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78
진백은 강을 건너는 적과 장해량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결단을 내렸다.
“좋습니다! 우리 비룡검문이 나서겠습니다.”
그는 장해량에게 군례를 하고는 바로 자기 진영으로 내려왔다.
“이, 이보시오!….”
장해량은 그가 정말로 혼자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서둘러 만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백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장해량은 계면쩍은 얼굴로 입맛을 다시다가 호문평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만 했다.
호문평은 젊고 호전적인 사람이라 진백의 행동에 순간적으로 피가 끓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사해문의 소문주이기도 했다.
십절금왕문 만큼은 아니더라도 돈과 이익에 대해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손해만 보는 이런 상황에 나서서 것은 본능적으로 기피했다.
자신의 진에 도착한 진백은 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적을 친다! 나를 따르라!”
“와아아!…”
비룡검문 제자들은 문주의 명령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즉각 호응하여 일제히 검을 뽑고 군영 밖으로 내달렸다.
기수도 선두에 섰고, 순우광과 조치성은 각각 문주와 호법 뒤에서 그들을 보좌했다.
삼황맹과 녹림72채 연합군은 강이라고 하기엔 얕은 물을 건넌 터라 바지가 젖었을 뿐 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뒤가 물이다 보니 제대로 된 진형을 펼치기 어려웠다.
비룡검문의 돌격은 그런 그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가했다.
새로 강을 건너는 자들이 꾸역꾸역 늘어났지만 앞이 막히니까 모래톱으로 올라서는 수는 많지 않았고, 러시아워의 지하철 승강장처럼 앞사람과 밀착도만 높아졌다.
그것은 전투하는데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간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비룡검문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싸움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언덕 위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무림맹 사람들은 주먹을 쥐고 탄성을 토해가며 비룡검문을 응원했다.
그리고 젊은 무림인들은 자기도 끼고 싶어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장해량과 호문평 역시 마음이 움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진백과 양호법 두 사람이 선두에 서서 닥치는 대로 적을 쓰러트리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룡검문이 남궁세가를 봉문시킨 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연히 입증하는 모습이었다.
무림인 치고 뛰어난 무공을 존경하고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진백과 양호법, 그리고 비룡검문은 고수진에 배치된 모든 무림맹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일전에 기수가 수색대에서 솜씨를 보였지만 지금은 구경꾼의 규모 자체가 달랐다.
장해량과 호문평 입장에선 각광받는 주인공이 자기네 문파,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 부럽기 짝이 없었다.
호문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진인님. 우리도 가세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장해량도 속으로는 그 말에 동감했지만 자존심을 굽히기 싫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비룡문은 곧 철수할 것이니 지금 나가봤자 소용없소.”
“왜 철수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장해량은 강의 좌우를 가리켰다.
적은 비룡검문이 막지 않은 쪽으로 우회하여 속속 땅을 밟고 있었다.
비룡검문이 막을 수 있는 범위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병력이 증원되지 않는 한 곧 포위될 게 뻔했다.
그리고 장해량은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호문평도 상황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싸우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장해량의 예상대로 비룡검문은 조금씩 포위당하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무공이 고강하다고 해도 수적 열세를 뒤집기는 쉽지 않은 일.
당장이라도 퇴각하여 본진으로 후퇴를 해야 했다.
그러나 비룡검문의 물러서지 않았다.
완강하게, 어쩌면 미련하게 버티면서 저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백과 기수의 압도적인 무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구경꾼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두 사람의 검술!
정말 두 마리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장관이었다.
사마 연합군은 정면 돌파를 포기하고 두 사람과 비룡문 전체를 멀찌감치에서부터 완전히 에워싸 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대머리 사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는 완전히 포위됐다! 항복해라!”
진백과 기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자기들과 달리 제자들에겐 퇴로 차단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수는 주변에 피 흘리는 제자, 쓰러진 제자들이 생겨난 것을 보고 내공을 급히 끌어올렸다.
그리고 항복을 권유한 적 지휘관을 향해 순간적으로 경공을 시전했다.
사람들 머리 위를 새처럼 날아가는 놀라운 경공에, 적은 미처 방비를 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머리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수의 검을 막으려고 칼을 들어 올렸지만, 기수가 도착하기도 전에 갑자기 혈도에 뜨끔한 느낌이 들면서 움직임이 멈추고 말았다.
기수의 검은 단번에 그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떨어지는 머리를 검으로 쿡! 찔러서 받은 기수는 그것을 높이 쳐들면서 외쳤다.
“너희들이 우리를 포위했다고? 웃기지 마라! 우리 비룡검문이 지금 너희들을 강변에 묶은 것이다! 네놈들에겐 죽음만 남았다!”
강변 전체는 물론, 언덕 위의 무림맹 진영, 그리고 강 건너까지 또렷하게 들리는 진기 충만한 목소리였다.
사마 연합군 전체가 움찔하는 게 눈에 보였다.
자기네 자휘관이 단 일 합에 머리를 잃었다는 사실.
거기다가 자기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장담하는 내공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니까 온몸에 소름에 끼치면서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
검을 휘둘러 머리를 가까이 있는 적에게 날린 기수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기수는 자신에 비해 월등히 약한 상대는 죽이지 않고 점혈만 했다.
그러나 비룡검문 제자들이 죽고 다치는 모습을 본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최대한 난폭한 방식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이 닿는 반경 안에 들어오는 적들은 목이건, 팔이건, 다리건 닥치는 대로 잘라버렸다. 도가 아닌 검이지만 남궁세가의 공자가 썼던 검답게 아주 단단한 쇠에 날도 예리해서 얼마든지 적의 머리와 사지를 분리할 수 있었다.
특별히 혈도를 노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자르다 보니까 이제까지와는 처리 속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점혈로 3명 쓰러트릴 시간에 5명씩 처치하는 게 가능했다.
사마연합 진형은 크게 흔들렸다.
강변 모래톱은 언덕이 아닌 평탄한 지형이라 사람이 겹쳐서 이제까지 기수의 무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수의 검술이 바뀐 이후엔 동료들 머리 위로 머리나 팔다리가 날아오르는 게 훤히 보였다.
동료 중 누군가의 몸이 절단되어 하늘로 떠오르는 광경.
그것이 끊이지 않고 연속으로 이어지는 광경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포위되어 있던 비룡검문이 오히려 주도권을 잡아가자 구경하던 호문평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끓어오르는 젊은 피가 손익 계산을 이겨낸 것이다.
“사해문은 나를 따르라! 비룡문을 구하자!”
“와아아!…..”
엄청난 함성이 터져나왔다.
단지 사해문 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싸움에 끼고 싶어서 근질거리던 군소방파 무림인들이 일제히 그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결국 언덕 위 군영엔 종남파만 남게 되었다.
장해량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제자들이 바라보는 눈빛의 의미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를 원망한다는, 어쩌면 겁쟁이라고 비난한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자존심을 굽히기 싫었던 것이다.
보다 못해 제자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부님. 저희들 중 일부라면 강변으로 내려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놈! 어디서 감히….”
장해량은 발을 구르며 그 제자의 뺨을 때렸다.
난감한 상황에 화풀이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장해량은 손찌검을 해놓고 즉시 후회했지만 나름 할 말이 있었다.
“우리마저 내려간다면 군영은 누가 지킨단 말이냐? 잔소리 말고 군령에 따라라!”
지금의 승세를 타서 적을 강변에서 무찔러버리면 되는데 군영은 왜 지킨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장문인에게 맞기 싫은 제자들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언덕을 내려간 행렬 중 맨 선두엔 호문평이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자기보다 빨리 달려가는 사람을 발견했다.
바로 자기 동생 호운혜였다.
‘쟤가 왠일이지?’
그녀가 싸움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호운혜는 언덕 위에서 오로지 한 사람만 보고 있었다.
전에 수색대에서도 본 적 있지만, 양호법의 무공은 보며 볼수록 독보적이었다.
무림의 여인으로서, 고수의 존재는 특별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양호법이 정말 뛰어난 활약을 보이니까 심지어는 그가 미남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오빠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최고 속도로 달려가게 된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자기 남자, 절세무공을 지닌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싸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피를 뒤집어쓰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르던 기수는 호운혜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발견하고 몹시 반가웠다.
밤중에 만나는 것도 즐겁지만 이렇게 훤한 대낮에 만나는 것도 흥취가 있었다.
특히 그녀가 입술을 야무지게 오므리고 눈썹을 치켜뜬 채 검 휘두르는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팔다리가 길쭉길쭉해서 그런지 장검을 들고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미소를 교환했고, 나란히 서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기수는 몹시 즐거우면서 동시에 기분이 묘했다.
이를테면 여친과 데이트를 하는 셈인데, 무슨 쇼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이좋게 살인을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 이 상황에선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빠. 나 머리 한 거 잘 어울려?’가 아니라 ‘오빠. 나 잘 죽이지?’ 하는 표정으로 피 벌창을 만드는 그녀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역시 피는 섹스를 유도하는 촉매제인가?’
계속 피를 보니까 지금 당장 여기서라도 호운혜와 함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두 남녀가 피바다 위에서 데이트하는 동안, 사마 연합군은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비룡검문 100명도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에 사해문과 군소 방파의 무사들까지 가세하자 이대로는 전멸당할 뿐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강은 도망치는데 방해요인으로 작용했다.
맨땅이라도 도망칠 때는 등을 드러내서 일방적으로 불리한데, 저항이 걸리는 물을 지나서 도망치는 것은 훨씬 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내린 퇴각명령은 다시 거둬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2시간 뒤 모든 전투가 끝나고 나서 보니 강변과 강물 위엔 온통 사마연합 쪽 시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림맹은 승리의 함성을 지른 후 군영으로 복귀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너 나 할 것 없이 종남파 제자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너희들은 안전한 곳에 있어서 좋았겟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종남파 제자들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물론 언덕 아래로 내려갔던 사람 중엔 부상자나 사망자도 있었다.
그러나 무림맹에 입맹한 이상 그건 피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문제는 어떤 싸움에 어떤 명분을 가지고 뛰어드느냐 하는 것인데, 오늘 종남파가 취한 태도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장해량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귀환한 진백과 호문평을 각각 찾아가 수고했다는 말만 전한 후 자기 군막으로 들어가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기수는 호운혜와 자정에 만나자는 눈빛 교환을 한 후 제자들의 상황을 살폈다.
무림맹에 입맹한 이후 최대 피해.
부상자가 20여명을 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망자 3명, 중상자가 3명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진백은 언덕 뒤에 무덤 3개를 만들도록 하고 중상자 3명은 수레에 태워서 부상자 4명이 호위하여 문파로 돌아가도록 했다.
100명이 90명으로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룡검문 제자들의 자부심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군영 내에서 마주치는 타문파 사람들이 문주나 호법은 물론 일반제자들에게까지 존경의 마음을 담아 목례를 할 정도였으니 목숨 걸고 싸울 가치가 있었다고 봐야 했다.
기수는 부상한 제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보타문의 금창약을 발라주었고, 필요한 경우엔 내공도 주입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금세 밤이 되었다.
저녁을 먹은 기수는 자기 군막에 들어가 해독연고를 바른 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낮에 오랜만에 폭주를 하는 동안 진기 소모가 좀 심한 편이었다.
만약 분광권을 자유롭게 사용했다면 얘기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비룡검법을 문주보다 뛰어나지 않는 선까지만 시전하면서 적을 최대한 많이 죽여야 한다는 것은 의외로 까다로운 제한이었다.
마치 주짓수 선수한테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타격기로만 싸우라고 시킨 거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수가 끝까지 그 제한을 지킨 것은 그것이 의외로 자신의 수행에 도움 되는 면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진기 순환을 충분히 마친 기수는 내장의 상태도 점검했다.
사천당문의 연고는 피부엔 확실히 효과가 있지만 내장의 기능회복까지 도와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서 약간 아쉬웠다.
‘연고가 간 손상 회복을 앞당겨줄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난 그는 밀회에 갈 준비를 했다.
그때,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피리를 부는 소리였다.
기수는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군막 밖으로 나갔다.
끊길 듯 이어지는 피리소리는 애절하기 짝이 없었다.
진백 역시 군막 밖으로 나와 좌우를 둘러보다가 기수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글쎄요. 우리 군영 안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허어!…. 누군지 모르지만 피리 한 번 구성지게 잘 분다.”
진백이 탄성을 토하자 기수도 멜로디에 집중해서 다시 들어보게 되었다.
과연 사람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느낌이 있었다.
‘이거 무슨 태교음악이라도 되나?’
일부 반복되는 멜로디는 콧소리로 쉽게 따라할 수 있었다.
기수는 누가, 무슨 목적으로 피리를 부는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