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56
식당 쪽 하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중늙은이 진송은 모두에게 인망을 얻고 있었다.
그는 기수가 아무 말 안 했는데도 강집사와의 구두 계약 조건을 물어보았다.
기수가 자세히 얘기하자 진송이 분개한 어조로 말했다.
“원래 한두 달 일 시켜보고 마음에 들면 늦어도 석 달째부터 품삯을 주는데, 3년째부터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에 한 마디 따지지도 않았단 말인가?”
“저는 먹고 자는 것만 해결되어도 감사하거든요. 헤헤….”
기수는 모자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진송은 기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를 따라오게. 내가 가서 대신 따져주겠네. 아무리 강집사라고 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걸 다 떼어먹으려고 하다니!”
남의 일인데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니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의협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기수도 함께 붉은 머리띠를 매고 노동조건 개선하라고 시위를 하고 싶었지만, 여기에 온 목적이 따로 있으니까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아닙니다! 그러다가 쫓겨나면 정말 큰일입니다! 전 그냥 일하겠습니다.”
“어허! 그놈한테 당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얘기를 잘 하면 두세 달 치 정도 떼어주고 그 이후부터는 받을 수 있어. 강집사도 흥정할 생각으로 일부러 3년이라고 부른 걸 거야. 그걸 그냥 다 주면 안 되지!”
“아닙니다! 전 정말 여기서 먹고 자는 것만 해결되면 만족합니다.”
기수는 제발 자기를 좀 그냥 내버려두기를 바랐다. 나중에 남궁세가를 박살낸 뒤에 후불로, 사채 고리이자 쳐서 받아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송의 호의는 멈추지 않았다.
“그냥 두고 볼 수 없네. 자네가 일한 대가는 받아야지.”
“진노대. 제발 그냥 놔두십시오. 노대가 보시기에도 제가 좀 어리숙하잖습니까? 그러다 보니 돈을 받아도 그걸 제대로 간수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품삯 없이 그냥 먹고 자는 데만 만족하렵니다. 그러면 적어도 제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나쁜 친구는 없을 거 아닙니까. 헤헤…”
“허어! 그것 참….”
진송이 손에 힘을 풀자 기수는 살짝 실망했다.
‘내가 진짜 그렇게 어리숙해 보이나?’
사실 실망하기보다는 기뻐할 일이었다. 역용술이 지능을 드러내 보일 정도까지 발전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진송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앞으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꼭 나를 찾아오게. 해결해줄 테니.”
“고맙습니다. 진노대. 헤헤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양십일은 바보로 소문이 났다.
힘세고 일은 잘 하는데 늘 헤헤거리며 웃기만 하고, 강집사한테 고스란히 뜯어 먹혀도 한 마디 반박조차 못하는 소심남,
기수 입장에선 사실 그렇게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바보로 지내다 보니 그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남들이 자기를 바보취급 하는 게 화나고 자존심 상했겠지만, 모든 면에서 우월함을 알기에 별 같잖은 놈들이 아는 체 잘난 체를 해도 그냥 느긋하게 들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본모습일 땐 하찮게 보았던 하인들이 다들 저마다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강자일 때 자기 본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하인들 사이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강집사도 남궁세가 사람들한테는 어찌나 선량하고 착실한 모습을 보이는지 손발이 다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하인끼리도 그랬다.
뭔가 조금이라도 권력이랄까 권한을 가진 자들은 윗사람한테 엄청난 아부를 하면서 아랫사람에겐 더러운 성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이 진짜 자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대에 살 때를 돌이켜보면, 미국인 관광객한테 보이는 얼굴하고 동남아 근로자들한테 보이는 얼굴 중에서 약자한테 보이는 얼굴이 진짜 한국인 모습인 것이다.
그런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어가며 열심히 장작패기에 몰두하던 어느 날.
저녁 먹고 하루 종일 흘린 땀을 씻고 있는데 그의 코를 자극하는 향기가 있었다.
‘여자 냄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웬 시녀 한 명이 자기를 빤히 보고 있었다.
“네가 양십일이냐?”
“그런데….”
시녀는 10대 후반으로, 약간 마른 체형에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기수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물었다.
“너 바보라며?”
무슨 이런 실례되는 질문이 있는가! 콱! 그냥 한 대…
그러나 애써 만든 캐릭터에 충실하기로 했다.
“나 바보 아니다!”
거의 영구 없다 톤으로 말한 뒤 씩 웃어줬더니 완전히 바보라고 믿는 표정이었다.
“너. 이런 거 먹어본 적 있어?”
시녀가 내미는 걸 보니 중국 전통 과자, 월병이었다.
“맛있겠다. 헤헤…”
“너 줄게. 먹어.”
기수는 조심스럽게 참치 캔 만한 빵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한 입 먹어보니 진짜 맛있었다.
단팥빵, 혹은 붕어빵하고 비슷한데, 빵 부분이 파운드케익 느낌이고 속에 팥앙금과 잣, 호두, 땅콩, 꿀등이 들어 있어서 상당히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우와! 태어나서 이런 건 처음 먹어 봐!”
게걸스럽게 다 먹고 나니까 시녀가 생긋 웃은 후 말했다.
“내일도 일 끝나면 이리로 와. 하나 또 줄게.”
“고마워. 헤헤헤….”
“다른 사람 함께 오면 너 혼자 먹을 수 없으니까 식당 하인들과는 따로 움직여야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았어. 난 그 사람들과 하는 일이 다르니까 따로 올 수 있어.”
기수는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야! 천하의 양기수를 빵으로 꼬시는 여자도 있구나.’
좀 모자라고 돈엔 관심 없는 남자로 소문이 났으니까 먹을 걸 들이미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는 있었다.
다음 날 다시 그 시녀를 만난 기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난 이향이라고 해. 오늘은 다른 월병이야. 자!”
기수는 받아서 맛있게 먹었다. 팥이 아닌 콩으로 소를 하고 호박씨와 깨가 들어간 데다 약간의 계피향도 가미되어서 어제 먹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아!…. 이거 진짜 빵에 넘어갈 거 같은데?’
워낙 단순하게 살다 보니까 색다른 미각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내일은 또 무슨 다른 맛을 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향이 정신없이 먹는 기수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너. 어디 출신이야?”
“대파산. 여기서 아주 멀어.”
“부모님이나 형제는?”
“아무도 없어. 아주 어릴 때 주인님이 주워다가 키워주셨는데, 하도 매만 맞아서 도망쳐 나온 거야. 여긴 때리지 않아서 너무 좋아. 헤헤….”
얘기를 하다 보니까 진짜 평생 하인으로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향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힘든 시절을 보냈구나. 불쌍하기도 하지.”
기수는 그녀의 관심을 고맙게 생각했다. 하지만 의문이 일었다.
‘얜 나한테 왜 이런 고급 과자를 챙겨다 주는 걸까?’
현재의 자기 모습으로는 여자들에게 호감을 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혹시 취향이 좀 이상한 앤가?’
그렇다고 해도 자기처럼 막일이나 하는 하인의 경우엔 시녀를 만나 뭔가 섬씽을 만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예전 약선문은 아들 중 한 명이 변태라서 땅속에 자기만의 비밀 공간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지만 이곳 남궁세가엔 그런 비밀 공간이 없었다.
지금처럼 담 밑 물 항아리 옆에서 과자나 먹는 게 다였다.
그래서 이향과 함께 있어도 성적 충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기수가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이거 안 먹어?”
“난 많이 먹었어. 괜찮아. 너 다 먹어.”
“고마워. 헤헤….”
“너…. 그 과자 더 먹고 싶니?”
“응. 많이 먹었으면 좋겠다.”
“그럼 이따가 새벽에 여기로 나올래?”
“새벽에?”
“그래. 무사들이 교대할 때마다 치는 종소리 알지? 자정 지나서 그 종소리가 들리면 속으로 100까지 센 뒤에 이리로 나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럼 과자 줄 거야?”
“응. 만두처럼 다진 고기 넣은 월병을 갖다줄게.”
“와! 신난다!”
기수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기대했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되자 화장실 가는 척 하면서 담 밑으로 나가 기다렸다.
새벽에 젊은 여자와 만나기 위해 가는 것이지만 색욕은 전무했다. 오로지 다진 고기 넣은 월병은 무슨 맛일까 하는 미각적 호기심만 가득했다.
기수 입장에선 일을 치르려면 최소한 30분은 보장되어야 하는데 무사들이 늘 순찰을 돌기 때문에 그 정도의 시간 여유는 없었다.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욕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의 3대 욕구 중 지금은 식욕이 최우선 순위인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이향이 나타났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네? 호호…”
“월병은?”
“어머! 얘 좀 봐. 나보다 과자가 더 보고 싶었나봐.”
당연하지.
“월병은 어디다 감췄어? 응?”
기수가 기웃거리자 이향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내가 좋아? 월병이 좋아?”
“월병.”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야 상대편에서도 솔직하게 이유를 밝힐 거라고 생각했다.
이향이 약간 삐진 표정으로 말했다.
“너 진짜 바보구나. 혹시… 너 남자 구실도 못 하는 거 아니니?”
“남자 구실이 뭔데?”
“그거 왜… 있잖아. 남녀가 서로…. 그러니까… 옷을 벗고…”
“함께 월병 먹는 거?”
“아니! 그거 말고! 그러니까 껴안고… 그러는 거 있잖아.”
“별로 관심은 없지만, 어쩌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아. 그보다 월병은?”
그걸 얼마나 잘 하는지 알면 아마 기절할 거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단진 고기로 만든 소는 어떤 맛일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이향이 미심쩍은 눈으로 기수를 보다가 말했다.
“좋아. 먹고 싶으면 날 따라와.”
그리고는 앞장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수는 그녀가 월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지만 또 다른 호기심으로 그녀를 따라 나섰다.
이향은 의외로 몸이 가벼웠다. 경공을 익힌 몸놀림이었다.
‘남궁가는 시녀들도 경공을 익힐 정도인가?’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경비에 들키기 않고 식당 구역을 넘고 후원을 넘어 안채로 가는 경로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궁가 무사들의 순찰 루트와 교대시간, 그리고 기문진의 위치를 완벽하게 꿰고 있는 것 같았다.
기수 입장에선 아주 유용한 길잡이였다.
그는 겉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두리번거렸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제시하는 경로와 주의사항을 전부 다 외워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규칙을 찾아낼 수 있었다.
‘좋아! 이런 식이면 다른 구역에도 비슷하게 적용시킬 수 있겠구나.’
안채가 가까워지자 이향이 말했다.
“여기선 조심해야 돼. 내가 먼저 저쪽 담에 가서 신호를 할 테니까 소리 내지 말고 최대한 빨리 달려와서 내 손을 잡아. 그럼 내가 올려줄게.”
“네가 날 끌어올린다고? 그게 되겠어?”
“그건 걱정하지 말고 내 손 꽉 잡아. 월병 먹고 싶으면 집중해야 돼.”
“알았어!”
먼저 움직인 이향은 순찰 상황을 면밀히 파악한 후에 신호를 보냈다.
기수는 무공 모르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느낌으로 뛰었고, 그녀의 손을 잡아 단번에 담 너머로 이동할 수 있었다.
“우와! 너 정말 힘이 세구나.”
“쉿! 이제부터는 조용해야 돼. 발소리도 죽이고 따라와.”
“알았어.”
이향은 기수를 어느 건물로 데리고 들어갔다.
기수는 야릇한 향기를 맡고 그곳이 여인의 거처임을 알아차렸다.
‘여긴 뭐지? 아! 인간 양기수 결국 빵 하나 때문에 이런 곳까지 유인된 건가?’
이향이 문을 잠그고 기수를 더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한 방으로 밀어 넣고는 자기는 들어오지 않고 문을 닫았다.
방안엔 초가 하나 켜져 있었다.
그리고 침상에는 얇은 잠옷을 입은 20대 후반의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기수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 만큼 매력적인 미녀였다.
기수는 방 안의 인테리어, 그리고 그녀가 입은 비단옷, 머리에 꽂힌 보석 장신구 등을 통해서 시녀와는 레벨이 다른 귀한 신분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마님. 제, 제가 방을 잘못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며 물었다.
“네가 바보 양십일이냐?”
“예? 양십일은 맞고, 바보는 아닙니다.”
“호호…. 그래. 월병을 먹고 싶어서 여기 온 거지?”
“예! 맞습니다. 그런데 이향이 이 방에 밀어 넣고 가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전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특히 가슴과 골반이 잘 발달해 있어서 동매가 7,8년 뒤쯤엔 딱 그 정도 농익은 라인을 가질 것 같았고, 키는 162에서 163정도, 얼굴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예쁘게 자리 잡았으면서 몹시 요염하고 색기 넘치는 인상이었다.
정황상 시녀를 시켜서 하인들 중 뒷말 나올 가능성이 가장 적은 바보를 데리고 와서 재미 좀 보자는 것 같은데, 기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남궁세가에 온 목적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이 정조 관념 없는 마님보다 월병의 맛이 더 궁금했다.
여인이 말했다.
“아니. 나가지 않아도 된다. 월병은 여기 있으니까.”
“그, 그렇습니까?”
여인은 나무 찬합을 열어 그 안에 있던 월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기수는 곧장 받아들고 허겁지겁 먹었다.
‘뭐야! 이거… 팥이잖아!’
배신감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