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 * *
걱정과는 달리 홍은산을 내려오기는 쉬웠다.
산 주위에 관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인 부대는 물론 법군 부대까지 전열을 갖추어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오르거나 무엇을 조사하기 위한 부대가 아니었다. 부대는 방어전을 치를 듯한 형태로 홍은산과 다천관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일행은 수레를 찾고 관성을 빙 돌아 다른 문으로 성에 들어왔다.
성안 분위기도 스산했다. 사방에 군인들이 오갔다. 아직 출정하지 않은 부대도 전투 준비에 들어간 듯했다.
온성의 집에 돌아왔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온성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철보를 시켜 씻을 물을 길어다 주었다.
시현도 온성에게 무엇을 물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준비가 되는 사이 호란이 시현에게 소근소근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요? 다천관 사람들도 돌 인간 일을 아는 걸까요?”
시현은 즉답을 피했다.
“내가 짐작하는 것은 있는데 당장 말하기가 어렵구나. 생각을 좀 정리하고…. 음. 오늘은 쉬어야겠다.”
“하지만 당장 싸움이 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지 않을 거다.”
시현은 짧게 말하고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피곤한 것보다는 뭔가 수심에 싸여 보였다.
호란은 얌전히 물러났다.
아마 시현은 호란의 짐작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흰 패나 감람에 대해서도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고.
어쩌면 이미 홍은산 금표 구역에 뭐가 있는지까지 파악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시문 님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것이다.
필요하면 호란과 단에게도 알려줄 거고.
호란은 더 이상 금표 구역 걱정은 안 하기로 했다.
시현이 혼자 고민하는 건 조금 걱정이었지만, 시현 본인이 그러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니 호란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 * *
해가 기울 무렵 모두는 큰 방에 모여 있었다.
뒤숭숭한 관성과는 달리 온성의 집은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연구를 마친 유도 돌아오고, 온성은 저녁 찬 삼을 닭고기를 소금 쳐서 굽느냐 간장과 마늘에 졸이느냐를 놓고 선호도 조사를 하는 중이었다. 푹 쉬고 난 시현도 표정이 밝았다.
조금 있던 걱정을 덜어낸 호란은 물주전자를 채울 요량으로 방을 나섰다.
물을 떠 가지고 돌아오는데, 마당 어귀에 누가 선 것이 보였다.
남자는 호란이 아는 사람이었다.
온성의 아들인 헌수가, 마당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무복이 아닌 도포 차림에 딸린 사람 없이 혼자였다.
“아, 안녕하세요….”
호란은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잔뜩 불안한 표정이었던 헌수가 허리를 딱 세우더니 헛기침을 크게 했다.
“어흠. 그…. 대감마님은 계시냐. 설마 오늘 같은 날 산에 가신 건 아니겠지?”
“온의 나리요? 네. 안에 계세요. 들어오실래요?”
헌수는 안심한 듯 화색을 보였다가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너는 뭐 하는 아이냐. 대감 댁에 있으면서 윗전을 맞는 예의도 아직껏 못 배웠느냐?”
“대감은 얼어죽을. 이 집엔 그런 놈 없다.”
온성이 방문을 벌컥 열며 말했다.
헌수는 다시 헛기침을 하더니 뜨락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가 어색한 투로 말했다
“음.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그간은 무슨. 바로 전날 봤구마는.”
온성이 옆으로 비켜서서 헌수에게 방문을 틔워주었다.
“왔으니 일단 들어오거라. 근데 쓸데없는 잔소리나 할 거면 그냥 가고.”
“꼭, 용건이 있어서 온 건 아닙니다만….”
헌수는 중얼중얼하면서 쪽마루에 올라섰다. 그래도 전날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태도였다.
하지만 그는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아득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이 집은 아직도 이 꼴이에요? 대체 왜 장지문 하나 안 세우시고….”
“잔소리할 거면 가라고 했다.”
온성이 핀잔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헌수는 방 안이 사람 여럿으로 북적이는 것을 보고 표정이 더 나빠졌다.
“또 이러시네요. 집 꼬락서니 하며, 매일같이 아랫것들하고 한 방에 모여앉으셔서…. 아버지 이렇게 지내시면 망신은 제가 당하는 거 아세요?”
“시끄럽다, 손님 앞에서! 망신은 네가 지금 하는 게 망신이고!”
“손님이라니, 또 무슨 식객을 받아서….”
짜증을 내며 안으로 들어온 헌수는 방 한쪽에 앉은 시현을 뒤늦게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가 잠시 굳어졌다가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겠지. 설마….”
그가 온성을 보고 물었다.
“아버지, 저분은….”
“하방에서 올라오신 여행자분이다. 잠시 머물다 가실 거란다. 사정이 있으니 성명은 묻지 말아달라 하시는구나.”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가왔다. 그가 옷매무새를 고치고 보통례로 인사했다.
“처음 뵙겠소. 아버님께 신세를 지고 있소. 성명을 감추는 무례를 용서하시오.”
헌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현을 샅샅이 보던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완씨 시문?”
방 안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이유로 굳었다.
시현이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헌수가 다시 말했다.
“나 남재 방헌수요. 서격원 강학회 동기인.”
시현이 반가운 낯을 했다.
“헌의인가! 그대가 온의의 자제였는가!”
“역시 시문 맞구만!”
헌수가 소리쳤다. 유가 들었던 공구함을 와장창 떨어뜨렸다.
헌수는 부친에게 시현과 함께 방씨 저택으로 와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하지만 온성은 완고했다.
“됐다고 몇 번을 말하느냐! 나는 예서 편하게 잘살고 있으니 넌 가주 노릇이나 제대로 하거라!”
“어휴, 아버지….”
헌수는 이번에는 시현 쪽을 보았다.
“자네도, 이 좁은 집에서 아랫것들하고 섞여서 무슨 꼴인가. 우리 집으로 오게.”
“초청은 감사하네. 허나 이제까지 자네 아버님께 과분한 환대를 받았네. 청을 받았다고 냉큼 자리를 옮기면 무례가 아니겠는가.”
헌수는 초조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소리를 잔뜩 낮춰 말했다.
“지금 말할 수는 없으나, 지금 다천관 상황이 조금 특수하네. 마침 자네가 이곳에 왔으니….”
시현은 손을 살짝 들어 헌수의 말을 막았다.
“무슨 뜻인지 아네. 하지만 내가 다천관에서 그 이야기를 나누려는 상대는 자네가 아닐세. 공연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네.”
헌수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야겠지. 내가 자네에게 배려를 받았군.”
“오늘까지는 자네 아버님께 신세를 지겠네. 다음 날엔 만날 사람을 만나고, 이후는 다음에 생각해야겠지.”
“그런가. 알겠네.”
헌수는 수긍하기는 했지만 낙심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래도 마음 바뀌면 언제라도 전갈하게. 바로 맞을 사람을 보낼 테니….”
헌수는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설 태를 보였다. 시현이 놀라 물었다.
“벌써 가는가? 거의 5년 만에 만났고, 여기는 자네 아버님 댁이 아닌가. 머물면서 이야기라도 좀 나누지 않고.”
“아….”
헌수가 당황하면서 부친의 얼굴을 보았다. 온성이 툭 말했다.
“그래 이 싸가지야. 매번 와서는 집에 들어오라고 떼나 쓰다 가지 저 어떻게 산다는 말 한 마딜 하고 간 적이 없지! 손주 얘길 한 번 안 들려주고! 문께선 너보다 스무 살이나 어리신데, 다 늙은 너한테 처신까지 일러주셔야겠느냐?”
헌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민망한 모양이었지만 꼭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이야길 한다 해도 어디서….”
헌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세 사람은 사이에 장지도 없이 이어진 넓은 방 한구석에 방석만 놓고 앉아 있었다.
방 반대편에서는 단과 유가 아무렇게나 앉아서 각자 책을 읽거나 뭐를 끄적이는 중이었다.
그 옆에 호란이 아예 쭉 엎드려서 턱을 괴고 단에게 뭐라뭐라 말을 걸고 있었다.
철보는 맨 구석에서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방이 널찍해 거리는 벌어져 있었지만 말소리가 안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헌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했다.
이렇게 세상 법도란 법도는 다 실종된 공간에 상격인 자기가 아무 소리 못 하고 앉아 있다는 게 적응이 안 되었다.
더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법도를 갖춰 앉고 저한테 예를 차려주는 사람이 그 완씨 시문이란 점이었다.
온성이 헌수의 속을 읽은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느냐? 너 앉은 데 계속 있으면 되지. 가시라도 돋혔느냐? 바꿔주랴?”
헌수가 어깨를 움츠렸다. 온성이 일어났다.
“있어라! 차 가져오마.”
온성은 곧 큰 주전자에 차를 그득하게 끓여와 방 안 모두에게 돌렸다.
헌수는 무척 어색해했다. 처음에는 온성은 놔두고 시현에게만 말을 했다. 다천관의 당면한 상황 이야기를 피해가려니 화제도 겉돌았다.
하지만 서로의 안부가 길어져 그간 살아온 이야기가 나오자 점점 말이 많아졌다.
중간부터는 제 부친이 얼마나 너무한 사람인지 한탄이 늘어갔다.
결국은 온성을 붙들고 서러움을 토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어쨌거나 헌수는 어릴 때 아버지가 누나만 데리고 집 나가서 서러운 아들이었다.
그건 몇십 년이 지나도 서러울 일이었다.
“다 좋아. 다 좋습니다 아버지. 그치만 누님 떠나가신 다음에도 결국 십 년을 안 돌아오셨잖아요. 그게 다 제 탓이라고 하실 겁니까? 모진 소리 한 저만 나쁜 거예요?”
“그건 아니다. 네 말 때문이라기보다… 원래부터도 내가 돌아가면 안 되지 않을까 생각했단다. 내가 그때서 돌아가면 고생해서 가주로 자리 잡은 네 어머니가 난처해지지 않니. 너도 이미 다 컸고.”
“그게 무슨…. 핑계잖아요. 다 핑계예요. 결국 나도, 어머니도, 집안도 아무 상관을 안 하신 겁니다, 아버지는!”
헌수가 점점 격해지자 시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자리를 피해드리는 것이 좋겠는가?”
“저것들 다 데리고 나갈 게 아니면 그냥 앉아 있게!”
헌수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호란네가 앉은 쪽을 삿대질했다.
호란은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를 봐서 이젠 엎드려 있지는 않았다.
온성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헌이야. 정말 미안하다…. 그래도 누나만 아끼고 너를 안 아껴서 안 돌아갔다고 생각하지는 말거라. 나는 그, 막상 해 보니까 상단 일이 좋았던 거야.”
“이런 옘병!”
헌수가 가슴을 쾅쾅 쳤다.
온성과 헌수는 이야기를 더 했지만 부자가 화해를 한 것인지 아닌지는 애매했다.
온성이 방씨 본가로 들어갈지 말지도 결론 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틀 후에 손주들을 보러 가는 것은 약속이 되었다.
아들이 더 말을 안 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자 온성은 점점 안절부절을 못하게 되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헌이야. 밥 먹고 갈 거지? 아버지가 밥해올게. 그… 밤, 밤도 구워줄게. 너 그거 좋아하잖아. 아버지 실력 더 늘었다. 법술 말고 화로로 구워도 기깔나게 구울 수 있거든.”
“아랫것들 쓰는 상스러운 말 좀 쓰지 마시라니까요….”
헌수가 투덜거렸다.
(계속)