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93
00296 296화
두 사람이 각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던 중이다.
반대편에서 회의실 입구 쪽으로 향하는 의사가 한 명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태수와 정민수가 화들짝 놀랐다.
“선배님.”
동성종합병원에서 두 사람이 ‘선배’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의사는 단 한 명뿐이 없었다.
바로 박성민이다.
박성민은 그 소리에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니들 여긴 어쩐 일이냐?”
“어쩐 일은요. 과장님들이 회의하실 때 씹을 게 필요하신지 또 부른 거죠.”
“나도 들어오라고 했는데.”
“선배님도요?”
태수와 정민수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박성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외래 중에 갑자기 연락이 왔어, 다른 선생한테 환자 돌리고 올라오라고.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혹시 저희 몰래 산부인과장님 멱살 잡았습니까?”
태수가 농담조로 묻자 박성민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내가 미쳤냐? 물론 마음 같아서는 수백 번도 넘게 잡고 패대기쳤지만 아직 실행에 옮긴 적은 없어.”
“그런데 선배님은 왜 호출했을까요?”
“혹시 내가 산부인과장 테러하려는 걸 눈치 챘나? 집에 BB탄 총도 몇 개 사 놨는데.”
“네?”
태수와 정민수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박성민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니들 잘리면 바로 산부인과장 얼굴에다가 BB탄 갈기려고 했거든. 더럽고 치사해서.”
“…….”
정민수는 순간 침묵했다.
박성민이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있는 줄은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태수도 감동했지만 티 내지 않게 외려 넉살을 부렸다.
“사랑하는 후배들이 잘렸는데 겨우 BB탄으로 되겠습니까?”
“나도 좀 부족해서 인터넷으로 다른 거 있나 뒤져보고 있었는데. 혹시 좋은 아이디어 있어?”
“글쎄요. 일단 회의실에 들어간 다음에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그건 또 그렇지. 그보다 난 왜 부른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네.”
박성민의 말대로 태수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확실한 건 안에 들어가 봐야 알 거 같았다.
“일단 들어가시죠.”
“그래. 가자. 아니, 내가 앞장서야지. 내 뒤를 따르라. 이 햇병아리 같은 후배들아.”
“아직도 햇병아리입니까?”
“니들 의술이 뛰어나도 영원한 내 후배야. 어디서 벌써부터 독립하려고 꼼수를 부려. 내 밑에서 독립하려면 10년은 더 있어야 돼. 그러니까 잔소리 말고 따라와.”
박성민은 긴장감을 억지로 털어내며 호기롭게 앞섰다.
그라고 불안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도 태수와 정민수 앞에서는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게 선배로서의 자존심이라는 게 대번에 느껴졌다.
이런 일에는 언제나 앞서서 등을 보여준 박성민의 모습에 태수와 정민수는 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세 사람은 곧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상석에 앉은 병원장의 반대편에 나란히 섰다.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이 그 사이에 존재했고 의과장들이 둘러앉은 모습이다.
한 번 들어왔던 장소라 그런지 어색함은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인지 궁금할 뿐이다.
그런 궁금증을 일단 속으로 숨긴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대표로 박성민이 병원장을 향해 말했다.
“호출 받고 왔습니다.”
“갑자기 호출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환자에게 뒷돈 받은 적 있나?”
병원장의 질문에 박성민을 비롯한 태수와 정민수는 어이가 없었다.
박성민은 당연히 발끈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호출해서 뒷돈을 받았냐니요.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만들어 냈습니까?”
그 말이 끝난 순간 산부인과장이 나섰다.
“정말 그런 적이 없나?”
“결단코 없습니다.”
“그럼 하나 묻지. 최태수 선생.”
산부인과장의 호명에 태수가 바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배건형 환자에게서 세 개의 봉투를 받았다지. 사실인가?”
그 순간 태수와 정민수, 그리고 박성민은 무슨 일인지 직감했다.
뒷돈에 대한 이야기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러나.
세 사람은 당당했다.
특히나 박성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 새끼들.’
태수와 정민수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이번 일에 걸려 들어갔을 터였다.
그때 내어주기 싫단 봉투를 뺏듯이 가져간 그 일이 지금은 너무도 다행이었다.
그런 속사정은 지금 말할 게 아니다.
궁금한 건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어떻게 알려졌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모두 의아해하는 사이 태수는 다닥다닥 붙어 선 정민수와 박성민의 허벅지를 가볍게 쳤다.
나서지 말라는 의미다.
그걸 알아들었는지 두 사람은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태수는 속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나와 주신다면.’
태수라고 곱게 당하고 있을 위인은 아니다.
대충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린 뒤에야 태수가 입을 열었다.
“받았습니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회의장이 들썩거렸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도대체 외과와 흉부외과에서는 뭘 한 겁니까?”
“환자에게 뒷돈을 받는 의사가 어떻게 의사야!”
여기저기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태수와 정민수, 박성민을 옹호하던 과장들 또한 할 말이 없었다.
박완용 과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억지로 덤덤한 척 했다.
흉부외과장은 박성민을 향한 눈빛에 싸늘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하석준 과장은 태수와 정민수를 향한 시선이 끝없이 흔들렸다.
‘니들이 어떻게…….’
너무도 믿었기에 그만큼 실망감도 커다랗게 작용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눈빛들 속에서도 태수와 정민수, 박성민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에 산부인과장이 크게 비난했다.
“저거 보십시오. 비윤리적인 행위를 일삼고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는 의사들입니다. 아니, 같은 의사라는 게 너무도 창피합니다.”
“…….”
“이래놓고 환자 생명을 위해서 조희성 선생 멱살을 잡았다고요? 아닙니다.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 겁니다!”
산부인과장의 목소리가 넓은 회의장을 가득 뒤덮었다.
그에 있어서 하석준 과장이나 박완용 과장, 흉부외과장은 도무지 옹호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태수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돈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저희 주머니에 들어온 적은 없습니다.”
“이거 이렇게 인성이 드러나나? 이건 마치 술 마시고 운전은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라고 한 거와 다를 게 뭐가 있어?”
“산부인과장님이 생각하시는 거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만.”
“어디서 뻔뻔하게!”
산부인과장이 호되게 소리치던 중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병원장이 처음으로 나섰다.
“자자, 산부인과장님 잠시 진정하세요.”
“이게 지금 진정할 상황입니까?”
“진정하시라고 했습니다.”
병원장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산부인과장이 멈칫했다.
아무리 기세가 올랐다고 하나 병원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늘 끝까지 치솟은 산부인과장의 분노를 잠시 누른 병원장은 차분한 얼굴로 태수에게 물었다.
“최 선생. 돈을 받았지만 주머니에 넣은 적이 없다. 무슨 뜻이지?”
“산부인과장님께서 어디까지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하게 상황을 이야기해 줘야 잘잘못을 가리는데 공정할 거 같은데 말이야.”
병원장은 끝까지 냉정함을 지켰다.
그 모습이 오히려 태수에게는 의외였다.
가식 없고 직설적인 병원장의 성격이라면 더욱 열을 내도 여기 자리한 누구보다 더욱 크게 화를 냈을 일이다.
그럼에도 들어보겠다는 입장을 보이는 건 고마웠다.
물론 반대의 상황이 되었더라도 태수는 이제부터 할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기회를 얻었으니 조금 더 편안하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당시 배건형 환자는 흉부외과 중환자실에서 특실로 옮겨진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환자가 수술에 참여해 준 의료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 주는 순간이었습니다. 거기서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태수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산부인과장이 버럭 소리쳤다.
“지금 이건 말도 안 되는 변명입니다. 상황을 핑계 삼아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키려는 거란 말입니다.”
“그럼 산부인과장님께 묻겠습니다. 심장 수술을 한 환자와 말다툼을 하다가 혈압이 솟구쳐 수술 부위가 터지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산부인과장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보일 때였다.
뭔가 반전의 기류를 느낀 하석준 과장이 침묵을 깨고 나섰다.
“그런 사례가 이미 여러 차례 학회에 보고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술 환자가 급격한 혈압의 변동을 보일 때 수술 부위가 벌어져 재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 말입니다. 산부인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그, 그건…….”
“아직 최 선생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모두 들어본 후에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도 될 거 같습니다.”
하석준 과장의 말을 병원장이 수용했다.
“저도 그게 좋을 거 같네요. 최 선생 계속해.”
병원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태수는 하석준 과장에게 가볍게 감사의 눈빛을 보낸 후에야 계속 이야기를 진행했다.
“저희들은 그 봉투 속에 있는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전용 간병인인 김혁권 씨에게 전달했습니다.”
“김혁권? 이유는?”
“어레스트 이후 의료진이 도착할 때까지 혼자 CPR을 이어갔습니다. 그 덕분에 환자가 수술실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희보다 더욱 고생해 준 간병인에게 공로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박성민 선생과 정민수 선생도 그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결국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건가?”
“제 말에 조금이라도 의구심이 드신다면 김혁권 씨를 직접 불러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태수의 말에 병원장은 산부인과장을 바라봤다.
아직 수긍하지 못한 표정이다.
병원장도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김혁권을 부르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김혁권 씨 잠깐 올라오라고 해요.”
병원장의 말에 흉부외과장이 휴대폰을 들었다.
심장 수술까지 김덕현 환자가 아직 흉부외과 일반병실에 머물고 있던 탓이다.
그 사이 회의는 잠깐 멈췄다.
태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석준 과장과 박완용 과장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이미 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석준 과장과 박완용 과장의 눈빛에 작은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한순간이지만 의심한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그걸 느낀 태수는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구라도 의심할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태수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 이렇게 일이 커져버린 걸지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잘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믿어주는 과장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순간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혁권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들어서 그런지 한달음에 달려온 모양이었다.
김혁권은 무거운 회의장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짝다리를 짚은 채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내과장이 바로 지적했다.
“혁권 씨. 자리가 자리니만큼 자세를 좀 바르게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제가 왜요?”
“네?”
“제가 의사입니까? 아니면 간호사입니까?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안 보시던 분이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참 기분 묘하고 좋네요.”
김혁권이 깊숙이 폐부를 찌르자 내과장 얼굴이 불쾌함에 꿈틀거렸다.
그걸 뻔히 바라보면서도 김혁권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병원장은 그 상황을 지켜보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김혁권 씨 이야기가 옳으니까 어떻게 서 있어도 괜찮습니다.”
“이거 매우 감사하네요.”
“그보다 저희가 잠시 이렇게 모신 이유도 알고 계실 거라고 믿습니다. 최 선생의 말이 사실입니까?”
병원장이 직설적으로 물으면서도 예의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