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93
기수는 도지휘사에게 여러 번 얘기했지만 그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결국 기수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도독도 저자세였는데 도지휘사가 이러는 건 당연하다고 봐야겠지?’
자꾸 강요하는 것도 오히려 결례일 것 같아서 그가 편한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대신 다른 걸 해주었다.
“반군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그동안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장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전중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 드러나 보였다.
“아닙니다. 반군 병력이 엄청나던데 정말 힘든 일을 해내셨습니다.”
나이와 외모로만 보면 아버지와 막내아들 뻘이지만, 기수는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기에 수식어만 살짝 바꾸면서 반복 칭찬을 해주었다.
그리고 허창의 상황에 대해서도 솔직히 얘기해주었다.
전중의 낯빛이 살짝 경직되었다.
앞으로도 허창으로부터의 원군은 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후군도독부에선 뭐라고 합니까?”
“황하 이남으로는 절대 병력을 보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흐음….”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후군도독부는 북경을 지키는 최후의 수비군이었다.
설령 개봉이 함락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관할 구역 방어력을 굳건히 하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다.
강 건너는 좌군도독부에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기수는 전중에게 수로맹이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자신과 무림맹, 도독부의 3천 기병이 만륙현을 친 상황과 제갈세가의 삼부자 중 두 명이 죽은 일까지 모두 얘기했다.
전중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다.
암담하기만 했는데 희망을 본 것이다.
“그렇다면 반군은 지금 애가 타겠군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할 것입니다.”
전중이 잠시 기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대인은 무림에서의 위치가 어떻게 되십니까?”
기수는 관청에 들어서면서부터 본래 얼굴로 돌아온 상태.
신분도 숨길 이유가 없었다.
“혈매궁의 궁주를 맡고 있습니다.”
“아! 역시 그랬군요.”
전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무림맹과 천마교와 수로맹이 힘을 합쳐 관군을 돕다니…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했더니 역시 궁주님 같은 영웅이 있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거군요.”
“영웅이라니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제가 비록 관에 몸을 담고 있지만, 강호의 사정에 대해서도 두루 잘 알고 있습니다. 무림맹과 천마교가 같은 목표를 위해 힘을 합친다는 것은 정말 유래가 없는 일이고, 아마 앞으로도 다시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수로맹까지…”
“하핫!…”
원래는 입버릇처럼 ‘제가 원래 좀…’이라고 붙일 뻔 했지만 참았다.
전중은 자기 휘하의 장수들을 모두 불러 기수에게 인사를 시켰다.
예전 같았으면 귀찮아했을 기수지만, 예의에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모두와 인사를 나누었다.
전중은 그 후에야 기수에게 숙소를 안내하여 쉬도록 해주었다.
기수는 오랜만에 눈을 좀 붙였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오행류 상생순환을 빡세게 10여 바퀴 돌린 후 북궁심법으로 세 단전 골고루 운기를 해준 후 눈을 떴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온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두 주먹을 꽈악~ 쥐는 것만으로도 방안의 공기가 우우웅~ 하고 진동을 했다.
기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공이 깊어지면서 지금처럼 주변의공기가 공진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어쩌면 천마교의 비폭대라수 기수식 부분도 자기가 펼치면 혈천제보다 훨씬 강력한 효과를 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 앞에서는 쓰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그녀 생각을 하니까 보고 싶었다.
냉막한 살기를 내뿜을 때도 아름답지만, 역시 자기 품 안에서 달뜬 호흡을 토하며 미간을 찡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교성을 토하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기수는 침을 꿀꺽 삼켰고, 곧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얼마 안 남았다! 이제 두 놈만 잡고 나면 그녀들과 마음껏… 므흐흐~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므흐흐흐….’
그때, 전령이 밖에서 기척을 냈다.
“기대인. 기침하셨습니까? 지휘사님께서 찾으십니다!”
꽤나 다급한 목소리였다.
옷을 챙겨 입고 그를 따라가 보니 전중과 무관들 모두 성벽 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수가 나타나자 전중이 군례를 한 후 상황을 보고했다.
“반군의 수장이 나와서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수장이라면…”
기수는 성벽 가로 바짝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 봤다.
우선 그의 시야를 압도한 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벌판을 꽉 메우고 있는 숫자의 압박.
기수는 절정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숫자의
은빛 갑옷에 큰 칼을 든 거구의 사내가 성문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타고 있는 말도 사람만큼이나 큰데다 잡 털 하나 없는 백마였다.
기수는 그가 바로 전군도독 황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지난번엔 시커먼 도적놈 같더니 이번엔 제법 차려입었네? 하하하!….”
황호도 기수를 알아보았다.
“역시 네놈이었나? 제갈가의 두 아들을 죽인 게…”
기수는 황호의 뒤쪽에 제갈청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수는 모두가 다 듣도록 내공을 실어 큰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국가에 반역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도 천하가 다 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목숨은 부지할 것이다. 하지만 천지 분간 못하고 저항한다면 한 놈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도륙 당할 것이다.”
기수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수 만을 헤아리는 반군 진영이 동요했다.
기수는 한 번 더 큰소리로 말했다.
“천하의 주인이 바뀐다고 해도 너희들에겐 아무 것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한두 놈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전쟁에 너희들이 왜 피를 흘려야 한단 말이냐?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심해지자 황호가 호통을 쳤다.
“닥쳐라! 혼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은 천하 만민이 바라는 바다. 우리는 하늘의 뜻을 대신 행할 뿐이다!”
그러자 황호의 부하 장교들이 함성을 독려했다.
“와아!….”
처음엔 어정쩡하게 시작되었지만 막상 자기네 쪽 숫자가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부터는 소리가 점점 커져서 개봉성 안까지 그 함성이 울려서 메아리를 만들었다.
수비군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퍼지는 게 보였다.
기수는 심호흡을 한 뒤 크게 외쳤다.
“누구를 감히 혼군이라 하는 것이냐!”
어쩌면 장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인데 말이지…
반군의 함성이 일시에 멈췄다. 기수의 목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울려 퍼져서 모두를 움츠러들게 만든 것이다.
기수 본인이 느끼기에도 볼륨이 장난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개봉 수비군들이 귀를 막으며 휘청거릴 정도였다.
황호는 혼자 앞으로 말을 걸려 나와 성문에 다가서더니, 기수를 향해 외쳤다.
“거기서 떠들어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 아니냐. 사나이라면 이리 내려와라. 나와 일 대 일로 승부를 가리자.”
“흥! 도망쳤던 주제에 이제 와서 싸우자고?”
“도망이라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기수는 딱 잡아떼는 황호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사매들 덕분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뿐, 실력으로는 백중세였기 때문에 따로 따지지는 않았다.
황호가 대도를 휘두르며 말했다.
“네가 사내라면 당장 내려와라!”
기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미쳤냐?”
황호는 자신의 본대로부터 30여 미터 앞에 홀로 나와 있지만, 기수는 현재 적 진영에 청탑산 무리가 최소한 100명 이상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30미터 쯤은 아무 것도 아닌 거리였다.
지난번에도 경험했지만, 청탑산 무리가 돕는다면 황호를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황호가 특이한 제안을 했다.
“내가 그리로 올라가겠다. 그러면 싸우겠느냐?”
“이리 온다고?”
“그렇다. 사내라면 그 조건까지 거절하지는 못하겠지?”
지금 개봉성 안에는 자기를 도울 정도의 고수가 없으니, 만약 황호가 올라와 성 위에서 싸운다면 비교적 공평한 대결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심호흡을 했다.
황호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일.
그가 주군, 혹은 검종의 장무검과 힘을 합치는 게 두려운 일이지, 이런 조건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이긴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좋다! 네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기수는 전중에게 부탁하여 성문 위 누각 주변을 비우도록 했다.
개봉성의 성문을 2중으로 되어 있었다.
성문 앞을 빙 둘러 성벽을 또 하나 쌓아서 그 위로 사람들이 다니면서 활을 쏘도록 만든 이른바 옹성(甕城), 혹은 월성(月城)이라고 불리는 구조물이었다.
기수는 아성의 맨 앞으로 혼자 나서서 황호에게 말했다.
“와라! 아무도 널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후후후!…. 좋다.”
황호는 말 안장에 앉은 자세 그대로 점프를 하더니 몇 번 메뚜기처럼 도약을 거듭하여 어렵지 않게 아성 위로 단숨에 올라섰다.
반군 병사들은 수장의 놀라운 경공을 보고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와 마주 선 기수는 온몸의 신경들이 곤두서는 긴장감에 몸을 한 차례 떨었다.
두려움이 아닌 짜릿한 흥분감이었다.
“너. 이제 보니 성을 넘을 능력이 충분히 있었구나.”
“후후후….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기수는 황호의 무공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렇다면 번거롭게 충차니 발석거니 하는 것들을 만들 필요 없이 자기가 앞장서서 성에 올라와 성문을 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화살이 두려웠나? 밤에 몰래 올라오면 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기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황호와 반군에게 있어 개봉성은 주요 목표가 아니라 허창의 좌군도독부 병력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기수는 냉소를 지었다.
“후후… 기회 있을 때 성을 점령하지 않은 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이까짓 성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취할 수 있다.”
“내가 오기 전의 얘기지. 이젠 불가능한 일이야.”
황호는 대도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내 장담하건데, 이 칼로 네놈 목을 자르고, 오늘 안으로 성도 빼앗을 것이다. 네놈의 머리는 저기 성문 위에 걸어주마. 흐흐흐….”
기수는 황호의 대도를 살펴보았다.
예전의 칼과 달리 전체가 은빛으로 반짝였고 군데군데 황금 장식이 달려 있었다.
자루도 그다지 굵지 않아서 분리되는 장치는 달려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무게가 줄어든 만큼 스피드는 좀 더 빠를 것 같군.’
그 정도 생각한 기수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솔직히 지난번 황호와 싸울 때는 청탑산 패거리들과 밤새 숨박꼭질을 하느라 100%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잠도 자고, 오행류 상생순환도 돌리고, 운기조식까지 한 상태라 몸 상태가 아주 좋았다. 그리고 상대의 실력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방심할 일도,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가질 일도 없었다.
‘그래! 좋아. 제대로 한 번 싸워보자!’
기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일단 화류의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순간, 확! 하는 폭음과 함께 불길이 동심원 형태로 퍼져 나갔다.
황호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번엔 수비군 쪽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자기네 편 무림고수가 뭔가 신비한 술법을 쓴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수는 즉시 천기오뢰강으로 방어체제를 바꾸었다.
화류 호신강기는 어디까지나 상대를 위축시키기 위한 후까시 용이었다.
비폭대라수의 기수식 부분을 썼으면 더 효과가 있었겠지만 그건 딜레이가 있는 기술이라 황호 정도의 적을 앞에 두고 쓰기는 부담스러웠다.
한 걸음 물러섰던 황호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네가 지난번에 본 것은 내 절반의 실력밖에 안 된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나는 이 청강도를 들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흐흐흐…”
그가 자신의 두 손에 진기를 주입하자 은빛 칼이 놀랍게도 푸른 빛을 내면서 찌이잉~ 하는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기수는 비로소 그 칼이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황호는 기수의 표정 변화를 보고 씩 웃은 뒤 칼을 휘둘러 아성의 난간을 베었다.
그러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성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기수는 칼이 자기를 벤 것도 아닌데 뭔가가 천기오뢰강을 꾹꾹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예리한 도기가 주변에 온통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씨발!… 이거 장난 아닌데…’
일 대 일 대결을 요청할 때부터 뭔가 숨겨진 한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만만치 않은 고수 손에 범상치 않은 무기가 들려 있다 보니 아무래도 위축되는 게 사실이었다.
‘다음에 싸우자고 할까?’
그러나 자기가 피하면 개봉성은 어찌 된단 말인가.
그때 반군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황호가 베어낸 성벽 때문에 성 아래서 올려다보는 그들의 시야가 훤히 트인 것이다.
기수는 자기가 마치 라스베가스 시저스팰리스 호텔 특설 링에 올라선 권투 선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군과 수비군 모두가 지금 자신과 황호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기수는 황호를 노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