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4
기수는 출발 원 안에 섰다.
목인들이 서 있는 폭 2미터 정도의 좁은 통로 안에는 석판들이 깔려 있었고, 그 건너에 도착지점이 보였다.
소림승들이 목봉을 휘저으며 준비 자세를 잡자 기수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간다!”
순간, 그의 몸은 화살처럼 폭사되어 어느새 건너편 원에 도착해 있었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빠르기였다.
기수가 심판관인 소림승 공청에게 물었다.
“석판 다 밟은 거 보셨죠?”
“예. 그, 그렇습니다.”
벙 쪄서 입만 벌리고 있던 구경꾼들이 그제야 환호성을 질렀다.
기수는 다음 동인진 앞으로 갔고, 구경꾼들이 우르르 이동했다.
공청은 동인진을 맡은 소림 제자들에게 눈짓을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뜻이었다.
“자! 간다!”
기수는 소림승들이 준비 되자마자 다시 출발했다.
쌩! 소리와 함께 폭사되는 신형.
동인진의 소림승들은 목인진에 배정된 제자들보다 무공이 더 뛰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수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의 경공술 선풍비가 너무나 빨랐던 것이다.
기수는 다시 공청에게 확인했고, 공청은 통과를 인정했다.
기수가 두 번째 역시 간단히 통과해버리자 구경꾼들은 함성을 지르는 한편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소림사에서 준비한 시험이 너무 쉬운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온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기수는 별다른 실력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단지 빨리 달리기만 했을 뿐인데 소림승들의 손이 느려서 그를 제지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기수가 마지막 관문까지 같은 방법으로 통과할지 궁금하여 철인진 앞으로 몰려들었다.
소림승 공청은 철인진에 배정된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곳마저 허망하게 뚫리면 우리 소림의 수치가 될 수도 있다. 정신차려라!”
“걱정 마십시오!”
제자들은 공청을 안심시켰다.
앞의 두 진과 달리 철인진에는 나한전 중에서도 항렬이 높은 승려들이 특별히 뽑혀 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이다.
기수가 공청에게 물었다.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공청은 제자들과 시선을 교환한 후 말했다.
“물론입니다! 오십시오.”
기수는 진기를 끌어올리고 출발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공간 패스를 받아 오프사이드 라인을 빠져 들어가는 공격수처럼 갑작스럽게 몸을 날려 철인진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목봉들이 빠르고 강력하게 길을 막았다.
과연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그것은 기수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과제였다.
그러나 그는 목봉의 움직임에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간파하고 그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보기에는 엉겁결에 피하다가 운이 좋아서 공격의 빈틈을 찾은 것 같은 움직임. 그러나 기수 본인은 완벽한 계산 아래 꼭 필요한 만큼만 몸을 움직여 피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세 번째 관문마저 간단히 통과해 버렸다.
첫 통과자를 축하하는 함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앞 다투어 목인진 앞으로 몰려갔다.
기수가 통과했듯이 자신들도 간단히 통과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첫 날. 기수 이후에는 목인진에서조차 단 한명도 통과자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만만하게 보고 덤빈 게 첫 번째 패착이었고, 기수의 통과 이후 소림의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한 소림승들이 죽을 힘을 다해 막은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저녁의 팔각정.
단운비와 공손탁, 공손추 등은 기수의 예선 통과를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그러나 신주오룡 중 소림 제자인 현범은 표정이 별로 밝지 않았다.
이름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청년에 의해 소림이 망신을 당했다고도 할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현범은 불제자답게 그런 생각을 속으로만 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기수만 주목하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림승들이 처음이라 진 운용에 익숙하지 않은 걸 이용해서 잽싸게 통과했으니 그 기민함 만큼은 인정해야겠지요. 후후…”
십절금왕문의 소문주 백무련이었다.
단운비가 반박했다.
“백형은 그때 기형의 신법을 보지 못했단 말이오?”
“마지막에 운 좋게 피하는 건 봤습니다.”
단운비가 또 나서려 하자 기수는 손짓으로 자제를 부탁했다.
그는 사실 오늘 자신이 한 일을 약간 후회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그는 스스로를 무슨 정의의 용사나 군자, 애국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최소한 자기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기라도 했다면 몰라도, 조국조차 다르기 때문에 무슨 사명감이니, 애국심 같은 건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청년 영웅으로 중원 천하를 누비고 다니면서 여자를 따먹… 여자와 자는 거라면 열심히 할 수 있겠지만, 새외의 무리들로부터 중원을 지킨다거나 마교로부터 정도무림을 지킨다거나 하는 일엔 관심 없었다.
그런데 오늘 같은 일로 무림맹 안에서 유명해진다면 코가 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백무련이 그냥 처음이라 운이 좋아서 통과한 것이라고 말할 때, 자기를 깎아내리려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고맙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단운비는 기수의 대응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한다는 군자의 표상 아니겠는가? 기형은 참으로 배포가 큰 사람이구나!’
하는 식으로 멋대로 해석해버렸다.
기수는 사실 소림의 관문을 통과한 것보다 당운영의 표정을 살피는데 더 집중하고 있었다.
아침에 찾아오지 않은 것이 좀 이상했는데, 하루 만에 좀 야위어 보였다.
뭔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우유를 좀 더 먹여야 하려나?’
말도 안 되는 나름대로의 처방을 내리고 있는데 사해문 소문주 호문평이 자리를 권하고 술잔을 건네주었다.
“기형. 우리 술 한 잔 합시다!”
속 좁은 백무련과 달리 호문평은 호탕하고 사내다웠다.
거기에 단운비와 공손가 형제까지 더해서 네 사람은 기분 좋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백무련과 화양문의 양화린은 거기에 끼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자들이 술자리를 벌이는 동안 여자들은 따로 뭉쳤다.
먼저 얘기를 꺼낸 사람은 백서린이었다.
“기공자의 사문이 어디라고 그랬지?”
호칭이 공자로 바뀐 것은 낮에 보여준 놀라운 경공실력 덕분이었다.
“아마 상춘관인가 뭔가라고 했을 걸.”
양여옥이 붉은 눈썹 중 한 쪽을 올리며 말했다.
“그 남자 내가 찍었어. 다들 눈독들이지 마. 알았지?”
그녀는 지난번부터 기수에게 관심을 드러냈기 때문에 자신에게 선점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생각일 뿐이었다.
능소화가 말했다.
“난 너희들이 오기 전부터 기소협과 알고 지냈어. 혹시라도 마음이 있으면 내 뒤로 줄을 서라고. 호호호!”
그녀를 보며 당운영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흥! 이제까지 모른 척하고 무시했으면서. 소림의 철인진을 뚫었다고 어쩌면 저렇게 금방 태도가 바뀔 수 있지?’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에서 최고의 가치는 무공!
숨어 있던 실력이 드러나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운영은 조바심이 났다.
어제 한숨도 못 잔 것은 기수가 유향경과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잠만 안 오는 게 아니라 밥을 먹어도 맛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젖 짜러도 안 갔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묘했다.
유향경 한 사람만 해도 골치가 지끈거릴 지경인데 능소화를 비롯한 정도무림 최고의 미녀 언니들이 기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안 돼! 기소협은 내 거야. 난 이미 젖도 짜먹을 만큼 그와 친하다고!’
그러나 그 사실을 겉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십정금왕문의 백서린이 능소화에게 말했다.
“네가 기공자와 먼저 만났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철인진 통과 전까지 너는 기공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었잖아?”
그러자 호운혜와 양여옥이 즉시 동조했다.
“맞아! 우리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해.”
“그래. 동등한 출발선에 서는 거야.”
당운영은 언니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다가 누구 한 사람이 좋다고 하니까 모두들 우르르 몰려드는 모습이 꼭 대여섯 살짜리 아이들 같았다.
백서린이 말했다.
“우리 제비를 뽑을까?”
당운영이 보다 못해 한 마디 했다.
“언니들. 기소협에게 이미 좋아하는 여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그러자 양여옥이 냉소를 지었다.
“있어봤자지. 설마 우리보다 더 예쁘겠어?”
자신감을 가질만한 외모들이기는 했다.
그러나 당운영은 경쟁자 유향경이 얼굴만 가지고 기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운영 본인도 해봐서 알지만 기수의 무지막지한 거물을 입으로 머금고 몇 가지 복잡한 동작들을 해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니들은 경쟁이 안 될지도 몰라. 나라면 모를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미파의 능소화가 말했다.
“제비뽑기보다 우리 내기를 하는 게 어때?”
“무슨 내기?”
“우리들 중 누가 그를 유혹하는데 성공하느냐에 은 한 냥씩 거는 거야.”
“오! 그거 재미있겠는데?”
백서린, 호운혜, 양여옥 등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능소화가 이어서 말했다.
“우리끼리 순서를 정해서 그를 만나는 거야. 그리고 그가 사랑 고백을 하면 승자가 나오는 거지.”
“사랑고백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확인해?”
“음…. 편지를 받으면 이기는 걸로 하자.”
“좋아! 재미있겠다.”
당운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소협이 좋다고 하면 혼인할 생각인가요?”
그러자 네 명의 여인이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양여옥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우리는 어차피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할 수 없어. 집안 어르신들끼리 정하는 곳으로 시집가야 한다고.”
그것은 명문가 자녀들의 공통된 운명이었다.
남부럽지 않게 호의호식하고, 영약을 밥처럼 먹어대고, 소년시절부터 절정의 무공을 보유하게 되는 대신, 부모가 정해주는 상대와 결혼해야 한다는 게 아들이건 딸이건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그나마 아들은 좋아하는 여인을 첩으로라도 둘 수 있지만 딸들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좋은 결말로 이어질 가능성이 극히 희박했다.
당운영의 경우는 그들과 좀 달랐다.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딸을 외부로 시집보내지 않고 데릴사위를 맞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정략결혼 자체를 하지 않았다.
정략결혼이란 비슷한 가문끼리 서로 득을 보자고 혼인으로 결합하는 것인데. 당가와 비슷한 가문이라면 아들을 데릴사위로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운영이 물었다.
“좋아하지도 않을 거라면 왜 유혹을 하는 거죠?”
“재미있잖아!”
네 명이 다시 까르르 웃어댔다.
“만약 그 남자가 언니들을 좋아하면요?”
“혹시 무림맹에서 높은 지위라도 차지한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곤란하지.”
“맞아. 언감생심 어디를 감히 넘봐? 한때 관심 가져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안 그래?”
“내 말이 그말이야. 호호호!”
당운영은 맞장구치며 웃어대는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수에 대한 감정 때문에 한창 괴로운 당운영은 인간의 연애감정 가지고 장난을 치겠다는 네 명의 계획에 증오심 같은 것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당운영은 기수의 거처를 찾아갔다.
기수가 그녀를 반가이 맞았다.
“오! 젖 짜는 소녀. 어서 와.”
“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아~놔. 진짜….! 너가 뭐냐? 오빠라고 해 봐.”
“싫어! 네가 왜 내 오빠야?”
“하여간 고분고분한 법이 없단 말야. 할 얘기가 뭔데?”
당운영은 어제 여자들끼리의 모임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주었다.
기수는 코웃음을 쳤다.
“흥! 나를 가지고 놀겠다고?”
사실, 능소화, 백서린, 호운혜, 양여옥 등의 4명은 얼굴로 보나, 몸매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현 무림맹 내에서 독보적인 미녀들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자기에게 다가와 사랑을 속삭였다면 전혀 의심도 못하고 깜빡 넘어갔을 게 분명했다.
“고마워. 가르쳐줘서.”
당운영이 생긋 웃고는 조심스럽게 기수의 의사를 타진했다.
“오늘 중으로 산 아래 집을 한 칸 빌릴 생각이야. 내일부터 거기서 만나자.”
“집은 왜?”
“무림맹 안은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아서 해약 짜먹기가 불안해. 여기만 해도 원래는 공손가의 숙소잖아.”
기수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유향경에 대한 애정이 약간 식는 중이라서 은근히 마음이 동했다.
‘요렇게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가 밀회 장소까지 스스로 마련해가면서 공평함을 요구하는데 내가 응해주지 않으면 벌 받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니까 당운영은 주둥아리에서 욕만 나오지 않는다면 정말 귀여운 마스크였고 몸도 성숙했다고 볼 수 있었다.
기수가 그녀를 껴안을 생각으로 다가가자 당운영은 뭔가 불안한 예감을 느꼈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너 왜 그래? 다가오지 마!”
기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접근했고, 당운영은 등이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