꽝이지.. 크크크….”
탁지연은 기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충 문맥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함께 불구경을 하다가 기수의 팔을 잡아당겼다.
“형님. 우리 선실로 들어가요.”
“지금?”
“예. 지금요.”
기수는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피가 아닌 화염에도 반응하는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기수는 육대기를 불러 지시했다.
“싸우고 오니 피곤하군. 좀 잘 테니까 채주님이 부르는 게 아니라면 깨우지 마.”
“예! 알겠습니다.”
육대기는 그나마 선실이면 괜찮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