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 * *
느닷없는 질문에 호란은 눈을 깜박였다.
“네? 뭐가요?”
“땅의 기운 말이다. 대지에 돌던 법력이 사라졌는데도 이곳에는 지하에 기맥이 촘촘하구나. 강이 있던 곳이라서일까…. 느껴지지 않느냐?”
“어, 저, 모르겠는데요.”
“그러냐. 너는 움직이지 않는 것은 잘 못 읽는다고 했지. …아니, 조금 다를까.”
시현은 살짝 장난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동안 보니, 너는 적이라 판단한 대상을 유독 잘 읽더구나.”
호란은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전 싸움꾼이니까요. 다른 거 뭐 읽어봐야 쓸데도 없고요.”
“그도 그렇겠구나. 이해가 간다.”
시현이 생각에 빠진 얼굴로 말했다.
“내 생각에 기감은 사람의 관점… 인지와 경험에 크게 좌우되는 감각이다. 스스로 쓸모를 깨닫지 못하면 읽히지 않는 것이 자연하다.”
“네, 네.”
말이 어려웠지만 호란은 일부러 눈에 힘을 주어 초롱초롱한 눈빛을 해보였다. 시현이 저에게 말을 걸어준 게 오랜만이라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시현은 호란이 이해를 다 못 한 걸 눈치챘다.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기운은 눈으로 볼 수가 없으니 존재를 실감하기 어렵지 않으냐. 사람의 뇌는 쓸모 없다고 판단한 정보를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느껴도 의미를 모르면 주의가 쏠리지 않고, 그러면 느끼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기감을 제대로 틔우려면 먼저, 자신이 기운을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뇌가 기운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물론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공부와 경험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호란 네가 실전에서 쓸모를 체감했듯이 말이다.”
“으…음.”
호란은 고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 경험 당연히 중요하죠…. 그러니까 기운 읽는 거는 직접 써먹어 봐야 는다는 거죠? 그건 알겠어요. 저도 싸우면 싸울수록 거석이나 사람의 기세가 더 잘 느껴지더라고요.”
“그렇다. 너는 긴박한 싸움의 경험으로 웬만한 땅인들의 십 년 공부를 대신한 것이다.”
시현의 어조엔 경탄하는 기색이 있었다. 호란은 은근히 으쓱해졌다.
기회가 온 김에 호란은 신경 쓰였던 것을 묻기로 했다.
“시문 님도 전보다 더 대단해지시지 않았어요? 거석도 더 잘 찾아내시고요. 그것도 경험을 쌓으셔서 그런 거예요?”
“음…. 전보다 기감이 예민해진 것은 맞다. 지맥도 더 수월하게 읽게 되었고. 다만 이것은 경험에 힘입은 바도 있으나 환경이 변화한 영향이 더 크다.”
“환경이요?”
“세상에 법력이 있던 시절에는 하늘과 땅이 온갖 흐름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중에서 특정한 기운을 읽어내려면 상당히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지맥이나 수맥 같은 땅 밑의 흐름은 특히 읽기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이제 법력이 사라졌지. 우리 땅인들에게 있어 이 세상은….”
시현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어떻게 표현하면, 상당히 고요해졌다. 예전에는 다른 흐름에 파묻혀 읽을 수 없던 작거나 정적인 기운도 훨씬 세밀하게 읽을 수 있다. 이제는 기감을 멀리까지, 심지어 땅속 깊이까지 펼쳐도 부담이 적다. 이 몇 달간 나도 꽤 적응하였지.”
“잘 모르겠지만, 좋아진 거죠?”
호란이 묻자 시현은 난처해했다.
“법력이 없어진 것은 좋아진 것이라고 할 수 없지.”
“그런 뜻이 아니라요….”
호란이 궁시렁대는 소리를 내자 시현이 웃었다.
“내가 발전했느냐고 묻는 거라면… 음. 부정할 수는 없구나. 의도한 성취는 아니다마는. 하유관에서 싸우면서는 한 겹을 벗는 듯한 경험을 했다. 이후로 하루하루 모든 것이 명료해지고 있다. 처음 문에 달하고 난 다음이 떠오를 정도다.
그래. 앞으로 싸움이 끝없을 테니 좋게 생각하자꾸나. 지금 내 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리하다.”
시현은 말하면서 다시 앞을 보았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호란도 시현을 따라 한번 신경을 곤두세워 보았다. 하지만 주위의 땅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걷고 있는 협곡은 바위와 암벽뿐으로, 기운이 돌기는커녕 이제까지 지나온 곳보다 훨씬 황량했다.
가파르게 솟은 암벽 위쪽에 나무와 풀이 좀 돋았을 뿐이었다.
호란이 다시 말을 꺼냈다.
“진짜로 이 땅에 기운이 많아요? 황폐하기만 한데.”
“평범한 지맥과 다르기는 하다. 기운이 맥의 형태를 취했는데도 주변으로 흐르지 않고 지반 아래 그저 고여 있구나. 지하에 마력석 광맥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순도도 낮고, 많은 양은 아닌 것 같지만.”
“와.”
뒤에서 탄성을 흘린 것은 해영이었다.
시현이 돌아보자 해영은 허둥지둥 입을 틀어막았다.
“죄, 죄송합니다! 말씀하시는데 함부로.”
“아니다. 생각한 것이 있으면 말해도 좋다.”
“그게, 저…. 진짜 대단하시네요.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옛날에 이 골짜기 바닥에 진짜 마력석 광산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 년도 더 전에 폐광되었다고는 하지만요.”
해영이 감탄조를 섞어가며 말했다. 그는 파발병으로 10년 넘게 몫을 해서 각지의 지리를 잘 알았다.
해영이 발밑의 땅을 탁탁 굴러보였다.
“지금 우리가 지나는 이 땅이요, 이 밑에도 갱도가 미로처럼 얽혀 있을 겁니다. 흔치 않은 중부 광맥이라 사람들이 악착같이 채굴했거든요. 겉으로는 전혀 모르겠지요?”
“지하에 공동이 있느냐? 그래서 기맥에 끊어진 곳이 많았구나. 혹시 지반이 내려앉을 염려는 없겠느냐?”
“괜찮습니다. 워낙 단단한 암반으로 된 지역이라서요. 마력석 산지는 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백 년이 지나도 갱도들이 다 멀쩡해서 큰일이었습니다. 한동안 빈 갱도에 방랑족 놈들이 진을 치고 지나가는 상단을 덮쳤거든요. 나중엔 간 부은 놈들이 관군까지 습격하는 바람에 저도 한두 번 피를 봤죠.
결국 십 년 전에 다천관에서 대군을 보내서 싹 토벌하고 갱구를 다 틀어막았습니다. 그 후론 다니기가 썩 괜찮아졌어요. 잔당이야 꾸역꾸역 남았지만 그런 놈들 우습지도 않고.”
방랑족이란 말에 호란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둘러보니 절벽면과 땅바닥에 반쯤 무너진 토굴 입구 같은 것이 두엇 보였다. 관에서 막은 갱구가 세월에 풍화되면서 다시 열린 모양이었다.
이런 토굴이 협곡 전체에 깔렸다면 어디서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호란은 입을 다물고 주의를 넓게 분산시킨 채 걷기 시작했다.
그가 경계 태세에 들어간 것을 알고 해영이 웃었다.
“긴장 안 해도 괜찮아. 방랑족이 떼로 있어도 우리한테 못 덤벼.”
“그건 그렇겠지만… 굴에 숨을 수 있는 게 꼭 방랑족만은 아니잖아.”
“돌 인간 말이야?”
해영이 말하고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 갱도가 넓긴 해. 그 민짜 거석 놈들이라면 드나들고도 남겠네.”
“조심해야 돼. 아침에 단도 그랬잖아. 오늘 지날 데는 기습 위험이 있는 지형이라고….”
호란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발을 멈추었다. 이미 대열 선두도 멈춰 서 있었다.
“적색대! 전투 대기!”
적을 확인한 서형이 소리쳤다. 호란은 우뚝 선 채 눈을 부릅떴다.
협곡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고요히 서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래로 된 형상. 석영과 똑같은 외형.
모새였다.
“위험이 있는 지형이란 말이 맞았구나. 하지만 기습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시현이 수레에서 내리며 말했다.
실제로 모새는 공격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일행으로부터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섰을 뿐이었다. 몸에 어린 기운이 없다시피 해서 시현마저 접근한 것을 몰랐다.
마력석 대련을 든 일꾼들이 시현의 뒤에 붙고, 그 주위를 대열이 둘러싸 호위 진형을 갖추는 동안에도 모새는 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빈 시선이 누구를 찾기라도 하듯 사람들을 차례차례 훑을 뿐이었다.
견디지 못하게 된 호란은 무리 앞으로 나섰다.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나를 찾고 있어?”
모새가 호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모래로 빚어진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과 생기가 피어났다.
모새가 아무 소리 없이 활짝 웃었다. 찬란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미소는 호란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호란이 다시 물었다.
“나한테 뭘 원해? 사부의… 석영의 원수가 갚고 싶어?”
“호란. 물러서라. 단독 행동은 허락하지 않겠다.”
시현이 말했다. 호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
“호란. 내 곁으로 오거라.”
“…네.”
호란은 뒤로 빠지다 말고 흠칫하며 숨을 삼켰다.
웃는 얼굴의 모새가 호란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마치 안아주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미쳤나, 저게….”
우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뒤에서 시현이 주문을 발했다.
“작렬하는 정이여.”
상공에 세 개의 불덩이가 나타났다.
모새는 이쪽의 적의에 곧바로 반응했다. 모래 형상에 금색 기운이 차오르고, 모새가 일행을 향해 내달렸다.
“격멸하라!”
시현이 외치자 모새의 몸체에 불덩이가 차례로 꽂혔다. 폭발을 뚫고 돌진해오던 금빛 형상은 일행과 한 장 거리를 남겨놓고 산산이 흩어졌다.
하지만 주위를 감도는 살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래다!”
시현이 마력석을 바꿔 쥐며 외쳤다. 어느새 호위 대열의 발밑에 금빛 모래가 깔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위치 유지!”
서형이 외친 순간 대열의 사이사이에서 다섯 개의 모래 형상이 불쑥 솟아올랐다. 모두 석영의 모습이었다.
다섯 분신이 사방에서 매섭게 덤벼들었다. 한 놈은 해영 곁의 시현을 노리고 있었다.
“어딜!”
해영이 시현의 앞을 막아서고, 동시에 호란이 몸을 날렸다.
호란의 발차기가 분신의 어깨에 꽂혔다. 분신은 형체를 훅 무너뜨렸다가 거리를 두고 다시 일어섰다.
호란은 곧바로 놈에게 따라붙으며 주먹을 퍼부었다.
한 번의 공격만으로 알 수 있었다.
모새가 만들어낸 분신은 석영의 겉모양을 본떴을 뿐 석영보다 훨씬 약했다. 속도도 느리고 공격도 맞받아칠 만했다.
다른 적색대 몫꾼들도 두엇씩 짝을 지어 어떻게든 상대하고 있었다.
호란은 이를 악물었다. 적의 주먹을 세게 걷어내면서 그가 소리쳤다.
“사부 모습 하지 마!”
모새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공방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얼굴엔 미소가 머물러 거의 천진해 보였다.
호란이 벼락같이 고함쳤다.
“사부 모습 하지 말라고! 패기 불편하니까!!”
호란의 주먹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직격을 당한 모새가 다시 형상을 흐트러뜨렸다.
동시에 시현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꿰뚫어 사르라!”
어지럽게 얽힌 대열의 사이사이로 굵은 빛줄기가 굽이치며 뻗었다. 타는 듯한 열을 품은 적황색 빛줄기는 모새의 분신만을 관통하며 파괴했다.
다섯 분신이 전부 무너지자 바닥을 흐르던 금빛 모래더미도 스르륵 물러났다.
처음 위치에 다시 솟아오른 모래 형상은 이번에는 석영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 형태만 갖춘 채 표면이 느리게 흐르는 것이 호란 말대로 겉모양을 바꾸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차은이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저거, 사람 말을 알아듣나?”
흐르는 모래가 멈추며 서서히 형상을 갖추어갔다.
소매 없는 윗도리와 반바지를 입은 날렵한 신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래로 된 땋은 머리채가 흔들렸다.
대열의 누군가가 욕설을 내뱉었다.
조금 형태가 어설프긴 했지만, 모새가 본뜬 모습은 틀림없이 호란이었다.
시현의 눈에도 엷게 분기가 돌았다. 그가 말했다.
“치기 불편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확실히 알아들은 것 같구나.”
시현은 모새가 움직이길 기다리지 않았다. 빠르게 다음 주문이 완성되었다.
“네 원초로 돌아가라. 발하라!”
모새의 몸체를 가운데 두고 거대한 폭발이 협곡을 뒤흔들었다. 진동과 폭음에 이어 열풍이 밀어닥쳤다.
폭연이 다한 자리엔 금빛 모래 몇 줌이 깔렸을 뿐 아무 형상도 남지 않았다.
치기 불편하다 말한 것치고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괜히 호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현이 냉연한 소리로 말했다.
“시험해볼 것이 더 남았느냐? 슬슬 전력으로 나오는 쪽이 좋다. 네 본디 형태를 내게서 얼마나 더 감출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