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880
02884 2884화
꾸벅.
“제임스 박사님, 웰컴 투…… 코리아, 아니 호프, 호스피…….”
서강재가 어정쩡한 영어를 겨우 구사하자 태수가 중재에 나섰다.
“희망병원에 오셔서 좋답니다.”
“그래. 잘 부탁한다고 하고. 어떻게 된 건지부터 물어봐……. 난 잠깐 저 환자 좀 보고 있을게.”
제임스는 태수가 답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영어를 좀 할 수 있는 의사였는지 놀라다가 이내 설명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강재는 그런 제임스를 바라보며 태수에게 말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역시 제임스 박사님 추진력은 누구 못지않아.”
“칭찬 고맙고.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돼. 세계적인 의학계 거장들이 한국에 입국했어. 그런데 환영 인파도 없고, 곧장 청주로 향했잖아.”
서강재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걸 공항에 있던 기자들이 냄새를 맡은 모양이야. 몇몇 기자들은 조용히 병원까지 쫓아와서 염탐했고, 수술 소식이 알려진 거지.”
“그럼……?”
“그래. 어젯밤 늦게 첫 수술 기사가 났어. 그 기사 보고 뜬눈으로 기다린 환자들이 아침부터 밀려온 거고.”
서강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 서강재가 한마디 덧붙여 말했다.
“김성국 차장님께서 또 한몫 하셨지.”
“형님이 또 뭘?”
“남들 손댄 기사는 관심 없다고 우리 이사장님과 조용히 만났다더라. 이사장님도 어차피 며칠 당겨진 상황이니까 개원했다고 인터뷰하셨고.”
그 말에 태수가 미간을 좁히며 부정적인 말을 건넸다.
“……다 안 모였잖아.”
“오늘 아침에 출근하셨지. 전원 출근 완료라고.”
“출근율 100퍼센트라. 가능한 수치였네. 아무튼 그렇다고 치고.”
태수가 그 부분도 일단 넘어갔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무렵 서강재가 나지막이 이어서 말했다.
“수술한 환자가 봉연수 씨인 것도 알려졌어.”
“뭐? ……뭐? 혹시 김 PD가 소문낸 거야?”
크게 소리치던 태수는 멈칫하며 얼른 작게 속삭였다.
그런 태수의 반응을 이해하는 듯했지만, 서강재는 고개를 저으며 의외의 말을 들려 줬다.
“김 PD가 좀 막무가내지만 그럴 사람은 아니더라. 아무튼 인천에서 청주까지 쫓아온 기자들이 보통 집요하겠어?”
“그럼?”
“그래. 얼마나 은밀한지 원내를 샅샅이 돌아다니다가 연수 씨 어머니를 만나서 인터뷰한 모양이야.”
멈칫한 태수가 쓰게 미소 지으며 인정했다.
“보호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지.”
“정확하게 1명밖에 없었지. 그런데 어떻게 못 알아보냐.”
“그러네.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네.”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누르고 대충 대답했다.
그때 서강재가 조용히 말했다.
“그 사연까지 다 알려지고, 다큐멘터리 촬영도 소문났고, 그래서 덕분에 접수실 전화기는 터질 거 같고.”
“일단 거기까지만 들을게. 당장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래. 일단 봉연수 씨하고 희망이만 신경 써. 누가 쳐다보든지 물어보든지 신경 쓰지 말고. 우리 할 일만 집중하자고.”
“알았어. 고생.”
툭.
가볍게 주먹을 부딪친 두 사람은 동시에 지나쳐 갔다.
그리고 태수는 제임스에게 다가가 그 내용을 또 짤막하게 축약해 전달했다.
어느새 ICU 밖으로 나온 두 사람 중 제임스가 말했다.
“꼬리가 붙었다니. 이거 좀 미안하게 된 거 같은데.”
“아닙니다. 어차피 알려질 거였는데요. 당장은 별 관심 없고요.”
“그래. 그쪽에만 집중해. 아직 하루도 안 됐지만, 희망병원…… 멋진 곳이야.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단 걸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앞으로 더 만족하실 겁니다. 그런데…….”
태수가 힐끔거리며 말꼬리를 늘이자 제임스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가 봐. 좀 정리되면 그때 천천히 얘기해도 되니까.”
“네. 이젠 이렇게 헤어져도 또 볼 수 있어서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갑니다.”
태수는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어 얼른 다시 ICU로 들어갔다.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과거와 확실히 달라졌다.
그렇게 ICU에 들어선 태수의 표정은 다시 가라앉았다.
아직 웃을 정도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봉연수도 문제였지만, 아기가 특히 외줄 타기처럼 위태위태했다.
아니, 곧 좋아질 거다.
그렇게 한 번 더 확신을 품은 태수는 커튼이 쳐진 쪽으로 향했다.
반나절이 지나가자 사방은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밤이 깊어갈수록 정신없던 ICU의 소란도 상당히 잦아들었다. 이젠 의료진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대신해 중환자들의 신음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끄으으.”
“쿨럭. 으으.”
그 신음 소리를 찾아 서둘러 다가간 의료진들의 보살핌도 쉼 없이 계속됐다.
“진통제 조금 더 추가하자. 용량은…….”
“바로 투여하겠습니다.”
“환자분,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환자를 대하는 목소리 모두가 차분함과 부드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정작 위로하는 의사의 모습은 땀에 절어 있고, 입에선 단내가 났다.
피로감이 극에 달한 표정도 역력했다.
희망병원의 모든 의료진이 같은 상황이었다.
어제저녁 급하게 시작된 봉연수의 수술부터 응급환자로 인해 지금까지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간 탓이다.
한숨도 못 잤다.
식사 또한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환자 앞에선 입가의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보람.
그 한 단어가 준 작은 선물이다.
커튼 속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료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두 눈이 충혈 되어 있었다. 12시간이 넘는 대수술 후 또다시 12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봉연수와 아기는?
삐빅, 삐빅.
그나마 ECG의 소리로 생명이 유지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태수와 팀원들의 표정이 12시간 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오른쪽 봉연수를 볼 땐.
“음.”
“그렇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를 보였다.
반대로 왼쪽 아기를 볼 땐.
“어후.”
“……제발 좀.”
안타까움과 절절한 표정이 가득했다.
그렇게 양쪽을 향한 시선에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태수와 팀원들이라면 끝없이 의견을 나눌 성격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
“…….”
다들 침묵하고 있었다.
이미 할 말은 다 끝냈다.
결국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대화였기에 이젠 침묵이 좀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 침묵과 상관없이 아기를 향한 눈빛은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침묵이 좀 더 이어지던 중이었다.
-희……. 흐이…….
뭔가 바람 빠지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뚱한 표정으로 아기를 지켜보고 있던 박성민이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어떤 의료에 ABC도 모르는 놈이 ICU 창문을 연 거야? 도대체가 안전불감증은 언제나 사라질는지.”
“뭔 ICU에서 창문 타령입니까?”
김혁권이 말도 안 된단 목소리로 타박하자 박성민이 시큰둥하게 동조했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ICU에 무슨 창문이 있어. 내가 그런 소리는 듣도 보도 못……. 어?”
“음?”
다들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ICU엔 창문이 없다. 그건 외부 공기로부터 감염을 방지한단 이유였고, 모든 병원이 똑같았다.
그런데 바람 소리?
그때 뒤에서 가늘게 떨리는 공우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기…… 연수 씨가 깨어나고 있습니다.”
“진짜요?”
스륵!
모두 일제히 일어나 병상으로 향했다.
공우혁의 말대로 봉연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의료진들의 표정이 복잡했다.
기쁨, 그리고 초조감.
그 두 가지 감정이 모두의 가슴을 거칠게 오갔다.
태수 또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곧 집도의답게 신중한 눈빛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연수 씨가 깨어나는 건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
“하지만 정신이 들 때까진 조심하십시오.”
태수가 전에 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오더했다.
들려온 대답은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입단속을 시킨 후에야 태수는 조심스럽게 봉연수를 불렀다.
“봉연수 씨, 제 말 들리십니까? 연수 씨?”
“……흐으, 흐으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조금 특이했다. 그건 환자들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의식이 깨어나는 데에 더 신경을 집중했다.
봉연수가 몇 번 더 입술을 달싹이고, 또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썩거렸다.
그 시간은 지금껏 기다린 시간보다 더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의식을 빨리 차리길 소망하는 마음이 강했다.
너무 오래 잤다.
그녀가 원한 잠이 아니었어도 이젠 일어나야 한다.
세상이 만든 정설을 보란 듯이 뒤집고 눈을 떠야 한다.
빨리 깨어날수록 회복도 탄력을 받는다.
그저 바라는 소망이 아니다.
다들 가느다란 목소리로 자극적이지 않게 힘을 더해 줬다.
“조금만 더요.”
“힘내요. 눈 떠야죠.”
“딱 일어나서, 빡!”
갑자기 들려온 엉뚱한 소리에 모두 박성민을 쳐다봤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혁권이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빡은 뭡니까, 빡은.”
“그냥 빡! 이렇게 빡! 저렇게 빡! 아무튼 빡!”
“참 응원도 이렇게 어설퍼서는……. 연수 씨, 저 인간 신경 쓰지 말고 빡……. 젠장. 나까지 물들었네.”
싱거운 김혁권의 투정이 이어졌다.
다들 아무래도 좋았기에 그냥 나오는 대로 응원을 이어 갔다.
“그래요. 까짓것 빡!”
“아무렴 어때요. 연수 씨, 그냥 빡!”
말도 안 되는 응원이 이젠 모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의미는 두루뭉술해도 응원하는 마음은 한결같고 또 강렬했다.
그런 소망이 통했는지 봉연수는 조금씩 의식을 회복해 갔다.
곧 눈을 뜬 봉연수는 꼼짝도 못한 채 눈만 크게 굴렸다.
그 모습을 본 태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벼…… 병…… 원.”
“맞습니다. 자, 그럼 수술실에 들어간 순간도 기억하십니까?”
“흐으, 흐으…… 밝고 추운…… 수술실.”
봉연수의 표현이 조금 찔끔했지만 맞긴 맞는 말이다.
“네. 수술실이 좀 춥긴 하죠. 아무튼 수술을 받고 만 하루가 지났습니다.”
“하루…… 요?”
“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힘드셨을 텐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더해 편안함을 선사했다.
어느새 봉연수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모두가 어렵단 수술을 겪어 내고 깨어난 이 순간에 느낄 수 있는 환희였다.
그런데 곧 봉연수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희…… 희…….”
반복되는 자그마한 목소리.
모두 멈칫했다.
아기를 찾는 게 분명했다.
얼굴 가득한 미소가 급격히 지워졌다.
지금 아기는?
“…….”
스윽.
모두의 시선이 태수에게로 향했다.
지금껏 밝던 태수의 미소도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지금껏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그려 왔지만, 막상 닥치자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그사이 봉연수의 목소리는 더 선명해졌다.
“희망이…… 내 아기…….”
삑삑삑.
불안함이 격해져 ECG 소리도 따갑게 변했다.
그때 서영우가 재빨리 태수 뒤로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이상해. 움직이지 못해. 고개도 못 돌리고 있다고.”
“마취 덜 풀렸습니까?”
“말이 돼? 마취제 투여 중지한 지가 12시간이 넘었다고. 아직까지 그 영향이 남아 있으면 그게 마취약이야? 마비약이지.”
서영우의 목소리에 자그마한 짜증이 담겨 있었다.
태수는 자신이 던진 어이없는 질문에 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이유가 뭘까요?”
“아직 감이 오는 게 없어. 좀 더 안정을 취한 후에 감각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만, 지금 그때까지 기다릴 분위기가 아닌 게 문제잖아.”
“그렇죠.”
대답한 태수가 눈을 굴리자 서영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울까?”
“그래서 해결될 일입니까?”
“그럼 어쩌자고. 간신히, 정말 간신히 바이탈이 안정돼서 깨어난 거잖아. 그런데…….”
서영우가 차마 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