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 * *
일행은 마을에서 나흘을 더 머물렀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골짜기에서 잃었던 수레와 짐도 찾아냈다.
시현은 기운이 없었지만 어지러워하지 않고 잘 걸었다. 식사도 꼬박꼬박 했다.
고집을 부려서 대열 몫꾼들 장사 지내는 자리도 끝까지 지켰다.
그는 장사가 끝나자마자 다천관으로 출발하고 싶어 했지만 의법사가 팔을 걷고 말렸다.
어지럼이 재발하면 약 쓰는 기간이 길어지니 수레 타는 것은 하루라도 미루시라는 당부였다.
출발 하루 전, 새벽에 단이 열을 재러 들어가 보니 시현은 깨어 있었다.
이전 같으면 그가 눈을 뜨고도 이불 속에 멍하니 누워 있는 건 상상을 못 할 일이었다.
시현의 얼굴을 본 단은 말을 걸지 않고 침상 곁에 앉아 기다렸다.
한참 만에 시현이 입을 열었다.
“남운관에, 집에 돌아간 꿈을 꿨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가 보니 아무도 죽지 않았고, 모든 게 다 괜찮았다….”
단은 잠자코 있었다.
물론 얘가 집에서 호의호식하던 시절에도 세상이 다 괜찮았던 적 따위 한 번도 없긴 하다.
하지만 단은 시현이 꾼 꿈이 어떤 건지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참 후에 시현이 말했다.
“전부, 내 탓이다….”
“아니.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단이 바로 말을 끊었다. 시현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항변하듯 말했다.
“내가, 방심했다. 내가, 그때.”
“아니라니까.”
단이 강하게 말했다.
“넌 그때 그냥 무력했던 것뿐이야. 놈한테 당한 것뿐이야. 돌 인간이 그런 식으로 기운을 다룰 수 있단 걸 아무도 몰랐잖아.
일어나는 나쁜 일을 막을 힘이 없었던 건 잘못이 아니야. 그게 잘못이면, 나처럼 힘없는 놈들은 뭐가 되는데?”
시현이 윽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터지는 흐느낌을 막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울음이 그치는 데도 숨이 가라앉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시현은 떨리는 긴 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그가 등을 돌리고 누운 채 잠긴 소리로 물었다.
“왜, 네가 이런 말을 해주느냐. 왜 네가 내 곁을.”
“이 정도 말도 못 하냐.”
단이 이마를 쓸어올렸다. 그는 시선을 다른 데 두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잘해준다고 했잖아.”
시현이 돌아보았다. 눈물에 전 얼굴에 당황이 뚜렷했다.
자기가 이 말을 할 때마다 시현이 매번 너무 놀라워해서 단은 더 짜증이 났다.
뭐 하나라도 편하게 가는 게 없어.
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나는 분명 잘해줄 거라 그랬어. 그걸 사실은 미워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다 뒤틀어 놓은 건 내가 아니고 너야.”
시현은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자신 없게 말했다.
“하지만, 넌 마음속으론….”
단은 시현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쏘아붙였다.
“내 속마음 따위가 뭐가 중요해? 그딴 거 아무도 신경 안 써. 나도 신경 안 쓰고. 애초에 우린 본심을 내보이면 그날 해 떨어지기 전에 다 뒤지는 목숨이라고. 속으로 무슨 결심을 해도 사흘이면 신세 뒤집어지면서 같이 뒤집어지고. 이젠 나한테 본심 같은 게 남아 있기나 한지도 잘 모르겠다.”
단이 삐딱한 투로 덧붙였다.
“그리고 넌 속마음 얘길 할 거면, 네가 남이 볼 때 마음속 깊이 빈정 상하는 새끼란 것부터 인정해야 해. 나만 그런 것도 아닐 텐데?”
시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어깨가 흔들렸다.
단은 조금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래도… 이제까지 꽤 오래 같이 다녔고. 앞으로도 한동안 같이 다닐 거니까. 이젠 화 좀 덜 내고, 조금 잘해주겠다고 하는 거야. 그걸로 만족하라고. 남의 진심 본심 찾지 말고. 어?”
시현이 손에서 얼굴을 들었다.
뭐라 대답을 못 하는 그에게 단이 조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왜? 너한테도 필요하잖아. 조금 잘해줄 사람 같은 거. 호란이 있지만, 호란이 하나로 가끔 모자라잖아.”
시현이 목에 막힌 것을 꿀꺽 삼켰다. 그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단은 새로 가져온 주전자에서 물을 따랐다.
그가 잔을 시현에게 넘겨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니 물은 니가 떠 먹어. 물까지 챙겨주는 건 환자인 동안만이야.”
“알았다.”
시현은 그제서야 목소리를 내서 대답했다.
그리고 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19. 감정의 이름
마을을 떠나기 전, 짐을 쌀 때 단은 책은 물론 지류와 필기구를 전부 함에 넣고 바깥짐으로 빼냈다.
수레에 오르는 시현에게 단이 경고했다.
“수레에서 책이니 문서 보시는 거, 글씨 쓰시는 거 전부 금지입니다. 중요한 게 갑자기 생각났어도 안 됩니다. 심심하시면 창밖을 보시고, 아니면 주무세요.”
“알겠다.”
단이 돌아서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멀미 안 하는 게 그나마 장점이었는데. 그것까지 사라지다니.”
시현은 웃으면서 수레 문을 닫았다.
일행이 셋으로 되돌아오면서 단의 막말도 은근슬쩍 되돌아왔다.
윤과 철과 준은 어제 오후 먼저 마을을 떴다. 그들은 의법사가 사는 소읍을 거쳐 준의 고향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일행이 마을에 머무는 동안 세 사람은 틈만 나면 단을 붙들고 나리마님 다 나으신 다음에 출발하면 안 되는 거냐고 물었다.
셋은 생전 처음으로 생사지경을 빠져나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시현이 마법을 못 쓰는 상태로 길을 나서게 될 것이 못내 불안한 모양이었다.
결국 시현이 세 일꾼을 불러서 여행에 계속 따르고 싶은지 의향을 물었다.
셋 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주뼛거릴 뿐이었다.
떠나고 싶으면 다천관이나 마땅한 읍성에서 내려주겠다고, 책하지도 죄 주지도 않을 테니 마음 놓으라고 시현이 거듭 달랜 다음에야 솔직한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준은 곁에 남으려는 생각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준의 고향이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결국 세 사람은 인근 소읍을 다니는 상단에 의탁하여 준의 고향으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시현은 단과 상의하여 셋에게 상급을 넉넉히 건넸다.
성의껏 봉사를 다하였으며 책받을 것이 없다는 문서도 써주었다.
떠날 때 세 사람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호란은 그들이 진실하지 않다거나 나약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무거운 일을 감당하려면 여력만이 아니라 그만큼 무거운 이유도 필요했다.
자기는 어쩌다가 그 이유가 생긴 사람일 뿐이었다.
단은 그사이 짐을 최대한 정리해서 수레를 큰 것 한 대로 줄였다.
소읍에 가서 처분할 것을 처분하고 말도 마련했다.
채비가 다 끝나고도, 시현이 열이 안 오르는지 하루를 더 두어보고서 일행은 길을 떠났다.
의법사는 수레 흔들리지 않게 하라고 마지막까지 당부했다.
이미 산지를 거의 다 통과했기 때문에, 다천관까지는 길이 잘 나 있고 마을과 소읍도 여럿 있었다.
다행히 가는 길이 평화로웠다. 일반적인 거석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다천관에서 관성은 물론 속령까지 잘 관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현의 몸 상태도 아직 만전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좋아지고 있었다.
다천관에 도착해서 성문을 지날 때, 시현은 수레에서 슬몃 잠들어 있었다.
광장에 들어가자 번화한 거리의 소음이 밀려들었다. 도시는 사람과 산물로 가득했다.
북방과 중부의 사이에 관문처럼 위치한 다천관은 옛 왕국의 고풍스러움과 교역도시의 활기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곳이었다.
마력석 산지가 인접한 덕택인지 습격에 크게 피해받은 모습도 없었다.
단은 인파와 짐마차를 피해 광장 한쪽에 수레를 세웠다. 그제야 시현이 들창을 열었다.
“내가 졸았구나. 설마 이미 성 안이냐?”
“예. 다천관에 들어왔습니다.”
단의 대답에 시현은 당황했다.
“내가 신분패도 통행패도 안 보였는데, 어찌 그냥 들어왔느냐?”
“나리님 주무신다니까 보내주던데요. 원래 척 봐도 땅님인 분은 패 검사 안 합니다.”
“저들이 내 얼굴도 안 봤지 않느냐.”
“별 게 얼굴입니까? 수레 으리으리한 게 얼굴이지.”
“이 수레가?”
시현은 조금 놀랐다.
하유관에서 준비해준 수레는 내부는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겉모양은 얌전했다.
무슨 휘장이 있지도 장식이 화려하지도 않았다.
처음 봤을 때 시현은 시선을 안 끄는 모양이라 좋다고 생각했었다.
단은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관성 문지기쯤 되면 티 안 나게 돈 쓴 외장도 다 알아보거든요. 원래 돈 많기는 윤지관이 제일, 사치는 대운관이 제일이지만 부내 나기는 하유관 부내를 제일로 친답니다.”
단이 이어 물었다.
“이제 어찌할까요. 총치부나 어디에 전갈하시겠습니까?”
시현이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다천관에서는 그냥 이름을 밝히지 말고 조용히 지나쳐 가면 어떻겠느냐. 검문도 허술한 것을 보면 여기는 돌 인간이 나타났다거나 특별히 큰일이 나지는 않은 것 같고.”
“저희야 상관없지요. 그런데 여기저기 인맥을 통하셔야 좋은 의법사라도 소개받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신이명은 쉬는 게 제일가는 약이라고 어머니가 항상 말씀하셨다. 이름 대고 총치부니 총령부에 얼굴 보였다 번거로운 일에라도 얽히면 오히려 더칠 것이다.”
단은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셋 중에 관성도시 정치판의 복잡스러운 일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시지요. 그럼 의법사한테 진료 먼저 받으시고, 제가 조용하고 괜찮은 여각을 찾아보겠습니다.”
시현에게 약을 지어 준 소읍 의법사는 다천관에서 신이명을 잘 볼 만한 의법사 세 사람을 추천했다.
그 중 관의가 아니고 소개나 인맥 없이 민간 대상 진료를 보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찾아갔더니 진료를 보려면 사흘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진료받을 분이 땅인이라 했더니 반나절로 줄었다.
성명은 못 밝히지만 귀한 어르신이라고 적당히 눈치를 주었더니 한 시진으로 줄었다.
단이 말을 잘해서라기보다는 의료소의 낮은 담 너머에 부내 나는 수레가 선 덕택 같았다.
말을 잘하면 더 줄일 수도 있겠지만 괜히 사람들의 인상에 남아도 곤란하다. 단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의료소를 빠져나왔다.
시현은 수레 밖에 나와서 서 있었다.
“멀미 나십니까? 숙소 찾는 데는 안 모시고 다니는 게 좋겠군요.”
“그래. 의료소에서 기다리마.”
“안 됩니다. 아프거나 쓸쓸하거나 시중꾼 없이 혼자 기다리는 모습을 보이시면 대기 시간이 길어집니다. 건너편 다점으로 가시죠.”
호란이 물었다.
“환자가 아프고 쓸쓸한 모습을 보이면 왜 안 되는데?”
“세상이 그래.”
“그럼 내가 시문 님 옆에 있으면 되잖아?”
“너는 수레 지켜야 돼.”
단이 잘라 말했다.
약간 아프고 약간 쓸쓸한 윗전과, 돈과 귀중품과 마력석으로 가득한 수레 둘 중에서 호위를 붙여야 할 건 당연히 후자였다.
단이 다점에 시현을 넣어놓고 거리를 가로질러 진료소 앞으로 돌아오니 호란은 마부석에 앉아 뭘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단이 다가가자 호란이 말했다.
“단! 군밤 먹을래?”
“밤? 갑자기 어디서 났어?”
“받았어.”
호란의 눈길이 의료소 담 안을 향했다. 단도 그걸 따라 의료소 안뜰로 시선을 넘겼다.
안뜰에는 자리를 깔고 기다리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가득했다.
그 사이로, 남자 한 사람이 자루를 들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군밤을 나눠주고 있었다.
남자는 노인이었다. 뒤로 넘겨 어깨에 닿는 진갈색 머리가 반 넘게 백발이었다.
햇빛에 탄 얼굴은 수염을 모두 밀어 웃음 주름이 보였다. 웃음기 어린 눈에 테가 검고 동그란 안경을 썼다.
넓은 옷소매와 옥패 달린 장식띠를 보면 땅인이었지만, 무명 장포를 허술게 걸치고 걸낭을 멘 것이 장사치 비슷했다.
눕고 앉은 사람들 사이를 성큼성큼 넘어 다니며 반민 하늘인 아무에게나 친하게 말 거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땅인 맞나 싶어지는 모습이었다.
단은 미소를 머금었다.
“온의 어르신이다.”
“응?”
호란이 쳐다보았다. 단이 밝은 얼굴로 호란을 보았다.
“왜 전에 말했잖아. 백희상단 방씨 온의 어르신. 다천관에 귀향하셨다더니 이렇게 뵙네.”
“아! 그 망종 아닌 사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