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80
01883 1883화
“최 팀장, 그거 아나?”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요?”
“누군가 호의로 건네준 물 한 잔을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야.”
“…….”
“그리고 그 아이가 앙심을 품고 준 게 아니잖나. 그저 고마워서, 감사해서 물 한 잔 떠 준 거란 말이야.”
석정현 회장의 말에 태수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맞는 말씀이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이 선생이 부주의한 건 사실입니다.”
“난 이기준 선생이 잘했다고 생각해. 만약 그 상황에서 이 선생이 거절했다면 어땠을까?”
석정현 회장 말에 태수가 말문을 닫았다.
“…….”
“이 선생은 자신의 몸을 생각한 게 아니야. 순수한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그 대가가 큽니다.”
태수의 대답에 석정현 회장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어떤 일이든 동전처럼 양면이 있는 법이야. 이 선생이 그 물을 거절했다면 몸은 건강했겠지. 하지만 장티푸스란 전염병을 알게 되는 건 더 긴 시간이 지난 후일 게야. 아닌가?”
“그건…… 맞습니다. 이 선생이 전염되어서 빨리 알아챌 수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래. 그러면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이 선생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 거라고 해야겠지?”
“네.”
태수의 대답에 석정현 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겉이 차가운 사람일수록 속이 따뜻하지.”
“제 동기지만 그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럼 그 차가운 사람을 누군가가 따뜻하게 바꿔 줬는지도 모르지.”
석정현 회장의 의미 깊은 말에 다시 한번 태수가 마땅히 대답할 말을 못 찾았다.
“…….”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내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석정현 회장이 말끝을 늘이자 태수가 바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르완다는 직항이 있나?”
“네?”
“선물을 보내려면 비행기가 빨라.”
“그럼……?”
태수의 눈이 크게 떠지는 사이 석정현 회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 수첩이 풍요로워지는 일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
“감사…… 합니다.”
“아냐 내 욕심이지. 그러니 어떻게 내 욕심을 채울지 방법을 알려 줘야지.”
“그게…….”
태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석정현 회장은 단 한 번도 태수를 재촉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작정인지 간간이 숨소리만 들려왔다.
그사이 태수는 맹렬하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짧은 시간 동안 몇 가지 생각을 떠올려 봤지만 역시 가장 순탄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태수가 석정현 회장에게 말했다.
“곧 미군 장성이 연락드릴 겁니다. 클라크 장군이라고…….”
“아아, 공동성명 발표했던 그 군인. 나도 화면으로 봤지.”
“네. 그분이 많은 도움을 주실 겁니다.”
“그럼 이번에 신세 한번 져야겠어. 연락 기다리지.”
석정현 회장의 간략한 결론에 태수가 보이지도 않는데 연신 고개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귀 따가우니까 그만해라. 녀석도 참.”
뚝.
석정현 회장이 꾸짖으며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가득 느껴진 커다란 정은 태수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했다.
사실 무리한 부탁임에도 선뜻 들어주는 석정현 회장의 배포에 태수는 또 한 번 감격했다.
잠시 후.
태수는 뜨거워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통화한 상대는 클라크 장군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미군 수송기를 지원해 준다고 했다.
이 일로 태수는 큰 빚을 졌다.
물질적으로 돌려줄 수도 없는 마음의 빚이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그가 원한다면 달려갈 작정이었기에 아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몇 군데 더 통화를 마치니 어느새 아침나절이었다.
부가라마 소식이 궁금했다.
그쪽과 무전을 하려면 PKO 본부로 가야 했다.
바로 출발하려던 태수는 몸을 돌려 NGO 지부 내에 있는 진료실로 먼저 향했다.
예방주사를 맞았다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는 체온을 재는 등 스스로 몸 상태를 세세하게 확인했다.
태수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PKO 본부에 도착했다.
자신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자가진단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전염의 기미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PKO 본부에 들어선 태수는 수소문해서 카스퍼 상사를 만났다.
덩치 좋고 날카로운 인상의 백인 남자였다.
그와 짧게 인사를 한 태수는 곧 무전기 앞에 자리할 수 있었다.
바로 무전기를 든 태수가 말했다.
“여기 키갈리 태수입니다. 들리십니까?”
-치직. 납니다.
김혁권의 목소리에 태수가 얼른 물었다.
“이 선생은 어떻습니까?”
-치직. 아직은 특별하게 문제 되는 건 없어요. 계속 열이 오르내리고 몽롱해하는 거 말고는요.
“다른 의료진들은 어떤가요?”
태수의 걱정에 김혁권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치직. 어젯밤에 늦게 들어와서 잠만 자고 아침에 다시 나갔습니다. 듣기론 우리 예상보다 전염 인구가 많은 거 같다던데요.
“음.”
태수는 무전기 버튼을 누르지 않고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 무전기에서 김혁권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치직. 약은 확보됐습니까?
“일단 100명분 정도 있습니다. 타 지역에서도 오고 있는데 300명분 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 같습니다.”
-치직. 지금 그걸 누구 코에 붙인다고. 뭐 하나 제대로 준비돼 있는 게 없으니 갑갑하기만 합니다.
“곧 나머지 물량도 준비가 될 겁니다. 확실한 분에게 부탁했으니까요.”
-치직. 누군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고. 큰 문제는 아니지만 수두도 돌고 있답니다.
김혁권의 목소리를 들은 태수는 허탈했다.
“아주 별의별 게 다 문제네요.”
-치직. 다들 그만큼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거겠죠.
“수두는 크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또 그렇기도 하고요.”
말 그대로 수두는 대부분 자연적으로 치료되는 바이러스성 질환 중에 하나였다.
물론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하면 좀 더 빨리 증상이 완화되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김혁권도 태수의 말에 수긍했다.
-치직. 일단 알아 두라고 한 말입니다. 문제는 아니니까 참고만 하고.
“알겠습니다.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그보다 김 간호사님은 어떠십니까?”
태수 입장에서는 김혁권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김혁권은 건강한 목소리로 태수를 안심시켰다.
-치직. 별문제 없습니다. 만약에 장티푸스에 걸렸어도 잠복기일 테니까 당장은 움직일 수 있고요.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또 고생하시고요. 타 지부에서 약이 도착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돌아가겠습니다.”
태수는 거기까지 말하고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머릿속엔 수두란 병명조차 지워져 있었다.
장티푸스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탓이다.
그보다 벌써 오후였다.
곧 르완다 각 지부에서 보낸 장티푸스 치료제가 도착할 터였다.
그것만 들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태수는 부가라마에 뭐가 필요한지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사방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하얀 트럭이 한적한 초원을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태수의 눈 밑에 거뭇거뭇한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만 24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부가마라로 돌아왔다. 수면 시간은 없었고, 장시간 운전을 하고 있었다.
오로지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운전 중이었다.
그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 피곤도 수면욕도 잊었다.
그렇게 달려가던 태수의 시선 저 멀리에 낮은 언덕과 학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곧 도착한다는 생각에 태수는 달리는 트럭에 힘을 더했다.
부아앙.
좀 더 달리니 학교뿐만 아니라 진료 천막과 텐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엔진 소리를 들었는지 하얀 가운을 입은 의료진도 눈에 들어왔다.
손을 흔드는 등 반기는 의료진들이었지만, 그들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태수는 지체하지 않고 그들 가까이 차를 몰아갔다.
곧 근처에 도착한 태수가 차를 급하게 멈춰 세웠다. 그리고 동시에 조수석에 고이 모셔 둔 약상자를 재빨리 들고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다들 물건부터 내리세요. 사이먼, 연료 챙겨!”
“오케이!”
“자자, 다들 빨리 움직여요.”
뒤에서 사이먼 기자와 의료진들의 부산한 소리가 들렸지만, 태수는 쳐다보지도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서두른 태수가 도착한 곳은 진료 천막이었다.
이기준은 누워 있고, 김혁권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펴보고 있었다.
김혁권이 태수를 발견했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왔습니까?”
“김 간호사님, syringe(주사기)!”
“여기!”
김혁권은 반사적일 정도로 재빨리 주사기를 찾아 건넸다.
탁!
낚아채듯이 받아 든 태수는 치료약을 준비했다. 그리고 주사기에 약을 담자마자 이기준에게 쏜살같이 달려가 주사했다.
“…….”
이기준은 별다른 반응조차 없었다.
주사를 놓으며 살펴본 태수가 김혁권에게 빠르게 물었다.
“탈진입니까?”
“네. 좀 심해요.”
김혁권의 말투에 염려가 그득 묻어나왔다.
태수는 이해한단 듯 조용히 지시했다.
“수분을 최대한 많이 공급해 주세요.”
“마실 물도 그렇게 많지 않아요.”
“가져왔습니다.”
태수가 빠르게 말하자 김혁권의 표정이 바로 살아났다.
“물을 가져왔다고?”
“많은 양은 아닙니다. 대신에 정수제를 많이 가져왔으니까 먹는 물은 많이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고생했어요.”
김혁권의 격려에도 태수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팔 주세요.”
“나?”
“약 놔 드려야죠.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말해 봐야 안 통하는 거 잘 아실 겁니다.”
태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혁권도 우길 생각은 없었는지 옅게 미소 지으며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1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어느새 주변은 껌껌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태수와 의료진은 식탁으로 사용하는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이들 주변은 발전기를 통해 전력을 공급받은 전등이 있어 환했다.
다들 한쪽 팔을 걷어붙이고 알코올 솜으로 같은 부분을 누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빈 약병과 주사기, 그리고 식사를 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태수를 포함해 모두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의료진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사이먼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다들 태수가 전해 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사이먼 기자도 있었기에 태수는 일부러 영어로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태수의 입을 통해 키갈리에서 있었던 일들이 전달되었다.
“……그런 상황입니다.”
다들 석정현 회장의 지원 약속에 특히 놀란 표정들이었다.
“회장님이 나서신다니.”
“회장님 몰라? 그분이라면 얼마든지 하시지.”
그런 의료진들의 반응과 달리 사이먼 기자는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 회장이 누군데?”
“그건 조만간 알게 될 거고. 그보다 각 부족 상황은 어떻습니까?”
태수가 다시 화제를 돌리자 정민수가 빠르게 답했다.
“이틀 동안 우리는…….”
이번에는 정민수의 입을 통해 전염병 예방 조치에 대해 설명 들었다.
장티푸스 증상을 보이는 부족민을 격리하고, 사용하던 물건들을 태우는 등 가장 기본적인 예방 조치들이 이어졌단 내용이었다.
그 말을 전해 듣는 태수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설마 했는데 거의 모든 부족이 장티푸스 증상을 보인다니.”
“증상이 발견된 부족민보다 아직 잠복기일 사람들이 훨씬 많을 거야.”
“현재 약은 여기 있는 게 전부야.”
태수가 테이블 위에 놓인 치료약을 내보였다.
방금 예방 차원에서 의료진들에게 주사해 10개 가까이 빠진 상태였다. 나머지는 대략 300개 남짓이었다.
약의 수를 계산해 본 의료진들의 표정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특히 유병태가 크게 울컥했다.
“이걸 지금 누구 코에 붙이라고.”
“나도 답답한데 더는 구할 수가 없었어.”
“너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하지?”
유병태의 물음에 태수가 답했다.
“오면서 생각해 봤는데, 30개는 빼 놓을 거야. 그리고 나머지는 당장 증세를 보이는 부족민들에게 투여하고.”
“30개는 비상용이란 말이지?”
유병태가 머리 아프단 듯 묻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