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17
기수는 행복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사매들이 어느 때보다 극진한 서비스를 해주었기 때문에 밤새도록 황홀했다.
기수는 그녀들 사이에 뭔가 조율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박을 하고 돌아왔는데 아무도, 심지어 공주도 추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서비스라니.
아마 태양과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 벗기기 내기를 했는데 결국 태양이 이겼다는 우화를 어디서 읽은 모양이다.
자신을 따듯하게 포용해준 그녀들이 사랑스러워서, 기수는 아침 먹기 전에 한 번 더,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그러면서 기수는 생각했다.
‘오늘은 하루 온종일 별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매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날로 정해도 될 것 같은데?…’
암천제와 자영등을 돌려보낸 후 별채는 완전히 혈매국 만의 공간이 되었기 때문에 문에 손님을 맞지 않겠다는 회피패(回避牌)만 걸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만 하고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함께 아침을 먹고 행복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기수는 황급히 옷을 입고 손님을 맞았다.
놀랍게도 호운혜였다. 더욱 놀랍게도 4명이나 더 있었다.
무림맹의 미녀들이 5명이나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다.
기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찾아온 5명의 공통점은 하나.
사매들과 좋았던 분위기가 다시 위기에 몰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5명의 차림새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화보라도 찍는지 화장이며, 옷이며, 장식품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사매들의 표정도 잔뜩 굳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끼리는 얼마나 공들여서 꾸몄는지 더 자세히 알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일로 오셨소?”
호운혜는 배시시 웃었다.
“전처럼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오라버니.”
“하핫!… 그, 그게 좀….”
기수는 슬쩍 사하의 눈치를 살폈다.
5명 중 유일하게 자기를 내쫓은 여인이기 때문이다.
눈가에 은은하게 남아 있는 노기. 그러나 이전과 달리 자기를 미워하는 감정만 담긴 게 아니라 뭔가 도전적인 의지가 엿보였다.
막상 자기 이외에 12명의 경쟁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니까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백서린이 가슴을 앞으로 쑤욱 내밀면서 기수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언제 우리 십절금왕문의 숙소에 한 번 와주세요.”
그녀의 가슴 내미는 행동이 많은 여인들의 공분을 샀다.
기수는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글쎄… 급히 해야 할 일들이 좀 있어서 시간이 날까 모르겠네.”
백서린은 기수의 냉정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다른 여인들의 입가에 조소가 번지는 것도 놓칠 수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저하고 만날 시간 정도는 내주실 수 있지 않나요?”
“그게… 사실은 내 무공의 완성과 관련된 일이라서…”
백서린의 양 볼이 상기되었다.
그날 밤 그토록 뜨겁게 사랑을 속삭여주던 기수가 설마하니 자기한테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양여옥은 그런 백서린을 곁눈질로 보며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기수에게 말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일로 얘기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 한 번 약속을 잡아주시죠.”
이미 전에도 만나 긴밀한 대화를 나눈 사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려던 그녀의 시도는 기수의 대답으로 인해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당분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양여옥은 기가 막혔다.
정자에서 그토록 달콤한 입맞춤을 해주던 그 남자가 맞나 싶었다.
호운혜는 백서린과 양여옥을 향해 ‘내가 뭐라고 그랬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하가 기수에게 물었다.
“무공의 완성 때문에 시간을 내줄 수 없다는 겁니까?”
“그, 그렇습니다.”
정색하고 경어를 쓰니까 확실히 어색했다.
사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더 길게 얘기할 것도 없군요. 전 가겠어요.”
그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기수와 호운혜 등은 그녀의 그런 행동에 당황했다.
물론 사매들은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다.
호운혜가 기수에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라버니가 바쁘시다면 우리도 다음에 와야겠네요.”
그러자 당운영, 백서린, 양여옥 등도 따라 일어났다.
기수는 그녀들을 잡지 않았다.
물론 양여옥 한테는 관심이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 이도저도 아닌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다수 쪽에 붙는 게 정답이었다.
혈매궁 거처를 나와 양여옥의 방으로 가는 동안 네 미녀는 올 때보아 10배는 많은 무림맹 남자들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
현재 무림맹 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미녀들이 잔뜩 치장까지 하고 지나갔다는 말에 다들 궁금해서 나와 본 것이다.
그들은 네 미녀들이 저마다 최대한 차려입고 화장한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 감흥이 없엇다.
거처로 돌아간 네 사람은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특히 양여옥과 백서린은 분하고 기가 막혀서 낯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호운혜가 그녀들에게 말했다.
“내가 뭐랬어? 그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거라고 했잖아.”
양여옥과 백서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참의 진정할 시간을 가진 후 백서린이 호운예에게 말했다.
“그래서… 네 생각을 말해 봐.”
호운혜는 씩 웃었다. 양여옥과 백서린이 기수를 포기하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 자기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그녀는 네 사람의 머리를 가까이 모은 후 말했다.
“우리가 기소협을 빼앗아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어제 얘기한 그거?”
“남자들은 다 똑같아. 미녀가 많은 쪽으로 끌리게 되어 있어.”
양여옥과 백서린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럼… 그를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어떻게든 불러와서… 그러니까… 순서를 정해서… 만난다는… 그런 뜻이야?”
“야! 우리끼리 있으면서 뭘 그렇게 조신한 척 해?”
“그, 그래도…”
“어쨌거나 작전은 그거야.”
양여옥과 백서린의 볼이 붉어졌다. 당운영도 마찬가지였다.
한 남자를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뭔가 말도 안 되는 몹시 나쁜 짓을 모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서로를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면서, 한편으로는 묘한 공범 의식 같은 게 생겨났다.
본래 그녀들도 순정과 자존심을 당연시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특별했다.
기수를 안고 싶다는 정열에 거부로 인한 자존심의 상처가 더해져서 뭔가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느낌이었다.
백서린이 호운혜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게 잘 될까? 방금도 거절했잖아.”
“혈매궁 마녀들 없을 때 소식을 전할 수만 있으면 반드시 올 거야.”
“확신해?”
“그를 겪어보고도 몰라? 정욕이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남자잖아? 그런 그가 여자를 거부할 리가 있어? 더구나 우리 같은 미녀들을…”
백서린은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리고 비비 꼬았다.
그러나 경험이 한 번 뿐인 양여옥은 그런 걸 알 정도까지 성감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라서 막연히 짐작만 할 뿐이었다.
백서린이 다시 물었다.
“그가 여기에 와도, 그 마녀들이 시끄럽게 굴면 금방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호운혜가 대답했다.
“우리에겐 당가의 여식이 있잖아.”
당운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요?”
“기공자가 일단 여기에 오면 우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묘약 같은 것을 먹일 수 있지 않을까? 혈매궁의 마녀들은 생각도 나지 않도록…”
당운영은 손을 내저었다.
“우리 당가를 뭘로 보는 거예요? 음약 같은 건 만들지 않아요.”
그녀가 보기에 그건 너무 치사한 짓이었다.
“내가 음약이라고 했어? 묘약이라고 했잖아. 예를 들면 약간 정신이 몽롱해져서 그냥 현재 상황에 안주하게 된다거나 하는…”
그건 더 나쁜 짓 아닌가.
당운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당가에 그런 종류의 약은 없어요. 하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독은 얼마든지 있어요. 기소협이 끝끝내 나에게 오지 않는다면 죽여 버릴 거예요.”
세 여인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참아!”
“그럴 수는 없어!”
당운영은 배시시 웃은 후 말했다.
“물론, 기소협이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세 여인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천당가는 비록 무림맹에 속해 있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사마연합 쪽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운혜가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보타문의 사소저는 어디 간 거지? 왜 여기로 안 온 거야?”
“싫으면 그만두라고 하죠 뭐.”
당운영 뿐만 아니라 백서린과 양여옥도 그녀가 빠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숫자로 밀어붙여서 기수를 끌어온 후에 독차지 하는 것은 개인별로 능력을 발휘하는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럴 거라면 경쟁자가 하나라도 적어야 좋은 것이다.
호운혜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8명 대 4명이면 일단 숫자로는 절반밖에 안 되네. 양보다 질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겠어. 여옥아.”
“응?”
“네 시녀나 하인들을 시켜서 혈매궁 거처 주변을 감시하도록 해.”
“알았어. 기소협이 혼자 나오면 즉시 우리한테 알리라고 하면 되는 거지?”
그러자 당운영이 끼어들었다.
“우리한테 왔다 갔다 할 시간이 어디 있어? 그냥 모든 하인들에게 미리 편지를 적어 줘. 기소협을 만나면 사매가 있건 없건 바로 전하라고.”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판단은 기소협이 하는 거니까.”
네 명의 공범의 미소를 교환했다.
자기들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여덟 마녀로부터 기수를 구출해내야 한다는 사명감뿐이었다. 그녀들 앞에서 기수의 무심한 태도를 대한 후 다들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기수는 회피패를 걸고 사매들과 행복한 시간을 이어갔다.
그러나 화류 태포련의 변형 발출 가능성을 확인한 이후로 거기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방보다 욕실에서 파티를 벌이면서 짬짬이 계속 시도를 해보았는데, 뭔가 감이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잘 되지 않았다.
‘이건 어르신께 여쭤볼 수밖에 없네…’
그렇게 생각하며 목욕통에 손을 넣었는데 턱! 하고 뭔가 걸렸다.
기수가 자꾸 물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공주가 장난삼아 물을 얼려버린 것이다.
얼음의 두께는 얇았지만 무심코 손을 넣다가 걸려서 그런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수류 호신강기를 꼭 부드러운 것으로만 할 이유는 없잖아?’
다른 오행은 태포련이 양강하고 파괴적인 반면 호신강기는 음에 속해서 좀 더 수비적이고 부드러운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수의 태포련을 더 음유하게 변형시키려다가 실패했던 것인데, 양과 음의 차이를 딱딱하고 부드러움이 아닌 온도의 높고 낮음으로 본다면 양일 땐 끈적끈적, 음일 땐 딱딱한 얼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 잠깐만! 나 오늘 그만 해야겠다. 개인 시간을 좀 줘.”
그러자 아래쪽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하던 건 마저 해야지!”
앞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우리 차례까지는 다 돌아야지!”
“아, 알았어. 빨리 하자. 빨리.”
“천천히 오래 하고 싶은데…”
“안 돼. 나 지금 급하단 말야.”
기수는 순번을 다 채운 후에야 겨우 사매들로부터 해방되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당분간 나 혼자 있게 좀 해 줘.”
그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 기수는 한음빙정공을 끌어 올려 호신강기로 만들어보았다.
그러나 실패.
물속이라면 몰라도 공기 중에서 난데없이 얼음이 만들어질 리 없었다.
‘안 되는 건가?’
막막한 마음에 한숨을 쉬자 방 밖에서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고민해? 내가 좀 도와줄까?”
자기보다 한음빙정공을 훨씬 능숙하게 잘 쓰는 그녀가 도와준다면 뭔가 보탬이 될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가까이 있으면 또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는 일.
기수는 그녀에게 됐다고, 방해하지 말라고 일단 돌려보냈다.
그리고 보다 안정적인 연공을 위해서는 사매들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사매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뭔가 무학에 대해 필이 꽂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기수는 종이와 붓을 꺼내어 ‘오행류 연구 때문에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으니까 방해하지 마.’라고 적어서 책상에 남겨둔 후 창을 통해 조용히 지붕으로 올라간 뒤 별채 밖으로 나갔다.
그가 담 밖에 발을 디디자마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들켰나?’
그런데 고수의 보법이 아니었다.
“혈매궁 궁주님 되시죠?”
어디 숨어 있었는지, 화양문 하인 한 명이 달려와 절을 꾸벅 하더니 여러 번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기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