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523
척회왕은 장창을 빙글 돌려 기수에게 겨누며 말했다.
“권주를 마다하고 기어이 벌주를 받겠다는 건가?”
“욕심에 눈이 멀어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와는 손잡기 싫다.”
“건방진 놈!”
기수는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척회왕의 창 끝에 집중했다.
바로 그 순간, 하복부에 극심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크으윽!….”
기수의 두 발은 땅에서 떨어졌고, 공중으로 떠오른 몸은 순식간에 10여 미터를 밀려났다.
창은 근처에 오지도 않았는데, 파천강기로 쑥 튀어나와 복부를 찌른 것이다.
기수의 몸이 꿰뚫리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천기오뢰강 덕분이었다.
‘젠장! 파천강기의 오리지널은 바로 이거였지.’
예전에 유청기가 온몸에 파천강기의 창을 고슴도치처럼 두르고 싸운 게 기억났다.
척회왕은 그런 식은 아니고 단지 하나를 쭉 뻗었는데, 그게 전신주 사이즈였다.
기수가 통증을 참고 억지로 자세를 바로잡자 척회왕이 씩 웃었다.
“의외로 단단한 몸을 지녔구나.”
“치사하게 암습을 가하다니!”
황제에게 암기를 던진 것도 그렇고, 방금의 공격도 그렇고, 일파의 종사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척회왕이 피식 웃은 후 말했다.
“치사하다? 그건 하수들의 투정일 뿐이다. 후후후…”
“으으…”
기수는 복부의 통증에 이어지는 기혈격탕을 가라앉히기 위해 호흡을 골랐다.
척회왕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싸움판에 치사하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기는 것만이 절대선인 것이다.
기수는 진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상대였다.
척회왕은 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맷집이 튼튼한 것은 확인했고, 이제 귀령공의 재주는 얼마나 익혔는지 볼까?”
기수는 상대가 우위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속공격을 해오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장무검을 통해 자신의 무공 내력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기만 준비를 한 게 아닌 것이다.
아래저래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기수는 척회왕의 방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왼손을 뻗어 파천강기를 날렸다.
파파파파팟!….
딱 다섯 방. 그 이상 진기를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강기들은 척회왕과 1미터쯤 떨어진 허공에서 튕겨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슨 막 같은 것으로 방어되는 느낌이었다.
“으음….”
효율이 떨어진다고는 해도 공력을 8성이나 주입한 공격인데 그의 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척회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네놈이 파천강기를 사용하는 거지?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하핫! 네 제자들이 가르쳐주었다. 파천강기, 단정홍과 뇌전격, 은혈대법등을…”
“믿을 수 없군.”
“그건 네 자유다. 믿거나 말거나…”
“흐음… 그렇단 말이지…”
기수는 척회왕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덧붙여 말했다.
“네놈의 수법인 단월쇄심장과 여의만상권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내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척회왕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놈의 배후엔 도대체 누가 있는 것이냐?”
“평화를 갈망하는 백성들이 있다.”
“흥!….”
척회왕은 심기가 뒤틀린 듯 냉소를 지었다.
“말은 그럴듯하다만, 실제 힘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봐야겠구나.”
그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눈깜빡할 사이에 기수 앞에 나타났다.
이형환위의 수법이었다.
기수는 급히 대도를 휘둘러 그를 베었고, 도와 창이 허공에서 격돌하며 무시무시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으음….”
기수는 손목이 뒤틀릴 것 같은 둔중한 충격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고작 이거냐?”
척회왕의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다.
기수는 이를 악물고 한 초식, 한 초식을 버텨냈다.
그렇게 초수가 늘어나면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는 척회왕의 공격을 견뎌낼 능력이 있었다.
‘그래. 겁먹지 말자! 난 할 수 있어.’
상대가 이제까지 만나본 적 없는 고수이다 보니 위축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복부에 한 방 맞고 시작해서 두려움이 더 커진 상태.
그러나 쏟아지는 뭇매를 어떻게든 막아내면서 조금씩 자신감이 살아났다.
조금 더 초수가 누적되자 상단전에 멸절강기 스푼 컷을, 중단전에 화류 태포련을 모을 여유까지 생겼다.
그 상태를 오래 끌 수는 없어서 상대의 창을 쳐내며 곧바로 눈 근처에 스푼컷을 발사하면서 화류태포련까지 뿜어냈다.
등 뒤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게 들렸다.
가슴 졸이며 보고 있던 구경꾼들 앞에 화려한 불 쇼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속 공격의 효과는 기대 이하였다.
스푼컷은 상대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고, 화류 태포련 역시 옷자락에 그을림조차 만들지 못했다.
척회왕으로 하여금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서도록 하는 게 전부였다.
“하하! 이런 거였구나.”
척회왕은 화염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수는 그의 반응을 보고 자신과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무학에 대한 탐구욕,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났을 때의 즐거움.
문제는, 자신은 즐거움보다는 부담감이 훨씬 크다는 사실이었다.
관건은 결국 내공의 깊이였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연공을 했지만 아직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기술이 비슷한 복서끼리 붙었는데 한 쪽은 헤비급이고, 한쪽은 페더급인 느낌이었다.
때릴 거 다 때리고, 막을 거 다 막지만 서로 데미지가 다르게 누적되는 것이다.
바교적 근거리에서 폭발시킨 화류 태포련이 머리카락 한 올 그을리지 못할 정도라면 다른 기술들도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자! 또 다른 재주는 무엇이 있느냐?”
척회왕이 다시 창으로 찔러 들어왔다.
기수는 정신을 집중하고 대도로 상대의 창을 막아냈다.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 하지만 질 수 없다!’
단순한 오기가 아니었다.
전대 천마교 교주에게서 배운 마음가짐이 그를 추슬러주었다.
상대의 내공이 나보다 깊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결국 최후에 살아남는 것은 내가 될 것이라는 의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다는 집중력이 기수를 버티게 만들어주었다.
척회왕의 창술엔 변화가 생겼다.
힘의 강약이 랜덤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여의만상권의 묘의가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수 입장에선 대응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결국 초수가 누적될수록 그의 대도가 그리는 투로는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척회왕이 그런 기수를 비웃었다.
“다 알고 있다고 하더니… 고작 이거냐?”
기수의 호언장담이 허풍으로 판명돠는 순간이었다.
기수는 입을 꾹 다물고 버텨내며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한 순간!
수류 태포련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방해한 후 바늘 끝 만큼 미세하게 드러난 허점에 대도를 휘둘렀다.
척회왕은 자신의 움직임이 갑자기 방해받는 느낌에 놀랐다.
그러나 기수의 칼을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수법이냐!”
그러나 칼과 창대가 만나는 순간.
놀랍게도 창대가 힘없이 뭉그러지며 동강이 났고, 칼날이 여세를 몰아 몸을 베었다.
척회왕은 크게 놀라 몸을 굴렸고,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기수는 아쉬움에 탄식을 토했다.
수류태포련으로 움직임을 제한한 뒤 운룡비결을 실어 벤 회심의 일격.
상대의 창을 두 동강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척회왕의 기민한 움직임 때문에 결국 그를 베지는 못한 것이다.
황제 진영에서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척회왕이 무기를 잃고 땅바닥을 구르기까지 했으니 누가 봐도 기수의 승리를 점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수는 이제부터라고 생각했다.
칼날이 척회왕의 엄심갑에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고무적이었다.
‘그래. 이길 수 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현재 척회왕과 자신의 능력치를 비교한다면 무조건 척회왕의 승이라고 결과가 나오겠지만, 싸움은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숫자로 승패를 판단한다면 방금 상대의 창을 부러뜨리고 갑옷까지 그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감을 가지게 된 기수와 달리 척회왕은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래. 과연 내 제자들을 모두 죽일만한 실력이구나.”
그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신경질적으로 턴 후 중얼거렸다.
“장난은 이제 그만두고 끝을 내는 게 좋겠구나.”
척회왕은 양손을 크게 한 바퀴 회전시킨 후 앞으로 쭉 뻗었다.
기수는 그가 다시 파천강기를 창처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급히 대도를 수평으로 세워 두 줄기 강기를 막았는데, 처음에 복부에 맞았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대도의 자루는 급격히 휘어졌고, 기수는 그 탄력에 밀려 다시 몸이 공중에 뜨려는 것을 억지로 버텼다.
결국 뚝! 소리와 함께 자루는 부러졌고, 기수의 몸은 뒤로 튕겨 날아갔다.
황제 진영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기수는 뒤로 날아가는 와중에도 몸의 균형을 유지했다.
충격을 대도의 자루가 대부분 흡수했기 때문에 내상은 없었다.
상대는 무기가 잃었고, 자기에겐 대도가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가졌지만, 척회왕을 상대함에 있어 무기의 유무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척회왕이 도약하며 양손을 번갈아 내뻗기 시작했다.
두 개의 파천강기 기둥이 요혈로 파고들자 기수 역시 파천강기를 양손에 일으켜 쌍검을 든 상태로 방어에 임했다.
강기의 창과 강기의 검.
성질이 같은 두 강기는 부딪힐 때마다 푸른 섬광과 함께 둔탁한 파열음을 만들었다.
양 진영의 고수들 모두 그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삼 장쯤 떨어진 거리에서, 두 사람이 강기로 치고받는 이런 식의 싸움은 정말 듣고 보도 못한 수준의 대결이었다.
황제와 문무대신, 그리고 무림 고수들은 척회왕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에 오로지 기수의 승리만을 다들 간절히 바랐다.
기수의 내공증진을 위해 그동안 희생(?)한 미녀들도 손모아 기수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러나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척회왕의 파천강기는 길이만도 10미터 이상이고 굵기도 한 아름은 되어 보였다.
거기에 비해 기수의 파천강기는 1미터 남짓에 굵기도 가늘어서 마치 연필 옆에 이쑤시개를 놓은 것 같은 차이를 보였다.
“후후후…. 꽤나 끈질긴 놈이구나.”
척회왕은 여유롭게 웃으며 계속 기수를 몰아붙였다.
기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겉보기엔 강기의 크기에서 상대가 안 되는 것 같지만, 의외로 버틸 만 했다.
그리고 척회왕이 비록 내공은 넘쳐난다 해도 실전 경험은 자기보다 적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강기를 크게 만드는 것은 분명히 진기의 낭비였다.
적을 상대할 때는 최고의 효율을 찾아내야 하는 법인데, 지금 척회왕은 자기가 구르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 때문에 흥분한 상태로 내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네가 맞수와 싸워볼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겠냐. 계속 이렇게만 해라.’
기수는 끈질기게 버티면 결국 자신에게 기회가 올 거라 믿었다.
그런데, 수십 초를 겨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엔 변화가 없었다.
기수는 척회왕이 단월쇄심장의 초식들을 펼쳐내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합비가 시범을 보여줄 때도 방어에 특화된 초식들을 좀처럼 뚫기 어려웠는데, 오리지널을 맞닥뜨리고 보니 도무지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곤란한 걸…’
기수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현재의 대치상태가 계속된다면 결국 집중력 싸움 및 내력 소모 대결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자기는 한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지만, 척회왕은 한두 번 집중력을 잃어도 괜찮았다.
거리가 충분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력 소모 대결도 척회왕이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래선 이길 수 없다… 간격을 좁혀야 돼.’
중장거리 수법은 효율이 떨어져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한 상태.
바짝 달라붙어 접근전을 펼쳐야만 그나마 승리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기수가 전진하자 척회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보며 기수는 이런 식의 대결이 그의 의도임을 알아차렸다.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을 수는 있지만, 확실하게 이기는 길을 찾아내고 그걸 실행에 옮기는 능력만큼은 인정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격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기수는 한 걸음씩 파고들기도 하고, 현란한 사이드 스텝으로 돌파구를 모색해보기도 했지만, 척회왕은 그때마다 횡으로 돌며 간격을 원위치시켜 버렸다.
참다 못한 기수가 그에게 말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울 작정이냐?”
“후후…. 예전에 사부님이 말씀하셨지. 적이 약점을 보이면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고… 멋진 승리, 화려한 승리는 바보나 좋아하는 거라고 하셨지.”
“젠장!”
맞는 말이라서 뭐라 항변할 수가 없었다.
내공도 자기보다 깊고, 까다로운 기술을 보유한 상대가 유리한 고지를 점한 뒤 계속 그걸 유지하는 전술로 나오자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화류와 수류 태포련을 너무 일찍 보여줬나?’
기술로 내공 차이를 극복하려면 접근전만이 해법인데, 상대로 하여금 경계심을 품게 한 것이 패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