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slayer's Class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56
56화
‘드레이커를 무너뜨리겠다라.’
지크는 아벨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눈동자를 마주 봤다.
선명한 선홍빛 눈동자.
지크는 그 속에 담겨 있는 파괴와 광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칼리 누님 쪽으로 간 것을 알고 회유하기 위해 온 것인가.’
지금은 지크의 힘이 미비했지만, 발할라를 졸업한 뒤 정식 기사로서 가문에 들어가게 되면 순혈 각성자로서 빠르게 권력의 중추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했다.
더군다나 지크는 흑색 기사였던 듀크의 정식 제자였으니, 그의 지지를 받으면 듀크까지도 자신이 진영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지크의 잠재 가치는 생각보다 컸다.
지크가 아무 말이 없자 아벨이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냐.”
지크는 아벨의 의도를 좀 더 파악하기 위해 말을 맞춰 보기로 했다.
“가문을 무너뜨린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아벨이 지크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다른 형제들은 모르겠지만 지크, 너라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지크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에게는 나와 같은 냄새가 난다. 피와 전투의 냄새가 몸에 짙게 배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용살자의 피를 가장 진하게 받았기 때문이겠지.”
‘그놈의 용살자 피 타령은.’
지크는 아벨을 좀 더 흔들어 보기로 했다.
“가문을 무너뜨린다…….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시는 것도 그 때문입니까.”
훅 치고 들어오는 지크의 말에 아벨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니라고 할 수 없겠지. 지크, 제국에 가 본 적 있느냐.”
지크가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서는 임무 때문에 여러 도시에 잠입을 한 적이 있었지만, 아직 이번 생에서는 가 본 적이 없었다.
지크의 반응에 아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은 이들이 여기 아틀라스를 중앙대륙 최고의 도시라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틀라스는 결국 하나의 자치권을 가진 도시일 뿐이다. 드레이커의 후원이 없다면 언제든 무너질 모래성 같은 곳이지. 하지만 제국은 다르다.”
“무엇이 말입니까.”
“제국의 모든 곳은 수도인 롬을 통하게 되어 있다. 제국은 끊임없이 길을 만들고 있어. 중앙대륙을 관통해 위로는 북부대륙, 아래로는 남부대륙으로 더 나아가서는 동방대륙으로 연결되는 길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길을 끊임없이 만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지크, 그게 바로 제국의 보이지 않는 저력이다. 대륙을 하나로 일통하는 것.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가진 자원이 다르기에 이 대륙은 항상 고통스러웠다. 제국은 이 모든 것을 길로 연결해 하나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다.”
지크는 장황한 제국론을 펼치는 아벨을 보며 말했다.
“제국의 황제가 할 법한 이야기로 군요.”
지크의 말에 순간 아벨의 눈빛이 변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크는 본능적으로 이를 포착해 뭔가가 있음을 깨달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성을 가졌던 카인. 그 녀석의 미들네임은 지멘스였지. 아벨은 지멘스을 외가로 두고 그쪽의 후원을 받고 있다. 분명 아벨과 지멘스, 제국은 서로 관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만약 그렇다면 아벨이 드레이커를 제국에 통째로 갖다 바친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아벨이 지크를 보며 말했다.
“지크, 나는 훌륭한 인재들에게 그에 걸맞은 직위와 보상을 내주고 싶다. 너라면 내 가까이에서 가장 빛나는 검과 보석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신의 진영에 오면 강력한 2인자 자리를 약속하겠다는 말이었다.
지크는 야망에 가득 찬 아벨의 눈빛을 봤다.
대륙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은 자에 어울리는 광기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지크는 전생에서 아벨이 만들어 냈던 혼란과 전쟁의 시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대륙 최강자가 되기를 원했지 학살자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지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벨이 지크에게 말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지크가 고개를 돌려 아벨을 보며 대답했다.
“별로 후회할 것 같지는 않군요.”
지크는 그 즉시 아벨을 두고 먼저 룸에서 나왔다.
테이블에 홀로 남은 아벨은 고개를 돌려 밖의 야경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얼마 후 윌리엄이 들어왔다.
그는 혼자 있는 아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혼자 있나. 지크는?”
그러자 아벨이 윌리엄을 보며 말했다.
“나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더군.”
그때 아벨이 들고 있던 와인잔이 갑자기 흐물흐물해지더니 완전히 녹아서 테이블로 흘러내렸다.
뜨겁게 녹아내린 유리가 테이블을 태우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벨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윌리엄,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싹을 미리 밟아 놓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은 아벨이 지크에게 건네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벨은 고개를 돌려 아틀라스의 고고한 야경을 바라봤다.
유달리 달빛이 처연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 * *
아틀라스로 돌아온 지크는 곧장 발할라의 새로운 학기를 준비했다.
발할라는 일 년에 한 학기로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벌써 2학년이 됐다.
보통 5년 과정으로 졸업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지크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벌써 조기 졸업을 준비했다.
이미 청색 기사로 승급한 데다가 드레이커의 정식 기사 위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수 이수 학점만 몰아서 듣는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유례없는 조기 졸업을 신청하니 곧장 총장 면담이 들어왔다.
지크는 오랜만에 총장 플로베르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총장실 앞에는 지크만이 아니라 다른 두 명이 더 있었다.
“요! 브로!”
한 명은 잘 아는 디에고였다.
그런데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누구지?’
키가 크고 마른데다가 눈에는 기미가 잔뜩 끼어 있는 기운 없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지크와 디에고, 기운 없어 보이는 청년은 플로베르 앞에 나란히 앉았다.
플로베르가 그들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 지크 군, 디에고 군, 그리고 아스터 군도 말일세.”
플로베르의 말에 지크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아스터? 설마 환영의 기사인 아스터 앨라도프?’
지크가 이렇게 놀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생에서 일어난 대륙 3차 전쟁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오성 기사 중 환영의 기사인 아스터 앨라도프는 발할라 출신인 것을 제외하면 일체의 신상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었다.
발할라 졸업 후의 행적도 밝혀지지 않았고 제국군 소속이었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항상 풀플레이트 아머에 투구까지 쓰고 있어서 이런 힘 없어 보이는 인상인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강한 기사로만 생각했던 아스터가 지금 총장 앞에서 흐느적대며 머리를 감싸 쥐고 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으으, 죄송합니다, 총장님. 일주일째 제대로 잠을 못 자서.”
“저런. 그 고질병은 여전한가 보군.”
그랬다.
아스터 앨라도프는 심각한 불면증 환자였다.
워낙 신경이 예민한 데다가 특유의 완벽주의 때문에 더 신경증이 도져서 학업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불면증이 번진 것이었다.
디에고는 그런 아스터를 보며 요란스러운 몸짓을 해 댔다.
“요, 브로! 잠이 안 올 때는 뮤직과 함께 하면 바로 잠이 솔솔!”
그러자 아스터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으으, 저기. 미안한데 머리가 울려서 그러니까 좀 조용히 말해 줄래.”
요란스러운 디에고와 아스터는 영 성향이 안 맞을 것 같았다.
지크는 불면증으로 괴로워하는 아스터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불면증이라. 나도 전생에는 그걸로 고생한 적이 있었지. 빌어먹을 돈 후앙 놈 때문에 끊임없이 악몽을 꿔서.’
불면증의 괴로움을 알기에 그는 아스터의 상황이 어느 정도 공감됐다.
그때 지크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쳐 갔다.
‘어쩌면 아스터를 끌어들일 방법이 될 수도 있겠군.’
그때 플로베르가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을 함께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셋 모두가 특별 조기 졸업을 같은 타이밍에 신청했기 때문일세.”
평소에는 그냥 날라리 같은 디에고와 힘없어 보이는 아스터였지만 실상은 발할라에서도 손꼽히는 인재였다.
디에고는 좀 더 음악 활동에 집중하고 싶어서, 아스터는 어차피 불면증 때문에 수업에 제대로 참여 못 할 거 차라리 빨리 졸업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특별 조기 졸업을 신청한 것이었다.
플로베르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디에고 군과 아스터 군은 3학년까지 해서 필수 과목 이수를 다 했고, 지크 군은 필기시험으로 대체 학점을 채운다고 했더군.”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총장님. 최대한 빨리 졸업해서 가문의 임무를 맡고 싶습니다.”
예의 바른 학생인 척하며 플로베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하는 지크였다.
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 편의 세 학생에게 말했다.
“좋아. 다른 교수들과도 얘기를 했는데 특별 조기 졸업 시험을 세 사람 모두 보는 것에는 이견이 없더군. 문제는 어떻게 평가를 하냐는 건데…….”
그가 책상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델포아에서 온 협력 공문서일세.”
지크는 총장이 어떤 것을 말하려는지 눈치챘다.
‘실전 임무에 투입해서 졸업 평가를 하겠다는 거군.’
실제로 발할라 졸업반은 다른 왕국의 기사단에 수련 기사 신분으로 참가해 임무를 수행하고는 했다.
더불어 그곳에서 높은 성과를 보인 학생은 졸업 후 그 기사단으로 곧바로 영입되어 가는 경우가 많았다.
발할라와 협력을 맺는 곳은 대부분 명성이 높은 중앙 왕국 기사단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델포아는 중앙대륙 5대 왕국 중 하나기는 했지만, 마법의 종주국이라는 전통성 때문에 왕국 내에서 기사단보다는 마법사단이 더 높은 권력을 쥔다는 것이 특이점이었다.
덕분에 기사단 생활이 좀 여유롭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명성을 따지자면 발할라 학생들이 선호하는 곳은 아니었다.
플로베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흑야차(黑夜叉)라고 들어봤나.”
그 말에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법자 출신 대륙 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크 군은 대륙 소식에도 밝군. 그 흑야차가 현재 중앙대륙에서 용병단을 흡수해 무리를 짓고 델포아 쪽에 자리를 틀었다고 하네.”
국경 지대에서 굴러온 무법자들은 중앙대륙의 기사들과 다른 방법으로 오러를 익힌 이들이었다.
제대로 된 오러 연공법은 아니었지만, 살인에 특화된 기술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효과적이었다.
괜히 카르텔에서 돈을 많이 주고 무법자들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크는 플로베르를 보며 말했다.
“델포아 기사단과 협력해 흑야차 무리를 토벌하는 겁니까.”
플로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은 델포아 기사단과 마법사단에서 맡을 테지만 자색 등급 이상의 실력 있는 기사를 요청해서 말일세.”
델포아 정도 규모의 기사단에서 자색 등급의 기사를 요청했다고 하니, 상황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대부분 전투 마법사들이 처리하고 기사들은 뒤에서 정리나 하겠군.’
졸업생들을 보내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아예 파견을 안 할 수는 없으니 특별 졸업 시험의 임무로 넣는 게 낫겠다 싶은 모양이었다.
플로베르가 세 사람에게 말했다.
“임무에 참여한 뒤 무사 귀환만 해도 1차 시험은 통과로 인정하겠네.”
“전체 시험은 몇 차까지 있습니까.”
“총 3차까지 있네. 1차가 끝나면 2차와 3차는 졸업 준비생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치르게 될 걸세.”
실전 경험으로 부족한 수업 차수를 채우라는 뜻인 듯싶었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여하겠습니다, 총장님.”
디에고와 아스터 역시 참여 의사를 밝혔다.
“좋아. 출발은 일주일 뒤니까 준비를 잘하도록. 특히 지크 군은 정식 임무는 처음일 테니 단단히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실상 지크야말로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고인 물 중의 고인 물이었지만, 플로베르가 알 길은 없었다.
총장실에서 나오자 같이 동아리 방에 가서 연주를 하자는 디에고를 먼저 보낸 뒤 지크는 아스터에게 다가갔다.
“아스터 앨라도프.”
지크의 부름에 아스터가 기미가 잔뜩 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이고 머리야. 응? 나 말이야?”
멍한 눈빛에 쾡한 모습이, 도저히 오성 기사 중 하나인 환영의 기사를 떠올릴 수 없는 얼굴이었다.
지크가 아스터에게 다가가 말했다.
“혹시 불면증 치료제 필요해?”
그가 씨익 웃으면서 속삭였다.
“나한테 좋은 약이 있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