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87
기수는 나머지 강시들을 파천강기로 최대한 빨리 처단하고 장원 안쪽으로 진입했다.
진기를 아낄 상황이 아니었다.
담 하나를 넘자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화염의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불꽃에 푸른 기운, 녹색 기운이 섞여 있는 걸 보면 단순히 나무에 불을 붙인 게 아니라 뭔가 화학약품 같은 걸 뿌린 게 분명했다.
“젠장!…”
기수는 그 와중에도 진기를 끌어 올려 기감을 집중했다.
그러자 화염의 반대편에서 움직이는 서너 명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따라와!”
기수는 공주와 아투사에게 그렇게 말한 뒤 선풍비로 장원 담을 넘어 반대편으로 돌아갔고, 오래지 않아 달아나는 일월신도 교도 네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중에서 착지하기도 전에 잔백지를 날려 그들을 제압한 기수는 한 명을 일으켜 마혈을 풀어준 후 물었다.
“사득공과 한귀비는 어디에 있지?”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기수는 여러 마디 귀찮게 물을 필요 없이 염정구심술을 시전했다.
공주가 조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얘기 좀 해 봐. 어떻게 된 거야?”
“이놈들은 아무 것도 몰라. 신호가 전달되면 인원이 모두 철수하고, 몇 명만 남아 장원을 불태운 후 빠져나가도록 정해져 있었나봐.”
“한귀비가 여기 있었던 건 맞아?”
기수는 일월신교 교도를 잠시 노려본 후 대답했다.
“사득공과 최근에 나타난 의문이 여인이 모두 여기 있었어.”
“아! 미치겠네…”
거의 다 쫓아왔는데 잡지 못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기수는 혹시라도 그들의 행적에 대해 아는 게 없는지, 사소한 단서라도 찾기 위해 일월신교 교도의 머릿속을 뒤져봤지만 마지막 명령 이후의 행적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기수는 놈을 밀어 쓰러트린 후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지금 침착할 수 있어? 한귀비가 싸우지 않고 도망친 걸 보면 은혈대법의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해. 지금이야말로 그녀를 잡을 최적의 기회라고.”
그것은 기수도 인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무작정 아무 곳으로나 달려갈 수는 없잖아.”
공주는 입술을 깨물며 발을 굴렀다.
좋건 싫건, 내일 해가 질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기수가 말했다.
“내일 새로 방향을 잡으면 내가 그 선을 따라 최고 속도로 달려가 볼게. 그녀가 경공 없이 움직인다면 하루거리쯤 반 시진도 안 되서 따라잡을 수 있어.”
공주는 그제야 어깨를 크게 한 번 들썩인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렇게라도 해보는 수밖에 없겠네.”
길도 낮선 강남 땅에서 작정하고 도망치는 사득공과 한귀비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야 했다.
아쉬운 마음을 다잡고 있으려니 동료들이 도착했다.
먼저 온 쪽은 혈매궁의 여섯 사매.
서문보다 훨씬 먼 북문 쪽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시랑보다 먼저 온 것은 그만큼 강시들을 빨리 처치했다는 뜻이었다.
표정들을 보아 하니 다들 기분이 몹시 좋은 것 같았다.
얼마 안 되는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대법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기수는 보람을 느꼈다.
잠시 후 백시랑도 도착했다.
그는 공주에게 목례를 한 후 장원의 불부터 끄도록 지시했다.
화재가 진압되고 주변이 정리되자 속속 도착한 장군부 무사들이 장원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백시랑은 공주에게 다가와 물었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마마.”
공주는 복면을 벗은 후 대답했다.
“저기 마당에 쓰러져 있는 강시들 보이죠? 형부.”
“예.”
“저거 전부 제 솜씨에요.”
“예? 정말입니까?”
“전부는 아니고 몇 개는 우리 궁녀가 부쉈지만 그래도 대부분 제가 해치웠어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형부가 더 걱정이에요. 어디 다친 데 없으세요?”
“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백무영은 처제의 말이 허풍인지 진담인지 몰라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석초가 달려와 소식을 알렸다.
“시랑님! 지하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창고라고?”
“예. 강시 제조 시설이 가득 들어차 있다고 합니다. 지금 선발대가 내려가서 수색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개들이 냄새를 맡지 못한다 했더니… 땅 속에 숨겨놓고 있었구나.”
기수가 급히 말했다.
“지금 들어간 사람들을 전부 나오라고 하십시오.”
백무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분명히 함정일 것입니다. 인화물질까지 준비하고 철수에 대비하던 자들이 그런 중요한 장소를 쉽게 조사하도록 놔둘 리 없습니다.”
백무영과 석초는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그리고 즉시 지하창고로 달려갔다.
단서를 찾아낸 무관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얼굴로 군례를 올렸다.
“시랑님. 저희가…”
“어서 나오라고 해라!”
“예?”
“모두 몇 명이나 들어갔지? 당장 나오라고 해.”
“열네 명이…. 그런데 왜…”
그때 뚜껑을 열어젖힌 입구 안쪽에서 미약한 폭음 같은 것이 연달아 나더니 곧이어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무, 무슨 일이냐?”
입구를 지키던 무관이 아래를 기웃거리다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내 눈….”
기수는 열린 구멍을 통해 녹색 가루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달려가 뚜껑을 덮어버렸다.
석초가 기겁을 하며 달려들었다.
“그것을 덮으면 어떻게 하오? 안에 아직 우리 사람들이 있는데.”
“이미 늦었습니다.”
냉정하지만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미 비명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녹색 독 가루가 지상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게 급했다.
아래를 들여다봤던 무관도 금세 조용해졌다.
얼굴이 녹아 뼈까지 드러난 처참한 죽음이었다.
보는 사람들 모두 다 그 끔찍한 광경에 치를 떨었다.
기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저걸 공주가 맞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호신강기로 즉시 몸을 보호했던 자기도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를 정도로 가루의 독성은 심각했다.
‘사득공. 넌 사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도 반드시 없어져야만 하는 존재야. 기필코 내 손으로 죽여주마.’
한귀비의 은혈대법보다 사득공의 녹색 독 가루가 어쩌면 더 까다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도 무관의 주검을 보고 분개했다.
“사득공! 이 나쁜 놈.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고 말 거야.”
그러자 백무영이 물었다.
“방금 사득공이라고 했습니까?”
“예.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자리라 마마니, 형부니 하는 호칭은 생략되었다.
“그는 환우구종 중 요종의 전인입니다.”
“환우구종이라고요?”
공주는 물론 기수와 조백호도 깜짝 놀랐다.
백무영의 말이 이어졌다.
“예. 환우구종은 마종, 검종, 사종, 화종, 독종, 음종, 요종, 도종, 비종을 일컫는 말인데, 천마교를 세운 마종, 일월신교로 갈라져 나온 사종, 화양문을 세운 화종, 약선문을 세운 독종, 장백천문을 세운 도종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경우도 있고, 비밀에 싸인 경우도 있습니다. 음종은 이번에 무림맹과의 대결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고, 검종과 요종, 그리고 비종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종이 일월신교와 손을 잡았다는 건가요?”
백무영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확실한 건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요종의 전인이 사후명이란 자였고, 그에게 득성, 득공이란 두 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주는 조백호 쪽을 봤다.
동창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백호는 공주의 시선을 피했다.
백무영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동창이야 궁 안에서 황상을 모시는 내관이고, 우리 장군부는 사해팔황을 주름잡는 무관들인데 아무래도 보고 듣는 것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겠지요. 하하하!”
조백호는 백무영을 노려봤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공주가 백무영에게 물었다.
“요종은 무엇을 특기로 삼는 문파죠?”
“부적과 재초, 기문둔갑과 술법, 환혼술과 강시술 같은 것을 행했다고 하지만 오래전의 얘기라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기수는 사득공의 무공이 일반적인 사도들과 달랐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요종이란 말이지…’
생각해보면 기수는 환우구종 중 검종만 빼고 전부 다 만나본 셈이었다.
불현듯 조민, 조현 자매가 생각났다.
‘그녀들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낼까?’ 아니면 비종이란 이름처럼 베일에 싸인 채로 계속 지내게 될까?‘
이 어수선한 난세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걸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공주가 툭 치는 바람에 기수는 화들짝 놀랐다.
“아냐! 나 상상 안 했어.”
“무슨 상상?”
“아! 그,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아냐. 왜?”
“일월신교와 요종이 한통속이라면 새로운 은신처 역시 강남 어딘가에 있겠지? 어떻게 생각해?”
기수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그건 아닐 거야. 사득공이 독자적인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은 외부와의 접촉 없이 한 장소에 틀어박혀서 연구에만 몰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강시 연구?”
“응. 예전의 강시들은 저들보다 훨씬 약했거든. 그리고 분명히 일월신교 교도가 제조했었고. 아마 내 생각엔 혼자 강시 만들기에 한계를 느낀 사득공이 사람도, 돈도 풍부한 일월신교 쪽에 슬쩍 정보를 흘린 것 같아. 그래서 일차로 완성이 되자 자기가 마지막 마무리를 해서 완성체를 뽑아낸 거지.”
“그럼 동지가 아니라 일월신교를 이용해먹었다고 보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일월신교는 상당한 위기상황에 몰렸으니까 조건을 내세울 처지가 아니었을 거야.”
“아! 그런 사이라면 지금은 어디로 갔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거네.”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백무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수를 쳐다봤다.
아무리 위장 신분이라고 해도 공주와 스스럼없는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궁녀출신이 일월신교의 강시 개발과정에 대해 속속들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도 수상했다.
기수는 백무영의 시선을 느끼고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공주의 팔을 잡아당기며 평소보다 더욱 가녀린 소리로 말했다.
“언니. 여기 일은 장군부에 맡기고 우리는 이만 쉬러 가요.”
맞은편의 여섯 사매들이 동시에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아투사도 기수의 그런 목소리는 듣기 거북한지 몸을 한 차례 떨었다.
기수는 ‘내가 뭘?’하는 표정으로 그녀들을 봤지만 아무도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고 다들 땅에다 한숨만 토해냈다.
장군부에서 내어준 장원에 들어간 공주와 혈매궁 일행은 우선 전갑을 벗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공주는 조백호를 따로 불러 말했다.
“너. 여기서 있었던 일을 창주에게 보고할 거지?”
“물론입니다.”
“어떤 식으로 쓸 건데?”
“우선 강시 토벌 과정과 강시의 위력에 대해 자세히 써야겠지요. 그리고 요종의 사득공과 한귀비가 한 통속이고, 일월신교와 협력관계였다는 얘기를 적을 겁니다.”
“좋아. 거기에 한 가지 덧붙일 게 있다.”
“예. 말씀하십시오.”
“이번 강시토벌전에서 혈매궁이 지대한 공을 세웠으니까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해. 공으로 과를 상쇄하자는 거지.”
“예? 그, 그것은 곤란합니다.”
공주는 발끈했다.
“곤란하다니? 지금 내 명을 거역하겠다는 게냐?”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창주님에게 고작 백호인 제가 올릴 말씀이 아니라서…”
“흐음…. 그건 그런가? 알았어. 편지는 내가 직접 쓰도록 할게. 동봉해서 전하는 건 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대답은 했지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공주 역시 혈매궁의 여섯 여인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혈매궁 궁주가 기수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굴레를 벗겨주고 싶었다.
내친 김에 그 자리에서 편지를 썼다.
다 쓰기를 기다린 조백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마마. 여기엔 얼마나 머무를 예정이십니까?”
“그건 왜?”
“사실, 적의 근거지를 찾아낸 것은 우리 동창의 공 아닙니까?”
공주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동창이 제시한 장원은 여러 개였다.
아투사의 보석이 있었기에 그들 중 하나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이곳의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머물렀으면 합니다만…”
조백호는 천상 환관이었다.
공적부에 자기 이름 올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공주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와 정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여기 있는 게 좋을 것 같네.”
“감사합니다. 헤헤헤…”
“그럼 수고해. 우린 내일 저녁 떠날 거니까.”
“예? .마마!….마마….”
공주는 매몰차게 돌아서서 나갔고, 조백호는 그녀를 급히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