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79
비룡검문만 피리소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종남파 장문인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사해문의 남매는 피리소리에 의문을 품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진백 등과 만났다.
“누가 부는 걸까요?”
“글쎄요. 우리 군영은 아니니 일단 아군은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내공이 상당한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낮에 전투를 치른 터라 신경이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좀 알아봐야겠습니다.”
호문평이 나서자 기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호운혜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는데 귀찮은 일거리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호운혜의 표정도 그런 심정을 담은 것으로 보였다.
기수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진백이 두 제자 순우광과 조치성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이 호소협과 함께 가서 찾아보거라.”
“예! 사부님.”
기수가 낮에 힘을 많이 썼음을 알기에 배려해주는 것이었다.
기수와 호운혜는 슬쩍 시선을 마주치고 미소 지었다.
세 사람이 떠난 후 기수와 호운혜는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는 척 하고는 밀회장소로 가서 바삐 파티를 시작했다.
그런데 둘이 한참 즐기는 동안에도 피리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못 찾은 건가?”
“헉헉… 그러게요… 헉헉…. 조금만 천천히… 헉헉…”
기수는 호문평과 순우광, 조치성 등이 피리의 주인공을 계속 찾지 못하기를 바랐다.
피리 소리를 듣는 게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좀 처량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들을수록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
그리고 성감도 조금은 더 예민해지는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음악이 사람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중원에 온 이후 음악다운 음악을 즐길 기회가 없었다.
디스토션 기타, 질주하는 드럼, 천둥처럼 깔리는 베이스 소리가 그리웠다.
심지어는 댄스음악이나 클래식 음악도 즐겁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밀회를 끝내고 돌아오는 새벽까지 피리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기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깐이지만 편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눈을 뜬 기수는 피리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순우광과 조치성을 찾아가 물었다.
“어제 어떻게 된 거야? 피리부는 사람을 찾았어?”
“아뇨. 방향을 찾지 못해서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모르겟습니다. 소리를 쫓아서 가다보면 엉뚱한 곳에서 들려와서 그 쪽으로 방향을 돌려 한참을 가다 보면 또 다른 방향에서 들리곤 했습니다.”
“이상하군. 연주가 끊기는 것 같지는 않던데.”
“그렇습니다. 피리소리는 끊긴 적이 없습니다.”
“그럼 피리를 입에서 떼지 않고도 너희들을 따돌릴 정도의 경공능력을 지닌 고수가 왔었단 말인가?”
“호소협 말로는, 소리가 반사되도록 만드는 음공을 펼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음공이라….”
그렇다면 사마연합 쪽에서 하는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피리소리가 사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전투에 지친 무림맹 사람들의 회복과 치유에 도움을 준 셈이었다.
‘강호엔 정말 기인이사가 많군.’
소리 혹은 음악으로 무림맹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정체는 드러내지 않는 신비 고수. 뭔가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곧바로 북소리가 울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사마연합군이 다시 집결하여 강을 건너기 시작한 것이다.
“저놈들. 어제 그렇게 당하고도….”
강을 내려다보니 그 기세가 어제에 비해 별로 차이가 없었다.
밤사이 병력 충원이 있었던 것 같았다.
수없이 많은 적을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똑같은 수가 몰려오니까 기수도 어느 정도는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마냥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기수는 크고 활기찬 목소리로 제자들을 독려했다.
“자! 오늘도 한 판 놀아보자!”
호법의 기운 넘치는 목소리에 제자들의 표정도 펴졌다.
그들이 의욕을 보이자 다른 문파 사람들도 덩달아 어깨를 폈다.
비룡검문이 고수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종남파 장문인 장해량은 느지막이 군막 밖으로 나왔다가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비룡검문 문주 진백이 무리한 작전으로 전체를 위험에 빠트려놓고 운이 좋아서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질적으로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려 진형을 갖추도록 했다.
진백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해량 앞에서는 행동을 삼가고 조심했다.
비룡검문은 행동을 했고, 종남파는 움츠렸기 때문에 지금의 차이가 생긴 것.
그러나 사람들은 늘 자기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남을 탓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장해량이 뭐라 하건 그냥 따르리라 마음먹었다.
상황은 어제와 동일했다.
강변에 횡대로 정렬한 적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호문평이 장해량에게 말했다.
“장진인님.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장해량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필요한 희생만 나올 뿐이오.”
“불필요하다니요? 어제 적의 시체가 온 강변에 가득했던 것을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 편에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소?”
“그거야…”
어떻게 전쟁을 하면서 그 정도 피해도 감수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호문평은 자기에게 동조해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진백 쪽을 봤다.
그러나 진백은 오늘 하루 쥐죽은 듯 있기로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비룡검문의 명성을 알리는 것은 어제 충분히 했으니까 오늘 하루쯤은 부상당한 제자들 휴식도 취하면서 종남파 장문인의 마음이나 다독거려줄 작정이었다.
무릇 어떤 조직에서 자리를 잘 잡으려면 아래에서 받쳐주는 사람들 못지않게 위에서 끌어줄 사람도 필요했다. 젊은 무사들의 지지를 확보했다고 끝이 아니라 노장들에게도 점수를 따둬야 하는 것이다.
진백이 호응해주지 않자 호문백은 실망하는 표정을, 장해량은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표정을 각각 지었다.
기수는 옆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문주 노릇 하기가 쉬운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도 혈매궁의 궁주이기 때문에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사마 연합군은 어제와 달리 광범위하게 펼쳐 서서 한꺼번에 강을 건넜다.
중간에 차단당하지 않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 방해도 없다 보니 뻘쭘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전원이 강을 건너자, 그들은 서둘러 집결한 후 진형을 새로 갖추었다.
제법 형태가 갖춰진 쐐기형이 수십 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나름 준비와 훈련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진백이 상체를 기수 쪽으로 슬쩍 기울인 후 말했다.
“이거 불안한 걸.”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진백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종남파가 완성시킨 현재 이곳 군영의 진법은 쇄월진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한 가지 약점이 있다네. 그게 무언지 아는가?”
“그, 글쎄요.”
기수 입장에선 진백이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고 그냥 결론만 얘기해주기를 바랐지만 진백은 자상했다.
“본래 선천쇄월진과 후천쇄월진은 서로 회전하는 방향이 반대일세. 즉, 생문과 사문이 출현하는 순서가 서로 역이기 때문에 웬만큼 기문진에 능통한 사람도 거기에 속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쇄월진에 대해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면 두 쇄월진이 결합되는 중심축을 찾아내고 거기를 찌를 수가 있어.”
“거기가 약점인가요?”
거의 귓속말 수준으로 작아진 진백의 목소리에 맞춰 기수도 아주 작은 소리로 질문했다. 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형을 저렇게 갖춘 걸 보면 그걸 아는 자가 적진에 있는 것 같아.”
“그렇군요.”
기수는 자세한 설명을 별로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듣고 나서 주변을 살펴보니까 대략적이나마 기문진의 중심축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찍어가며 더듬거리자 진백이 바짝 붙어서 장해량 쪽을 몸통으로 가리고 포인트를 콕 콕 찝어주었다.
기수는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정도 진법지식 가진 사람이 설명 두 번에 포인트를 찾아낼 정도면 이거 완전 허접한 진이잖아?’
구성방식이 복잡한 게 아니라 파해법이 복잡해야 하는데, 종남파의 진법은 토목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한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어려울 것 같았다.
삼황맹은 몰라도 제갈세가에서 제자 하나만 파견했어도 파악이 끝났을 것이었다.
물론 기문진법과 방어 병력이 결합하면 또 얘기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의 수준이 높을수록 더 보탬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소항산에선 무극환혼진 덕분에 일월신교도 막아내지 않았던가.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지켜보는 가운데 적이 가까워지자 장해량은 검을 뽑아들고 병력배치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사해문과 비룡검문, 그리고 군소방파의 무림인들은 즉시 그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 한 차례 화살과 암기가 비처럼 쌍방에서 날아올랐다.
장거리 무기는 언덕 위쪽에 자리 잡은 무림맹 쪽이 유리했다.
하지만 활과 화살은 삼황맹 쪽이 많고, 무림맹 쪽은 암기 위주라 사거리에서 차이가 나고 병력 수도 많았기 때문에 피해는 쌍방 비슷했다.
거리가 좁혀지자 암기 공격은 멈추고 창과 칼이 본격적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와아!….”
“죽여라!….”
“모두 자기 자리를 지켜라! 물러서지 마라!”
기수는 진백과 각각 하나씩 중심축을 나누어 맡은 후 제자들을 독려하여 싸움에 임했다. 사방에서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기수의 검도 피를 잔뜩 머금엇다.
처음부터 살육을 목적으로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전투 중 잠시 손을 쉬면서, 기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기 구역과 진백의 구역은 거의 완벽한 수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허접한 진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건가?’
어쩌면 소항산의 무극환혼진이 좀 오버스펙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수는 다른 쪽 상황도 살펴보았다.
피해상황은 제각각이었지만 중심축을 빼앗긴 곳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종남파 제자들의 분전이 돋보였다.
자기네들에게 익숙한 진법이라 운용이 원활한 것도 있는 것 같고, 어제 놀았기 때문에 오늘 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는 각오도 한 것 같았다.
‘역시 명문은 명문이구나.’
9파에 속하려면 세월의 무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이번 싸움에 대한 좋은 예감을 가지게 되었다.
삼황맹과 녹림72채의 연합으로는 아무리 수가 많아도 종남파, 사해문, 비룡검문이 지키는 방어진형은 뚫지 못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적이 측은해 보일 지경이었다.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인가? 후후…. 모조리 죽여주마.’
검을 고쳐 쥐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단숨에 너댓 명을 쓰러트릴 때, 갑자기 적의 배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징!~ 찌르르….”
기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몸을 한 차례 떨었다.
‘뭐지? 이건….“
갑자기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면서 아버지와 함께 세 식구가 놀이공원에 놀러갔던 일이 생각났다.
‘왜 갑자기 이런 뜬금없는….’
기수뿐만이 아니었다. 무림맹 전체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동시에 사마연합군의 공세는 급격히 강화되었다.
기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멍한 표정 짓고 있는 제자들에게 호통을 쳤다.
“다들 정신 차려!”
그의 내공 충만한 목소리에 비룡검문 제자들 모두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징소리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이번엔 사방팔방에서 연달아 들려왔다.
기수는 다시 한 번 회상에 빠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경제적으로도 윤택했고 삶에 어떠한 어둠도 없던 그 시절이 자꾸만 생각났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그 시절로 돌아가서 아빠 엄마 손잡고 그네를 타고 싶었다.
그 때,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창 한 자루가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기수는 깜짝 놀라 그것을 쳐냈지만 그 후에도 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워서 잠시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이거 뭔가 수상해! 저 징소리에 문제가 있어.’
기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가 이 정도의 혼란을 느낄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겠는가.
급히 뒤를 돌아보니 다들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눈을 떠라! 비룡의 전사들이여!”
쩌렁쩌렁한 호통에 다들 다시 정신을 차렸다.
기수가 외쳤다.
“징소리를 들으면 안 된다. 수건이건 옷이건 잘라서 귀를 막아라!”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부터 소매 끝을 잘라 귀마개를 했다.
그러자 징소리의 영향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기수는 경공으로 몸을 날려 징 치는 자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삼황맹과는 확연히 다른, 몹시 특이한 복장을 입고 있었고, 20여 명의 삼황맹 무사들이 그를 엄중히 지키고 있었다.
기수가 다가가자 남자는 징을 더욱 요란하게 두들겼다.
“으으!….”
귀마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워지니까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그가 든 징은 사물놀이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컸고 올록볼록한 동심원 굴곡이 있었으며, 사슬이 달려 있어서 한 번 울릴 때마다 ‘찌르르~’ 하는 여음이 발생했다.
기수는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이 떠오르려고 하자 급히 세 개 단전에 모두 의식을 걸고 집중했다.
그냥 단순히 머리를 흔들면서 ‘정신 차리자!’고 외치는 정도로 상대할 술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염정구심술 비슷한 것일 수도 있어.’
그 정도로 상대 능력을 존중해주면서 진기를 집중하자 소리가 아무리 요란해도 환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성욕도 누를 정도의 집중력과 의지를 지닌 기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