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79
기수는 피식 웃은 후 복면을 집어넣었다.
살인은 할지언정 강도질은 하기 싫었다.
살인은 나쁜 놈을 죽이는 거지만, 강도는 약자를 괴롭히면서 본인이 나쁜 놈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법체계로 보자면 살인의 처벌이 훨씬 무겁지만 이곳은 이곳 나름의 질서가 있으니 맞춰서 살면 그만인 것이다.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돈이 없으니까 배가 더 고팠다.
게다가 처량한 느낌도 들었다.
‘아. 씨발….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 먹고 싶다. 두부하고, 호박하고, 풋고추하고…후르릅….’
생각만 해도 침이 마구 흘러나왔다.
침뿐만 아니라 눈물도 살짝, 한 방울 나온 것 같았다.
‘아 놔. 사람은 본능 앞에서 너무 쉽게 감상적이 된단 말야.’
기수는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그때 마을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미치겠네…..”
기수는 닭까지 자기를 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껴? 뭘 어디다 꼭 끼우라고? 아! 아닌가? 반드시 끼우라는 소리인가?’
그러자 조건반사적으로 혈천제 얼굴과, 거기와, 거기가 떠올랐고 힘이 불끈!
“으으으…. 배고파 죽겠는데…. 너 진짜!”
기수는 경공을 펼쳐 숲으로 들어갔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지만 숲으로 가면 얘기가 좀 달랐다.
기수는 상춘관 시절에 약초를 캐러 사형제들과 함께 온 산을 뒤지고 다녔었다.
그때 익힌 열매와 뿌리들에 대한 지식을 써먹을 때였다.
숲 어딘가에는 먹을 게 항상 있었다.
중간에 새 둥지에 들어 있는 알도 발견하고, 기어 다니는 구렁이도 발견했지만 그것들은 참기로 했다.
돈만 없는 게 아니라 불을 피울 화섭자도 없었다.
‘일회용 라이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나무, 저 나무 돌아다니다 보니 그럭저럭 배고픔은 해소할 수 있었다.
샘물을 찾아 손바닥으로 떠서 마신 기수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하루 종일 야생 열매만 따먹을 수는 없지?”
무슨 로빈슨 크루소도 아니고, 인간이 만든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었다.
‘무림맹으로 가볼까?’
그러나 그 생각은 곧 접어야 했다.
지금은 무림맹과 마교가 충돌 일보 직전인 상황.
무림맹 속에 섞이면 마교와 싸워야 하는데 거긴 혈천제가 있었다.
동전을 던져서 나온 결과에 따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무림맹에도, 마교에도 가지 않는 거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까 오라는 곳도, 갈 곳도 없었다.
그때 또 주책없이 존슨이 일어섰다.
‘하루 굶었다고 이럴 것 까지는 없잖아?’
기수는 다시 운기조식으로 성욕을 누르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가지 관용어구가 생각났다. 바로 꼴린대로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 너의 의사를 존중해주마. 어디로 갈까?’
존슨이 원하는 것은 딱 정해져 있었다. 온도와 물기와 조임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존슨에 깊은 인상을 남긴 미녀들에겐 모두 접근이 제한되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한 여인이 생각났다.
“그래! 활란! 나의 섹스 슬레이브!”
그녀라면 무림맹도, 마교도 아니니까 얼마든지 온도와 물기와 조임을 추구해도 좋은 상대였다. 특히 입으로 해주던 그 다양한 서비스들은 기수의 몸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으으…. 상상만 해도….’
기수는 존슨을 칭찬해주었다.
“잘했어! 앞으로도 갈림길에 서면 너에게 길을 물으마!”
기수는 곧장 난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난주엔 화양문이 있어서 접근 금지 대상이지만, 다행히 활란은 화영문 근처의 객잔에 머물고 있으니까 상관없었다.
‘그녀는 돈도 가지고 있을 거야.’
그것은 제대로 익힌, 동물성 단백질 함유된 식사를 의미했다.
중간에 길을 한 번 잘못 들었지만 그래도 워낙 선풍비가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에 정오가 지날 무렵엔 난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수는 눈짐작으로 길을 기억해내고 화양문 쪽을 피해 활란이 기다리고 있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실망감이 그를 맞았다.
활란은 없었다. 기다리다 지쳐 떠난 모양이었다.
“손님. 일단 차부터 드릴까요?”
점소이가 다가와 물었다.
“아, 아니. 난 누굴 만나러 왔을 뿐이야.”
되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점소이가 어깨에 메고 있던 수건으로 허공에 휘둘러 먼지 터는 소리가 들렸다. 재수없는 손님 내보내는 제스추어였다.
‘아! 별 게 다 사람 우습게보네.’
하지만 점소이를 때릴 수는 없었다.
그 정도에 쓰기에는 익힌 무공의 레벨이 너무 높았다.
한국이나 중원무림이나 돈 없는 설움은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길로 나선 기수는 다시 한 번 갈림길에 섰지만 이번엔 존슨에게 물을 수 없었다.
지나다니는 행인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활란. 고게 도대체 어디로 갔지? 무슨 노예가 주인 허락도 안 받고 종적을 감추는 거야?’
그러다가 기수는 자기를 죽이려 했던 또 다른 자객에 생각이 미쳤다.
‘맞아! 고황명! 그놈 평생 청부업으로 모은 재산을 못 쓰고 죽는다고 아쉬워했었지.’
그의 기억은 기수가 염정구심술로 뽑아서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기수는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벗어나 한적한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경공을 시전해서 낙양으로 날아갔다.
그의 비밀창고에 은전 한 닢만 있어도 음식과 잠자리와 새옷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많은 것이 있기를 기대했다.
일단 기대감이 생기자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난주에서 낙양은 엄청나게 먼 길.
‘그래 좋다! 내 내공의 끝이 어디인지 시험해보자.’
기수는 선풍비를 극한의 스피드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주변 경관이 깔대기처럼 휘어져 보이기 시작했다.
“우와! 죽인다.”
무슨 람보르기니 가야르도를 탄 기분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빨랐다. 앞에 산이 보인다 싶으면 어느새 발 아래 지나갈 정도니까 자동차보다는 비행기 속도라고 봐야 했다.
‘극한까지!’
기수는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그때, 갑자기 심장이 뻐근해지면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헉! 왜 이러지?”
기수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내공도 진정시켰다.
그러나 가슴의 통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기수는 겁이 덜컥 났다. 자신의 몸은 어마어마한 내공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
뚱뚱하고 운동 안 하는 중년 아저씨라면 심장뿐만 아니라 온몸이 다 아파도 이상할 게 없지만 자신의 몸은 이런 증상을 보여선 안 되는 것이다.
‘혹시 혈천제의 마기를 완전히 다 분해하지 못한 건가?’
기수는 좌우를 둘러본 후 바지를 들추고 존슨을 확인해보았다.
검정이나 보라색으로의 변색은 없었다.
‘그럼 도대체 원인이 뭐지?’
기수는 조심스럽게 운기를 해보았다.
그러나 가슴의 통증이 가라앉고 나니까 그 어떠한 이상도 감지할 수 없었다.
기수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몸 하나가 전재산인데 그 몸에 이상이 생겼으니 원인을 찾아야 했다.
기수는 다시 선풍비를 시전해서 최고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아까와 동일한 상황으로 몸을 몰아간 것이다.
그러자 동일한 통증이 다시 심장을 옥죄어 왔다.
기수는 멈추지 않고 속도만 좀 늦춰보았다. 그리고 통증이 생길락 말락하는 그 시점을 찾아냈다. 내공의 8성에서 9성 사이.
엄밀히 따지면 86%정도를 끌 때 통증이 시작되었다.
‘왜 이러는 걸까?’
기수는 통증의 원인을 찾다가 이질적인 느낌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가 처음 고수의 반열에 끼게 된 것은 순양무극태양대환단의 엄청난 양기가 조현, 조민 자매를 만나 태을음양대법을 통해 태무대력신공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기수의 기본 내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도룡문에서 혈천제를 만나 그녀의 마공을 음양대법으로 쪽쪽 흡수한 게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태무대력신공과는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내공이란 게 우주의 에너지라서 기본적으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중도가 80%를 넘어가면 그때부터 각각의 개성이 드러났다.
마치 데뷔 때는 서로 잘 어울리다가 인기가 좀 생기면 각자 개인 활동에 집중하고 사이도 벌어지는 걸그룹 같았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고, 심장에 부하가 걸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거 곤란한데…. 쩝….’
나름대로 분석을 끝낸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태무대력신공이 100이고, 혈천제의 마공이 100이면 둘 다 가지게 된 지금 당연히 자신의 능력은 200이 되어야 했다.
그 무슨 씨너지효과라는 걸 고려하면 300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그의 몸은 200의 80%인 160 정도로 내공을 끌어 올리면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예전 100이던 시절에 비하면 그래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이지만, 풀 파워를 다 쓰지 못한다는 건 꺼림칙했다.
‘혈천제 정도의 고수와 목숨 걸고 싸웠다가는 상대를 쓰러트리기 전에 내가 먼저 자폭할 수도 있겠네.’
그런 생각을 하자 신나게 선풍비로 달리던 흥도 식어버렸다.
터덜터덜, 열매와 약초로 주린 배를 채우며 낙양 인근의 야산에 도착한 기수는 자신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기억을 되짚어 고황명의 비밀창고로 갔다.
반쯤 불타버린 폐사찰.
대웅전엔 불상 놓였던 자리가 무너져 있었다.
기수는 그 사이에서 널판지를 치우고 석판을 찾아냈다.
그걸 옆으로 옮겨 놓자 멀리 뒤쪽에서 끼릭끼릭 하며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기수는 처음 와봤지만 그게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찾아갔다.
담 너머 빽빽한 넝굴 뒤 절벽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틈이 보였다.
기수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닥에 걸려 있는 철사를 치웠다.
자물쇠와 문을 멀리 떨어트려놓은 것도 모자라서 무심코 들어가면 암기가 발사되도록 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머리 진짜 많이 썼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냐? 결국 죽었는데.’
안으로 5미터 정도 들어가자 문이 끼릭끼릭 소리를 내며 도로 닫혔다.
기수는 손을 뻗어 화섭자를 찾았고 등잔에 불을 밝혔다.
“와우! 예상보다 많네.”
석벽에 3단 선반이 걸려 있고 거기에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상자마다 금은이 가득했다.
일부엔 옥, 진주, 산호 같은 보석들도 보였다.
“햐! 죽을 때 아까워할 만 했구나.”
기수는 고황명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극락왕생해라. 이건 내가 보람 있게 써줄게.”
동전 한 닢도 없어서 숲에서 열매 따먹던 처지였는데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고 보니 기분이 엄청 좋아졌다.
복권에 당첨된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기수는 금과 은, 그리고 보석 몇 개를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지 않을 만큼 챙겼다.
나머지는 이곳에 놔두고 필요할 때마다 와서 찾아 쓰면 될 것 같았다.
석실 안에는 돈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한쪽 구석엔 암기와 무기가 놓여 있었고 맨 윗 선반엔 책들도 있었다.
기수는 고황명의 기억 중 일부를 빼앗아 왔지만 그건 이곳까지 오는 길과 들어오는 방법에 대한 것뿐이었다. 남의 인생 다른 기억들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무기들, 특히 암기들을 흥미롭게 하나씩 살펴봤다.
몸 안 여기저기 숨기는 방식들이 대부분이었다.
머리 쓴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지만 잔백지를 자유자재로 시전할 수 있는 기수 입장에선 잠깐의 흥미거리일 뿐 몸에 그런 걸 차고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기수의 관심은 책으로 넘어갔다.
‘청부살인업자는 무슨 책을 읽나?’
교양서적은 아니었다.
무공비급 몇 개가 있었지만 기수가 보기엔 대단할 것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변장술에 관련된 책은 볼만했다.
“오! 바로 이거야!”
기수는 책 내용중에 엄청나게 소중한 자료를 찾아냈다. 바로 인피면구 없이 얼굴 근육들을 당기고 고정시켜 다른 얼굴로 만드는 기술이었다.
기수는 책의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적힌 내용대로 운기를 해서 얼굴 형태 바꾸기를 연습했다.
하지만 거울이 없어서 확인이 불가능했다.
책을 품에 넣은 기수는 맨 아래 깔린 책을 집어들었다.
표지에는 어떠한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으음…. 이 책은 뭔가 포스가 느껴지는데? 혹시 절세무공이 담긴 비급인가?’
기수는 살짝 긴장하며 첫 장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 놔…. 진짜…. 푸하하하하!”
첫 페이지에 그려진 것은 여성의 성기였다.
그리고 어디를 어떻게 자극해야 하는지 자세한 해설이 적혀 있었다.
다음 페이지엔 체위들이 참고 그림과 함께 이어졌다.
고대 중국식 포르노 잡지, 내지는 성생활 교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후후…. 이러니까 제목을 안 써놨지.”
기수는 건성건성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밑줄이 쳐진 부분을 발견했다.
“뭐야? 이거…. 고황명 그 새끼 발기불능이었나?”
그곳엔 혀와 손가락만으로 여성을 자극하여 절정으로 보내는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기수도 참고할 만 한 게 있어서 열심히 읽었다. 광혼랑이 혈천제를 어떻게 자극했는지 이해가 되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것이 책의 마지막 챕터였고, 곧 표지 맨 뒷장이 나타났다.
기수는 거기에 색깔 다른 종이가 2장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뭐지?”
체위 그림이려나? 하고 펼쳐봤는데, 한 장엔 거미줄처럼 선들이 이어져 있고, 각각의 교차점마다 숫자와 문자들이 아주 작은 세필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종이엔 누군가 급히 흘려 쓴 글자들이 보였다.
[이곳에 감춰진 보물의 가치는 황금 일만 관 이상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곳에 감춰진 무공을 얻는 자, 천하를 취하리라!]
기수의 손이 떨렸다.
“일만 관? 그것도 황금으로?”
기수는 무공엔 더 이상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황금이라면 얘기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