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18
쪽지를 펼쳐 본 기수는 피식 웃었다.
‘웃기고 있네.’
사매들을 피해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호운혜, 당운영, 양여옥, 백서린, 사하에게 자청해서 찾아가 시달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은 오행류 상생순환의 마지막 10번째 고리를 완성시키는 게 더 중요했다.
순환을 마무리시키지 못한 상태로도 음양대법 수준의 내공이 모이는 판인데, 10개 순환 고리를 제대로 돌린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알았다고 전해줘.”
쪽지를 하인에게 돌려준 기수는 장원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니까 두 사람의 얼굴이 생각났다.
우선 사하.
그녀는 부담 없는 친구사이였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경우인데, 막상 뜨거운 사이가 되고 보니까 의외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못 참고 혼자 뛰쳐나간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양여옥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과연 백서린만큼 신선하면서도 화끈한 감동을 안겨줄 것인지 못 견디게 궁금했다.
‘딱 하루만 더 있다가 갈까?’
호운혜는 뭐 그냥 봐도 그만 못 봐도 그만, 데면데면하지만 당운영의 경우도 투약 주기가 한참 지난 상태라 뭔가 의무감 같은 게 느껴졌다.
기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쪽지에 적힌 양여옥의 거처를 향해 돌아서서 걸었다.
‘딱 하루만 더 있는 거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걷던 기수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야! 다리! 스톱! 네 멋대로 가지 마!’
기수는 일단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솔직히 중원 무림에 와서 처음으로 여인들과 잠자리를 가졌을 때는 정말 세상에 그보다 좋은 일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좋지만, 적어도 일의 선후경중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수는 멈춘 다리를 다시 뒤로 돌렸다.
‘나중에라도 기회가 있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한 후 기수는 급히 장원 밖으로 나갔다.
제대로 한 결심이 또 흔들릴까봐서였다.
지난번에 현현각주를 이긴 것은 자기가 잘했다기보다는 상대가 제풀에 무너진 거라고 봐야 했다. 근접전에 당황했고, 승기 잡은 것에 기뻐서 부주의한 접근을 하다가 카운터를 맞은 것이다.
앞으로 더 이상 그런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건 압도적인 차이로 이기고 싶었다.
자기 하나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엄마를 만나려면 주군이란 놈을 잡아야 하는데, 그놈이 자기 휘하의 사도들을 다 키우다시피 할 정도로 고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
지금 실력으로 그를 이긴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내상을 입거나 팔다리 하나라도 못쓰게 된다면 그것 역시 심각한 문제였다.
신은 분명 이곳에서 가지게 된 능력도, 상처도 다 가져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죽으면 그것 역시 진정한 죽음.
부상이나 죽음은 필요 없고 능력만 가져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무공의 완성이 가장 시급한 일인 것이다.
여자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안을 수 있으니까.
기수는 그렇게 자신을 다잡고, 장원 쪽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돌아본 뒤에 경공을 시전했다.
장원과 한참 떨어진 후.
기수는 인적 없는 깊은 산을 찾아 들어갔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에서 차분하게 정리를 해보기 위해서였다.
바위산 사이로 들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잡은 기수는 일단 화류의 태포련을 시전해 보았다.
강렬한 화염이 곧바로 솟아올랐다. 조금 약하게 해 볼 생각으로 진기 집중을 줄이자 아예 시전이 되지 않았다. 그 중간은 없었다.
‘물속에서만 그렇게 되었던 건가?’
사방을 둘러봤지만 물은 보이지 않았다.
감숙성은 건조하고 황량한 기후라 강 근처가 아니면 물을 찾기 어려웠다.
기수는 수류의 호신강기 쪽으로 연구의 방향을 바꾸었다.
온도 차이로 음양을 나눈다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게 호신강기로 만들어지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다른 오행의 진기 운용법을 참고하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지만 무엇 하나 성과가 없었다.
‘이것도 물이 있어야만 되는 건가?’
그러나 상대와 물속에서 싸우는 상황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런 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원본을 배워야 돼!’
그런 결론을 내린 기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사방은 깜깜했다.
집중력이 나날이 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별을 보고 방향을 가늠한 후 함양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야간비행을 즐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수는 합가촌에 도착했다.
상당히 빨리 온 셈인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공을 강하게 순환시킨 덕에 몸이 개운했다.
‘확실히 몸이 예전과 달라.’
기분이 좋아진 기수는 촌장네 집으로 가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비 혼자 사는 집이 아니니까 여러 사람 깨우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애매한 시간에 도착해버렸네.’
기수는 합비의 옛 집으로 갔다.
해가 뜰 때까지 연공이나 하면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집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기수는 잽싸게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어르신! 여긴 어쩐 일로…”
자기는 왜 이렇게 운이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필요할 때 합비가 마침 옛집에 와 있다니…
그러나 안쪽에서 얼굴을 내민 사람은 합비가 아닌 사하였다.
“왔구나!”
“어라!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분명 그녀들 패거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화양문 장원을 빠져나왔는데 이곳에서 만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사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무공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올 곳은 여기밖에 없지.”
그녀는 합비와 기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일어나 빠져나온 즉시 제자들에게 자기가 잠시 자리를 비울 것임을 알리고 함양으로 달려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측이 맞아떨어졌다는 점. 그리고 기수를 만났다는 사실에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기수가 안쪽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누구? 나밖에 없어.”
“그래? 하하!…내가 매복에 당했네.”
기수는 이것을 자신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의지를 발휘해서 발길을 돌렸는데도 이렇게 따라붙는 걸 어쩌겠는가.
특히 사하는 머리를 써서 매복에 성공한 거니까 상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보고 싶었어.”
“흥! 거짓말 하지 마.”
사하는 기수의 팔을 밀어냈다.
“진심이야. 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혈매궁의 그 많은 여인들은 다 뭐야? 그리고 무림맹에도… 그러면서 내가 보고 싶었다는 게 말이 돼?”
기수는 정색하고 말했다.
“그건 미안해. 하지만 그 여인들 모두 너를 알기 이전부터 이미 사귀던 사이야. 단지 이번에 한 자리에 모였을 뿐….”
“그렇게 여자가 많으면서 나를 또 유혹했단 말야?”
“네가 그만큼 사랑스러웠으니까.”
“말이나 못 하면…”
“자, 시간이 점점 흐르고 있어. 아깝잖아. 이리 와.”
그러나 사하는 여전히 거리를 주지 않았다.
“너 앞으로 그 여자들 또 만날 거야? 안 만날 거야?”
“당연히 또 만날 거지.”
“뭐라고?”
사하가 날카롭게 외쳤다.
기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속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쫄지 마. 여기는 일부일처제 세상이 아니라고!’
솔직히 자기가 현대에 계속 살았다면 한 여자에 일편단심 순정을 다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아니지 않은가. (정말 다행이다.)
기수는 그동안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느꼈다.
내가 나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데 상대가 받아들여줄 리 없었다.
‘난 아무 문제 없어! 이건 정당한 거야! 너 자신을 믿어!’
기수는 자신에게 그렇게 용기를 북돋아준 후 당당한 어조로 대답했다.
“난 너를 사랑하지만, 다른 여인들도 마찬가지야. 이런 내가 싫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건 너의 선택이야. 나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이 아니라고?”
“그래. 이게 나니까 네가 선택해.”
기수는 가슴을 펴고 그녀를 바라봤다.
보통 남자들이 여자에게 매달리고, 애원하고, 구걸하는 것은 다 함 달라고 그러는 것이다. 오로지 그걸 위해서 정말 온갖 수모를 다 견디지 않는가.
그러나 기수는 그런 면에서 약간은 자유로웠다.
늘 공급과잉이기 때문에 굳이 징징거리며 한 여자에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당장 혼자 밤을 보낸다고 해도, 운기조식을 이용해 욕정을 돌려버릴 수도 있고, 또 오행류 상생순환 연공으로 보람찬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아쉬울 것 없는 상태.
마치 홀덤에서 포켓에 에이스 두 장이 들어왔는데 플랍에 또 한 장이 살며시 미소 짓고 있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못 먹으면 운명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지를 수 있는 판인 것이다.
사하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기수는 그쯤에서 슬며시 그녀의 결심을 도와주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넌 어차피 이번 출정이 끝나면 보타문으로 돌아갈 생각이잖아. 중원에서의 추억으로 간직하면 되는데 왜 자꾸 미래를 걱정해?”
확실히 먹혀들어가는 게 그녀 표정을 통해 보였다.
기수는 슬그머니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안고 부드럽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 사하가 말했다.
“너. 나빠.”
“알아. 그래서 날 좋아하는 거잖아.”
“미워.”
기수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침상으로 갔다.
그리고 해뜰 때까지 이어진 뜨거운 섹스.
역시 여자는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 시간이었다.
사하의 매끄럽고 탄력 넘치는 피부 감촉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사하는 기수의 말을 통해 마음의 부담을 털어버렸는지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고 도전적으로 기수에게 안겨왔다.
그리고 이타적인 행위도 아주 깊이, 오래 오래 해주었다. 물론 아투사 레벨은 아니었지만 나름 인상적이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3차전까지 끝낸 이후엔 기수가 그녀에게 음양대법을 가르쳐주었다.
사하는 대법의 효과에 깜짝 놀랐다.
“이런 게 있으면서 왜 안 가르쳐줬어?”
“나도 최근에 배웠어.”
“누구한테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중요한 게 뭔데?”
“너와 나의 마음이 통한다는 거. 이 대법은 그게 가장 중요하거든.”
사하는 진기를 한 바퀴 순환시켜 본 후 말했다.
“우리. 한 번 더 하면 안 될까?”
“너무 급하게 많이 먹으면 체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 건데…”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이라 기수는 마음을 바꾸었다.
“좋아. 딱 한 번만 더 하자.”
기수는 그 한 번을 오랜 시간 지속하면서 사하의 단전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옷을 입고 밥을 챙겨먹은 기수는 촌장네 집으로 가서 합비를 찾았다.
그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채로 고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어르신. 저 왔습니다.”
합비는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래. 무림맹 일은 잘 처리했나?”
“예. 현현각주가 죽고 나서는 뭐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난주까지 단번에 탈환했죠.”
그러자 합비의 눈이 빛났다. 무림인의 기질이 되살아난 것이다.
“음종의 전인을 죽였다고?”
“그렇습니다. 하하!… 모두 어르신 덕분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군. 우리 집으로 가지.”
“예.”
집에 도착하니 사하가 차를 끓여 두 사람을 대접했다.
“어서오세요. 어르신.”
“아! 오, 오랜만이네.”
그녀가 주방으로 간 사이 합비는 턱짓으로 기수에게 물었다.
그 사이에 또 상대가 바뀌었냐는 의미였다.
기수는 곧바로 싸움 얘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를 이겼느냐 하면 말이죠…”
기수는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최대한 상세하게 모두 얘기해주었다.
합비는 진지하게 들은 후 물었다.
“화류 태포련을 직접 만들어서 썼다고?”
“예. 보여드릴까요?”
“꼭 보고싶군.”
기수는 집을 또 태워먹고 싶지 않아서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자신이 개발한 양손 화염방사기를 마음껏 펼쳐 보이며 자랑했다.
합비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이거 참 재미있구나. 이런 식으로 응용할 수도 있다니.”
그러더니 자기도 기수처럼 양손에서 불기둥을 만들어보았다.
사하가 그저 신기하게 지켜보는 앞에서, 두 사람은 4개의 불기둥을 휘저으며 어린아이처럼 한동안 장난을 쳤다.
그리고 불이 모두 꺼진 후 기수가 합비에게 물었다.
“어르신. 제가 이걸 물속에서 써봤는데 예전에 가르쳐주셨던 태포련과 비슷하게 열기를 발출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서로 연관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합비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달라. 운기법을 너도 알지 않느냐? 길이 완전히 다른데 뭘…”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하긴, 겉에서 태우는 것과 안에서 익히는 게 같을 리 없지.’
그러나 오행류 상생순환이 이어지는 걸 보면 자기가 완전히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아닌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