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23
기수는 사하와 백서린을 주시했다. 그들의 반응이 가장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젯밤을 그렇게 보내고 밝은 곳에서 다시 만나니까 이상한지, 나란히 앉았으면서도 서로를 향해서는 아예 뒤통수를 보이고 있었다.
양여옥과 당운영도 먼 산을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대하던 첫 목소리는 식당 밖에서 들려왔다.
곰의 울부짖음, 혹은 호랑이의 포효와 같은 괴성이었다.
“당운영! 이 나쁜 년! 도대체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식당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은 호운혜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당운영에게 주먹을 날렸다.
당운영은 깜짝 놀라 피했지만 호운혜의 공격은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너. 오늘 나한테 죽었어!”
당운영은 걸상을 집어던지며 다시 피했다.
날아간 걸상은 호운혜의 발길질에 산산조각이 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기수는 찻잔을 손으로 가리며 일어나서 뒤로 피했다.
당운영이 자기 쪽을 봤지만 기수는 호운혜를 제지하지 않았다.
이건 자기가 나설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약을 먹은 호운혜와 양여옥, 그리고 그걸 먹인 당운영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였다.
두 번 연속 공격에 실패한 호운혜는 살기까지 피워 올렸다.
그 기세를 읽고 움찔한 당운영은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호운혜와 자기는 체격 차이에서 거의 2배였다.
그녀와 싸움이 되려면 당가의 자랑인 암기와 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때 기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안 돼.”
당운영은 어젯밤 그를 오빠로 부르기로 하면서 무림맹과 혈매궁 사람에겐 독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한 게 생각났다.
암기만 쓰면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암기 중에 독이 묻어있지 않은 건 하나도 없었다.
당운영은 결국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경공엔 얼마간 자신이 있으니까, 적어도 잔뜩 흥분한 상태의 호운혜는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방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다리를 누군가 슬쩍 걸었다.
“악!…”
당운영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고 그 위로 호운혜의 거구가 덮쳤다.
퍽! 퍽! 소리와 함께 호운혜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무차별적으로 내리꽂히자 당운영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온몸을 움츠리며 얻어맞는 수밖에 없었다.
당운영의 다리를 건 사람은 바로 양여옥이었다.
그녀는 당운영의 약 때문에 피해를 봤다기보다는 오히려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호운혜처럼 직접 주먹을 휘두를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얄미운 건 얄미운 거라서 다리를 건 것이다.
온 방안에 울려 퍼지는 당운영의 비명을 들으며 양여옥은 씩 웃었다.
남자라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 호운혜의 주먹질이 이어지자 기수가 한 마디 했다.
“사해문이 사천당가와 원수지간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만 하지. 여기 증인들이 많아서 죽이면 소문이 날 텐데…”
장난기 섞인 말이었지만 호운혜의 주먹질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당가 사람을 건드리는 건 꺼림칙한 일이었다. 칼이나 주먹과 달리 독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떤 식으로 당할지 모르는 것이다.
호운혜는 손을 털고 일어나 웅크린 당운영을 한 대 걷어찬 후 말했다.
“기소협이 말리지 않았으면 넌 오늘 내 손에 죽었을 거야.”
당운영은 그녀가 비켜서자 벌떡 일어섰다.
맞은 자리들이 못 견디게 쑤시고 아팠다.
성질 같아서는 사해문이고 뭐고 독침을 잔뜩 먹여주고 싶었지만 기수가 보는 앞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 미안해. 언니.”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녀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자 오히려 호운혜가 놀랐다.
평소 당운영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 앞으론 조심해.”
“다시는 안 그럴게.”
상황이 일단락되자 호운혜는 기수와 네 사람을 차례로 둘러본 후 물었다.
“어젯밤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그러자 네 여인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시선을 외면했다.
호운혜는 순간 부쩍 의심이 깊어졌다.
“뭐야! 왜들 이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기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난 좀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아침들 챙겨먹고 있어.”
그러자 당운영이 물었다.
“오빠. 혹시 도망치려는 거 아니죠?”
“어허! 나를 어떻게 보고?”
기수는 눈의 초점을 풀어 5명 중 아무도 주시하지 않고, 손으로도 애매한 지점을 대충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니.”
순간 5명의 눈이 모두 하트 모양으로 변했다.
다들 자기한테 다정하게 말해주는 거라 생각한 것이다.
기수는 다시 애매한 각도로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밖으로 나갔다.
마당을 지나는 동안 호운혜가 다그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기수는 함양에 들려 가장 비싼 술 한 동이와 돼지고기를 사들고 촌장의 집을 찾았다.
촌장과 인사하고 고기는 그에게 건넨 후 합비를 만나 술을 드렸다.
“이건 뭐냐?”
자기를 사부로 모시는 예물이라는 생각에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합비의 표정이 굳었다.
기수는 머리를 조아린 후 말을 이었다.
“어르신을 만나 뵙고 절세신공을 배워 음종의 후인을 꺾을 수 있었으니 그 은혜가 정말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어르신을 사부님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만, 저는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몸입니다.”
합비가 입맛을 다신 후 말했다.
“젊은 시절엔 천하를 종횡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니는 게 당연한 일이지. 그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든 기수를 제자로 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 저는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면 중원을 떠나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래야 할 사정이 있습니다.”
“흐음….”
합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원하신다면 그동안 배운 세 가지 무공을 앞으로 절대 쓰지 않겠습니다.”
합비는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 정도 선물쯤이야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느냐? 크크크!…”
“감사합니다.”
정말로 고마운 마음 씀씀이였다.
“가져온 술 맛 좀 보자.”
“예.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기수는 술을 따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촌장이 고기 요리를 가지고 와서 이른 시간에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기수는 술을 즐기지 않지만 합비와 함께 하는 이런 자리는 예외였다.
어느 정도 취기가 돌자 합비가 말했다.
“네가 배운 것 중에 화류의 태포련은 아직 시전을 못 하지?”
“예. 제 손이 먼저 익을지도 모른다고 겁을 주셔서…”
“겁이 아니라 주의를 준 거다. 조심하지 않으면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 그렇군요. 하핫….”
“네가 말했던 물속에서 열기를 뿜어내는 것 말이다.”
“어, 어르신…. 오행류에 대해 더 이상 말씀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왠지 모르게 빚을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네놈에게 더 가르쳐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이미 가르쳐준 것에 대해 조언은 해줄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건 그렇습니다. 하핫!…”
“넌 참 넉살도 좋구나. 크크…”
합비는 미소 지으며 기수를 봤다. 제자 삼지 못한 걸 몹시 아까워하는 표정이었다.
“어쨌거나, 그 물속에서 하는 수련을 계속 하다보면 결국엔 내가 가르쳐 준 태포련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수는 몹시 기뻤다.
“아! 제가 바른 길을 가는 거였군요?”
“아니지. 아주 멀리 돌아가는 어리석은 길이지. 내 제자가 되었으면 즉시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을 가르쳐 줬을 텐데.”
“하핫! 뭐, 어쨌거나 길이 이어져만 있다면 열심히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냥 무작정 반복하지만 말고 생각을 하면서 잘 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기수는 합비의 술잔을 새로 채워주었다.
그러면서 그의 안색을 살피다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 제가 없으면 전인 문제는 어떻게…”
“왜? 네 놈 아니면 제자 될 사람이 없을까봐?”
“사실… 저 정도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많지는 않잖습니까?”
“이놈 낯짝 두꺼운 거 봐라.”
“자신감입니다.”
“크크크!…. 그래. 네놈이라면 좀 교만해도 되지. 하지만 천하가 얼마나 넓은데 제자 하나 찾지 못하겠느냐? 사실은… 내 고손자 놈이 근골이 제법이다.”
“아! 그 아이요? 눈이 참 똘똘해 보이더군요.”
합비와 촌장, 촌장 아들을 거의 판박이로 빼닮은 얼굴이라 아직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잘 생겼다거나, 귀엽다거나 하는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지금부터 슬슬 추궁과혈을 해주고 있으니까 아마 오 년만 지나면 오행류 입문 단계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잘 됐군요.”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핏줄 중에서 무공 익히기에 적합한 근골 가진 아이가 태어났고, 옆에서 지켜보며 조기교육을 시킬 수 있으니 시간은 좀 더 걸리더라도 보람이 훨씬 클 것이었다.
술동이가 반쯤 비워질 무렵 합비가 말했다.
“내가 강호행을 하면서 이기지 못한 사람이 딱 세 명 있다.”
기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누구입니까?”
“아! 물론, 만났던 사람 중에서만 하는 얘기니까 내가 천하에서 네 번째 고수라는 뜻은 아니다.”
“예. 감안해서 듣겠습니다.”
“아니지!… 셋 다 같은 편이었으니까 기회가 없었을 뿐, 만약 싸웠다면 내가 가장 강했을 지도 몰라.”
“감안해서 듣겠습니다.”
합비는 헛기침으로 목을 고른 후 말했다.
“우선 나와 함께 삼선이라고 불렸던 춘신공과 진영군. 그 두 사람은 특이한 무공들을 워낙 다양하게 알고 있는데다 내공도 깊어서 어떻게 해도 안 될 것 같았다.”
“춘신공과 진영군… 그런데 왜 한 사람은 공이 아니라 군입니까?”
“진영군은 여자였거든.”
“아! 그렇군요.”
“둘이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애는 없었지. 나중에 자식을 얻게 되었는지, 아니면 후사 없이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자 정도는 있을 거다.”
기수는 합비가 이런 얘기 해주는 이유를 눈치 챘다.
자신도 절세고수가 된 만큼 이제 세상에 적이라 할 만한 사람이 많지는 않을 터.
그 중에서 그가 아는 사람에 대해 최대한 정보를 주려는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합비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환우구종 중 검종이었지. 검신이라고 불리던 진천후. 그도 기세가 대단했어. 적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은 상대였지.”
“검종은 일인전승이라고 하던데…”
“그렇다. 진천후는 자기 친형을 죽여야 했지.”
“예? 설마요…”
“거기가 원래 그래. 그래서 그런지 그 자는 성격이 좀 괴팍했어. 늘 어둡고 우울해 보이다가 검을 뽑아 피를 보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몰랐지.”
“끔찍하군요.”
“뭐, 나이가 들면서 심신 수양에 집중하는 것 같긴 하던데… 적어도 친형제를 제자로 뽑는 일은 하지 않았겠지. 물론 사형제를 모두 죽여야 하는 건 여전히 끔찍한 일이지만.”
“그런 규칙은 도대체 왜 만들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자들의 수행을 독려하는 의미가 제일 크겠지. 살아남고 싶으면 사형제들보다 더 열심히 수련해라. 그보다 확실한 동기가 어디 있겠어?”
“설령 사부가 그런 식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제자는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굳이 따를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사문의 규율을 자기 대에서 바꾼다고?”
“불합리하다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너를 제자로 삼지 않길 잘 했구나. 크크크….”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 것은 옛날 사람들과 자신의 가치관 차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합비와 술동이를 전부 비우고, 기수는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합비는 장안 근처를 지날 때면 언제든지 들러서 술이나 한 잔 마시자고 했고, 자기의 옛 집을 언제든지 자유롭게 쓰라고 허락해주었다.
기수가 집에 도착해 보니 다섯 미녀가 말끔하게 단장을 하고 음식을 차려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과 달리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기수가 물어보았다.
“나 없는 동안 무슨 얘기들 했어?”
그러자 사하가 대답했다.
“다들 욕심을 버리기로 했어.”
“무슨 욕심?”
“너를 독차지하겠다는 욕심.”
“나 없는 동안 그런 결론을 이끌어냈다고?”
놀라운 얘기였다.
“물론, 처음부터 애기가 잘 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모두 동의했어.”
기수는 속으로 만세삼창을 했다.
‘토론문화 만세! 대화와 타협 만세! 민주주의 만세!’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한 차례씩 그녀들과 시선을 맞춰 보았는데, 다들 수줍은 듯 하면서도 도발적인 미소를 보내 왔다. 반가운 반응이었다.
사하가 말했다.
“우리들 모두 씻고 목욕물을 새로 떠서 데워놨는데 지금은 다 식었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새로 데워줄게.”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난 찬물이 필요했어. 그럼 식사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씻으러 가볼까?”
기수는 욕실로 가서 옷을 벗어놓고 목욕통에 들어갔다.
불기둥 수련을 두세 번 하니까 물이 펄펄 끓어서 중단해야 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씻던 기수는 고개를 돌렸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있었다.
‘기다려도 되는데 뭘 또 이렇게 적극적으로….’
기수는 미소 지으며 여인들의 입장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