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
사천의 대파산(大巴山).
협서성과 사천성을 가르는 장벽답게 그 산세의 험준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 수백 개의 봉우리 중 하나에 도관이 세워져 있었으니, 이름하여 상춘관(常春觀).
도교의 한 지파로, 장문인이 단약 만드는 일에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들을 통해 온갖 종류의 약들을 만들었고, 그 효능이 뛰어나서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상춘관은 동시에 검술을 가르치는 문파이기도 했다.
50여 명의 많지 않은 제자들이 아침에 일어나 검술 수련을 한 후에야 각자 맡은 일을 시작했다.
제자들이 맡은 일이라는 건 약을 만드는 것이다.
입이 댓자나 나온 한 청년이 작두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존나 불공평하다고. 노동착취야. 어떻게 된 세상이 최저임금도 안 주냐고. 씨발.”
중원 땅에서 한국말로 욕을 해대는 사람은 바로 양기수.
PC 모니터로 무협지를 읽다가 빗소리에 잠이 든 대한민국의 알바인생 청년이었다.
그가 눈을 뜬 곳이 바로 이곳 상춘관의 숙소였다.
사람들은 깨어난 그를 보고 몹시 놀라고 반가워했다.
주화입마에 걸려 다 죽어가던 제자가 눈을 뜨고 벌떡 일어섰기 때문이다.
약을 팔아 돈을 버는 상춘관 입장에선 제자가 죽는다면 안 좋은 소문이 퍼질 게 분명했기 때문에 장문인도 꽤나 신경을 쓰던 터였다.
기수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왜 자기를 보고 떠드는지, 여기가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
기수는 우선 말을 배우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가장 황당한 것은 아무리 잠에서 깨어나려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는 점이다.
뺨을 때리고, 꼬집고, 심지어는 머리를 침상에 쾅! 쾅! 들이받아 보아도 여전히 이상한 장소였다.
꿈을 꾸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어서 엄습한 것은 목마름과 배고픔.
그걸 해결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밥맛도 이상했고, 국도 배가 고파서 억지로 먹긴 했지만 싱겁고 느끼하기만 했다. 야채볶음도 영 아니었다.
배가 차니까 엄마 생각이 났다.
‘내가 집에 안 들어가면 얼마나 걱정하실까?’
전화라도 걸려고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심지어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감을 잡았다.
장소뿐만 아니라 시대도 한참 달랐던 것이다.
동료로 추정되는 자들이 하는 얘기는 분명히 중국말.
기수는 자초지종이라도 알고 싶어서 어떻게든 대화를 하려 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몇 번 듣지 않았는데도 단어의 뜻이 짐작되었다.
그리고 자기도 어영부영 발음을 흉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더듬거리는 소리를 낸지 일주일 만에 동료들과 조금씩 대화가 통했다.
정말 신기한 일은 말뿐만이 아니라 글자도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에 영어만큼이나 한문도 어려워하던 기수이지만 약초에 관계된 책을 펼치면 어느 페이지를 봐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결국 2010년대를 살아가던 대한민국의 양기수가 중원 무림의 기수(奇秀)라는 청년 도사가 되는데 한 달이 채 안 걸렸다.
기수는 기억을 일부 잃어버린 척하고 동료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물어보았다.
자신의 한자 이름이 그의 성과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거울로 보니 패션 센스는 꽝이지만 어쨌거나 얼굴과 몸은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 외에 뭔가 다른 공통점이 있나 찾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기수는 전쟁통에 버려져 고아가 된 것을 문주님이 데려왔다고만 알 뿐, 부모나 친척에 대해 아무도 몰랐다.
결국 기수는 적응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서 무림이나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는 얘기들을 몇 번 읽은 적 있는데, 바로 그런 일들이 자신에게도 일어났다는 게 유일한 설명이 될 수 있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내일 깨어나면 아파트의 내 침대이겠지.’ 하는 기대를 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짚이 깔린 딱딱한 나무침상이었고, 동도 트기 전에 사형들이 나무 막대기로 만든 딱따기 치는 요란한 소리로 깨웠다.
처음에 가장 힘든 것은 담배 생각이었다.
낯선 시간, 낯선 장소에 낯선 사람의 몸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금단현상이 생기는 걸 보면 몸까지 한꺼번에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기수라는 인물은 양기수가 오기 전에도 분명 여기 살고 있었다.
내공심법을 연마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려서 죽기 직전이었다고 했는데, 자신이 와서 생명이 연장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죽을 운명인 사람의 자리만 차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담배 다음으로 기수를 괴롭힌 것은 인터넷이었다.
있을 땐 몰랐는데, 없으니까 정말 답답했다.
최소한 검색엔진에 시간과 공간을 넘는 육체 이동에 대한 질문이라도 올려보고 싶은데, 전기도 없는 세상에서 컴퓨터로 통신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없고, 해 떨어지면 그냥 자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었다.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나.’
기수는 몰래 눈물도 흘렸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꾸역꾸역 먹다 보니 야채볶음과 기름만 둥둥 뜬 국도 그럭저럭 맛을 느끼게 되었고, 말도 익숙해졌으며, 해 떨어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동트기 전에 일어나는 생활패턴도 몸에 익게 되었다.
그렇게 되는데 1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다.
답답하고, 두렵고, 엄마도 보고 싶었지만 시간과 함께 그런 감정들은 약해졌다.
그리고 기수에게 즐거움도 한 가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무공연마였다.
처음엔 또 다시 기혈이 막힐지 모른다면서 모두들 그의 운기를 막았지만 함께 검법을 수련해도 별 이상을 보이지 않자 나중엔 그냥 내버려두었다.
기수는 검을 들고 초식을 수련하고, 운기조식으로 단전에 뭉친 뜨거운 기운을 몸 구석구석 돌리기도 했다.
소설로 읽던 것과 실제는 달랐다. 무슨 검강이니, 경공술이니 하는 건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기수의 몸은 기대와 달리 하수였던 것이다.
그래도 검을 빙빙 돌리며 폼 잡는 게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다.
‘검 한 자루 어깨에 메고 천하를 종횡하며 협의를 행하는 영웅! 나도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무협지에서 읽었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했지만, 기수의 실력은 상춘관 제자 50명 중에서 20위권에 불과했다.
무협지로 따지면 주인공이 얍…! 할때 윽…!하고 쓰러지는 엑스트라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머릿속엔 초식이 다 들어 있는데 그것을 실제로 펼쳐내는데 있어서 힘이 딸렸다.
사형들의 얘기에 따르면 같은 동작을 하루에 100번 1000번씩, 1년이고 10년이고 반복하면 내공이 쌓인다고 했다.
끔찍한 얘기였다.
기수에겐 잘 늘지 않는 내공 외에 다른 불만도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제자들이 종일 일하면서도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까 그럴 수는 있다고 쳐도, 풍부한 알바 경험을 가진 기수는 노동력 착취를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동기와 사제들을 중심으로 노조를 결성하여 단체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말만 들었지 실제 노동운동을 해 본 경험은 없는 기수였지만, 그래도 그의 주장은 금방 호응을 얻었다.
기수의 요구사항은 하나였다.
“일하는 것에 비해 먹는 게 너무 부실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끼는 고기반찬을 주십시오.”
일단 그 사항이 통과되면 다음에 다른 요구를 하나 더하고, 그런 식으로 제자들의 권익을 찾을 계획이었다.
문주 관자추(關仔秋)는 기수의 요구에 기가 막혔다.
“생각해 보겠다.”
대충 그렇게 돌려보내고는 제자들 중 맏인 정두원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사부님.”
“기수가 말썽이다.”
“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고기반찬을 달란다.”
“저런 건방진…!”
정두원 입장에선 그런 요구사항이 있더라도 대사형이 자기를 거쳐서 했어야 하는데 쏙 빼놨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제가 알아듣게 잘 타이르겠습니다.”
“심하게 하지는 말고.”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제자에게 떠넘기고 자기는 쏙 빠진 관자추는 내실로 들어갔다.
등롱이 밝혀진 침상.
그의 아름다운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불을 활짝 젖히며 반겼다.
“오늘도 피곤하셨죠?”
관자추는 아내의 복장상태를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속살의 노출이 많은 것을 보니 작정을 한 게 분명했다.
관자추의 아내 경홍부인은 갓 서른이 된 한창 나이의 미인으로 관자추에게는 세 번째 부인이었다.
처음 그녀를 아내로 맞을 때만 해도 관자추는 그녀와의 방사에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하지만 스무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조금씩 관자추를 주눅 들게 만들었고, 반대로 남자에 눈을 뜬 경홍부인은 점점 더 농도 짙은 요구를 했다.
그러다 보니 근자에 이르러서는 관자추가 그녀를 피해 다니기에 이른 것이다.
“여보…”
경홍부인이 콧소리를 내며 등을 끌어앉자 관자추는 등짝으로 꾸욱 밀착되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 감촉에 몸을 한 차례 떨었다.
‘아! 10년만 젊었어도…’
한창 팽팽하고 탱글탱글한 그녀를 안고 밤새도록 운우지락을 나누고 싶은데 아랫도리가 도무지 반응을 하지 않았다.
“으음……. 부, 부인!”
경홍부인의 손이 관자추의 아랫도리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능수능란한 손길에 관자추는 계속해서 신음을 토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를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애가 타는 건 경홍부인이 더했다.
남편이 아버지뻘이라는 건 이미 시집 올 때부터 각오를 한 바였다.
하지만 신혼 때는 그렇게 잘 해주고 밤새 자신을 괴롭히던 남편이 이렇게까지 쪼그라들 줄은 정말 몰랐다.
차라리 가르쳐주지나 말던가.
방사의 즐거움을 다 알게 해준 후에 이제 와서 이렇게 흐물거리는 건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경홍부인은 부드러운 손길로 어떻게든 힘을 불어 넣으려고 애썼지만 관자추는 신음만 토할 뿐 도무지 일어서지를 못했다.
경홍부인이 관자추의 귀에 속삭였다.
“입으로 해볼까요?”
“헉! 돼, 됐소. 사실은 이번 단약의 불 조절 때문에 북두단에 올라가서 밤을 새야 할 것 같소.”
“불 조절 같은 건 제자들 시켜도 되잖아요?”
“이번 단약은 정성을 다해야 하오.”
경홍부인은 한숨을 내쉰 후 쥐고 있던 물건을 놨다.
이번에 만드는 약이 어렵게 구한 재료들을 집대성한 최고의 단약이고 상춘관의 운명을 건 역작이라는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편이 자기를 피하는 핑계일 뿐이라고 여겨졌다.
“아직 날이 추운데 옷 든든히 입으세요.”
“걱정 말고 먼저 자구려.”
관자추가 서둘러 나가자 경홍부인은 한숨을 쉬며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 밖을 내다봤다.
모두들 잠든 시간.
달빛만 교교하게 상춘관의 지붕들을 비추고 있었다.
경홍부인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다가 붓을 꺼내들었다.
먹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그 붓은 글씨를 쓰는 용도가 아니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달뜬 호흡이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