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slayer's Class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579
579화
과거에는 대마도사 호쉬가르의 연구실이었던 망령의 저택.
두 명의 리치가 저택을 차지한 뒤로는 암울한 기운만 감돌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떠들썩한 소리로 가득한 상태였다.
“이 리치 새끼야! 이거 놔라!”
여전히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계의 삼 공녀 아나스타샤가 리치몬드에게 붙잡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리치몬드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여기 나가 봐야 갈 곳도 없으면서 왜 자꾸 도망가는 겁니까.”
그러자 아나스타샤가 갸르릉거리면서 리치몬드를 위협했다.
“빌어먹을 리치! 만약 마계였다면 너 따위는 내 앞에서 제대로 눈도 못 마주쳤을……!”
그때 공중에서 나타난 마법의 재갈이 아나스타샤의 입을 막았다.
옆에 수십 권의 마법서를 쌓아 두고 읽고 있던 엘리자베타가 마법을 부린 것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안경 너머로 발버둥 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말했다.
“아샤, 우리는 여기에 손님으로 있는 거란다. 조금은 예의를 갖추는 게 좋지 않겠니?”
마계에서 소환된 삼 공녀는 현재 바라나온에 위치한 호쉬가르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지크가 판데모니엄의 주인이자 공녀들의 양부인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하게 되면서 그녀들은 일종의 소통 창구로서 현상계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에게 큰 수모를 당한 아나스타샤는 틈만 나면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애를 써서 이곳을 빠져나갔다가도 리치몬드에게 붙잡혀 오기를 반복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를 하지 않았다.
그때 저택의 문이 열리고 예카테리나가 땀에 젖은 채로 검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자베타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예카테리나 앞에 시원한 물병이 나타났다.
그녀는 익숙하게 물병을 집어서 받아 마시고서는 숨을 크게 쉬었다.
“후우.”
그녀는 벽에 검을 내려놓고서 공중에서 발버둥 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또 잡혔구나.”
예카테리나는 버둥대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예카테리나의 반응에 아나스타샤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엘리자베타를 보며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딱히 들어야 할 말은 아닐 듯했지만, 엘리자베타는 재갈을 풀어 주었고 그 즉시 아나스타샤가 예카테리나를 향해 소리쳤다.
“젠장! 이번에는 도망칠 수 있었는데! 근육 바보년! 네가 리치한테 일렀지!”
세 공녀는 마계에 있을 때 서로 경쟁을 하는 사이였기에 셋이서 이렇게 함께 오랫동안 붙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나는 모르겠는데?”
그녀의 태도에 부들부들 떠는 아나스타샤였다.
그리고 요즘 지금처럼 아나스타샤를 놀리는 맛으로 사는 예카테리나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츠츠츠츠―
저택 한쪽에서 포탈이 열렸다.
갑작스레 만들어진 포탈에 엘리자베타와 예카테리나가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포탈에서 지크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번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리치몬드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아나스타샤는 포탈에서 나온 지크를 보고 그제야 입을 다물며 귀와 꼬리를 움츠렸다.
포탈에서 빠져나온 지크가 삼 공녀와 리치몬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상당히 사이들이 좋아 보이는군.”
그 말에 리치몬드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주인님, 말도 마십시오. 상전도 이런 상전이 없습니다. 심지어 베인은 리치임에도 저 마녀들 등쌀에 시달려 앓아 누웠…… 억!”
아나스타샤가 빈틈을 노려 리치몬드의 손등을 할퀴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아나스타샤는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뒤 날랜 몸짓으로 소파 뒤에 가서 숨었다.
리치몬드는 손등을 문지르며 혀를 찼다.
“이것 보십시오. 차라리 베인이랑 같이 전쟁터에 보내 주시면 안 됩니까? 마수들이랑 싸우는 게 낫겠습니다요.”
한탄이 서린 리치몬드의 말에 엘리자베타가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 누가 들으면 저희가 무례하게 군 줄 알겠어요. 그런 오해가 생길 만한 얘기는 조심하시죠.”
엘리자베타의 우아하지만 뼈 있는 말에 리치몬드가 움찔했다.
가녀려 보여도 삼 공녀는 마계의 최상급 마족들이었다.
리치인 리치몬드로서는 본능적으로 그녀들의 기세에 눌릴 수밖에 없었다.
지크는 리치몬드에게 가서 쉬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제야 리치몬드는 조금 홀가분한 표정이 되어서 지하 연구실로 갈 수 있었다.
리치몬드가 자리를 뜨자 지크는 삼 공녀들을 향해 말했다.
“할 말이 있으니 모두 앉지.”
엘리자베타는 책을 덮고 본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우아한 자세를 취했고, 예카테리나는 대충 아무 곳에나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소파 뒤에 숨은 채 지크를 노려봤다.
대충 자리를 잡은 세 공녀를 보며 지크는 소파에 앉은 뒤 인벤토리에서 차를 꺼냈다.
“한 잔씩들 하겠나.”
엘리자베타는 좋다고 손을 들었고, 예카테리나는 차라리 술을 달라고 했다.
지크는 찻잔에 차를 따라 엘리자베타에게 건넨 뒤, 예카테리나에게는 도수가 높은 술 한 병을 통째로 줬다.
숨어 있는 아나스타샤 쪽에는 쿠키 하나를 접시에 담아 바닥에 내려놨다.
엘리자베타는 우아한 자세로 차를 마셨고, 예카테리나는 독주를 한 번에 훅 들이켰다.
“호오, 괜찮은 술이로군. 인간들도 제법인걸.”
아나스타샤는 지크를 경계하면서도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소파 뒤에서 나와 앞발로 쿠키를 들고 베어 먹었다.
지크는 조용히 차를 마시다가 공녀들을 보며 말했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연락을 해 줬으면 좋겠군.”
그러자 엘리자베타가 빙긋 웃으며 지크에게 말했다.
“어떤 메시지를 아버지께 전달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지크가 찻잔을 내려놓고 엘리자베타의 말에 대답했다.
“마계의 군주 회의에 참석하겠노라고 말해라.”
그 순간 엘리자베타를 비롯해 예카테리나와 아나스타샤까지 모두 지크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마계의 군주 회의.
추락한 성좌들 중 지고한 위치에 존재하는 마계의 정점들만 참여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인간인 지크가 참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정신을 차린 아나스타샤가 수염에 쿠키 가루를 잔뜩 묻힌 채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 장난해! 인간 주제에 어딜 가겠다고? 하, 참나!”
아나스타샤는 긍지 높은 마족으로서 지크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맞은편에 있던 예카테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지크를 노려보았다.
셋 중에서 유일하게 엘리자베타만 지크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귀빈이시여. 당신이 섣불리 이런 말을 꺼낼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마계의 군주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갖춘 겁니까.”
엘리자베타의 말에 다른 두 공녀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미친 말이 되는 소리를! 인간이 그런 자격을 갖출 리가!”
“아무리 아버지께서 선택한 인간이라 해도 그건 말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두 공녀를 향해 순간 엘리자베타가 기운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며 마족 특유의 스산한 살기를 내뿜었다.
“너희 둘은 잠시만이라도 생각이라는 걸 좀 할 수 없겠니.”
말투는 우아했지만, 그 속에 담긴 기운은 그렇지 않았다.
섬뜩한 엘리자베타의 위협에 예카테리나와 아나스타샤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크는 그런 엘리자베타와 다른 공녀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만한 구원자의 영혼을 찾았다.”
그의 말에 세 공녀의 표정이 변했다.
마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바벨을 처음으로 만든 성좌.
오만한 구원자는 다른 마계 군주들과 비교했을 때도 격이 다른 존재였다.
예카테리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크에게 말했다.
“서, 설마…… 진짜 오만한 구원자의 영혼을 인간인 당신이…… 손에 넣었다는 겁니까.”
“못 믿겠다는 표정이로군.”
“아니, 그걸 그대로 믿는 것이 오히려 더…….”
“증거를 보여 주마.”
지크가 무심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딱 하고 부딪혔다.
그러자 예카테리나 앞에 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라타소가 봉인된 녹색검이었다.
순간 녹색검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이더니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츠츠츠츠―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녹색 기운과 함께 아라타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쿵!
본래는 인마의 형태를 하고 있던 아라타소였지만 이번에는 그 모습이 이전과 달랐다.
녹색 갑옷으로 무장한 마계 기사가 몸이 에메랄드빛으로 빛나고 있는 마계의 말과 함께 서 있었다.
과거 오만한 구원자의 기사단이었던 모닝스타의 1번 대대 대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크가 오만한 구원자의 권능을 계승하자 아라타소 역시 봉인되어 있던 본래의 힘을 되찾은 것이었다.
엘리자베타가 아라타소를 보며 말했다.
“오만한 구원자의 가장 충실한 검…….”
그 순간 아라타소의 눈에서 녹색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곧 녹색 안광의 색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새벽의 여명을 닮은 붉은빛이 섞인 황금의 기운이 아라타소의 눈을 비롯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청명한 녹색의 염원’의 권속 위치에서 벗어나 다시 오만한 구원자의 권속으로 되돌아왔다는 의미였다.
이름과 힘을 되찾은 아라타소가 지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위대한 오만한 구원자의 계승자께 인사 올립니다.]지크는 그런 아라타소를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내 권속이 되었구나, 아라타소.”
지크와 아라타소의 대화를 들은 세 공녀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오만한 구원자의 영혼을 계승했다니.’
엘리자베타는 지크가 인간의 한계를 훌쩍 넘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지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군주를 뵙습니다.”
그런 엘리자베타의 행동에 예카테리나와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랐다.
머리 회전이 빠른 엘리자베타가 인간인 지크를 군주로 칭했다는 것은 그의 위치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예카테리나는 엘리자베타보다 머리를 쓰는 것은 미숙했지만 상황 판단 능력은 뛰어났다.
그녀 역시 곧장 자리에서 내려와 지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나스타샤 혼자서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지크는 그런 세 공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제 어느 정도 내 말이 증명된 것 같군.”
그가 고개를 돌려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고양이였던 아나스타샤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저주가 풀렸다!”
나부가 걸어 놓은 이야기의 힘에 의해 고양이가 됐던 아나스타샤는 어떤 마법으로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크의 손짓 한 번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아나스타샤는 이전과는 격이 달라진 그의 힘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지크가 아나스타샤를 보며 말했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통하는 문을 열어라.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마계의 군주 회의에 참석하겠다.”
엘리자베타가 지크의 말에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군주시여.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버지께로 통하는 통로를 여는 것은 저희 세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연락을 넣도록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강력한 힘을 지닌 영혼체를 이곳에 불러내 강림시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카르마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에게 직접 도달할 길을 뚫는 것은 인과성을 훌쩍 뛰어넘어 카르마의 제재를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자 지크가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카르마와 인과성은 내가 감당할 것이다. 너희들은 통로만 열어라.”
세 공녀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화신들이었기에 그와 곧장 연결되는 차원의 좌표를 열 수가 있었다.
엘리자베타는 지크의 말에 고민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와서 내 손을 잡아라.”
그녀의 말에 예카테리나와 아나스타샤가 순응하며 가까이 다가가 서로의 손을 잡았다.
우우우우웅!
세 공녀가 손을 잡고 기운을 일으키자 주변이 진동을 일으키며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지크가 눈에 이채를 띄고 메피스토펠레스에게로 향하는 차원의 문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