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85
기수는 그녀의 강렬한 반응에 몸을 움찔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란다더니… 진짜 오싹하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상대는 약선문.
철산문을 서너시간 만에 완전히 멸문시킬 수 있는 거대한 힘의 소유자.
거기에 반해 탁지연은 철산문의 유일한 생존자였고, 무공도 기수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백호단주 왕총 수준에 불과했다.
그것도 정면대결을 한다면 이길 가능성이 40% 정도에 불과할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복수를 한단 말인가.
탁지연도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움켜쥐었던 두 주먹을 풀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복수는커녕 당장 몸을 피할 곳도 없었다.
기수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흔들리면 안 돼! 예쁘다고 도와주고, 못 생겼으면 못 본 척 하고, 너 그런 사람 아니잖아? 외모와 상관없이 지조를 지켜야지. 강간, 아니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도와준 거야.’
그렇게 생각한 기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어디 친척집에라도 가서 숨어 지내면서 기회를 봐서 신중하게 처신해.”
혼자 힘으로 덤볐다간 개죽음 당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탁지연은 발길을 옮기지 않고 머뭇거렸다.
기수는 불안함을 느꼈다.
‘이거… 이거…. 함 줄 테니까 대신 복수해달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아! 난감하네…’
생기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있는데 탁지연이 말했다.
“당신. 장보도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었어요?”
“응? 그건…. 그냥 다 아는 데가 있지.”
“나하고 협력할래요?”
“나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여자의 몸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가 장보도 해석을 도와주겠다는 건데….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저의 복수를 도와주세요.”
그녀는 기수가 자기보다 훨씬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경공만 봐도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를 자기 편으로 만든다면 복수의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수는 피식 웃었다.
“네가 지도를 가진 게 아니라면서?”
“예. 지도는 아버지의 비밀 금고에 있었어요.”
“그런데 무슨 해석을 도와?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양소협은 그 지도를 본 적이 있나요?”
“아니.”
굳이 사실을 밝힐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잘 모르겠지만, 거기엔 산과 강과 길이 그려진 게 아니예요. 선과 숫자와 문자만 적혀 있어요. 아무리 들여다 봐도 그게 어디인지, 무슨 의미로 숫자를 적은 것인지 알 수 없죠.”
“그, 그런가?”
기수는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진짜 그 지도엔 그림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았다.
“지도를 입수했다고 해도 해석은 전혀 별개의 문제에요.”
“넌 그걸 해석할 수 있다고?”
“그 숫자와 문자들이 구궁팔괘를 황도십이궁에 역배열 해서 조합해낸 것이라는 사실을 찾아냈죠. 적어도 제 눈엔 더 이상 암호로 보이지 않아요.”
기수는 탁지연의 큰 눈을 들여다보았다.
예상보다 훨씬 더 똑똑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다리가 길고 곧은 여자, 힙이 예쁜 여자, 가슴이 풍만한 여자,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 모두 남자를 흥분시키는 요인이지만 머리 좋은 여자도 의외로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럼 내가 가서 약선문의 문주와 자식들을 전부 다 죽이고 지도를 빼앗아 오면 네가 해석해줄 수 있겠네?”
“있는 부분은요.”
탁지연은 기수가 하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이 남자. 정말 그럴 능력이 있는 걸까?’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약선문 문주와 자식들을 모두 처치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기수가 말했다.
“좋아! 그런 조건이라면 서로 협력하기로 하지.”
일방적으로 돕는 게 아니라 서로 윈윈 하는 거니까 사람의 외모를 보고 내린 결정은 분명 아니었다. 그래서 마음도 편했다.
“잘 생각했어요. 내가 정말 유용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기대가 되는군. 이제 나는 아까 얘기한 대로 하면 되나?”
“아, 아뇨.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은 게 아니라고 했어요. 공연히 서두르기보다는 확실을 기해야죠. 그리고 양소협이 대신 죽여주면 그게 무슨 복수인가요? 제 손으로 죽여야지.”
기수는 그녀의 눈에서 다시 시퍼런 한광을 보았다.
“뭐, 그건 맞는 얘기군. 알았어! 약선문 문주와 그 자식들을 내 손으로 죽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그렇다면 내가 뭘 해야 하지?”
“일단 저와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약선문의 내부사정을 전해주세요. 그 정보들을 조합하면 차츰 길이 보일 거예요.”
“연락? 어떤 식으로?”
카톡이 가장 편한데, 이곳에선 불가능했다.
“제가 청주에 들어가 거처를 마련하고 지내면서 연락할 방법을 취할게요. 양소협이 자주 가는 객잔을 하나 얘기해주세요. 첫 만남은 거기서 갖기로 해요.”
“이름은 모르겠고, 약선문 건물의 서문 바로 앞에 월병과 차를 파는 가게가 하나 있어. 노파와 아들이 함께 하는데 팥 앙금 사이사이에 잣과 밤 조각이 들어 있어서 아주 맛이 독특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알았어요. 그런데….”
탁지연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급히 빠져나오느라 빈털터리라는 사실이 생각난 것이다.
당장 월병은커녕 끼니 사먹을 돈도 없었다.
기수가 그녀의 고민을 눈치 채고 주머니를 열어 은전을 한 웅큼 집어주었다.
“자. 이걸 써. 옷도 눈에 덜 띄는 거로 사 입고, 필요하다면 약선문 근처에 집을 빌려서 살아도 돼”
“아! 이, 이건 너무 많아요.”
“괜찮아. 네가 장담한 대로 지도 해석만 확실히 해준다면 이 정도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아.”
탁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받겠어요. 고마워요.”
당당하게 돈을 챙기는 그녀의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 지도를 해석할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딸부터 급히 피신시킨 것은 어쩌면 그녀의 바로 그 능력 때문일 수도 있었다. 딸을 살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지도를 빼앗긴다 해도 해석까지 하게 해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기수 입장에선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는 현대의 교육을 받았지만 구궁이니, 팔괘니, 황도니 하는 것들은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아팠다.
‘차라리 미분방정식을 풀라고 하면….’
사실은 그것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어쨌거나 큐트걸이 그걸 해석할 능력이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 참…. 이거 받아.”
기수는 그동안 가지고 다니던 역용술 책을 그녀에게 주었다.
“이, 이게 뭐죠?”
“내공으로 얼굴을 바꾸는 방법이 적혀 있어. 네 얼굴로 청주 시내를 돌아다녔다가는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걸 먼저 익힌 다음에 청주로 들어와.”
“아! 고마워요. 지금의 저에게 꼭 필요한 거였어요. 소중히 보고, 다 익힌 다음엔 돌려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어. 그냥 태워버려. 난 다 익혔으니까.”
그러자 탁지연이 기수를 빤히 쳐다봤다.
“지금 얼굴…. 양소협의 본래 얼굴 아닌가요?”
“아! 내 본래 얼굴은 이거야.”
기수의 얼굴과 음성이 갑자기 변하자 탁지연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깜짝 놀랐다.
“어머나! 원래 그렇게 생기셨군요.”
탁지연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기수가 키도 크고 마음 씀씀이도 고마운 또래 청년이라는 사실은 마음에 들었지만, 사실 그의 인상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어딘가 약간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사나워 보이기도 했다.
눈빛만 인상적이었는데, 본모습을 보고 본래 음성을 들으니까 눈빛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다정다감한 마음씨를 지닌 미공자였다.
아쉽게도 기수는 양일의 얼굴로 금세 돌아갔다.
“나를 찾을지도 모르니까 가봐야겠어. 몸조심해. 잡히지 말고.”
“걱정 마세요.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된 이후에 움직일 거니까요.”
돌아서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기수는 비로소 그녀의 다리 길이, 힙과 허벅지의 이어지는 라인 등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키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율이 기대 이상이라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동업자잖아. 동료하고 자면 끝이 안 좋다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탁지연을 섹스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딱한 처지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갑이 아닌 동등한 처지가 된 다음에 다시 대시해보자.’
대충 그렇게 결론을 내린 기수는 산을 내려가 일행에 합류했다.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난 거야?”
조장 유량이 그를 반겼다.
멀쩡한 남의 문파에 쳐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사람을 무수히 죽여놨기 때문에 아무리 무림 문파라고 해도 관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임무를 완수하자마자 곧바로 철수가 시작되었는데, 18조는 기수와 함께 가려도 뒤처진 상태였다. 이제라도 그가 도착했으니 다행이었다.
“발목 상태가 안 좋아서 편한 길을 찾아 내려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
“상태는 어때? 걸을 만 해?”
“이젠 다 나았어. 경공도 문제없다고.”
“잘 됐네. 어서 가자.”
“일은 다 끝난 거야?”
“그런 것 같아. 후후후….”
유량은 핏자국 남아 있는 얼굴로 씩 웃었다.
철수는 공격하러 갈 때보다 느긋하게 진행되었다.
약선문에 귀환한 이후 무사들에겐 적지 않은 보너스가 지급되었다.
철산문에서 약탈한 돈이었다.
무사들은 술도 마시고, 노름도 하면서 그 돈을 흥청망청 써댔다.
기수는 같이 가자는 동료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발목이 아무래도 시원찮아서 걷기도 불편해. 술을 마시면 아무래도 낫는 게 더 늦어질 것 같으니까 너희들끼리 마셔.”
기수는 본래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특히 약선문 사람들과는 이제 함께 마시고 싶지 않았다.
탁지연과 한 편이 되어서인지, 약선문이 나쁘게 보였던 것이다.
혼자 내무반에 남아 지도를 어떻게 빼앗을까 궁리하고 있는데 백호단주 왕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숙소를 둘러보는 중인 듯 했다.
기수는 일어나서 군례를 하자 왕총이 물었다.
“다리가 아프다고?”
“예. 곧 나을 겁니다.”
왕총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기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말했다.
“꼭 필요할 때 쓸모가 없다니…. 에잉… 쯧쯧….”
그러면서 그는 혀를 차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기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새끼. 죽여버릴까?’
그러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일이 커질 것이었다.
지도를 찾기 전에는 조용히 지낼 필요가 있었다.
하긴, 무공을 겨뤄보고 마음에 들어서 고용했는데, 실전에서 가장 중요할 때 대열에서 이탈한 자신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건 이해해줘야 했다.
밤이 되자 기수는 몰래 숙소를 빠져나왔다. 지도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보초를 서면서 약선문 건물들의 구조와 출입구는 물론 보초의 배치와 근무 교대시간까지 완벽하게 파악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는 담과 지붕과 정원수, 정원석, 정자들 사이를 누비며 은밀하게 이동했다.
높은 담을 지나 약선문 정식 제자들이 지키는 구간.
그러나 외곽 지역과 마찬가지로 기수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자는 없었다.
‘빼앗은 지도는 지금 큰아들이 보관하고 있겠지?’
기수는 그의 집무실 쪽으로 다가갔다.
누각의 창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걸로 보아 아직 자지 않는 듯 했다.
‘곤란하군.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곤란한 일이 기수를 가로막았다.
보초 서는 제자들은 따돌릴 수 있는데, 주변 경관이 갑자기 바뀌는 상황은 대처할 수가 없었다. 집무실 주변에 진법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아! 이것들이 내 약점을 어떻게 알고….’
기수는 진법이라면 치를 떨었다.
첫사랑 자매와 헤어진 것도 바로 진법 때문 아니었던가.
그런데 보물지도 찾는 데도 진법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위치를 약간만 바뀌어도 무슨 거울의 방에 들어간 것처럼 주변 경관이 달라지는 걸로 봐서 뭔가 대단히 복잡한 기문진법을 펼쳐놓은 게 분명했다.
일단 들어갔다가 갇히면 빠져나올 자신이 없었다.
기수는 결국 포기하고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햐!…. 요거 만만치 않네.’
기문진법은 일종의 무인경비 시스템과 같았다. 전문가가 아니면 뚫기 어려울 테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이 언제 기어 나오려나.’
그러나 사람만 나와서는 소용이 없었다. 지도를 가지고 나와야만 했다.
짝을 모두 모으기 전엔 가지고 나올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그러다 며칠 뒤.
기회가 찾아왔다.
무사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는데, 이번에 함께 갔던 네 째 아들 고원달이 보표를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기수는 소문을 전한 조장 유량에게 물었다.
“정식 제자들이 있는데 보표를 왜 따로 뽑으려는 거야?”
보표는 바디가드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문주의 제자지, 공자님의 제자는 아니잖아.”
“아! 그건 그러네.”
“넌 실력이 충분히 있으니까 한 번 지원해 봐. 공자님의 보표가 되면 대우도 엄청나게 좋아질 거야.”
“그래볼까?”
겉으로는 심드렁하게 얘기했지만 속으론 뛸듯이 기뻤다.
7남매 중 한 명의 경호원이 된다는 것은 지도와 아주 가까워지는 것이고, 기회도 훨씬 많아질 것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