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826
02830 2830화
그런 그에게 태수는 여전히 미소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표정만 굳히지 마시고 눈빛도 좀 날카롭게 쏘고 그러셔야죠.”
“이런. 내가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못한 모양이야. 다음에는 꼭 그 충고대로 하지.”
“그렇게까지 결심하실 건 아니라고 봅니다.”
태수는 설령 그럴까봐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런 태수의 유쾌한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지 제임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농담은 이쯤 하고, 이제 정말 가 볼게. 어깨 회복되면 그때 연락해.”
“네? 어깨는…….”
“그런 수술을 하고도 멀쩡할까. 겉은 몰라도 내부에 염증이 좀 생겼을 거야. 항생제 꾸준히 먹도록 해. 아니면 내가 직접 째 버릴지도 몰라.”
제임스의 협박에 태수는 순간 갈등했다.
“제임스가 수술해 주신다면 그냥 놔둬야 하나…….”
“뭐?”
“아닙니다. 약 잘 챙겨 먹고 아주 멀쩡하게 찾아뵙겠습니다.”
태수가 얼른 말을 바꾸자 제임스가 못 말리겠단 얼굴로 말하며 지나쳐 갔다.
“하여간 틈을 주면 안 된다니까. 이만 실례하지.”
“나도 가 볼게. 다음엔 한국의 음식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지. 고생했어.”
톡톡.
스미스는 태수의 팔뚝을 가볍게 다독이고 멀어져 갔다.
누가 보면 다분히 놀랄 모습이었다.
외국인들, 그중에서도 미국인들은 타인과의 스킨십을 즐기지 않는다. 그 상대가 가족이라고 해도 가급적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그런데 스미스와 제임스는 그 거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오갔다.
태수 또한 당연하게 여겼다.
밤새 지켜봐 준 그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만약 수술 중 문제가 있었다면?
다른 의사들은 몰라도 제임스와 스미스만큼은 내려왔을 터였다.
‘진작 참관실 좀 볼걸.’
태수는 이상한 후회를 하며 그들이 떠나는 걸 지켜봤다.
그때 줄리앙 협회장이 다가왔다.
“오랫동안 친분이 있으시다고요.”
“아, 네. 의사로서 갓난아기 때부터 지켜봐 주신 분들입니다.”
“그래요. 그런 인연이 찾아오는 것도, 이렇게 오래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요.”
줄리앙 협회장의 목소리가 덤덤했다.
태수도 별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답했다.
“그래서 저에겐 더 특별한 분들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 잘 이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수술은 NGO가 극찬한 닥터 최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었습니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 부끄럽습니다.”
“아니요. 아마 닥터 최 또래에서 그 정도 실력자는 단연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의 말은 언제나처럼 청산유수였다.
그 말이 악의 없는 칭찬인 게 조금은 의외였다. 하지만 태수는 진작 결심한 대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말하는 그대로만 받아들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나도 이만 실례해야겠네요. 편안한 휴식 되시길.”
먼저 인사한 그가 몸을 움직이려 했다.
태수는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줄리앙 협회장을 불렀다.
“협회장님.”
“음, 네. 말씀하시죠.”
“어제, 아니지, 그제의 죄송한 일을 조만간 만회했으면 싶은데요.”
태수가 넌지시 식사 초대 의향을 물었다.
떠볼 생각은 없었다.
이건 이해관계가 아닌 예의를 의미하는 초대였다.
그런 태수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줄리앙 협회장이 의외의 답을 말했다.
“그때 거부한 게 마음에 남는다면, 같이 식사한 걸로 하시죠.”
“네?”
“먹은 걸로 하겠단 겁니다. 그럼 이만.”
대답을 마친 줄리앙 협회장은 쿨하게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그 자리에 남은 태수의 표정만 묘하게 변했다.
“이런 반응은 뭐지?”
승낙도 거절도 아닌 반응은 처음이라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확실한 건 그의 대답 속에 뒤끝은 느껴지지 않았단 점이다.
아무튼 찝찝했던 일 하나 덜었으니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한편, 줄리앙 협회장은 일행들의 맨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엔 그림자처럼 상임이사가 함께했다.
상임이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닥터 최를 영입하시려고 했던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쪽에서 초대한 식사를 거부했냐고요?”
“네. 궁금하네요.”
상임이사가 바로 묻자 줄리앙 협회장이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상엔 품어서 득이 될 인물이 있고, 독이 될 인물이 있단 걸 아실 겁니다.”
“닥터 최는 독이란 말씀이신 거 같습니다.”
“그래요.”
“그의 인지도와 실력, 두 가지 모두 득으로 작용하지 않을까요? 놓치기 아깝다며 직접 한국에 오신 거 아닙니까.”
상임이사의 의견에 줄리앙 협회장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서로 가는 길이 다릅니다, 가는 길이.”
“…….”
“닥터 최에 대해선 이만 신경 끄도록 하죠. 이번 한국행은 그 결론을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걸음이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줄리앙 협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의외로 개운해 보였다.
같은 시각.
태수는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중환자실로 향했다.
화이트엔젤 중환자실 문턱을 막 넘어선 태수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박성민과 도성민, 그리고 공우혁과 정승휘가 기운이 쭉 빠진 얼굴로 간호사실 앞 의자에 자리하고 있던 탓이다.
바로 다가간 태수가 얼른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Cardioplegy(심정지)가…….”
그 말은 기분 좋던 태수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뭐라고요? 진호가요? 이런!”
태수가 반사적으로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탁.
도성민이 묵직한 손으로 태수의 팔을 낚아채며 말했다.
“진호 말고 그 옆 환자.”
“어?”
“오후에 수술 끝난 환자라는데 갑자기 Cardioplegia(심장마비)가 와서 생난리 치고 간신히 되살렸어. 진짜 한계 시간까지 심장 안 뛰어서 내가 죽는 줄 알았네.”
도성민의 설명을 듣고야 태수는 몸에 힘을 뺐다.
하지만 황진호가 아니라고 안심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은?”
“뒤에 ECG 봐.”
슥.
도성민이 턱짓했다.
바로 돌아본 태수는 중앙 간호사실에 설치된 각 병상 ECG 모니터를 둘러봤다.
심정지로 한계까지 몰렸던 환자를 찾는 건 의외로 쉬웠다.
허탈증이 쉽사리 회복되지 않기에 바이탈 사인 자체가 다른 탓이었다.
“음, 음.”
아직 업다운이 일어나는 중이었지만 위험한 수준은 벗어난 듯했다.
천만다행이었다.
태수는 내친김에 황진호의 ECG 모니터도 확인했다.
모니터에 환자 이름이 떠올라 있기에 바로 찾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유심히 지켜보고 또 지켜봤다.
그러던 태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생각보다 낮은데…….”
“올라오는 중이야. 머리, 가슴, 배, 그렇게 쨌는데 바로 좋아지면 그게 말이 되겠어?”
정승휘가 날카롭게 물었다.
화난 게 아니라 원래 말투가 그랬다.
그 성격을 잘 알기에 태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싱겁게 미소 지었다.
“그야 그렇긴 하지. 그런데 옆에서 심정지 왔다니까 괜히 발걸음이 무거워지네.”
“여기 의사가 몇 명인데 네 발만 무거워져?”
“그래도 기분이 좀 그래. 특히 양족 폐를 모두 수술했잖아.”
“에휴. 가서 봐. 네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까.”
휙휙.
정승휘는 지쳤는지 손짓으로 신호했다.
박성민은 아예 조용했다.
아니, 거친 숨만 계속 몰아쉬고 있었다.
“헉, 헉.”
땀이 식었는데 호흡이 거친 건 체력적인 한계를 의미했다. 지금 말을 걸어서 좋은 소리 듣지 못할 분위기다.
그래서 태수는 조용히 정승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곧 태수는 유리벽 앞에 섰다.
그 유리벽을 통해 내부 병상에 누운 황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건 모두 똑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가 결정적으로 달랐다.
그건 병상의 모습이다.
에크모(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 ECMO)라고 불리는 의료기계다.
중증호흡기 질환으로 심폐 기능이 온전하지 않은 환자에게 사용한다. 체외막을 통해 산소를 공급해 폐의 직접적인 활동을 줄일 수 있었다.
황진호의 수술 과정을 떠올려 보면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태수는 그런 황진호를 일부러 이렇게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지켜봤다. 그리고 미소를 짓던 태수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이런 걱정을 미리 하면 안 되지만 그래도 병원비가 마음에 걸렸다.
성호종합병원이 아무리 수익에 치우치지 않았다고 해도 무조건 공짜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특히나 에크모는 가동에 필요한 부수기재들이 상당히 비싼 편이다.
그런 태수의 머릿속에 드웨인 센터장과 닥터 헤인즈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수술 영상이라.
교육의 목적이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비슷한 수술의 참고 자료로 사용되어야 한다.
태수는 그것만큼은 반드시 확답을 받아낼 거라 다짐을 굳혔다.
거기다 UCLA와 메이요 클리닉의 자산은 정확히는 몰라도 성호종합병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솔직히 기대해도 좋을 금액이 오갈 수 있다.
물론 태수 혼자 결정 내릴 부분은 아니다.
민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최대한 거부감 없는 방법을 찾아내고 싶었다.
태수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가 있었다.
서로가 끈끈한 가족이다.
조금씩 부족한 부분이 서로 함께하기에 채워지고 있었다.
병원비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부분도 걱정되는 게 사실이었다.
보통의 가정환경이라면 이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을 터였다.
남들과 조금 다른 환경이다.
그럼에도 어느 가정보다 정과 사랑이 가득했다.
그걸 직접 봤기에 태수는 스스로 조금 부지런해지기로 결심했다.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황진호를 향한 태수의 눈가에 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틀이란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오후 무렵.
태수는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황진호와 만나고 있었다. 에크모가 계속 구동 중일 정도로 아직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병실 안은 침묵이 흘렀다.
태수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면 상대도 말을 하고 싶어진다.
그런 심리적인 이유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
“…….”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마음이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을 해야 대화가 아니다.
눈으로 보고, 깜빡임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미소로 서로를 향한 믿음과 신뢰를 보였다.
그 모든 게 바로 대화였다.
그 시간이 꽤나 흘러간 후였다.
그릉.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상에 누운 황진호의 두 눈이 구슬퍼졌다.
반대로 태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서로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곧 황진호의 구슬픈 눈이 크게 깜빡였다.
톡톡.
태수는 황진호의 손을 가볍게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 유리로 된 병실 밖으로 나왔다.
유리벽 앞에서 한 번 더 황진호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공우혁이 옆으로 다가오더니 핀잔부터 건넸다.
“이거 뭐, 휴가 중인 팀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출근해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까 눈치 보여 살 수가 있나.”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압니다.”
“진짜야. 가끔 최 팀장이 중환자실에 나타나면 다들 긴장해.”
“설마요.”
태수는 믿지 않았다.
공우혁도 그냥 하는 소리였는지 굳은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며 말했다.
“바이탈은 점점 올라오고 있어. 그러면서 확실해진 건 신약 부작용은 아니었다는 거야.”
“그럼 역시 타까야수동맥염이 악화된 거였네요.”
“그래. 에크모 치료하면서 동시에 항생, 항염에 대해 집중 치료 하고 있어. 물론 골형성부전증 신약도 때에 맞춰 잘 투여 중이고.”
“역시 완벽하십니다.”
태수의 격찬에 공우혁은 힐끔 흘겨봤다.
“제대로 안 하면 그 잔소리를 어떻게 들으라고?”
“잔소리는 말씀도 마십시오. 저 어제 서영우 선생님하고 개인 면담 했잖습니까.”
“언제? 진호 보고 나서?”
그가 궁금해하자 태수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