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84
기수가 투시력을 따로 익힌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 여인들의 복장 스타일이 하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다리가 짧은지, 허벅지가 굵은지, 안짱다리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다리가, 길고 곧은 다리가 남자를 얼마나 흥분시키는가.
그래서 치마로 가려진 하체 라인을 약간의 옷자락 휘감김 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노력하다 보니 약간의 성과가 있었다.
앞에 도망치는 철산문 문도들은 전부 남자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여자가 섞여 있었다.
‘중요한 인물인 모양이지? 문주의 마누라나 딸이라도 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쫓아가는데 갑자기 펑! 소리가 나더니 흰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그것은 도망치던 자들이 터뜨린 것으로, 일종의 연막탄이었다.
기수는 투덜거렸다.
‘젠장! 레이저 유도 미사일을 쏜 것도 아닌데 시야는 왜 가린담.’
이래서 밀리미터파 레이다 유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수는 도망자 무리를 찾으려 했다.
서멀 이미지 없이 정확한 수색은 불가능했지만 다행히 산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오래지 않아 시야를 열어주었다.
“저쪽이다!”
왕총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무성한 숲으로 몸을 숨기며 도망치는 무리가 있었다.
“흥! 네놈들이 연막을 펼친다고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느냐!”
그리고는 왕총은 더욱 속도를 냈다.
기수도 동행하다가 갑자기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내 사과 어디 갔어?’
그 힙이 보이지 않았다. 애플 타입의 탱글, 동그란 곡선이 어디에도 없었다.
기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조장 유량이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래? 갑자기.”
“발목을 접질린 것 같아. 먼저 가.”
유량은 더 묻지 않고 앞으로 달렸다.
남에게 고용되어서 칼밥을 먹으려면 필요할 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지금처럼 수가 적은 적을 추격하는 것은 싸움 중에서도 제일 쉬운 싸움이었고, 죽거나 다칠 확률도 거의 없었다.
이럴 때 단주한테 확실한 눈도장을 받아둬야 했다.
다른 무사들도 비슷한 생각으로 열심히 달려서, 오래지 않아 기수만 남게 되었다.
기수는 검지로 안경 추켜올리는 흉내를 한 번 낸 후 말했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철산문의 도망자들이 굳이 산길을 택한 이유, 그리고 중간에 연막탄을 터뜨린 이유가 분명 일행 중에 섞여 있던 여인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그들이 갔던 경로를 되짚어 가면서 주변을 자세히 관찰했다.
“여기쯤에서 연막탄을 터뜨렸군.”
흰 가루가 집중적으로 흩어져 있는 장소를 발견한 기수는 무릎까지 꿇고 발자국의 향방을 확인했다.
흙바닥에 작고 깊이가 얕은 흔적을 발견한 기수는 발가락 쪽이 더 깊이 파인 것을 보고 도약했음을 짐작하고 자기도 살짝 점프해보았다.
그리고 착지한 자리를 자세히 살폈다.
불필요하게 떨여져 있는 풀잎들.
기수는 마침내 땅바닥에 뚜껑처럼 덮여 있는 문을 찾았다.
“아하! 여기 숨어 있었군.”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순간적으로 검 한 자루가 얼굴을 찔러왔다.
“죽어라! 원수!”
날카롭고 빠른 공격. 내공도 상당수준이었다.
그러나 기수를 위협할 수준은 아니었다.
기수는 간단히 검을 피한 후 상대의 완맥을 단숨에 제압해버렸다.
“으으……”
급히 갈아입은 것으로 보이는 남자 옷과 두건으로 머리를 감춘 그녀는 이제 열일곱에서 많아야 열아홉 정도로 보였다.
놀라고 겁먹어서 더 그렇겠지만 눈이 아주 컸고, 콧날은 오똑하고, 입술은 도톰했다.
전체적으로 계랸형에서 약간 갸름한 얼굴형이라 화장을 전혀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와 얼굴 라인이 조화를 잘 이루어서 아주 예뻤다.
‘오오! 이런 큐트걸일 줄이야….’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다른 뜻은 전혀 없고, 그냥 남자의 본능이 그렇게 시켰다. 그녀의 허리에서 힙으로 이어지는 곡선, 그리고 다리의 길이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선이 가로막혔다.
두 덩이 볼륨이 나이와 걸맞지 않게 몹시 빵빵했다.
‘이게 뽕브라 없는 실제 사이즈란 말이지?…’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하체에 혈류가 증가하는 걸 느꼈다.
그때, 당황스런 일이 발생했다.
소녀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이 하루아침에 박살난 아침.
문도들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기 위해 희생을 각오했는데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잡혔으니 억울하기 한이 없었다.
점혈을 당해 소리도 못 지르고 상대를 찔러 죽이지도 못하는 터라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눈물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
“이봐. 울지 마.”
기수는 여인에게 신의 선물인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주는 스페셜리스트였다.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라면 몰라도 이런 식으로 울리는 건 싫었다.
기수는 좌우를 둘러본 후 그녀를 안고 경공을 펼쳐 현장에서 멀리 벗어났다.
안다 보니까 가슴 쪽에 부드러운 압박감이 전해져 와서 다시 혈액이 쏠렸다.
이번엔 그쪽도 상대방의 배쯤에 닿아서 자극이 더했다.
인적없는 산꼭대기로 단숨에 올라선 기수는 소녀의 점혈을 풀어주었다.
“소리 지르거나 도망치려는 시도는 하지 마.”
소녀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의 경공 실력을 통해 보통 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런 정도 상대라면 자기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할 가능성도 없다고 봐야 했다.
기수가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탁지연. 넌 누구지?”
“질문은 내가 한다. 그리고 반말하지 마. 가만있자… 성이 탁씨라면 혹시….”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가 철산문의 문주님이시다.”
“역시 그랬군.”
“그런데…..날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뭐냐? 혹시….”
탁지연은 옷자락을 여미며 뒤로 물러섰다.
자기네 상관에게 데려가기 전에 강제로 겁탈하려는 의도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녀는 품속에 감추고 있던 단검을 잽싸게 뽑더니 자기 목을 찔렀다.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기수는 잽싸게 그 단검을 빼앗았다.
“아! 놔…. 뭐 이렇게 충동적이야? 내가 널 덮치기라도 할까봐?”
“그, 그럼… 아니란 말이냐?”
“난 말야. 강간을 경멸하는 사람이야.”
그러나 탁지연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기수는 그녀를 강제로 어찌해 볼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에 혹하기는 했다.
“야. 너 엄마가 서역 사람이냐?”
“아니다.”
“그런데 피부가 어쩌면 그렇게 희지? 눈도 크고… 가슴…. 어쨌거나…”
탁지연이 인상을 썼다.
“말로 희롱하는 건 괜찮다는 거냐?”
“이건 희롱이 아니지. 이쁜 걸 이쁘다고 하는 게 뭐 어때서…”
탁지연은 이 사내의 의도를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눈빛을 보니 정말 자기를 강제로 덮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맑았고, 음탕한 기운이라곤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너무 과한 반응을 자제하고 손을 내렸다.
기수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동료들을 모두 보내고 너를 찾아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 그게 뭐냐?”
“너희한테 보물 지도 중 일부가 있지?”
탁지연의 안색이 굳었다.
“그, 그것을 어떻게?”
“너희 문파는 보안유지에 실패했어. 그래서 오늘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거야.”
“아!…..”
탁지연은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기수가 다시 물었다.
“그 지도. 혹시 지금 네가 가지고 있냐?”
“아, 아니다.”
“정말이지? 거짓말하면 안 돼.”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
“만약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아니…. 홀랑 다 벗겨버릴 거다.”
탁지연은 몸을 움츠렸다.
“절대 없다! 그런 귀한 걸 왜 내게 주셨겠느냐?”
“하긴 그래…..”
기수는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가지고 있다면 빼앗을 생각이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약선문의 경쟁 심한 아들들 중 한 명이 챙길 테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좋아. 그럼 이만 가 봐.”
탁지연은 멍하니 기수를 봤다.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라고?”
“응.”
“지금 날 그냥 보내주겠단 말이냐?”
“그렇다니까. 왜? 나하고 같이 있고 싶어?”
“아,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
“난 본래 철산문과 아무 원한도 없던 사람이야. 약선문에 충성을 바칠 이유도 없고. 그러니 너처럼 예쁜, 아! 예쁜은 빼고… 어쨌거나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만났으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괴롭히지는 말아야지. 어서 가.”
기수가 진심이란 사실을 알고 탁지연이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기…. 아니. 양일이다.”
그녀는 잠시 생각 후 말했다.
“너. 이제 보니 지도를 찾으려고 약선문에 잠입했구나? 맞지?”
“하하! 머리 좋은데? 생긴 것만 예쁜 게 아니고….”
상당히 만나기 힘든 조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그녀의 지능과 가슴, 아니 지능과 미모 조합에 많이 흥미가 동했지만 욕심을 버리고 손짓을 했다.
“어서 가! 마음 변하기 전에.”
탁지연은 기수에게 포권을 했다.
자기를 찾아냈을 때만 해도 죽여야 할 원수였지만 이렇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보내준다면 은인이라고 해도 좋을 상황이었다.
“고마워, 다음에 또 볼 수 있기를….”
“내가 널 왜 또 보냐?”
기수는 고개를 돌렸다.
깜찍한 미모에 큰 눈이 눈을 떼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파공음과 함께 그녀가 경공 펼치는 게 느껴졌다.
기수는 숨을 몰아쉬었다. 점혈한 큐트걸을 앞에 두고도 잘 참은 자신을 다독거려주고 싶었다. 물론 한 대 패주고도 싶었다.
어쨌거나 남의 싸움에 끼어들었으면서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은 잘 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이곳에서는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다는 게 기수의 생각이었다.
다만, 남이 시키는 살인은 싫었다.
자기 판단 하에, 자기 주관 하에 살인하고 싶었다.
‘나중에 시체를 만나면 칼하고 옷에 피를 좀 더 묻혀야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산길을 내려가는데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어! 너. 왜 안 가고 여기 있어?”
탁지연이었다. 그녀는 불타는 철산문 건물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버지….. 어머니….. 오빠…..”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두 눈에선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수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장원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였는데, 움직이는 건 약선문 사람들 밖에 없었다.
철산문 쪽 사람들은 전부 다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가장 지붕이 높은 건물 앞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었는데, 거기에 쓰러진 시체들은 멀어서 얼굴이 잘 안 보였지만 화려한 옷차림으로 미루어 상당히 지체가 높은 사람들 같았다. 탁지연은 바로 그들을 보고 우는 것이었다.
기수는 계속해서 들썩이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부모를 잃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아온 경험이 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그렇지만,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이 정말 못 견디게 힘든 적이 많았었다.
그런데 지금 탁지연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 오빠, 혈육을 전부 다 잃은 것이다.
가족의 시신이 뻐히 내려다보이는 상황에 어떤 심정일지. 기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작은 어깨를 안아주었다.
무심코 한 행동에 흠칫 놀라 손을 떼려는데, 갑자기 탁지연이 홱 돌아서더니 기수의 품에 와락 안겨 울기 시작했다.
기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의 눈물 때문에 옷 앞자락이 젖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탁지연은 거의 10분 이상을 운 것 같았다.
약선문의 일원으로 이곳에 왔다는 죄책감 때문에 기수는 계속 가슴을 빌려주었다.
한참 만에 그녀가 얼굴을 떼었다.
속눈썹이 다 젖어 있어서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미안해요.”
그녀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아, 아니. 내가 미안하지.”
“양소협이 왜요?”
“막아주지 못해서.”
탁지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발길을 돌렸다.
“이젠 가볼게요. 살려주셔서 고마워요.”
기수가 힘없는 그녀의 뒤에 대고 물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야? 설마 자살하러 가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탁지연이 돌아서서 말했다.
“아뇨. 전 절대로 죽지 않을 거예요.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살아남아서 부모님과 오빠의 복수를 내 손으로 할 거예요. 반드시!”
두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떠는 그녀의 두 눈에 시퍼런 한광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